< 지각 변동 (1) >
“이건 정말...”
우리가 준비해온 몬스터 가죽의 품질을 확인하며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이자벨.
“어떻습니까, 끝내주죠?”
나를 대신해 우리 다닐렌츠 상단 측의 협상 대표로 나선 파스칼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묻는다.
“어... 예, 가죽 상태가 정말 좋네요.”
저건 빈말이 아니다.
이자벨의 눈에 떠오른 감정은 진심 그 자체였다.
우리 상단이 가져온 몬스터 가죽의 질과 양 모두 그동안 보크 상단이 다루던 가죽보다 몇 배는 뛰어날 것이라는 파스칼의 말이 사실로 판명되는 순간이었다.
‘아이고... 우리 물건 보고 많이 놀라셨나 보네, 저 누님.’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보크 상단에서 취급하던 몬스터 가죽은 콜티츠 상단에서 쓸만한 물건들을 미리 싹 쓸어가고 남아있는 것 중에서 겨우 골라낸 물건들.
몬스터 사냥 과정에서 온갖 무기에 베이고, 찍히고, 긁혀 가죽이 크게 훼손되어버린 저질의 가죽들이었다.
무두장이의 자식으로 태어나 평생 가죽을 보고 만지며 자라온 이자벨의 눈엔 절로 한숨이 나오는 가죽의 상태였으리라.
하지만 그마저도 없다면 보크 상단은 그야말로 손가락이나 빨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질 떨어지는 가죽이나마 매입해서 장사를 이어온 것이다.
‘아니, 잠깐...?’
생각해보니까 이 누님 엄청 대단한 능력자인 거잖아?
순간, 보크 상단으로 오던 길에 파스칼이 들려주었던 이자벨에 대한 평가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자벨 상단주는 콜티츠 상단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저질의 가죽들을 매입해 어떻게든 판로를 개척하고 적게나마 꾸준한 수익을 만들어 왔습니다. 사실상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격이죠. 그리고 그건 단순히 끈기가 있다고 해서 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끈기에 더해 돈 냄새를 맡는 감각(感覺)이 있어야 하죠. 그런 의미에서, 이자벨은 타고난 장사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고난 장사꾼이라...
<로스트 킹덤>에 등장하는 캐릭터 중 상업적 능력으로는 으뜸이라 할 파스칼에게 그런 평가를 받을 정도라면, 정말 보통이 아닌 인재란 뜻이다.
‘원작 속에선 그렇게 비중이 크지 않았는데...’
아니, 비중이 크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등장이 없었지.
그냥 파스칼이 다닐렌츠 상단을 잘 운영해나간다는 묘사를 할 때 지나가듯 살짝살짝 언급되는 정도였으니까.
‘... 앞으로 더 지켜봐야겠군.’
여차하면 완전히 우리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쪽을 생각을 해봐야겠다.
한편, 내가 머릿속으로 이자벨의 영입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는 동안 다닐렌츠 상단과 보크 상단을 대표하는 두 사람은 본격적인 계약 협상에 들어가 있었다.
“저희 다닐렌츠 상단이 공급하는 양질의 몬스터 가죽은 그동안 뛰어난 경영 능력에도 불구하고 가죽 수급에 어려움을 겪어 제대로 된 수익을 올리지 못했던 보크 상단의 행보에 날개를 달아줄 겁니다.”
“으음, 제게 보여주신 가죽의 품질이 좋은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사업에 있어선 제품의 질만큼이나 양도 중요합니다. 꾸준한 물량의 공급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계약은 어려워요.”
그동안 보크 상단이 매입하던 저질의 가죽들과는 차원이 다른 양질의 물건을 눈앞에 두고도 냉철함을 유지하는 이자벨.
과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수년간 보크 상단을 흑자 경영으로 이끌어온 인물다운 모습이었다.
“꾸준한 물량 공급, 당연히 가능하죠. 지금 보고 계신 마차 두 대분의 가죽 물량, 당장 다음 주에도 가능합니다.”
“... 그게 정말인가요?”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파스칼을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자벨.
그런 그녀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이번엔 다닐렌츠 상단의 수장인 내가 나섰다.
“파스칼의 말이 맞습니다. 다음 주에도, 그리고 그 다음 주에도 가능합니다. 지금 우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 순간에도 몬스터 가죽은 계속 만들어지고 있거든요.”
“아, 상단장님.”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든 나를 바라보며 이자벨이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인다.
그 모습에서 그녀가 나를 다닐렌츠 상단의 대표자로서 인정하고 대우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 처음 본, 그것도 새파랗게 어려 보이는 놈에게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말이지.
내 마음속 그녀에 대한 평가를 한 단계 더 상향시키며, 나는 설명을 계속했다.
“우리 다닐렌츠 영지에 몬스터가 아주 많다는 거, 이자벨 님도 알고 계시죠?”
“예, 제가 다닐렌츠에 가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예전엔 그 사실이 영지의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큰 단점이었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다닐렌츠를 살기 좋은 땅으로 바꿔 놓겠다는 영주님의 강력한 개혁 의지 아래 대대적인 몬스터 토벌 작전이 매일 같이 이뤄지고 있지요.”
“아...”
“더 중요한 사실은, 그 몬스터 토벌 작전에 대한 모든 권한이 저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
내가 꺼낸 말에 어지간히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는 이자벨.
그런 그녀에게 나는 품속에서 다닐렌츠 영주의 인장이 찍힌 문서 한 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영지 내에서 이뤄지는 몬스터 토벌 작전의 입안과 수행에 대한 모든 권한을 다닐렌츠 상단장인 나에게 위임한다는 내용이 담긴 문서였다.
“우리 상단은 다닐렌츠 전역에 창궐한 수많은 몬스터들을 사냥해 시장에 공급할 수 있는 독점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루테니아 영지군이 사냥한 몬스터를 눈치 보며 얻어다 파는 콜티츠 상단 ‘따위’와는 처지가 다릅니다.”
내가 콜티츠 상단을 두고 ‘따위’라고 표현하는 걸 들으며 파스칼이 슬쩍 미소를 짓는 게 보였다.
콜티츠 상단에서 일했던 기억이 어지간히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거기에 더해, 우리 상단은 자체적인 무두질 작업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주당 마차 두 대분의 가죽을 생산하지만, 앞으로 더 시설 규모를 더욱 늘릴 생각입니다. 앞서 설명했듯, 우리 다닐렌츠엔 잡아다가 가죽 벗길 몬스터들이 아주 많이 살 거든요.”
이 정도까지 말했는데 제안을 받지 않는다면 사업적 감각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일 터.
그리고 다행히, 내 눈앞에 선 이자벨은 그 감각이 넘치도록 충만한 사람이었다.
“... 다닐렌츠 상단과 계약하겠습니다. 지금 바로 제 방으로 가서 계약서를 작성하시죠.”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선선했던 바람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고, 내리쬐는 햇볕을 그대로 받아내기가 부담스러워지는 계절.
여름이었다.
“뭐야? 이거 왜 이래? 가죽 부문 매출이 왜 이 모양이냐고?”
루테니아의 주도 프롤린 번화가에 자리한 콜티츠 상단의 본부.
상단의 심장부라 할 그 공간에 실로 오랜만에 발을 들인 중년의 사내, 지몬 콜티츠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2년 전, 콜티츠 상단의 설립자이자 아버지인 옌스 콜티츠의 죽음 이후 새로이 상단의 주인이 되었다.
아버지 옌스가 지녔던 상인으로서의 미덕, 예컨대 성실함과 끈기, 사업적 감각을 털끝만큼도 물려받지 못한 지몬 콜티츠.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는 상단 운영엔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지금껏 아버지와 함께 사업을 일궈온 직원들이 ‘알아서’ 상단을 운영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그저 직원들이 가져다주는 결재 서류에 서명을 하고, 직원들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호의호식을 하는 것.
그런데 오늘은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별안간 상단 본부를 찾아와 매출 내역을 들여다보며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가죽 부문 매출! 3개월 전부터 조금씩 꺾여서 이번 달엔 아예 반 토막이 났잖아! 시발, 이거 왜 이러는 건데?”
“...”
“우리 상단에서 다루는 품목 중에 가죽이 제일 돈 들어가는 건지 몰라서 이래? 어?”
상단주의 아들로 태어나 지금껏 노력 없이 많은 것들을 누려온 지몬.
그 팔자 좋은 인생을 상징하듯 두툼하게 불어난 턱살이 주인의 분노를 표현하듯 잘게 떨렸다.
“이런 썅! 빨리 대답들 안 해? 당신들 진짜 죽고 싶어?!”
지몬의 분노를 마주한 콜티츠 상단의 베테랑 간부들이 한숨을 지으며 고개를 떨군다.
사실, 콜티츠 상단의 급격한 가죽 부분 매출 하락은 이미 몇 달 전부터 예견된 현상이었다.
약 석 달 전부터 무서운 속도로 몬스터 가죽 부문의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있는 보크 상단.
대체 어디서 그토록 많은 물량을 확보한 것인지 루테니아, 아니 왕국 북서부 지역 전체의 몬스터 가죽 시세가 요동칠 정도였다.
보크 상단의 급격한 성장세에 깜짝 놀란 담당 직원들이 그들이 파는 물건을 사다가 확인해보니 가죽의 질과 양 모두 우수한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가 파는 가죽들이랑 비슷한 품질에 가격은 훨씬 쌌지.’
‘고블린이나 놀 가죽은 그렇다 치고, 그 많은 오크 가죽은 어디에서 나는 거야?’
‘심지어 이번 달엔 트롤 가죽까지 팔았다는데... 보크 상단 놈들, 그걸 어떻게 구한 거지?’
전설 속에 등장하는 드래곤의 레어라도 발견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막대한 물량의 몬스터 가죽을 쏟아내고 있는 보크 상단.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실무자들이 이미 두 달 전에 관련 보고서를 작성해 상단주에게 올렸건만, 그때 그 보고서는 빛도 보지 못한 채 책상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제 아버지가 죽은 이후 생전 안 하던 상단주 노릇을, 왜 하필 지금 하려는 건데?’
‘평소 여자 끼고 술 처먹을 시간에 그 보고서 한 번이라도 봤으면 이 사태가 났겠어?’
‘시발... 그냥 나도 이참에 보크 상단 쪽으로 옮겨버려?’
시선을 바닥으로 처박은 상단 간부들이 각자의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생각만 들여다보아도 훤히 알 수 있는 콜티츠의 미래.
지난 십수 년간 단단하게 굳어졌던 왕국 북서부 상계의 판도에 다닐렌츠 발(發)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
“... 이 추세대로라면 석 달 후부턴 상단 운영이 흑자로 돌아설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키르헨에 자리한 다닐렌츠 상단 본부 건물의 내 집무실에서 나는 파스칼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석 달 후라... 그럼, 예상되는 수익의 규모는 어느 정도입니까?”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약 15에서 20골드 정도로 예상합니다.”
“어, 정말 많지 않네요?”
지난 생의 화폐 가치로 생각하면 천오백만 원에서 이천만 원 정도에 불과한 수익.
하지만, 나는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애초에 사업을 이렇게 큰 규모로 벌렸는데, 1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흑자구조로 전환이 기대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용병들에 직원 월급에... 인건비만 해도 월에 수백 골드씩 나가는 상황이니까.’
보통 상단을 세워 사업을 한다고 치면 보크 상단의 경우처럼 작은 짐수레 한두 대로 시작해 오랜 세월 착실하게 기반을 다지며 성장해나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시작부터 수백, 수천 골드의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 상단 사업을 시작했다.
그 돈으로 백여 명 가까운 용병을 부려 수백 마리의 몬스터를 때려잡고, 또 대규모 무두질 작업장을 세워 미친 듯이 몬스터 가죽을 생산해냈다.
왕국 북서부의 몬스터 가죽 시세를 뒤흔들 정도의 어마어마한 물량이었다.
뿐인가, 나는 그 가죽을 팔아 벌어들인 막대한 수입을 마냥 쌓아두지 않고 곧바로 상단에 재투자했다.
가장 돈을 많이 쓴 것은 다름 아닌 시설 투자 비용이었다.
나는 영주의 재가를 받아 키르헨의 도시 성벽 역할을 하던 나무 장벽을 해체해 도시의 영역을 넓히는 작업에 들어갔다.
어차피 키르헨 주변의 몬스터들과 야생 동물들은 모조리 사냥당해 가죽이 벗겨진(?) 상황이었기에 나무 장벽을 해체한다고 해서 불안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널찍해진 도시의 공터에 사람들이 살 집을 지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는 키르헨의 새로운 주민들을 수용하기 위함이었다.
당장은 집을 구매할 여력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사정을 고려해 일단 새로 만든 집을 다닐렌츠 상단의 재산으로 두되, 아주 싼 값에 임대하는 식으로 운영하기로 했다.
사람들이 사는 주택 단지뿐만 아니라 여관이나 술집, 대장간, 양조장, 각종 창고 같은 상업-산업용 건물도 함께 지어 도시 발전의 균형을 잡았다.
몬스터 가죽 생산, 판매에 이은 건설, 임대업이 다닐렌츠 상단의 새로운 사업 모델로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누차 강조했듯이, 사람이 곧 영지의 힘입니다. 상행을 나갈 때마다 다닐렌츠 영지의 발전 상황을 다른 지역에 퍼트리도록 하세요. 보크 상단 측에도 그렇게 하도록 부탁하는 것 잊지 마시고.”
“알겠습니다.”
나는 도시를 갈아엎는 한편, 주변 다른 영지 곳곳에 소문을 퍼트려 사람들이 다닐렌츠에 대한 환상을 품게 했다.
이미 영지 인구 대장에 등록되어있는 영지민은 어쩔 수 없지만, 산과 들에 숨어 사는 화전민들은 흡수할 수 있었으니까.
나무꾼, 약초꾼, 사냥꾼, 요리사, 도예가, 무두장이, 치료사, 대장장이, 농부와 광부, 양치기, 심지어 술을 빚는 양조사와 음유시인까지.
정말 각양각색의 사연을 지닌 수많은 이들이 새로운 희망과 꿈을 찾아 다닐렌츠, 특히 도시 키르헨을 찾아왔다.
나는 그런 이들에게 다닐렌츠 영주의 이름으로 적게나마 정착지원금을 쥐여 주었다.
정말이지 몇 푼 안 되는 금액이었지만, 평생 귀족에게 뭘 뺏겨보기나 했지 받아본 적은 없었던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고, 구스타브 남작의 이름을 칭송했다.
이렇게 돈을 펑펑 써대니, 몬스터 가죽을 팔아 번 돈이 아무리 많아도 쉬이 수익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돈 아낄 때가 아니야. 돈 지랄이 됐건 뭐가 됐건 무조건 투자를 해야 해.’
그렇게, 나는 다닐렌츠 상단이 벌어들이는 돈과 내 개인 자금을 모조리 털어 도시 키르헨의 발전에 투자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
낙엽 지는 가을과 눈 내리는 겨울,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차례로 떠나보내고 다시 뜨거운 여름을 맞이했을 때,
다닐렌츠의 주도 키르헨은 예전의 기억을 찾아볼 수 없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도시가 되어 있었다.
< 지각 변동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