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82화 (78/197)

< 지각 변동 (2) >

신성력(神聖歷) 784년 7월,

다닐렌츠의 주도(主都) 키르헨_

오늘은 7월의 첫 번째 월요일.

다닐렌츠 영지의 수뇌부들이 모두 모이는 월례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모두 왔으면... 쿨럭!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지. 쿨럭! 쿨럭!”

회의실 상석에 자리한 다닐렌츠의 영주, 남작 구스타브 카릴베르크.

최근 들어 부쩍 기침이 잦아지고, 눈에 띄게 수척해진 그였다.

1년 전, 우리 일행이 다닐렌츠에 도착했을 때도 그다지 건강이 좋아 보이지 않았던 남작.

허나 지금은 건강이 좋아 보이지 않는 수준을 넘어 당장이라도 쓰러지지 않을까 염려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두가 그의 건강을 염려하며 휴식을 취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남작을 그 같은 주변의 제안을 물리치고 오히려 더욱 열정적으로 영주로서의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 아마 남작은 알고 있겠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마치 생(生)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 영지 발전에 몸을 내던지는 남작의 모습은 나를 포함한 모든 다닐렌츠의 가신들에게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먼저, 키르헨의 도시 인구 증감에 대해 보고 드리겠습니다.”

월례회의에서 가장 먼저 발언을 시작한 것은 다닐렌츠 영지의 서기관이자 키르헨 성당의 주임신부인 세르지오였다.

“6월 한 달간 도시 키르헨에 새로이 유입되어 정착한 영지민은 총 일백일흔네 명, 노화, 질병 등의 이유로 사망한 인구는 마흔세 명입니다. 전달 대비 약 일백삼십 명의 인구가 늘었습니다.”

“인구가 늘었다? 허면...”

세르지오의 보고를 들은 남작의 눈빛이 기대감으로 반짝인다.

다른 이들 역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들 남작과 비슷한 눈빛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세르지오는 그런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예, 맞습니다. 우리 키르헨의 인구가 드디어 6천 명을 돌파했습니다!”

“오오!”

“드디어...!”

“와아아아아아!”

세르지오의 말을 들은 모두가 박수를 치고, 주먹을 치켜들며 기뻐했다.

1년 전부터 시작된 유입 인구의 가파른 증가.

지난해 여름 3천 명 남짓이던 도시의 인구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마침내 그 두 배인 6천 명을 달성했다.

“내 생애에 이런 일이 다 있구나! 키르헨의 인구가 6천 명이라니... 하하하하!”

병색이 완연해 어두웠던 남작의 얼굴에 잠시나마 밝은 웃음꽃이 피어난다.

물론 6천 명이란 인구는 왕도 카를리온이나 북부를 대표하는 영지 라이에른-팔츠의 주도 루덴스부르크, 남부의 쾨니히슈타인, 그라이츠 등 왕국을 대표하는 대도시들과 비교하면 분명 손색이 있는 수치였다.

해당 도시들은 이미 인구가 수만 명을 헤아리게 된 지 오래였으니까.

하지만 다닐렌츠처럼 왕국 변방에 자리한 영지의 도시가 6천 명이나 되는 인구를 갖게 된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감히 ‘기적(奇蹟)’이라 표현해도 그리 과한 것은 아닐 터!

“... 사람의 숫자는 곧 그들이 발 딛고 사는 땅의 힘이 되는 법! 포악한 몬스터들이 들끓던 우리 다닐렌츠가 이제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살기 좋은 땅이 되고 있다 하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렇게 말하는 남작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는 게 보였다.

그래, 감동적이겠지.

남작이 말한 것처럼 과거의 다닐렌츠는 사람보다 몬스터가 더 많이 사는, 그야말로 마경(魔境)이나 다름없는 곳이었으니까.

뭐, 지금도 몬스터가 사람 수보다 많기는 하겠지만...

‘... 적어도 이제 키르헨 주변에선 몬스터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이끄는 다닐렌츠 상단과 겔베르트가 수장으로 있는 키르헨 용병 길드가 힘을 합쳐 이뤄낸 눈부신 성과.

지난 1년간, 우리는 정말이지 쉬지 않고 몬스터를 때려잡았다.

‘나 혼자만 수백 마리... 아니, 수백이 뭐야. 몇천 마리는 때려잡았을 거다.’

우리는 그 때려잡은 몬스터의 가죽을 벗겨 다른 영지에 내다 팔았고, 그렇게 번 돈을 오롯이 영지의 발전, 특히 키르헨에 쏟아부었다.

처음 우리 일행이 발을 디뎠을 때, 한 영지의 주도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낙후되어 있었던 도시 키르헨.

하지만 이제 시골 촌 동네 마을 같았던 키르헨의 모습은 더는 찾아볼 수 없다.

마차 두 대가 함께 지나가도 너끈할 수준의 널찍한 대로를 중심으로 상업 지역과 주거 지역, 관공서 지역을 나누었고, 그 모든 지역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건물이 올라가고 있었다.

뿐인가, 드넓은 들판이 펼쳐진 도심 외곽 지역엔 곧 찾아올 수확의 기쁨을 기대하며 열심히 밭을 일구는 농민들의 노랫소리가 쉬지 않고 들렸다.

‘다른 영지에 비하면 말도 안 되는 세율로 농사를 짓게 되었으니, 노래가 절로 나오겠지.’

작년 가을쯤이었던가?

나는 남작과 서기관 세르지오를 설득해 기존의 영지민들은 물론, 새로이 다닐렌츠에 정착한 사람들의 농지(農地)에 관한 세율을 일괄적으로 4할까지 낮추는 정책을 펼치도록 유도했다.

보통 다른 영지의 세율이 6할에서 7할, 심한 곳은 8, 9할(!)에 이른다는 것을 생각하면, 4할의 세율은 실로 파격적이라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을 수준이었다.

처음엔 듣도 보도 못한 4할의 세율 정책 시행을 두고 반신반의하던 다닐렌츠 영지의 수뇌부들.

하지만 그 제안을 한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영지에 막대한 돈을 벌어다 주고 있는 나였기에, 세율을 낮추는 방안은 별다른 반발 없이 다닐렌츠에 도입되었다.

처음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는 듯 보였던 세율 인하 정책.

그러나, 해당 정책에 대한 소문이 주변 다른 영지들에 충분히 퍼진 후부터 수많은 사람이 키르헨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 덕분에 치안을 담당하는 영지군 병사들이랑 경비대원들이 제대로 피똥을 쌌지.’

많은 수의 외지인들이 몰려들면서 자연스럽게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도시 곳곳에서 사람들 간에 다툼이 벌어지고, 심한 경우 패싸움이 벌어지거나 칼부림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 이미 예상하던 바였지.’

급격한 인구의 증가가 불러올 부작용을 예견하고 있던 나는 그 같은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미리 준비했던 카드를 재빨리 꺼내 들었다.

용병 길드장인 겔베르트를 통해 미리 선발해두었던 마흔 명의 용병을 경비대 병력으로 빠르게 충원해 치안력의 부족을 메꾼 것이다.

실력과 인성, 양쪽 모두 문제가 없는 친구들이라며 내게 호언장담했던 겔베르트.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의 깐깐한 눈을 통과했으니 믿어도 될 것이다.

여기에 더해, 나는 ‘리트베르크의 수호신’ 데론 베르켈을 경비대장의 자리에 추천했다.

그는 왕국 3대 기사단 중 하나인 사자기사단 출신의 명성 높은 기사이자 남작령 리트베르크의 군무관 직을 20년 가까이 역임했던 인물.

그토록 화려한 이력을 갖춘 데론에게 일개 도시의 경비대장의 직책은 당연히 어울리지 않는 부족한 자리였다.

어쩌면 나의 제안에 불쾌함을 표현할 수도 있을 상황.

하지만...

“허허, 다 늙은 노인네에게 일할 기회를 주는 것만 해도 고마울 일이지. 내 열심히 해보겠네, 아무 걱정하지 말게나!”

나의 간곡한 부탁을 들은 데론은 경비대장 자리를 흔쾌히 받아들였고, 그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함과 동시에 도시의 혼란은 빠른 속도로 가라앉았다.

‘사자’의 이름에 걸맞은 드높은 실력에 넘쳐나는 경험,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갖춘 상관을 모시게 된 경비대원들이 순식간에 정예 병력이 되어 미친 듯이 활약한 결과였다.

‘그 바람에, 데론의 직속상관이 되어버린 발터가 아주 난감한 처지가 됐지.’

왕립사관학교 생도 시절 교수님이었던 데론을 자신의 직속부하로 거두게 된 군무관 발터 브라운.

졸지에 옛 스승을 아랫사람으로 부리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 상황에 부담을 느낀 발터가 차라리 자신이 경비대장직을 맡아 수행하고 데론을 군무관 자리에 올리는 게 어떻겠냐는 얘기를 했으나, 그 제안은 남작에 의해 가볍게 ‘기각’되었다.

어차피 데론의 경비대장직 수행은 임시방편의 성격이 짙은 만큼 오래지 않아 다른 사람으로 교체될 것이란 이유에서였다.

‘적잖이 부담스럽겠지만 조금만 고생하십쇼, 발터.’

가볍게 미소짓는 나의 시선 끝, 서기건 세르지오에 이어 월례회의 보고를 올리는 군무관 발터의 모습이 보였다.

“다음으로, 군무(軍務) 관련 보고 드리겠습니다. 동부 접경지대에서 공사 중이던 군 훈련소 시설이 완공되었습니다. 이번 달부터 지원자를 받아 영지군 신병 양성에 들어갈 계획입니다.”

발터의 보고를 들은 남작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동안 맨땅에 머리를 처박듯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던 다닐렌츠 영지군의 훈련.

하지만 제대로 된 시설을 갖춘 훈련소의 완공으로 이제 체계적인 계획을 통해 병사를 양성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고생 많았소, 군무관.”

“아닙니다, 영주님. 고생은 그동안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하고 위험한 전장에 나서야 했던 병사들이 한 것이지요. 앞으로는 우리 병사들이 그런 일을 겪지 않을 터이니, 영지의 군무관이자 기사의 한 사람으로서 그저 기쁠 따름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남작에게 고개를 조아린 발터가 그 직후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이 자리를 빌어, 다닐렌츠 영지군 훈련소 설립에 큰 도움을 주신 다닐렌츠 상단장, 데미언 님께 감사드립니다.”

꾸벅-

앞서 남작에게 한 인사만큼이나 진심이 느껴지는 인사였다.

‘어휴, 저 아저씨가 부담스럽게...’

내가 아무리 얼굴 두꺼운 사람이어도 이것까지 뻔뻔하게 앉은 채로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발터에게 마주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도움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다닐렌츠 상단은 본디 영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설립의 목적 자체도 다닐렌츠의 발전을 위해 만들어진 곳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일 뿐입니다.”

“허어...”

내가 한 말은 지극히 원론적인 얘기에 불과했지만, 여기 있는 모두는 그 원론적인 얘기를 내가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데미언 님은 실로 하늘이 내린 분입니다!”

“하하, 맞습니다. 우리 다닐렌츠를 위해서 아르닌께서 보내주신 은인입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해가 바뀌어 이제 열아홉이 된 나였지만, 회의실에 모인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반 토막에 불과한 나이였다.

그런 나에게 존경의 시선과 감탄이 쏟아진다.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분위기였다.

“흠흠, 군무관님? 하시던 말씀 계속 하시는 게 어떨지...”

“응? 아! 그렇지... 커흠! 군무 관련 보고를 마저 드리겠습니다. 신설된 군 훈련소의 최고 책임자인 훈련소장의 자리에...”

슬쩍, 발터의 눈이 다시 나에게로 향한다.

그의 눈빛이 무얼 뜻하는지 알았기에 나 역시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것으로 화답했다.

이어, 발터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 현 키르헨 경비대장인 데론 베르켈 경과 다닐렌츠 상단장이신 데미언 님께서 함께 추천하신 인물, 용병대 ‘푸른 방패’의 대장인 메이슨을 임명하려 합니다. 영주님, 재가해주십시오!”

***

“아, 상단장님. 월례회의는 잘 끝나셨습니까?”

영주의 저택에서 회의를 마치고 상단 본부로 돌아온 나를 반갑게 맞이하는 파스칼.

분명 밝게 웃고 있는데, 눈 밑에 생긴 그늘이 너무 짙어서 웃는 게 웃는 것처럼 보이질 않는다.

“어후... 파스칼, 괜찮은 거지?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

“예? 하하, 저는 괜찮습니다! 요즘 너무 행복해서 탈인걸요!”

내 걱정 어린 물음에도 불구하고 파스칼은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파스칼은 정말로 자신의 생활을 행복해했다.

콜티츠 상단의 창고에 처박혀 허망하게 흘려보냈던 시간에 비하면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지금이 너무 좋다나 뭐라나.

미친 듯이 일에 몰두하는 파스칼 덕에 나는 할 일이 많이 줄어서 좋긴 한데, 저러다 과로로 쓰러질까 봐 무섭다.

“쉬엄쉬엄해, 쉬엄쉬엄. 직원 필요하면 나한테 묻지 말고 알아서 바로바로 사람 뽑아서 쓰고.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아, 그나저나... 지금 바로 출발하실 겁니까?”

“응, 바로 가야지.”

파스칼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늘은 루테니아의 보크 상단으로 오크 가죽을 납품하는 상행단이 출발하는 날이다.

물량이 워낙 많은 고블린과 놀 가죽이야 매주 납품을 하지만, 오크 가죽의 경우엔 아무래도 물량이 그 정도는 아니어서 납품 일정이 달에 한 번 정도였다.

“근데 상단장님이 직접 가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냥 다른 사람 보내시지...”

“아, 내가 가서 이자벨이랑 따로 상의할 것도 있고... 또, 우리 이번에 트롤 세 마리나 잡았잖아? 그거 가죽 비싼데, 내가 잘 지켜서 가져다줘야지.”

“하긴, ‘그 얘기’는 상단장님께서 직접 가서 이자벨과 의논하시는 게 맞겠죠.”

내 설명에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인 파스칼.

곧 그가 납품 과정에 필요한 이런저런 서류를 챙겨주며 말했다.

“조심해서 잘 다녀오십시오, 상단장님. 여긴 제가 잘 지키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하하, 파스칼이 있어서 내가 마음 놓고 출장을 다니네. 늘 고마워. 그럼, 다녀올게!”

짐칸 한가득 오크 가죽과 트롤의 가죽을 실은 다닐렌츠 상단의 마차를 끌고, 나는 오랜만에 루테니아의 주도 프롤린으로 향했다.

< 지각 변동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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