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각 변동 (3) >
“데미언 상단장님! 이게 얼마만 입니까? 진짜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하하!”
루테니아로 향하는 상단행의 호위를 위해 길드에서 파견된 용병 한 명이 나를 보며 시원한 웃음을 터트린다.
짧게 자른 흑갈색 머리와 네모진 턱.
그 아래로 꿈틀거리는 구릿빛의 탄탄한 근육들까지.
처음 만났던 그때의 모습 그대로를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는 존경스러운 베테랑 용병이자 나의 절친한 친구.
엔리케였다.
“이게 누구야? 푸른 방패 부대장... 아니지, 이제 대장님이라고 불러 드려야 하나?”
“에이씨, 대장은 무슨. 아직은 아니잖아.”
“아무튼요.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직접 나온 거예요? 어지간히 심심했나 봐?”
“하하하! 왜?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냐? 응?”
터억!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다가선 나와 엔리케가 있는 힘껏 서로를 끌어안았다.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해 너무 많은 것들이 달라졌지만,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만은 그대로인 우리였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戰友)이자, 피가 섞이지 않았을 뿐 서로에게 형제(兄弟)라 불러 마땅할 사이.
오랜만에 만나 더 반가운 엔리케의 얼굴을 보며 나는 질문을 던졌다.
“자, 설명을 좀 해봐요. 어떻게 된 거예요?”
“아니, 그게... 자, 우리 애들 얼굴 좀 봐라. 너 여기 아는 사람 있냐?”
“어...”
엔리케의 말을 듣고 나서 그를 따라온 푸른 방패의 용병들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 뭐야, 다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네요?”
“어, 이제 우리 푸른 방패도 변해야지. 다 늙어서 힘도 못 쓰는 노땅들은 이제 내다 버리고, 체력 좋고 생기 있는 젊은이들로 바꿔야 하지 않겠냐? 흐흐흐!”
말은 짓궂게 늘어놓고 있었지만, 나는 그 장난스러운 목소리 뒤에 숨겨진 사정을 알고 있었다.
노땅이라 불리는 옛 동료들을 내다 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 각자 살길 찾아간 역전의 용사들은 잘 지내고 있어요?”
“헹! 역전의 용사는 무슨... 순 배신자 새끼들 같으니! 카악, 퉤!”
내 말에 대답하며 과장된 동작으로 바닥에 침을 뱉은 엔리케였다.
“어이구?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시네. 더 늦기 전에 위험한 용병 일 때려치우고 노후 준비하라고 먼저 등 떠민 사람이 누군데!”
“크흠, 내가 또 언제 그랬냐?”
텔마르크에서 리트베르크, 다시 바이펠베르크와 왕도 카를리온을 거쳐 이곳 다닐렌츠에 이르기까지.
나와 함께 사선(死線)을 넘나들며 왕국 전역에 푸른 방패의 이름을 드높인 자랑스러운 동료들.
그들은 이제 ‘기회의 땅’ 이곳 다닐렌츠에서 인생의 2막을 준비 중이었다.
시작은 겔베르트였다.
모두의 신뢰와 존경을 받는, 푸른 방패의 믿음직한 리더였던 겔베르트.
그는 지금 키르헨의 용병 길드장 자리에 앉아 다닐렌츠 상단장인 나의 가장 든든한 사업적 동료가 되어주고 있다.
겔베르트의 뒤를 이어 푸른 방패의 새로운 대장이 되었던 메이슨.
지난 1년간 멋지게 리더의 임무를 수행한 그는 이번에 신설된 다닐렌츠 영지군 훈련소의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일개 용병이 영지 정규군의 주요 보직 중 하나인 훈련소장 자리에 앉는다는 건 그야말로 개천에서 드래곤이 나는 수준의 일.
용병 생활을 하기 전 군에 오랫동안 몸담았던 메이슨의 경력을 내세워 내가 군무관 발터 브라운에게 강력하게 추천한 결과였다.
“야, 근데 너 진짜 대단하다. 메이슨 뿐만 아니라 다른 놈들 자리도 만들어서 밀어 넣었다며?”
“아휴, 밀어 넣긴 뭘 또 밀어 넣어요. 능력이 그만큼 되는 사람들이니까 알아서 자기 자리 찾아간 거지.”
“자기 자리는 개뿔... 네가 말 안 해줬으면 걔네가 그런 게 있는 줄이나 알았겠냐? 안 그래?”
메이슨과 함께 내가 추천한 푸른 방패의 동료 네 명이 군 훈련소의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전투 경험이 충분하다 못해 흘러넘칠 정도로 많은 이들이니, 어설픈 훈련병들도 그들의 손에 걸리면 얼마 안 가 사회 물을 쫙 빼고 빠릿빠릿하게 각 잡힌 군인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맞다, 경비대 병력 충원할 때 그쪽으로 넘어갔던 사람들은 잘 지낸답니까? 할만하대요?”
내 질문을 들은 엔리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한다.
“야, 말도 마라. 그때 그놈들 이제 용병일 지겨워서 못하겠다고, 몬스터 피 냄새 맡는 거 지겹다면서 남은 인생 설렁설렁 살겠다고 경비대로 넘어갔던 거잖아? 너도 기억나지?”
“예, 그랬죠.”
“푸흐흣! 근데 그 새끼들, 지금 설렁설렁 일하기는커녕 베르켈 경 밑에서 개 같이 구르고 있더만? 크크큭, 쌤통이다!”
“뭐, 늑대 피하려다가 사자 아가리로 잘못 기어들어 간 셈이죠.”
“그러게. 며칠 전에 토르벤 자식이 놀러 와서 둘이 술 한잔했는데, 다시 푸른 방패로 돌아오면 안 되냐고 우는소리 하더라고.”
“하하하! 그래서요?”
“그래서는 뭘 그래서야, 좆 까라고 했지. 으하하하!”
어떤 이는 군(軍)으로, 어떤 이는 현대의 경찰 역할을 하는 도시 경비대로 넘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몇몇은 이제 칼 들고 싸우는 건 지긋지긋하다며 키르헨 시내에 술집을 차리거나 장사를 벌였고, 심지어 농사일을 선택한 이도 있다.
각자의 방식대로, 인생의 새로운 페이지를 열어가는 푸른 방패의 동료들.
나는 그런 동료들의 모든 선택을 존중하고, 응원했다.
“뭐... 다들 돈은 벌 만큼 벌었잖아요? 딴 일 하다가 한두 번은 망해도 사는 데 문제없겠죠.”
“그치. 네가 지난 1년 동안 우리한테 챙겨준 몬스터 사냥 수당이 얼마냐? 아마 앞으로 십 년은 놀고먹어도 될 만큼 쌓였을 거다. 크흠, 너한테 고맙지 뭐.”
슥슥, 엔리케가 손끝으로 콧잔등을 훔치며 말했다.
나한테 고맙다는 말을 하기가 괜히 민망해서 그런 거겠지.
나 역시도 그런 말을 듣는 게 낯간지러운 것은 마찬가지여서, 일부러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어, 우리 너무 잡담이 길었네요. 얼른 출발합니다. 갈 길이 멀어요.”
“알겠습니다, 상단장님! 어서 가시죠!”
***
지난 1년간 내가 가장 공을 들인 사업 중 하나는 다름 아닌 도로 정비였다.
다닐렌츠 영지 내에 손봐야 할 무수히 많은 도로가 있겠으나, 적어도 루테니아로 향하는 길만큼은 상단 마차가 지날 것을 생각해 가장 먼저 공을 들였다.
그리고, 지금 그 노력의 결과가 우리의 눈앞에 펼쳐져 있다.
“이야, 진짜 길 깔끔하고 좋네. 처음 우리 다닐렌츠 올 때 생각하니 그때 그 길이 맞나 싶다.”
각종 자갈과 돌멩이, 진창이 어우러져 총체적 난국이었던 예전의 도로 상황을 떠올린 엔리케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하하, 제가 신경 좀 썼죠. 이 길 지나다니면서 장사를 해야 하니까요. 적어도 돌 밟고 마차 바퀴가 부서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어야죠.”
“그러게, 좋네. 걸어가다 발에 돌 안 걸리는 것만 해도 어디냐.”
“지금은 돌만 골라내고 옆으로 배수로를 조금 파낸 정도이지만, 나중에 영지 자금 사정이 더 나아지면 아예 도로를 새로 깔아버릴 거예요.”
나는 다닐렌츠 전역에 로마 군단병이 만들었던 것과 유사한 포장도로를 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돈도 엄청나게 들 것이고, 무엇보다 석재가 어마어마하게 필요하겠지만...
‘... 몇 년 안에 그 두 가지 조건을 다 채울 수 있게 될 테니.’
내 머릿속엔 질 좋은 석재를 마르고 닳도록 캐낼 수 있는 석재광산 몇 군데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었다.
광산업이 돈 많이 드는 이유 중 하나가 자원이 나오는 맥(脈)을 찾는데 돈을 많이 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자원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기에 헛돈 쓸 일이 없다.
‘손대는 곳마다 자원이 펑펑! 그야말로 마이더스의 손이라고 할 수 있지.’
몬스터 가죽을 팔아 번 돈으로 최소한의 산업 기반을 갖추었으니, 그다음은 광산업을 터트릴 차례.
다닐렌츠를 왕국 최강의 영지로 만들기 위한 나의 계획은 다음 목적지를 향해 착실하게 진행 중이었다.
“그나저나, 어째 가는 길이 조용하다? 이래서야 뭐 신입 애들한테 가르칠 게 있나 싶네. 아무것도 안 나오잖아!”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은 주도 키르헨에서 걸어서 사흘 정도 떨어진 장소였다.
여기서 반나절 정도만 더 이동하면 루테니아 영지에 들어서게 된다.
놀라운 건, 키르헨을 떠나 이동해온 사흘 동안 그 어떤 외부의 습격도 받지 않았다는 것.
지난 1년간 이 길을 따라 주야장천 우리 상행단이 오가며 길목에 나타나는 몬스터와 도적놈들을 족친 결과였다.
푸른 방패의 새로운 식구가 된 신입 용병들에게 상행 중 벌어지는 전투 상황에 대해 이것저것 가르쳐 줄 생각이었던 엔리케의 입장에선 조금 실망스러울 수도 있는 그림.
하지만 용병이 아닌 철저히 상단장의 위치에서 이 상행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엔리케와 사정이 달랐다.
“참나, 상단 호위하러 나온 양반이 불길하게 그런 소릴 합니까? 아무 일도 없으면 상단 입장에선 오히려 좋은 거죠.”
“아니이...! 그런 얘기가 아니라... 쩝, 그래도 하다못해 고블린 몇 마리라도 나와줘야지. 그래야 신입 애들도 긴장이란 걸 좀 할 거 아니냐. 안 그래?”
나의 지적에 입에 튀어나온 엔리케가 뭐라 변명을 늘어놓는다.
“떽!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 그러다가 뭐 나오면 다 엔리케 탓이에요. 진짜 가만 안 둘 겁니다?”
“아휴, 알았다, 알았어! 거참 되게 뭐라고 하네!”
나의 구박에 질려버린 엔리케가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서던 그때였다.
“...!”
상단 마차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거미줄처럼 넓게 퍼져 있던 나의 감각에 걸려든 불온한 누군가의 움직임.
그 즉시, 나는 말고삐를 끌어당기며 천둥 같은 함성을 내질렀다.
“전원 정지!!! 마차를 중심으로 뭉쳐라! 습격에 대비해!!!”
“?!”
“... 아,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상단장님, 갑자기 그게 무슨...?”
나의 갑작스러운 명령에 모두가 놀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그들의 눈엔 적의 습격은커녕 그 흔한 들개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냅다 습격에 대비하라며 소리치는 내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겠지.
하지만...
타타탁!
“뭐해, 이 새끼들아!!! 다들 싸울 준비해! 방패 꺼내 들라고!!!”
대체 언제 올라간 것인지, 상단 마차 지붕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엔리케가 들고 있던 활에 화살을 재며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한 마리 표범처럼 재빠른 움직임.
역시, 전투 상황의 엔리케는 평상시의 그 능글맞은 아저씨와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된다.
“어, 으어! 저, 전투태세에에에!!!”
“야, 빨리 움직여! 다들 방패 들라고!!!”
“상단 직원들은 마차 뒤쪽으로 이동하십시오! 어서!”
직속상관인 엔리케의 외침까지 들리고 나서야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전투태세를 갖추는 푸른 방패의 신입 용병들.
하지만 그런 부하들과 달리 나와 수백 번의 전투를 치렀던 ‘전우(戰友)’ 엔리케의 얼굴엔 털끝만큼의 의심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데미언, 어느 쪽이냐!”
내가 알고 있는 이들 중 가장 무시무시한 활 솜씨를 지닌 사나이, 엔리케의 외침에 나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정면에서 왼쪽에 있는 숲속! 적어도 스무 명 이상은 되는 것 같아요!”
“왼쪽 숲... 아, 그래. 보인다.”
내가 가르쳐준 곳을 향한 엔리케의 시선.
그리고,
퉁! 퉁! 퉁!
그늘에 숨어 우리를 노리던 정체불명의 적들을 향해, 푸른 방패의 ‘호크 아이(Hawk Eye)’가 쏘아낸 세 발의 화살이 매서운 비행을 시작했다.
< 지각 변동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