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각 변동 (4) >
쾅!!!
“또 떨어졌어! 또!!! 으아아악!!!”
루테니아의 주도, 프롤린에 자리한 콜티츠 상단의 사무소.
전달보다 더욱 엉망이 된 매출 내역서의 내용을 확인한 상단주 지몬 콜티츠가 주먹으로 책상을 후려치며 괴성을 지른다.
“야, 이 개새끼들아! 너희들을 매달 꼬박꼬박 돈 받아 처먹으면서 하는 일이 뭐야 대체? 순 밥 버러지 같은 새끼들이!!! 으아아!!!”
와장창! 쨍그렁!!!
정확히 한 달 전에 새것으로 마련해두었던 상단주 사무실의 집기들이 속절없이 깨져나간다.
매달 상단의 매출 내역이 나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벌어지는 살풍경.
벌써 1년째 반복되는 그림이었기에, 상단주 집무실 밖에서 근무하는 상단 직원들은 이제는 그러려니 하며 자신의 할 일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가죽뿐만이 아니잖아! 그 외에 식자재나 건설자재 납품 매출도 점점 떨어지고 있어! 이게 말이 돼? 당신들 일 안 하냐고!!!”
길길이 날뛰는 지몬의 모습을 보며 1년 사이 족히 십 년은 더 늙어버린 얼굴을 한 콜티츠 상단의 수뇌부들이 고개를 떨군다.
“보크 이 새끼들이 이렇게 치고 올라올 동안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었어? 아니면 그 새끼들한테 뒷돈이라도 받아먹는 거냐? 대답 안 해? 어?!”
1년 사이 무섭게 성장해 콜티츠 상단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가 된 보크 상단.
처음엔 몬스터 가죽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이었으나, 이젠 식자재와 건설자재, 광물자원, 심지어 군수품 납품 쪽으로도 손을 뻗치고 있었다.
그 같은 보크 상단의 눈부신 성장세엔 타고난 상재(商才)를 지닌 보크 상단의 주인 이자벨의 활약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의 주력 상품인 몬스터 가죽의 기이하리만큼 훌륭한 품질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고블린과 놀 같은 소형 몬스터들의 가죽은 어차피 저렴한 가격에 박리다매로 팔아먹는 것이니 딱히 품질을 따질 것이 없었다.
하지만 몬스터 가죽 시장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오크 가죽의 경우엔 손님들이 품질을 꽤 깐깐하게 따졌는데, 바로 이 부분에서 보크 상단과 콜티츠 상단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보크 상단에서 판매하는 오크의 가죽이 콜티츠 상단의 것에 비해 상태가 훨씬 좋았던 것.
여기서 가죽의 상태가 좋다는 것은 가죽의 상처, 즉 훼손된 부분이 적다는 뜻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보크 상단과 콜티츠 상단에 각각 가죽을 납품하는 ‘거래처’들의 몬스터 사냥 방식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보크 상단에 가죽을 납품하는 다닐렌츠 상단, 정확히는 그들에게 고용된 키르헨의 용병들은 처음부터 가죽을 벗겨 내다 팔 생각으로 몬스터를 사냥했다.
당연히 가죽에 훼손이 덜 가는 사냥 방법을 선호했는데, 예컨대 머리통을 한 방에서 쳐서 날린다거나 팔다리를 잘라서 출혈을 유도하는 식이었다.
반면, 콜티츠 상단의 거래처인 루테니아 영지군은 몬스터의 ‘토벌’이 주요 목적인 조직.
최소한의 인명피해로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이 중요한 이들이었기에, 직접 몬스터와 창검을 맞대기보단 원거리에서 활을 쏴서 쓰러뜨리는 것을 선호했다.
깔끔하게 머리통을 날려 잡은 오크의 가죽과 화살 구멍이 군데군데 숭숭 나 있는 오크 가죽 중 어느 쪽이 높은 품질일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래, 오크 가죽은 그렇다 쳐! 대체 트롤은 어떻게 상처 하나 없이 잡는 건데? 그게 말이 되냐고?!’
빼어난 품질을 지닌 오크 가죽과 함께 보크 상단의 명성을 드높인 최고의 히트 상품은 다름 아닌 트롤이었다.
알다시피 트롤은 오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사냥 난이도를 지닌 몬스터다.
대형종으로 분류될 만큼 커다란 몸집와 일격에 군마를 때려죽일 수 있을 정도의 괴력을 함께 지닌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트롤은 불가사의할 정도의 강력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어 팔다리를 잘라내거나 내장이 쏟아질 정도의 큰 부상을 당해도 금세 회복할 수 있었다.
용병 업계에 널리 퍼져있는, ‘오크 한 부대랑 싸울지언정, 트롤과는 싸우지 않는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던 것.
이처럼 잡기가 힘든 몬스터인 트롤이었으나, 잡을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가죽과 피, 심지어 뼈까지 버릴 것이 없었다.
어지간한 날붙이 공격 따위는 너끈히 받아내며, 활은 물론 근거리에서 쏘아낸 석궁 공격조차도 몇 발 정도는 버텨낼 수 있다는 트롤의 가죽.
상처에 좋은 몇 가지 약초와 잘 섞으면 아르닌 교의 고위 사제들이 만들어내는 힐링 포션 못지않은 상처 치료 효과를 보인다는 트롤의 피.
거기에 골동품 수집가들과 무기 제작자들이 환장해서 달려든다는 트롤의 뼈까지.
놈은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 될 정도로 귀한 취급을 받는 특상품 중의 특상품이었기에, 트롤의 사체를 구할 수 있는지 없는 지가 상단의 명성에 큰 영향을 끼칠 정도였다.
헌데, 보크 상단은 그 귀한 트롤을 두어 달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시장에 내놓았다.
심지어 얼굴 이외에는 상처 하나 없는 상태로 말이다.
‘뭐, 주먹으로 트롤 얼굴을 후려갈겨서 잡기라도 한 거요? 아니 어떻게 이렇게 상태가 깔끔해?’
보크 상단에서 내어놓은, 짓뭉개진 얼굴 외에는 상처 하나 없는 트롤의 모습에 사람들이 물었다.
그때마다 보크 상단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영업 비밀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현격히 차이 나는 오크 가죽의 품질과 ‘특급 상품’ 트롤의 등장으로 콜티츠 상단은 점차 보크 상단에게 시장 점유율을 내어주기 시작했고...
“세 배 차이야, 세 배 차이라고! 보크 상단 놈들의 가죽 판매 매출이 우리의 세 배야! 이게 말이 돼? 고작 1년 사이에 이 꼴이 난다고?”
“죄, 죄송합니...!”
“죄송은 시발! 죄송하다고 하면 일이 해결돼? 뭐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이렇게 쥐새끼처럼 숨어서 입만 털고 있을 게 아니라!!!”
콰앙-!!!
다시 한번 지몬의 살찐 손이 책상 위를 후려치며 듣기 싫은 굉음을 냈다.
“...”
“...”
하지만 그의 앞에 있는 모두가 고개만 아래로 처박고 있을 뿐 입을 열지 않는다.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지몬이, 길게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하아... 이런 멍청한 작자들을 믿고 지난 1년을 기다린 내가 병신이지. 으이구, 결국은 내가 직접 나서야 뭐라도 일이 돌아가니...”
“...!”
“?!”
갑자기 튀어나온 지몬의 발언에, 아래로 향해 있던 부하직원들의 고개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다.
“아, 아니... 상단주님?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희가 모르게 취하신 조치가 있습니까? 대체 어떤 걸...”
여자 끼고 술 마시는 것 외에는 도통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위인이 바로 눈앞의 지몬이었다.
그런 그가 ‘직접’ 나서서 무엇인가를 했다?
그런데, 심지어 그걸 상단의 수뇌부인 자신들이 모른다?
치밀어 오르는 위기감에 모두가 지몬의 입을 바라보며 긴장하는데...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면 될 것 아닌가?”
“...!”
“제거... 제거라니요?”
“상단주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놀란 얼굴로 묻는 부하들을 보며 피식, 비웃음을 흘린 지몬.
그가 한껏 거드름을 떨며 대답한다.
“지금 우리 상단이 겪는 문제, 결국은 다닐렌츠에서 넘어온다는 그 몬스터 가죽 때문이 아닌가? 그럼 그 가죽이 보크 상단으로 못 가게 만들면 되는 거잖아?”
드르륵- 탁!
자신이 앉아 있던 집무실 책상의 서랍을 연 지몬이 그 안에 보관되어 있던 웬 서류 한 장을 꺼내어 책상 위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는다.
“당신들이 1년 동안 책상 앞에 앉아서 해결 못 하던 그 일, 내가 해결했어. 상단주인 이 지몬 콜티츠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상단을 구하기 위해 직접 나섰다 이 말이야! 하핫!”
“... 예?”
다들 영문 모를 표정으로 지몬이 내어놓은 서류를 바라본다.
그 서류에 적힌 내용은 다름아닌...
“금패 용병, 위르겐 스팔터...? 사, 상단주님, 용병을 고용하신 겁니까?”
“세상에...”
“용병? 그럼, 보크 상단을 습격하려고...?”
“이, 이건 아닙니다! 선을 넘은 행동입니다, 상단주님!”
서류의 내용을 확인하고 기겁한 이들이 기함했다.
하지만 이미 눈이 돌아간 지몬은 그런 이들에게 꽥꽥거리며 큰소리를 쳐댈 뿐이다.
“입 닥쳐! 당신들이 어영부영할 동안 보크 상단 놈들이 우리를 위협할 정도로 커졌어. 밥줄이 끊기게 생긴 마당에 뭐? 선을 넘어?”
콰앙!
책상에 양손을 내리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지몬이 살기 어린 눈으로 모두를 쏘아보며 외친다.
“선을 넘은 건, 내가 아니라 저 새끼들이지! 감히 이 콜티츠 상단의 영역에서, 내 주머니로 들어와야 할 돈을 가로채?”
으드득,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며 이를 간 지몬이 노을 지는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 건방진 놈들. 제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설친 대가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살려주마. 흐흐흐...!”
***
퍽! 퍽! 퍽!
“?!”
빛살 같은 속도로 날아든 세 대의 화살이 정확하게 세 목숨을 앗아간다.
“커헉!”
“억!”
“크아악!”
각각 가슴 한복판과 머리, 오른쪽 눈에 틀어박힌 화살.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진 세 명의 부하들은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이런 시발?! 뭐야, 뭔데?!”
“화, 화살?!”
“우리가 보인 거야?”
화살을 맞고 쓰러진 이들 곁에 있던 몇몇 다른 부하들이 기겁하며 놀란 소리를 내뱉었다.
그래, 화살이 못 날아올 거리는 아니다.
문제는 이쪽이 수풀 속에 숨어 매복하고 있었다는 것.
멀리 다닐렌츠 상단의 마차가 보이기 시작한 순간부터는 말 한마디조차 꺼내지 않고 쥐 죽은 듯이 숨어 있었다.
‘근데, 그걸 알아채고 활을 쏴?!’
수풀 속에 숨어 있던 사내들의 대장, 루테니아의 금패 용병 위르겐 스팔터가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이 정도면 여기 미리 숨어 있는 걸 알고 있다가 화살을 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혹시, 정보가 샌 건가?
‘아니야, 그럴 수가 없지.’
콜티츠 상단의 주인, 지몬 콜티츠와 용병 계약을 체결하자마자 그 길로 도시를 떠나 다닐렌츠와의 접경지대로 향했다.
애초에 정보가 샐 시간조차 없었다.
그럼, 결론은 하나뿐이다.
‘... 놈들이 매복을 알아챘다!’
어떻게 알아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숨어 있다가 기습하려던 계획이 어그러졌다는 것이고, 상대가 전투 준비를 마쳤다는 것.
이렇게 된 이상, 남은 건 정면으로 들이받는 길뿐이다.
“시발, 기습은 글렀다! 그냥 나가서 정면으로 조진다! 자, 다들 튀어나갓!!!”
두꺼운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근육질의 거한, 용병대 ‘회색수염’의 대장인 위르겐 스팔터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자 곧 주변을 진동시키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아아!!!”
“다 죽여! 죽여버려!!!”
“가진 거 다 내려놓고 얌전히 뒈져라!!!”
“으하하, 목을 내놔라 이 새끼들아!”
은신(隱身) 중이던 풀숲을 떠나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위르겐의 부하들.
거의 서른 명에 가까운 인원이 동시에 움직이다 보니 마치 숲이 움직이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쉬잉- 쉬잉- 퍽! 퍼억!!!
그 와중에 또다시 날아든 화살 두 발이 위르겐의 부하 두 명의 머리통에 꽂힌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귀신 같은 활 솜씨.
맹세컨대 20년 넘는 용병 생활 동안 위르겐은 저 비슷한 수준의 활 솜씨조차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썅! 마차 위에서 화살 쏘는 놈을 조심해라! 2조는 마차 뒤로 돌아 들어가고, 1조는 나와 함께 정면을 들이친다! 가자아!!!”
“알겠습니다아아아!!!”
명성 높은 금패 용병 위르겐을 따르는 부하들인 만큼 인성엔 다소 문제가 있어도 실력이 처지는 이는 없었다.
정신없이 달려나가는 와중에도 칼같이 명령을 수행하는 회색수염의 용병들.
그 사이 또 화살이 날아와 한 명이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지만, 달려드는 기세는 줄어들지 않는다.
“이 개새끼들아! 싹 다 뒈져라!!!”
곧 두 패로 나누어진 위르겐의 부하들이 예상치 못한 기습에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다닐렌츠 상행단을 덮쳤다.
아니, 덮치려고 했다.
휘우우우웅-
“?!!”
콰지지직! 푸화아아아악!!!
상행단을 호위하는 병력과 약 대여섯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
앞선에서 기세 좋게 돌격하던 회색수염의 용병 다섯이 피떡이 되어 사방으로 튕겨 나간다.
가서 따로 살필 것도 없는, 분명한 즉사(卽死).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바닥을 구르는 그들 다섯 명 모두 머리가 사라진 채였다.
“허읍!?”
“저게 무슨?!”
“세, 세상에...”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습격자들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서 못 박힌 듯 멈춰선다.
애초에 사람이 다섯이나 머리통이 터져 날아가는 광경을 봤는데, 놀라지 않는 쪽이 더 이상했다.
“어디서 온 쥐새끼들이냐?”
위르겐의 눈앞에 마치 땅에서 솟아오르기라도 한 듯 갑자기 나타난 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바람에 천천히 흩날리는 금빛 머릿결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살짝 아득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녹색의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여러모로 이 너저분한 전장의 분위기와 맞지 않는 외모를 지닌 사내.
문제는, 그 사내의 손에 들린 기이하고도 흉악한 물건이었다.
“저, 저...”
“뭐야, 저게? 철퇴인가?”
“미친, 저게 철퇴라고...?”
“나무... 나무로 만들었겠지?”
생긴 건 분명 철퇴였으나, 그 크기가 문제였다.
일반적인 철퇴의 두세 배쯤 되는 길이와 두께.
심지어 끝부분에 달린 묵빛의 쇳덩어리는 어른의 머리 크기만 했다.
저토록 무지막지한 걸 휘둘렀으니, 단숨에 사람 머리통 다섯 개가 터져나가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
“저, 저게 말이 되는...”
“말이 왜 안 돼? 방금 봤잖아? 이거 휘두르는 거.”
보통 사람은 휘두르기는커녕 들고 있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이는 거대한 철퇴.
“감히 겁도 없이, 이 길 위에서, 다닐렌츠의 깃발을 보고도 덤벼든다라...”
다닐렌츠 상단에서 큰돈을 들여 제작한 트롤 사냥 전용 특수무기, 일명 ‘안면분쇄자’를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올린 데미언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
“... 사연이 있는 놈들인 것 같은데, 일단 맞고 나서 얘기를 좀 해보자.”
“자, 잠깐...!”
휘우웅- 콰직! 푸화아아악!!!
< 지각 변동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