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89화 (85/197)

< 새로운 시대 (1) >

“언니, 이 옷 어때요?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거울 앞에서 쉴 새 없이 조잘대며 자신의 모습 이곳저곳을 살피는 소녀가 있다.

니나 아르펜.

2년 전, 왕국 남부의 영지 리트베르크에서 아버지와 가문을 잃는 비극을 겪고 이 머나먼 북부의 변방 다닐렌츠까지 오게 된 소녀.

처음 이곳에 왔을 당시엔 고생을 많이 한 탓에 깡마른 얼굴을 한 그녀였는데, 지금은 보기 좋게 날씬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뿐인가, 고작 두 해가 지났을 뿐인데, 몰라보게 훌쩍 커진 키가 눈에 띄었다.

물론,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호수처럼 맑은 두 눈동자, 오똑한 콧날과 깨끗하고 새하얀 피부.

그리고 가느다란 목덜미를 지나 어깨너머로 풍성하게 내려오는 금갈색의 머리칼 같은 것들.

리트베르크의 모두가 사랑했던 소녀 니나는, 이제 이곳 다닐렌츠에서도 모든 이들의 미소를 자아내는 존재로 자리잡고 있었다.

“내가 아까 말했잖아, 뭘 입어도 넌 다 이쁘다고.”

니나의 질문에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한 사람.

바로 니나의 호위 기사이자 그녀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친한 언니, 아이린이었다.

“아잇, 언니는 내가 뭐 물어볼 때마다 맨날 그렇게 말하더라? 좀 성의있게 대답해주면 안 돼?”

그저 예쁘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할 보석 같은 얼굴 위, 새빨간 꽃잎 같은 입술을 삐쭉 내밀며 불만을 토해내는 니나.

하지만 그런 그녀의 투정 섞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아이린의 대답은 태연하기만 하다.

“성의있게 대답한 건데? 진짜 다 예쁘다니까?”

“에휴... 됐어, 이제 언니한테 안 물어볼 거야!”

“그래놓고 또 물어볼 거면서...”

“아니야, 이번엔 진짜야!”

“그래, 그래. 네 마음대로 해.”

니나의 투정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센 언니’ 아이린이다.

“그나저나, 언니는 다 모르지?”

“뭘?”

“오늘 행사 말이야. 무슨 이유로 모인 건지, 확실히 다 알아?”

“어...”

묘한 기대감이 어린 니나의 표정에 아이린이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평소의 모습을 회복하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흐음, 아드리안 기사 서임 받는 거랑... 베르켈 경께 북부 요새 사령관 직위를 수여하는 거, 그리고 니나 네가 정식으로 영주님의 양녀가 되는 거.”

“흐응...”

아이린의 대답을 들은 니나가 싱긋 미소를 짓는다.

“언니는 그렇게 세 개만 알고 있는 거지??”

“뭐야, 그 반응은? 뭐가 또 있어?”

“뭐가 더 있지. 근데, 지금은 알려줄 수 없어. 궁금해도 참아 언니, 헤헷!”

“... 하나도 안 궁금해.”

니나에게 지지 않으려 애써 관심 없는 척을 하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는 아이린.

하지만 머릿속에선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그녀였다.

‘대체 뭐지? 아, 궁금해 죽겠네!’

***

“허허, 오랜만에 보는구만. 잘 지냈지?”

영주님의 저택에 들어선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하는 한 사람.

리트베르크에서도 그러했듯, 다닐렌츠에서도 모두의 존경을 받는 ‘큰 어른’으로서 자리잡은 사나이, 데론 베르켈이었다.

“베르켈 경, 잘 지내셨습니까.”

꾸벅,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게 인사하는 나에게 다가온 데론이 내 어깨를 잡아 일으키며 말한다.

“허허, 이 사람! 뭐 이리 딱딱하게 구는가. 별 볼 일 없는 늙은이한테 너무 과한 인사야.”

“하하하, 별 볼 일 없다니요. 이곳 키르헨을 살기 좋은 도시로 바꾸어 놓은 일등 공신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다른 사람들의 입장이 곤란해집니다.”

“일등 공신은 무슨... 그저 밑에 사람들 괴롭혀서 거리로 내몬 성질 고약한 늙은이일 뿐이지.”

내가 꺼낸 말에 손사래를 치며 부끄러워하는 데론.

하지만, 데론의 존재가 키르헨의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것은 나를 비롯해 다닐렌츠의 영지 운영에 깊이 발을 담그고 있는 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내가 수장으로 있는 다닐렌츠 상단이 만들어낸 막대한 자금을 양분 삼아 가파르게 발전하기 시작한 키르헨.

사람이 없어 문제였던 도시였기에 인구가 늘어나는 것은 무조건 좋은 일이었지만, 워낙 단시간에 많은 사람이 도시로 밀려 들어와 초래되는 부작용이 상당했다.

하지만 영지의 군무관인 발터 브라운 경은 물론 영주님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 데론이 도시 경비대장으로 취임하며 그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압도적인 경험과 연륜, 예순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젊은이 못지않은 체력과 절륜한 검술 실력 등을 앞세워 순식간에 경비대 조직을 장악한 데론.

그는 급격히 늘어난 키르헨의 인구에 발맞춰 덩치를 키운 경비대를 탁월한 지휘로 이끌며 도시의 소란을 잠재웠다.

내가 그를 ‘키르헨을 살기 좋은 도시로 바꾸어 놓은 일등 공신’이라 표현한 이유였다.

“... 듣기로, 영주님으로부터 중임을 받게 되셨다고요.”

조금은 나직한 목소리로 묻는 나에게 데론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뭐, 그리되었네. 영주님의 말씀도 말씀이었지만, 발터 그 친구가 워낙 간곡하게 부탁을 한 터라...”

하얗게 센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말끝을 흐린 데론이 대화의 화제를 돌린다.

“아직 공식적으로 정해진 일이 아니니 언급하기가 조심스럽구만. 크흠, 그나저나 내가 공무가 바빠 새로 이사한 상단 본부 건물에 놀러 가보지를 못했군. 조만간 두 손 무겁게 선물 들고 한번 들림세.”

“하하하, 베르켈 경이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미리 연락 주신다면 오시는 길에 비단 카펫을 깔아두도록 하지요. 꽃가루도 좀 뿌려두고.”

“이런, 자네는 상단장 일을 몇 년 하더니만 말솜씨가 더 늘었구만. 못 당하겠어.”

“하하하하!”

내 말을 듣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데론의 모습에 내가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는데...

“참나, 저놈이 또 뭔 헛소리를 해서 우리 베르켈 경을 힘들게 하는 겁니까? 저한테도 다 말씀해주세요.”

“...!”

뒤쪽에서 들린 익숙한 목소리.

고개를 돌려보니, 내가 예상했던 바로 그 얼굴이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겔베르트.”

“그래, 인마. 나다.”

앞서 데론에겐 고개를 깊이 숙여 공손하게 인사를 했었다.

정중하게, 데론은 웃어른으로 대하는 마음가짐이 묻어나는 행동이었지.

하지만 겔베르트와는 다른 방식의 인사가 필요하다.

터억-!

마주 잡은 오른손을 강하게 잡아당기며 힘차게 서로를 끌어안는다.

용병 시절부터 나눠왔던 우리만의 인사법이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여긴 웬일로...”

“그러게, 나도 좀 놀랐다. 영주님 이름으로 초대장이 왔더라고.”

“아... 하긴, 오늘 니나가 공식적으로 영주님의 양녀가 되는 날이니까 겔베르트에게도 초대장을 보내신 모양이네요.”

“어, 내 생각도 그래.”

“이유야 어찌 됐건, 이렇게라도 얼굴 봐서 좋네요. 그나저나... 요즘도 수련 꾸준히 하시나 봐요? 용병 길드장 된 다음부턴 일에 치여 사느라 그냥 아저씨 된 줄 알았더니?”

“그러려고 했는데, 누가 그럴 틈을 안 준다. 일손 딸려서 나도 맨날 현장 나가잖냐. 몬스터랑 싸우다 뒤지기 싫으면 몸 관리해야지.”

“하하하, 좋네요.”

두꺼운 겨울의 외투 위로도 느껴지는, 여전히 크고 단단한 겔베르트의 어깨 근육에 내심 감탄하면서 나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팟-!

『 겔베르트 / Lv. 55

소속: 키르헨 용병 길드

클래스: 용병 』

‘몸 관리한다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네.’

스킬, ‘창조주의 눈’으로 살핀 겔베르트의 능력치.

처음 다닐렌츠에 왔던 2년 전에 51이었던 레벨이 무려 네 단계나 상승한 것이 보였다.

하긴 그 2년 동안 몬스터 잡는다고 쉬지 않고 싸웠으니, 그 막대한 전투 경험치가 어디로 갔겠는가.

‘... 좀 아쉽네.’

겔베르트의 현재 위치, 용병 길드장도 분명 대단한 자리다.

특히나 그가 수장으로 있는 키르헨 용병 길드는 우리 다닐렌츠 상단은 물론이고 다닐렌츠 영지 수뇌부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여러 분야에서 많은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쉽다.’

그동안 겪어온 겔베르트는 그야말로 일군(一軍)을 이끌만한 재능이 있는 사나이.

일신의 무력 또한 대단한 수준이었다.

‘용병 말고, 기사로서 군을 이끄는 것에 욕심 내주면 좋으련만...’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본인이 원하지도 않는 길에 억지로 끌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

아쉬운 마음을 삼킨 채로, 그저 때를 기다릴 뿐이었다.

***

“존귀하신 펠리노어 왕국 국왕 폐하께서 인정하신 다닐렌츠의 온당한 주인, 구스타브 카릴베르크 남작님께서 입장하십니다! 모두 예를 표하십시오!”

영지의 모든 행정과 의전 업무를 도맡아 담당하는 서기관 세르지오의 목소리와 함께, 다닐렌츠의 영주 구스타브 남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쿨럭... 쿨럭! 이 부족한 사람의 부름에 응해주어서... 쿨럭! 감사하오. 다들 일어나시오.”

“주군의 부름에 응하는 것은 가신으로서의 의무입니다. 당연히 와야지요.”

연신 기침을 토해내는 남작의 말을 받은 것은 군무관 발터 브라운이었다.

언제나 굳건한 모습을 보여주던 그였지만,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쇠약해진 모습의 남작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전에 없이 떨리고 있었다.

“내가 오늘, 이렇게 모두를 모이라 한 것은... 내게 주어진... 쿨럭!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오.”

“아닙니다, 영주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다시 건강을 찾으실 겁니다! 모든 다닐렌츠의 사람들이 영주님의 건강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영주의 말에 반박하듯 쏟아지는 사람들의 발언들.

하지만 남작은 초연한 미소를 얼굴에 띄운 채 천천히 자신의 할 말을 이을 뿐이었다.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아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쿨럭! 미리... 준비를 해야겠지. 후우...”

그렇게 말한 남작이 미리 준비했던 서류를 서기관 세르지오에게 넘긴다.

두 손으로 그 서류를 건네받으며 꾸벅, 고개를 숙이는 세르지오.

곧,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세르지오가 남작에게 받은 서류를 조심스럽게 풀어낸다.

“... 다닐렌츠의 온당한 주인이신 영주 구스타브 카릴베르크 남작의 의지(意志)로 작성된 이 문서의 내용을, 영지의 서기관으로서 대독(代讀)하겠습니다.”

흠흠, 몇 번의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세르지오가 남작의 명령서에 담긴 내용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먼저, 인사 명령에 대한 내용입니다. 현 키르헨 도시 경비대장직을 수행 중인 기사 데론 베르켈을 영지 동부 접경지대에 자리한 라엔슈타인 요새의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앞서 데론과 인사를 나눌 때 잠깐 언급했던 바로 그 내용.

데론이 영주로부터 받았다던 ‘중임’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다.

“... 이 데론 베르켈, 영주님의 명을 받습니다.”

남작으로부터 요새 사령관의 지휘권을 의미하는 한 자루 검을 건네받으며 고개를 숙이는 데론.

‘리트베르크의 수호신’으로 불리었던 그가 ‘다닐렌츠의 수호신’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다음으로, 기사 서임의 건입니다.”

오, 드디어 기사 서임인가.

고개를 슬쩍 돌려 긴장으로 새파랗게 변한 아드리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오늘 기사로 서임 된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기에, 나 말고도 많은 이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 아드리안. 너무 쫄지마라. 그러다가 실수한다.”

“예? 어으... 예!”

어쩐지 내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느낌인데.

뭐, 그래도 잘 하겠지.

스승님인 데론이 이것저것 잘 가르쳐 주었을 테니, 이런 자리에서 어이없는 실수를 할 리는 없...

“기사 서임 대상자인 데미언, 겔베르트, 아드리안. 이상의 3인은 앞으로 나와 영주님 앞에 무릎을 꿇으라!”

“?!”

세르지오의 갑작스러운 말에 깜짝 놀란 나는 고개를 돌려 정면에 앉아 있는 남작을 바라보았다.

바짝 마른 나뭇가지처럼 쇠약한 그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피어나있는 것이 보였다.

마치 ‘이놈아, 이건 예상 못 했지?’라는 표정.

맞다.

전혀 예상을 못 했다.

‘나야 상단 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으니, 굳이 기사 작위를 내려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거기에 더해, 굳이 작위가 필요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근데 그 생각이 틀렸다.

남작을 포함한 다닐렌츠의 수뇌부들은 나를 곁에서 수행하는 아드리안이 기사가 되었는데, 그 상관인 내가 기사가 아니라면 보여지는 그림이 이상하리라 생각했다.

그저 실리적인 부분만을 생각한 나와, 명분을 따진 그들의 차이였다.

“이... 이거 뭐냐, 데미언? 네가 영주님께 부탁한 거냐?”

당황하기로는 나보다 옆에 있던 겔베르트가 더했다.

“... 저도 몰랐어요.”

“진짜로?”

“진짜로.”

“허어 이게 무슨... 야, 아드리안 너는 알았...”

“예? 예에?”

“... 아니다.”

넋이 나간 나와 겔베르트, 긴장으로 새하얗게 질려버린 아드리안.

그렇게 우리 세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멍청한 소리만 하고 있는데,

“... 크흠, 기사 서임을 받을 세 사람은 어서 앞으로 나오라!”

기다림을 참지 못한 세르지오가 호통 아닌 호통을 쳤고,

“어, 예!”

“나갑... 나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허둥지둥 뛰쳐나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서는 남작의 발 앞에 무릎을 꿇은 우리들.

그렇게, 다닐렌츠 역사상 유례가 없는 깜짝 기사 서임이 이루어졌다.

< 새로운 시대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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