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시대 (2) >
“... 언제나 약자를 존중하고, 지킬 것입니다. 나의 조국을 사랑할 것이고, 싸움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을 것이며, 주 아르닌의 뜻에 반하는 이들을 앞장서서 처단하겠습니다.”
“... 니다.”
기사의 맹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 옆에 있는 아드리안이 하는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몇몇 사람들이 좀 비웃는 것 같았지만, 뭐 나 자신도 스스로 어이가 없었으니 넘어가도록 하자.
의외인 것은 겔베르트의 반응이었다.
갑작스러운 기사 서임에 크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잠시.
겔베르트는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아드리안과 함께 기사의 맹세를 읊고, 경건한 표정을 지으며 남작에게서 검을 건네받았다.
마치 아주 오랫동안 염원했던 일생의 목표를 이뤄낸 것 같은 사람의 표정이요, 분위기였다.
‘...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
때때로 너무 가까이 있기에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겔베르트와 나의 사이가 그러했다.
때론 아버지와 아들처럼, 때로는 형제처럼.
말 그대로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였기에, 그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고 믿었다.
착각이었다.
나는 그를 몰랐다.
기사를 꿈꾸는 한 남자가 평생토록 품었던 열망의 크기를, 나는 알지 못했다.
“후우우우...”
기사 서임식을 마치고 다시 자리로 돌아온 후로도 겔베르트는 마음이 진정 되지 않는 듯 연신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툭 내뱉듯 농을 던졌다.
“거, 사람 참. 그렇게 기사가 되고 싶었으면 미리 얘기를 좀 하시지. 영주님한테 진즉에 내가 추천했을 텐데...”
“...”
“크흠, 아무튼 축하해요. 이제 진짜로 기사 되셨네. 예전부터 농담으로 맨날 ‘대장은 용병이 아니라 기사에 더 어울려요’, 그런 말 했었는데.”
“... 고맙다.”
“응? 뭐라고요”
속삭이듯 말하는 그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해서,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러자 조금 민망한 듯, 괜히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답하는 겔베르트.
“... 고맙다고, 인마. 네가 직접 영주님한테 말씀드린 게 아니어도 결국은 다 네 덕 아니냐.”
“아이, 제가 뭐 한 게 있다고요.”
“한 게 많지. 나랑 애들 데리고 다닐렌츠로 온 것도 너였고, 내가 어찌어찌 길드장인 된 다음에 계속 일거리 끊이지 않게 주면서 내 입지 다져준 것도 너잖아.”
“그거야 뭐...”
겔베르트의 말에 이번엔 내가 민망해져서, 괜히 코끝을 긁었다.
“네가 쉬지 않고 준 일거리를 처리하면서 영주님과 군무관님에게도 눈도장 찍게 된 거지. 결국은 너야. 데미언 네가... 나를 다닐렌츠의 기사로 만든 거지.”
“에이, 뭘 또 그렇게까지... 아, 됐어요. 앞에나 쳐다보세요!”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우리 두 사람 모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니나 아르펜.
오늘 이 행사 자리의 실질적인 주인공.
언제가 내가 선물했던, 푸른빛 비단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은 그 아름다운 소녀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앞을 향해 걸어나가고 있었다.
***
“... 하여, 나 다닐렌츠 남작 구스타브 카릴베르크는 여기 니나 아르펜 양을 나의 딸로서 기쁘게 맞이할 것이다. 이 자리의 모두가 증인이 되어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신기하게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침을 전혀 하지 않는 남작이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쇠약해진 몸.
그러나 니나를 바라보는 남작의 눈빛엔 그 어떤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는 다닐렌츠의 영주도, 카릴베르크 가문의 주인도 아니다.
그저 사랑하는 딸의 앞에 선 한 사람의 ‘아버지’였다.
그러니, 결코 병마(病魔) 따위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 수 없을 것이다.
‘... 축하한다, 니나.’
쏟아지는 사람들의 박수 소리를 들으며, 나는 코끝이 시큰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나를 포함해 원작의 팬들 모두가 가장 사랑하는 장면 중 하나가 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다 알고 보는 거라서 그렇게 큰 감흥은 없을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2년 사이 몰라보게 자라난 니나의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자리 옆으로 안내하는 ‘아버지’ 구스타브 남작의 모습은 한없이 자애롭고 따뜻했다.
“보기 좋네. 영주님도, 그리고 니나도.”
내 어깨에 손을 올린 겔베르트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아까 기사 서임을 받은 후의 흥분을 잘 가라앉혔는지, 내가 아는 평소의 그로 돌아왔다.
“그러게요. 영주님만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셨으면 참 좋겠는데.”
“회복하시겠지. 니나가... 아니, 따님께서 옆에서 열심히 간호도 할 거고 말이야.”
“후우...”
남작의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모두의 축복 속에 환하게 웃고 있는 니나의 모습.
그리고 그런 니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남작의 인자한 미소.
하지만 나는 저들 앞에 다가올 이별의 순간을 알고 있기에 마냥 기분 좋게 이 시간을 즐길 수가 없었다.
“어, 음... 크흠! 큼! 이제 슬슬 마무리되겠네. 연회 자리엔 음식 뭐가 나오려나? 하하! 아이고, 배고프다!”
끓어오른 감정으로 어느새 붉게 변한 눈가를 숨기기 위함인지, 괜한 소리를 늘어놓으며 딴청을 피우는 겔베르트였다.
“뭐예요, 눈은 시뻘겋게 변해 가지고. 설마 지금 울었...”
그런 그를 놀리기 위해 내가 입을 열던 그 순간,
“그리고, 영지 다닐렌츠를 이끌어 가는 중요한 인물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모두에게 알릴 소식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장내의 모두를 집중시키는, 서기관 세르지오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끝난 게 아니었나? 니나 아가씨 얘기 말고 더 중요한 게 남아 있었나?”
“글쎄요. 그거 말고 뭐가 또 있지?”
예상 밖의 전개에 웅성거리는 손님들.
이 자리의 모두가 오늘 행사의 주인공이 니나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나 역시 그랬고.
그랬는데...
‘... 뭐지?’
내가 바라보는 정면, 영주님 자리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니나와 눈이 마주쳤다.
왜인지 나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는 니나.
그래, 의미심장하다는 표현이 딱인 것 같다.
뭘 하든 내 눈엔 예쁘고 귀여운 니나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예쁜 미소가 어딘가 ‘꺼림칙’한 느낌을 들 게 만들었다.
저렇게 예쁜 얼굴로 그런 기분을 들게 하는 거, 진짜 쉽지 않은 일이...
‘...!’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 가지 생각에 퍼뜩 놀라 영주님의 주변을 살폈다.
서기관 세르지오.
군무관 발터 브라운.
그리고 방금 동부 접경지대 요새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데론까지.
다들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설마...”
그들의 흐뭇한 미소가 지닌 의미를 왠지 알 것 같아서, 순간적으로 목덜미에 식은땀이 솟아올랐다.
“응? 설마가 뭔데? 뭔가 느낌이 온 거냐? 야, 혼자만 알고 있지 말고 나한테도 좀 알려줘 봐 인마.”
내 어깨에 한 손을 올린 것도 모자라 다른 손으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속삭이듯 묻는 겔베르트.
하지만 곧 이어진 영주님의 말에, 겔베르트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만다.
“... 다닐렌츠의 기사 데미언. 나는 오늘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이 자리에서 그대를 나의 후계자로 삼으려 한다.”
“...!”
영주의 발언에서 시작된 조용한 충격이 장내를 휩쓸었다.
“어, 어어... 어으...”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던 자세로 굳어버린 겔베르트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겔베르트 뿐만이 아니었다.
영주의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던 영지의 몇몇 수뇌부들을 제외한 모두가 너무 놀라 멍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 그대는 나약하고 부족함 많은 이 구스타브가 평생 해온 일보다 더 많은 것들을 지난 2년간 다닐렌츠를 위해 이루어 주었지.”
앞서 니나에게도 보여주었던 자애롭고 따뜻한 ‘아버지’의 눈빛이 이번엔 나에게로 향한다.
“데미언, 지난 두 해 동안 그대가 보여준 빛나는 재능과 지혜, 불굴의 용기와 헌신은 나를 포함해 다닐렌츠의 모든 이들을 탄복하도록 만들었다.”
“여, 영주님...!”
“오랫동안 왕국 변방의 초라한 땅으로 살아왔던 다닐렌츠다. 허나, 그대의 진두지휘 아래 이룬 지난 2년간의 눈부신 발전은 우리 모두에게 잊었던 꿈과 희망을 되찾게 했지. 170여 년 전, 우리 카릴베르크 가문의 초대 가주이시자 다닐렌츠 영지의 시조이신 마르크님의 통치 이래 쇠락만을 거듭하던 땅에 비로소 축복이 깃들게 된 것이다.”
“...”
진지하다 못해 엄숙한 목소리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가는 남작.
그 모습에 감히 뭐라 입을 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나는 그 자리에서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 하여, 나는 그대를 다닐렌츠의 영주 가문, 카릴베르크 가(家)의 후계자로 삼아 어렵게 얻은 그 축복의 시간을 이 땅의 모든 이들이 오랫동안 누릴 수 있도록 준비하려 한다. 후으음...!”
쇠약해진 몸으로 갑자기 기력을 몰아 썼기 때문일까?
앉은 자리에서 말을 이어나가던 남작이 잠시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떨군다.
“영주님!”
“영주님, 괜찮으십니까?”
서기관 세르지오와 군무과 발터 브라운이 깜짝 놀라 남작의 상세를 살폈다.
하지만 이내 다시 고개를 든 남작은 자신을 걱정하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뿌리치며 못다 한 말을 이어나갔다.
“... 이는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나와 함께 오랜 세월 이 다닐렌츠의 미래를 대비해온 훌륭한 가신들과 머리 맞대고 함께 내린 결론이다.”
“...”
“나의 제안을, 이 간절한 청을 받아주겠는가?”
제안, 이라고 했다.
명령이 아닌 제안이다.
거절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포석.
그러나...
‘... 외통수네.’
오히려 명령이 아닌 제안이기에, 나는 남작의 청을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짜 이렇게 될 줄이야.’
혹시나 하는 생각은 있었다.
지난 2년간 내가 다닐렌츠에서 보여준 활약, 그 대단했던 업적들.
그런 것들을 고려해 나를 후계자로 삼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이내 잦아들었다.
남작이 그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직접 니나에게 이른바 영주로서 응당 지녀야 할 것들에 대해 가르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심했다.
남작의 뒤를 잇는 것은, 당연히 니나가 되리라 생각했던 거다.
나는 원래 계획대로 그런 니나의 최측근이 되어 다닐렌츠를 발전시켜 나갈 생각이었는데...
‘... 이러면, 완전 얘기가 달라지는 거잖아.’
머릿속에 한꺼번에 차오르는 복잡한 생각들을 애써 떨쳐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적지 않은 이야기를 한 번에 쏟아냈기 때문인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가쁜 숨을 쏟아내는 남작이 보였다.
그 바로 옆, 아까의 미소는 어디에 갔는지 입술을 앙다문 채 초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니나도 보인다.
두 손을 가슴 앞에 곱게 모은 채로 나를 바라보는 서기관 세르지오.
바짝 긴장한 눈빛으로 연신 입가를 쓸어내리는 군무관 발터.
담담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자네 마음 가는 대로 하시게’라고 말하는 듯한 데론.
그리고...
“... 야, 인마. 뭘 망설여?”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겔베르트가 말했다.
“이미, 여기 있는 모두가 몇 년 전부터 너를 믿고 따라온 사람들이야.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
“쓸데없이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대답해. 저기, 네 ‘아버지’ 쉬게 해드려야지.”
“하...”
겔베르트의 마지막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다행히 그 순간 고개를 다시 숙여서 망정이지, 분위기 이상해질 뻔했네.
그렇게, 나는 시선을 바닥에 둔 채로 한쪽을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대답했다.
짧은 순간 단단히 벼려낸 각오가 느껴지는, 힘 있는 목소리였다.
“다닐렌츠의 기사, 데미언. 영주님의 청을 감사하고 영광된 마음으로 받듭니다.”
마지막엔, 나도 모르게 조금 목소리가 떨렸던 것도 같고.
“... 카릴베르크 가문의 이름에 걸맞은,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겠습니다.”
< 새로운 시대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