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91화 (87/197)

< 새로운 시대 (3) >

신성력(神聖歷) 785년 2월_

늦겨울의 추위가 유난히 더 가혹하게 느껴지던 어느 날이었다.

뎅그렁- 뎅그렁-

오전 일찍부터 키르헨 성당의 종탑이 구슬프게 울었다.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는 애도의 종소리였다.

“... 고인께서는 평생토록 다닐렌츠의 발전과 영광을 위해 노력하셨으며...”

다닐렌츠의 영주이자 카릴베르크 가문의 가주.

그리고, 두 달 전부터 나의 아버지가 된 사람.

구스타브 카릴베르크 남작이 죽음을 맞이했다.

예견되었던 죽음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슬펐다.

다가오는 죽음을 바라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모두를 힘들게 했다.

“흑흑! 흐으윽! 아버지...”

나와 함께 아버지의 임종을 지켰던 니나는 벌써 몇 시간째 쉬지 않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니나가 카릴베르크 가문의 양녀(養女)로 입적된 것은 고작 두 달 전이었지만, 처음 다닐렌츠에 도착했던 2년 전부터 남작은 니나를 친딸처럼 아끼고 보듬어 주었다.

그러니, 저토록 슬퍼하는 것이겠지.

“... 이로써 구스타브 카릴베르크 남작님의 장례 미사를 마치겠습니다.”

장례 미사를 집전한 세르지오가 엄숙한 표정으로 가슴 앞에 성호를 긋는다.

그는 오늘만큼은 다닐렌츠의 영지의 서기관이 아닌 키르헨 성당의 주임신부란 본업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후우우...”

오열에 통곡에, 저러다 쓰러지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슬퍼하는 니나와 달리 나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남작과 부자(父子)의 연을 맺은 지 고작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아서?

아니,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니나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남작과 정식으로 가족이 된 건 두 달 전이었으나, 그 전부터 나를 아들처럼 대해주는 남작에게 가족과도 같은 정을 느껴왔다.

내가 눈물을 보이지 않은 것은,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 우는 모습을 보일 수 없기 때문이지.’

남작의 죽음과 동시에 나의 신분은 다닐렌츠 영주의 후계자에서 영주 대리가 되었다.

아직 국왕으로부터 정식 재가를 받지 못했기에 아직은 대리 딱지를 달고 있었지만, 그건 시간이 지나면 떼어져 나갈 꼬리표에 불과했다.

이미 영지의 주요 인물들은 나를 영주의 신분으로 대하고 있었고, 나 역시 달라진 나의 위치에 적응 중이었다.

‘... 앞으로 더 바빠지겠네.’

영주의 죽음을 틈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이들이 생길 것이다.

빠르게 발전 중인 우리 영지의 광산과 밀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동쪽의 바렌부르크 남작령.

그리고 다닐렌츠 남부 최대의 도시, 카르셀을 장악하고 제멋대로 굴고 있는 건방진 놈들이 바로 내가 말한 불온한 자들이다.

‘... 하지만, 네놈들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미래의 흐름을 꿰고 있는 나, 다닐렌츠의 차기 영주 ‘데미언 카릴베르크’가 그런 놈들의 꿈을 산산히 깨부숴줄 테니까 말이다.

***

“보고가 올라왔다면서요?”

“예, 공자님. 여기 있습니다.”

나의 질문에 공손하게 답하며 봉인(封印)된 문서를 내어주는 한 사람.

바로 다닐렌츠의 군무관 발터 브라운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넘쳐나는 격무에 시달려 늘 낯빛에 어두웠던 그.

하지만 내가 이끌고 온 푸른 방패의 인재들과 동부 라엔슈타인 요새의 사령관으로 부임한 데론이 그의 어깨에 올려져 있던 무거운 짐을 나눠 가진 탓에 예전보다 한결 나아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투둑-

들고 있던 종이 뭉치에 살짝 힘을 주자 밀랍을 굳혀 만들어진 봉인이 깨어져 나간다.

붉은색 봉인 위에 찍혀 있던 것은, 다름 아닌 동부 접경지대 라엔슈타인 요새 사령관의 문장(紋章).

즉, 나에게 이 문서를 보낸 이는 데론이란 얘기였다.

“음...”

“공자님, 무슨 내용입니까?”

“바렌부르크 놈들 움직임이 수상하답니다. 접경지역에 정찰 기동이 늘었다고 하는데...”

발터의 물음에 답하며 문서의 끄트머리를 읽는데, 그곳엔 이러한 맺음말이 적혀 있었다.

‘... 허나, 이는 영주님을 잃은 슬픔을 틈타 우리 요새의 장병들을 불안케 하려는 적의 같잖은 수작일 뿐입니다. 저를 포함한 라엔슈타인 요새의 모두는 저 굳건한 아이펠 산맥처럼 버티고 서서 조금의 흔들림 없이 이 자리를 지킬 터이니, 공자께선 이곳의 일은 걱정하지 마소서.’

이거, 글을 읽은 것뿐인데 귀에서 절로 음성 지원이 되는 기분이다.

‘... 든든하네.’

이런 게 바로 ‘연륜’이라는 건가.

값싼 자랑으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대신, 격조 높은 말 몇 마디로 상대방에게 더할 나위 없는 믿음을 선사한다.

그래, 이래서 내가 데론을 동부 요새 사령관으로 보내자고 했던 거지.

“음... 역시, 데론 경이시군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내가 다 읽고 넘겨준 데론의 서신을 확인한 발터가 고개를 끄덕인다.

“군무관께서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바렌부르크 놈들의 움직임이 그저 허장성세에 불과하다는 거 말입니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세밀한 계획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우리 영지가 상중(喪中)이라는 것을 이용해 심리적으로 흔들어볼 요량으로 얕은수를 쓰는 것에 불과할 겁니다.”

“흠, 그렇군요. 그럼... 일단 동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돌아온 대답에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문서 하나를 발터에게 내밀며 말했다.

“그럼, 이 계획은 계획대로 진행하겠습니다.”

“...!”

내가 건네준 문서의 제목을 확인한 발터의 얼굴에 긴장이 어린다.

“... 알겠습니다.”

비장감마저 감도는 그의 시선 끝, 내가 내민 문서의 상단에 적힌 제목은...

[다닐렌츠 영지 남부 평정 계획]

***

테오릭 베케르트(Theoric Beckert).

그는 다닐렌츠 영지 남부 지역 최대의 도시, 카르셀을 지배하는 조직인 ‘밤의 형제단’의 수장이었다.

용병 출신으로, 일신에 대단한 힘과 검술 실력을 지녔다고 알려졌다.

나이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략 사십 대 중반 정도라 추측된다.

밤의 형제단이라는 조직의 이름은 유치했지만, 그들이 지닌 힘은 전혀 유치하지 않았다.

도둑 길드와 용병 길드, 도시 뒷골목의 양대 산맥이라 할 그 두 조직을 모두 산하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두 조직의 힘과 영향력을 십분 이용하여, 테오릭은 카르셀의 뒷골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술집과 도박장, 매춘 업소 등 뒷골목의 모든 돈 되는 사업들이 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렇게, 테오릭은 쓸어 담은 돈과 칼의 힘으로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권력의 성을 쌓았다.

영주의 임명을 받아 중앙에서 파견된 카르셀의 시장(市長)조차 감히 그의 뜻을 거스르지 못할 정도의 공고한 권력이었다.

***

“... 해서, 카르셀의 공식적인 통치자는 시장이지만 그 위에 ‘왕’이 있다는 말이 떠돌 정도입니다.”

나의 명령을 받아 한 달 전 카르셀에 잠입, 테오릭 베케르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아드리안.

마침내 임무를 마치고 키르헨으로 돌아온 그가 내 앞에서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왕? 영주도 아니고 왕이라고?”

테오릭이 ‘카르셀의 왕’이라 불리고 있다는 아드리안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건방진 녀석이 아닌가!

‘... 뭐, 확실히 테오릭이 대단한 놈이긴 하지.’

테오릭이 이른바 ‘난 놈’이라는 평가에 대해선 나도 동의한다.

심지어 나는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그의 출신 배경까지 알고 있었다.

‘감히 귀족의 뒤통수를 깔 정도의 배포가 있는 인간이니, 확실히 걸물이긴 하지.’

지금으로부터 십오 년 전 처음으로 카르셀에 모습을 드러낸 용병 테오릭 베케르트.

그는 단순히 먹고 살길을 찾아 도시에 흘러들어온 이가 아니었다.

동쪽으로 이웃한 영지 바렌부르크에서 다닐렌츠의 후방에 불안 요소를 만들어 놓으려 의도적으로 침투시킨 일종의 ‘첩자’였던 것.

그가 바렌부르크의 영주, 폴커 야닝스 남작으로부터 받은 본래의 임무는 카르셀의 뒷골목을 장악한 후 거기서 나오는 수익과 정보를 주기적으로 바렌부르크 측으로 넘기는 것이었다.

겸사겸사 두 영지가 전쟁을 벌이게 되면 후방에서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기도 하고 말이지.

‘하지만, 막상 카르셀의 상황을 파악하고 보니 다른 생각이 들었던 거지.’

그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카르셀의 상황은 한마디로 ‘주인 없는 산(無主空山)’ 그 자체였다.

그때부터였을 거다.

테오릭의 가슴 속에 잘만하면 바렌부르크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꼬리’가 아니라 그 자신이 ‘머리’가 되어 독자적인 세력을 이뤄낼 수도 있으리란 야망이 고개를 든 것이.

‘카르셀 내에서 어느 정도의 세력을 이룬 후, 테오릭은 바렌부르크와의 연락을 끊어버렸다.’

테오릭의 변심을 알아챈 바렌부르크의 영주는 크게 분노했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애초에 다른 영지에서 더러운 수작을 부리려 했던 그가 누굴 욕할 것인가?

‘그거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지...’

물론, 다닐렌츠의 영주인 내 입장에선 똥 묻은 놈이건 겨 묻은 놈이건 둘 다 쳐죽일 개새끼인 건 매한가지였다.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건 테오릭이 본래 바렌부르크의 명령을 받아 카르셀로 기어들어온 첩자라는 사실이었다.

“테오릭은 카르셀 도심 외곽 지역에 세워진 자그마한 성에서 부하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성이라...”

아드리안의 한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릭의 성, 원작에도 등장하는 요소다.

원작에서 다닐렌츠의 영주가 된 니나의 명령을 받아 직접 테오릭 토벌에 나섰던 군무관 발터가 그 성을 무너뜨리느라 고생을 좀 했지.

물론, 성이라고 해서 막 귀족들이 사는 성처럼 진짜 크고 웅장한 규모의 건물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건물 4, 5층 정도의 높이로 흙벽돌과 나무를 쌓아 만들어진, 자그마한 규모의 고성(古城)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만 해도 일개 용병 놈의 근거지로는 차고 넘칠 정도로 훌륭했다.

나름 번듯하게 지어진 카르셀의 시장 공관도 그런 테오릭의 성에 비하면 초라한 개집처럼 보일 정도였으니...

“성을 지키는 병력은 어느 정도지?”

“상주 하는 병력은 스물에서 서른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제가 직접 성안으로 들어가서 확인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밖에서 본 추정치가 그렇다?”

“예. 그 외에도 테오릭이 이동할 때마다 따라붙는 호위 병력이 있습니다.”

“흐음... 그놈들 수준은?”

테오릭 부하들의 전투력 수준을 묻는 나의 말에 아드리안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음... 직접 검을 맞대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테오릭의 곁에 붙어서 움직임을 함께 하는 놈들의 실력은 확실한 것 같았습니다. 얼핏 들어보니 기사급 실력자도 대여섯은 되는 것 같았습니다.”

“돈으로 끌어들인 놈들이군.”

“맞습니다. 돈 받고 검 팔러 다니는 자유 기사 놈들 몇 명을 호위로 고용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테오릭 본인의 수준도 꽤 된다고 하고...”

“뒷골목 쓸고 다니는 놈들 수준이 꽤 되어 봤자지, 안 그러냐?”

나는 걱정하는 아드리안의 말을 부드럽게 받으며 미소를 지었다.

나를 믿고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그의 주군이자 형님으로서의 믿음직한 미소였다.

***

“그래서, 결국 그 근본도 없는 용병 새끼가 영주가 된다는 거야?”

“예, 이미 작위 승계를 허락받기 위한 인편을 왕도 카를리온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쩝쩝-

부하의 보고를 들으며 게걸스럽게 접시 위의 음식을 씹어 삼키는 중년의 사내.

터럭 한 톨 남아 있지 않은 깔끔한 민머리 아래 진하고 두꺼운 눈썹과 번쩍이는 눈빛을 지닌 두 눈이 강렬한 인상을 뽐낸다.

으드득, 으적!

그의 입속에서 뼈가 부러지는 음산한 소리가 들린다.

퉷, 하는 소리와 함께 접시 위로 떨어진 것은 몇 조각의 부서진 닭 뼈.

자신의 입에서 뱉어낸 그 닭 뼈를 우두커니 바라보던 민머리 사내가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말한다.

“그 자식이 이제 갓 스물이라고 했던가? 성년은 지났네.”

“예, 그렇습니다.”

“흐, 그래 봤자 아직 병아리지. 어떻게 운이 좋아서 영주 감투를 쓰게 됐는지는 몰라도... 나한테 걸리면 이 닭 뼈처럼 잘근잘근 씹힐, 그런 애송이란 얘기야. 적어도 여기, 카르셀에선 나한테 안 된다는 얘기지. 안 그러냐?”

“맞습니다!”

“이참에 아예 시장 모가지 따고 자유 도시 카르셀로 독립을 해버릴까? 크흐, 그거 아주 괜찮은 생각인데? 으하하하하하!”

‘카르셀의 왕’이라 불리는 민머리 사내, 테오릭의 음산한 미소가 어둡고 차가운 고성(古城)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다.

< 새로운 시대 (3)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