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시대 (4) >
“상단주님.”
“...”
“저... 상단주님?”
“... 음? 아!”
바로 옆에서 자신을 부르는 것도 듣지 못할 만큼 깊이 생각에 잠겨 있던 한 여인.
이자벨.
업계의 터줏대감이었던 콜티츠 상단을 밀어내고 루테니아 영지 상계의 선두로 올라선 보크 상단의 수장.
그녀가 수심 가득한 시선을 돌려 자신을 부른 상단 직원의 얼굴을 바라본다.
“미안해요, 내가 생각을 좀 하느라...”
“그, 혹시 다닐렌츠 상단 쪽의 제안을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 네, 맞아요.”
상단 직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자벨이었다.
“그쪽에서 제시한 게 너무 좋은 조건이라, 고민이 되네요. 후우우...”
뒤이어 깊은 한숨을 내쉬는 이자벨이었다.
그녀의 말에 공감하는지, 상단 직원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솔직히 저도 상단주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아니 사실은... 이건 그냥 ‘좋은 조건’ 수준이 아니죠. 아예 말이 안 되는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그렇죠?”
“예.”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상단 직원의 얼굴을 보며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쉰 이자벨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후우, 그래서 이상하다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니까... 아무튼, 알겠어요. 손에 들고 있는 그거, 여기 두고 나가 보세요. 내가 이따가 확인할게.”
“예, 알겠습니다.”
이자벨의 책상 위에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내려두는 상단 직원.
그 후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방문 향해 걸어가던 직원이, 문득 생각난 듯 뒤를 돌아서서 말했다.
“저는 그 제안에 숨겨진 다른 의미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
“제가 생각하는 상단주님은, 충분히 그런 제안을 받고도 남으실 분이니까요.”
“...!”
“주제넘은 소리가 너무 길었습니다, 그럼.”
끼이익-
뚜벅뚜벅뚜벅...
직원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얼굴의 감싼 이자벨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
“보크 상단 쪽에선 아직 연락이 없습니까?”
“예, 아직은 연락 들어온 게 없습니다.”
나의 질문에 깍듯하게 대답하는 짧은 갈색 머리의 사내.
영주 후계자로서의 행보를 시작한 나를 대신해 다닐렌츠 상단의 새로운 수장이 된 파스칼 긴터였다.
처음 만났을 당시엔 엉망인 머리 모양에 덥수룩한 수염, 키만 껑충하니 큰 말라깽이에 불과했던 파스칼.
하지만 지금의 그는 고급의 비단으로 잘 만들어진 옷을 아래위로 차려입고, 하얗고 곱상한 얼굴 위엔 얼마 전 내가 큰돈을 들여 선물해준 번쩍이는 금테 안경이 씌워져 있었다.
‘저렇게 차려입으니까 사람이 아주 달라 보이네. 확실히 옷이 날개야.’
입고 있는 옷도 옷이었지만, 확실히 안경이 주는 지적인 인상이 남달랐다.
기본적으로 이 시대의 안경이란 가히 보물 못지않은 어마어마한 가격을 지닌 물건.
안경테도 비쌌지만, 고품질의 유리를 솜씨 좋은 기술자가 세밀하게 세공해 만드는 렌즈의 경우엔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일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값비싼 귀물(貴物)이라 한들 나의 ‘고급 노예’ 파스칼의 가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 안경 사드렸으니 더더욱 열심히 일해줘요, 파스칼. 내 곁에서, 영원히!’
그 옛날 세종대왕님과 황희 정승께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
아무튼, 나는 다시 파스칼과의 대화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흐음, 생각보다 답이 오래 걸리네요.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라고 생각했는데.”
“공자님께서 제안하신 조건이 너무 좋아서 오래 걸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조건이 너무 좋아서, 오래 걸린다?”
“예.”
“어째서? 조건이 좋으면 바로 받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보통은 그렇습니다만, 조건이 보통 수준을 넘어서면 이게 맞나 의심을 하게 되니까요.”
“흐음...”
파스칼의 말을 들은 나는 몇 주 전 똑같은 장소에서 보크 상단의 수장, 이자벨을 만나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을 떠올렸다.
***
몇 주 전,
다닐렌츠의 주도, 키르헨의 영주 저택_
“... 영주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상단 거래 차 먼 곳에 나가 있던 터라 일정을 맞춰 올 수가 없었습니다. 늦었지만, 돌아가신 영주님의 명복을 빌겠습니다.”
내게 깊이 고개를 숙이며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 다닐렌츠 영주 구스타브 남작에게 조의(弔儀)를 표하는 이자벨.
다닐렌츠 상단장에서 차기 영주로 신분이 달라졌기 때문인지, 나를 대하는 그녀의 행동과 말투에 조금 더 조심성이 묻어나는 기분이었다.
“참석하시기에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마음 쓰지 마십시오.”
나 역시 그런 이자벨에게 마주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사실, 전과 비할 바 없이 높아진 나의 신분을 생각하면 일개 상인인 그녀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고개를 숙이는 것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자벨은 지난 2년간 다닐렌츠의 성장에 가장 큰 역할을 해준 인물 중의 한 명.
그녀와 그녀의 상단이 열심히 몬스터 가죽을 팔아 만들어준 자금이 마중물 역할을 제대로 해주었기에 지금의 다닐렌츠 상단이 있을 수 있었다.
뭐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였다고는 하나 어쨌든 고마운 건 사실이었고, 그렇기에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전혀 꺼리지 않았다.
하지만, 내 인사를 받는 이자벨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고, 공자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고개를 숙이시다니... 이러지 마십시오. 저는 그럴 자격이 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니요, 상단주님은 그럴 자격이 충분히 됩니다. 보크 상단이 우리 상단... 아니지, 우리 다닐렌츠 전체에 가져다준 이익이 얼마입니까? 그걸 생각하면 이까짓 인사 정도는 몇 번이고 드릴 수 있습니다.”
“... 가, 감사합니다.”
빈말이 아니라, 이자벨은 정말로 감격한 얼굴이었다.
그래, 분위기 좋고.
이 기세를 몰아서 슬슬 하려던 얘기를 꺼내봐야겠다.
“상단주님, 요즘 보크 상단의 사업은 어떠십니까?”
“사업 말입니까? 어... 잘 되고 있습니다.”
나의 질문에 웃는 낯으로 대답하는 이자벨.
하지만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의 눈빛에 스쳐 지나간 걱정과 당혹감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이 아니어도, 원작의 내용을 알고 있는 나는 지금쯤 그녀의 상단에 문제 생겼을 거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 보크 상단이 주력으로 밀던 몬스터 가죽의 가격이 공급 과잉으로 떨어지고, 그 외에 보크 상단에서 자체적으로 물건을 구해다 파는 것들의 수익이 신통치 않기 때문이지.’
반면, 우리 다닐렌츠 상단의 운영 상황은 가파르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기록적인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었다.
보크 상단으로 납품하는 몬스터 가죽을 제외하고 그 외 다닐렌츠에서 생산되는 모든 물품의 판매가 원활하게 진행 중이었던 것.
키르헨 주변 들판에서 수확한 밀과 보리, 목재와 약초 등의 임산물, 그리고 북부 나움가르트 광산에서 생산된 소금까지.
그 모든 것들을 우리 상단에서 직접 개척한 독자적 판로를 통해 왕국 각지로 유통했다.
내가 직접 하려고 했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했을 일.
하지만 나에겐 파스칼이 있었고, 그에게 상단 운영에 대한 전권을 쥐여 주는 것으로 그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래, 바로 이 맛에 S급 인재 긁어모으는 거 아니겠어?
“아, 그래요? 그거 정말 다행이군요. 제가 들은 게 잘못된 소문이었나 봅니다. 하하하!”
“어떤 얘길 들으셨길래...?”
“제가, 요즘 보크 상단에 대해서 좋지 못한 소문을 좀 들었거든요.”
“어떤 소문을...?”
“몬스터 가죽의 시장 가격이 많이 하락했다는 건 우리 쪽에서 공급하는 물품이니, 저희도 잘 아는 얘기고... 가죽 말고도 보크 상단이 주로 취급하는 품목인 밀과 보리의 경우 루테니아의 작년 작황이 좋지 않아 물량 자체를 구하기 어려워졌다고 들었습니다. 거기에 콜티츠 놈들이 루테니아의 다른 상단들과 손잡고 반(反) 보크 상단 연합 전선을 꾸려 조직적으로 방해한다는 얘기도 있고...”
“...!”
“그래서 많이 걱정했는데, 상단주님이 아무 문제 없다고 하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제가 잘못 들었나 보네요. 역시, 뜬 소문은 믿는 게 아닌가 봅니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이자벨의 반응을 살폈다.
떨리는 눈동자, 잠깐 사이에 바짝 마른 입술, 그리고 거칠어지는 숨소리까지.
초조하겠지.
자기가 말하지도 않은 보크 상단의 문제점들을 내가 훤히 들여다보듯 하나씩 들춰냈으니 말이다.
자, 과연 그녀는 여기서 어떻게 나올까?
그냥 끝까지 아무 문제 없는 척 자존심을 세울까, 아니면 솔직하게 자신의 상황을 밝히고 도움을 구할까?
잘게 떨리는 그녀의 두 눈을 주시하며, 내가 입을 열었다.
“이런, 제가 손님 모시고 너무 일 얘기만 했던 것 같습니다. 차라도 좀 내어 드렸어야 하는데...”
“...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공자님.”
“말이 나온 김에 자리를 옮기시죠? 마침 점심 먹을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식사를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 공자님이 하신 말씀이 다 맞습니다.”
마침내, 이자벨이 백기를 들어 올렸다.
“예? 뭐라고요?”
“공자님께서 방금 하신 말씀, 저희 상단의 문제점... 그거 다 맞습니다. 소문이 아닌 사실입니다.”
보크 상단의 이야기가 나온 후부터 옅게 떨리던 이자벨의 눈빛이 안정을 찾는다.
약점을 감추지 않고, 무작정 자존심을 지키려 들지 않으며,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태도.
좋다.
아주 마음에 드는, 좋은 태도다.
그 후 한참 동안 이자벨은 현재 보크 상단이 처한 상황에 대해 솔직하게 설명해주었다.
“... 해서, 염치없게도 공자님과 다닐렌츠 상단 측에 도움을 요청드립니다.”
“흐음, 자선 사업엔 별 취미가 없는데...”
일단은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런 내 반응을 예상했는지, 이자벨은 당황하지 않고 다음 말을 내놓았다.
“당연히, 대가 없는 호의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장사꾼의 사전에 대가 없는 호의란 들어 있지 않으니까요. 거래를 제안 드리겠습니다.”
“거래라...”
“다닐렌츠 상단이 저희에게 지원을 해주신다면, 그 대가로 충분히 만족하실만한 조건를 내놓겠습니다. 그게 뭐든지, 저희가 열심히 준비해보겠습니다.”
기다리던 대답이 나왔다.
그럼 지체할 필요가 없지.
“만족할 만한 조건이라, 하나가 있긴한데...”
“말씀해주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자세를 바로 하고 두 손을 꼭 모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둔 모습.
그 모습은 지금 이자벨이 얼마나 이 협상에 진심인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보크 상단이 현재의 위기를 잘 버텨낼 수 있도록 각 방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대신...”
“...?”
“보크 상단의 모든 직원들과 함께, 우리 다닐렌츠 상단의 깃발 아래로 들어오십시오. 그리고...”
“자, 잠시만요! 공자님 그 말씀은 지금...!”
“아직 제 말 안 끝났습니다. 끝까지 들으세요.”
당황한 이자벨의 말을 끊으며, 나는 그녀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던졌다.
“만약 우리 다닐렌츠 상단의 깃발 아래로 보크 상단이 들어온다면... 이자벨 상단주님께 통합된 두 상단의 수장 자리를 약속드리겠습니다. 이곳 키르헨으로 건너와 우리 다닐렌츠를 위해 일해주십시오.”
“...?!”
“이것이 바로 다닐렌츠의 차기 영주로서, 당신과 당신의 상단에게 드리는 저의 제안입니다.”
***
다시, 현재_
“근데, 좀 섭섭하지 않으세요?”
뜬금없는 내 말에, 파스칼이 흘러내린 금테 안경을 손끝으로 천천히 밀어 올리며 대답한다.
“뭐가 말입니까?”
“저쪽에서 제가 한 제안을 받아들이면, 파스칼은 졸지에 상단장 자리 뺏기게 되는 거잖아요?”
“아, 그거야 뭐...”
내 질문을 들은 파스칼이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짓는다.
“저 백수 되면 공자님께서 어련히 좋은 일자리를 구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 제가 알기론 다닐렌츠 영주 가신단 중에 재무관 자리가 비어 있는 것으로 아는데...?”
“하, 하하! 하하하하!”
능글맞은 파스칼의 대답을 듣고 나는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영리한 사람, 내가 따로 말하지 않았음에도 내 머릿속 계획을 짐작하고 있다.
“후, 파스칼 덕분에 당분간 자리를 비워도 안심이겠군요. 혹시 제가 없는 동안 이자벨에게 연락이 오면 계획대로 진행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공자님도 몸조심하십시오.”
“그깟 것들 상대하는데 몸조심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긴 한데... 아무튼,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내가 애정과 믿음을 담은 말로 파스칼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끼이익-
“공자님, 준비가 다 됐습니다. 무기와 갑옷, 다 챙겨뒀습니다.”
“그래? 나가자.”
“예.”
나를 데리러 온 호위 기사 아드리안과 함께,
우리는 다닐렌츠 영지의 남부, 카르셀로 향했다.
< 새로운 시대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