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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93화 (89/197)

< 다닐렌츠 남부 평정전 (1) >

다각, 다각...

며칠 전 키르헨을 빠져나온 나는 현재 다닐렌츠 남부 지역 최대의 도시, 카르셀로 향하는 길 위에 있었다.

키르헨 주변의 도로들, 특히 동쪽 루테니아로 가는 우리 다닐렌츠 상단의 주요 무역로의 경우엔 내가 신경을 많이 써서 정비한지라 아주 깔끔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도로는 아직 손을 대지 않아서인지, 길이 고르지 않고 돌과 자갈이 많아 걷기에 불편했다.

그러나, 그런 불편한 길을 걸어가면서도 마음만은 푸근했다.

아마도 이 길을 함께 하는 사람들 때문이겠지.

“이렇게 셋이서 움직이니, 예전에 용병대 시절 생각나고 좋습니다, 공자님.”

“그러게요, 옛날 생각나네.”

나에게 깍듯한 존대어를 써가며 옛일을 추억하는 사나이.

겔베르트.

아니, 이제는 다닐렌츠의 기사 ‘겔베르트 로이터(Gelwert Reuter)’ 경이라고 불러야겠지.

처음 그가 나에게 존댓말을 썼을 땐 어색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농담으로라도 우리끼리 있을 땐 말 편히 해라, 따위의 말은 꺼내지 않았다.

피를 나누지 않았을 뿐, 친형제 혹은 부자와도 같았던 우리 두 사람.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시간을 과거에 남겨두고, 영주와 기사라는 지엄한 군신(君臣)의 관계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도 알고, 나도 알았다.

하지만...

“그나저나, 처음엔 되게 어색했는데 계속 듣다 보니 적응되는데요?”

“뭐가 말입니까?”

“겔베르트... 아니, 로이터 경이 나한테 존댓말 쓰는 거요.”

“크흠! 그거야, 뭐... 봉신으로서 받들어 모시는 주군에 대한 당연한 예의 아니겠습니까.”

“어, 아직 주군 아닌데? 내가 국왕 폐하의 재가를 받아서 정식으로 작위를 승계하고, 돌아가신 영주님의 권한을 물려받아야 진짜 주군인 거죠. 지금은 그냥 공자님?”

“아이씨, 그럼 뭐? 다시 예전처럼 반말 쓸까? 이렇게?”

“어허이, 로이터 경! 주군과 봉신 간에 지엄한 예의범절이 존재하거늘, 어찌 저잣거리의 무뢰배들처럼 함부로 말을 놓을 수 있습니까?”

“이봐, 이봐! 결국 이럴 거면서... 내가 이꼴 보기 싫어서 애초부터 존댓말을 쓰는 거지... 에이!”

비록 우리의 관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바뀌었다지만, 서로를 가족처럼 여기며 믿고, 의지하고, 장난치는(?) 마음만은 그대로였다.

“에이? 지금 에이라고 한 거요, 로이터 경?”

“아닙니다, 공자께서 잘못 들으신 게지요.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허... 내 분명 나에게 불손한 언행을 한 것을 똑똑히 이 귀로 들었는데?”

“그 귀가 문제인 거 아니겠습니까?”

“어허! 거듭 무엄하오, 로이터 경!”

어린 애들처럼 유치하게 장난치는 우리 두 사람의 모습을 본 아드리안이 옆에서 배를 잡고 웃는다.

“하하하하! 아휴, 두 분 다 장난 그만하십시오. 누가 들을까 무섭습니다.”

참, 아드리안 이 녀석도 기사에 서임되며 성(姓)이 생겼다.

다닐렌츠의 기사, 아드리안 쉬라흐(Adrian Schirach).

리트베르크의 주도, 리트렌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가난뱅이 소년이 자신의 성을 지닌 기사가 되다니.

짜식, 엄청 출세했네.

“공자님, 이제 슬슬 해가 지고 있으니 밤을 보낼 곳을 찾아봐야겠습니다.”

“어, 그래. 그렇게 하자.”

“예, 제가 먼저 가서 주변에 민가가 있는지 살피겠습니다. 없으면 적당한 노숙 장소를 알아보지요.”

“수고해라, 아드리안... 아니.”

나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아드리안이 너무나 좋아하는 그 말을 꺼냈다.

“부탁하오, 쉬라흐 경. 하하하!”

***

같은 시각,

다닐렌츠의 주도, 키르헨_

“... 거듭 말했다시피, 이번 원정은 기동성이 생명이야. 공자님과 약속한 기일, 정해진 장소에 정확하게 우리의 병력이 도착해야 해. 알겠나?”

다닐렌츠의 군무관, 발터 브라운이 굳은 표정으로 거듭 확인하듯 말한다.

“예. 말씀해주신 내용, 명심하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군무관님!”

발터의 앞에 서 있는 건장한 체구의 사내, 다닐렌츠의 기사 마틴 페스텔이 상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믿음직스럽게 대답한다.

“자네가 지휘할 병력은 총 백오십. 기존 병력 오십에, 이번에 훈련을 마친 신병 백을 더한 숫자지. 경험이 없는 만큼 신병들은 이동 속도가 떨어질 테니, 베테랑들을 병력 중간중간 잘 배치해서 전체적인 행군 속도를 높여야 해. 잊지 말도록.”

“명심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키르헨 용병 길드를 통해 고용한 용병 오십을 이번 원정에 함께 투입하기로 했어.”

“오, 그렇습니까?”

키르헨 용병 길드에서 지원 병력을 동원할 것이라는 발터의 말에 마틴의 얼굴이 밝아진다.

사실, 전쟁터의 용병이란 부족한 머릿수를 채워주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닐렌츠의 주도, 키르헨의 용병들은 어지간한 영지 정예병 못지않은 전투력을 지닌 이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키르헨의 용병들은 지난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도시 주변에 우글거리던 몬스터들과 도적놈들을 매일 같이 때려잡으며 무수히 많은 실전 경험을 쌓은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실력만 좋은 것이 아니었다.

같은 기간 겔베르트가 키르헨 용병 길드장으로 재임하며 길드 소속 인원들의 기강을 ‘빡세게’ 잡은 덕분에 그들은 용병답지 않은 엄정한 군기 또한 지니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마틴의 입장에선 이제 갓 영지군이 된 신병들보다는 용병들의 합류가 더욱 기꺼울 수밖에 없었던 거다.

“용병들을 자네가 직접 지휘할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용병들을 지휘하는 이가 우리에게 꽤 협조적일 테니, 문제는 없겠지.”

“음? 지휘하는 이로 누가 오길래 그런 말씀을... 혹시, 엔리케입니까?”

“아, 맞네. 자네 엔리케 그 친구랑 친했지?”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말하는 발터.

그리고, 마틴은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 친구, 저랑 나이도 같고 여러모로 성격이 잘 맞아서...”

“그래도 용병이랑 기사랑 그렇게 친해지는 경우가 흔치는 않은데... 자네도 참 성격 특이해.”

“에이, 그런 게 어딨습니까? 다 같이 칼밥 먹고 사는 직업인데... 하하!”

기사로서의 품위 따위는 내다 버린 듯한 마틴의 대답에 상관인 발터는 잠시 아찔한 기분을 느낀다.

‘그래, 마틴 이놈이 원래 이런 녀석이었지’, 라는 표정과 함께였다.

“... 그래, 뭐. 두 사람이 친분이 돈독하다고 하니 원정 중에 시비가 생길 일은 없겠군. 아무튼, 내일 해가 뜨면 바로 출병(出兵)이야.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나가봐.”

그렇게 마틴이 방에서 나간 뒤, 홀로 남은 발터.

멋들어진 특유의 콧수염을 몇 차례 쓸어내리며, 일주일 전 데미언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키르헨에서 영지군이 움직였다는 소문이 퍼지면 테오릭은 분명 대비를 할 겁니다. 자신을 찾지 못하게 어디론가 도망을 갈 수도 있고, 아니면 사방으로 돈을 뿌려 우리를 상대할 병력을 끌어모을 수도 있죠.’

‘음...’

‘제가 생각하는 가장 나쁜 경우는 테오릭이 반란을 일으켜 시장과 그 외 공무를 담당하는 직원들을 볼모로 잡고 경비대 병력이나 도시를 방위하는 영지군 병력을 흡수해 시내에서 농성을 벌이는 것입니다.’

‘... 상상만 해도 최악이군요. 혹시, 공자께선 그에 대한 복안이 있으신 겁니까?’

‘믿을만한 이들 몇을 추려 제가 먼저 카르셀로 가겠습니다. 가서 적당한 기회를 잡을 수 있다면 테오릭을 제거해 버리고, 그게 여의치 않다면 도시 내의 병력을 먼저 장악해서 놈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적진 한복판으로 들어가 암살 작전을 펴겠다는 것.

듣기만 해도 위험천만한 계획이었다.

더욱이 그 계획을 수행하는 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데미언이었으니, 발터의 입장에선 더더욱 승인해서는 안 되는 계획이다.

이제 데미언은 일개 용병도, 물건을 만들어 파는 상단의 주인도 아니었다.

그는 발터의 새로운 주군(主君)이자 얼마 후면 국왕의 재가를 받아 정식으로 이 땅 다닐렌츠의 영주가 될 사람.

즉, 다닐렌츠 전체에서 가장 존귀한 몸이란 뜻이었다.

그런 이가 달랑 몇 명의 수행원만을 데리고 위험천만한 일을 하러 가겠다는데, 가신의 입장에서 냉큼 그렇게 하시라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알겠습니다. 공자님,’

발터는, 데미언의 계획을 허락했다.

‘... 엄밀히 말하면 허락한 것이 아니고 그저 동의한 것이지.’

애초에 발터는 ‘주군’ 데미언의 명을 따르는 ‘가신’의 입장이니, 허락하고 말고 할 권한이 없다.

다만, 데미언의 계획에 반대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발터는 그리하지 않았다.

주군이기 이전에 검사(劍士)로서의 데미언의 실력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한낱 도적놈들과 용병들이 판치는 카르셀에 그분의 검을 꺾을 수 있을 만한 무언가가 존재할 리 없다.’

언젠가, 발터는 데미언과 검을 겨뤄볼 기회가 있었다.

날을 세우지 않았을 뿐 진검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연습용 철검을 들고 승부를 겨룬 그 날의 대련.

그리고 그 대련에서, 발터는 무참하게 패배했다.

‘엇, 하는 순간 바닥에 쓰러져 있었지...’

너무 어이없었던 패배라, 데미언에게 기회를 청하여 서너 번을 더 겨루어보았지만 결국 무릎을 꿇는 건 발터 자신이었다.

까마득한 사관학교 생도 시절. 교수의 입장에서 발터 자신에게 검을 가르쳤던 옛 스승 데론 베르켈, 키르헨의 모든 용병을 평정하고 이제는 기사의 신분이 된 겔베르트 정도를 제외하면 이 다닐렌츠 안에서 검으로 자신보다 나은 사람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검사로서의 데미언은, 그보다 나은 수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세계에 도달한 존재였다.

‘말 그대로 격(格)이 달랐지. 허, 사람이 그런 속도를 낼 수 있다니...’

땅바닥에 쓰러져 하늘에 둥실 떠가는 흰 구름을 바라보던 그 순간, 발터는 그제야 다닐렌츠 상단의 직원들과 용병들이 떠들던 데미언에 대한 찬사가 과장된 소문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한 칼질에 오크 열 마리의 목을 날리고, 트롤을 홀로 잡아내셨다는 게 거짓이 아니었구나...!’

그 날의 기억이 있었기에, 발터는 데미언의 계획에 찬성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손을 놓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데미언을 제외한다면, 아마도 다닐렌츠에서 가장 강할 것이 분명한 기사 겔베르트 로이터와 젊은 패기가 매서운 기사 아드리안 쉬라흐를 함께 보냈다.

여기에 영지군과 용병을 합쳐 이백 명에 이르는 넉넉한 병력을 기사 마틴에게 붙여주며 최대한 빨리 카르셀로 이동해 주군의 뒤를 받칠 것을 지시했다.

이 정도면 카릴베르크 가문의 이름이 지배하는 다닐렌츠 땅에서 감히 ‘왕’을 참칭한 그놈의 목을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이다.

‘공자님... 믿고 있겠습니다. 부디, 보중하소서!’

***

“사, 살려주... 끄악!”

푸화악!!!

깔끔하게 베인 머리통에 몸에서 분리되며 수풀 속으로 처박힌다.

촤악- 스르릉, 탁!

한 차례 손을 떨쳐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아드리안이 자신의 검을 다시 검집으로 돌려보낸다.

도시로 향하는 가도 옆 풀숲에서 튀어나와 일행을 습격했던 십여 명의 도적 떼가 몰살당하는 순간이었다.

“도시가 눈에 보일 만큼 가까운 곳인데, 이렇게 도적놈들이 많다니... 치안이 정말 개판이네.”

홀로 도적떼를 상대하는 아드리안의 모습을 무심한 눈빛으로 지켜보던 나의 감상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한 2년 전쯤의 키르헨 주변을 보는 것 같군요.”

“후우... 여기도 쓰레기들 싹 청소하려면 오래 걸리겠어. 몬스터들도 원체 많으니까 말이야.”

“그래도 한번 하셨던 일이니, 이번엔 좀 더 수월하지 않겠습니까?”

“뭐, 그것도 그건데... 이번엔 내가 안 할 거라서.”

“잉?”

데미언의 대답을 들은 겔베르트가 의아한 눈빛을 하며 그를 바라본다.

“뭐, 왜?”

“아니... 영주가 되실 분께서 이걸 하지 않으시면, 누가 합니까?”

“나는 키르헨에 있어야 하잖아. 거기에도 할 일이 많은데, 이 먼 곳까지 어떻게 나와 있나?”

“아, 그도 그렇군요.”

“적당한 사람을 시장으로 임명해야지. 쓰레기들 싹 쓸어내고, 도시의 충성도를 확고히 다져줄 만한 인물로.”

“... 다음 시장 될 양반은 엄청 고생하겠군요.”

나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겔베르트.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 툭 던지듯 말했다.

“힘들겠지만 잘 해봐, 겔베르트.”

“... 예, 열심히 잘... 예?”

“도둑놈들 때려잡고, 몬스터 쳐 죽이는 거, 그거 겔베르트가 전문 아냐? 키르헨에서도 잘 했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쉿, 할 일 많으니까 빨리 움직이자고. 아드리안, 가자!”

“예, 공자님. 푸흣-!”

망연자실한 표정이 된 겔베르트의 곁을 지나며, 그의 어깨를 툭 건드린 아드리안이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야, 차기 카르셀 시장님? 벼락 승진 축하드립니다. 조만간 크게 한턱 쏘세요.”

뒤이어, 넋이 나간 듯한 겔베르트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 그냥 다 때려치우고 텔마르크로 돌아가 버릴까?”

< 다닐렌츠 남부 평정전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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