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닐렌츠 남부 평정전 (2) >
카르셀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더 번화한 도시였다.
뭐 그렇다고 해서 왕도 카를리온이나 쾨니히슈타인 수준의 대도시란 얘기는 아니었지만, 일단 거리에 보이는 사람의 수가 상당했다.
‘처음 도착했을 당시의 키르헨보다는 확실히 더 크네, 규모가.’
실제로 카르셀은 내가 발전시키기 전의 과거 키르헨보다 거주 인구가 더 많았고, 유동 인구는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은 도시였다.
“보시면 알겠지만, 술집에 도박장에 홍등가에... 유흥거리로 따지자면 주변 다른 영지 어디에도 이런 도시가 없습니다. 놀고 싶은 놈들은 다 이리로 모인다고 하더라고요.”
내 지시를 받고 한참 먼저 카르셀에 침투해 도시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던 아드리안이 앞장서서 우리를 이끌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카르셀에 원래 거주하는 주민들을 제외하고, 여기 오늘 외지인 놈들은 죄다 용병, 깡패, 창녀, 도박쟁이 같은 놈들뿐입니다.”
“어, 사람들 눈빛을 보니 그래 보이네.”
기본적으로 용병이나 깡패, 창녀, 도박쟁이 같은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과 눈빛이 다르다.
불량하고, 거칠고, 사납고... 사람마다 표현 방법은 다르겠지만, 여하간 고운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뭐, 나도 용병 출신이기에 제 얼굴에 침 뱉는 것 같긴 하지만 말이지.
“이 거리에도 테오릭과 그의 조직인 ‘밤의 형제단’이 운영하는 사업체가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곳이 도박장인데, 우선 거기부터 가보시죠.”
“도박장에 들러야 하는 이유는?”
나의 물음에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하는 아드리안이다.
“다른 곳은 몰라도 도박장의 경우엔 테오릭이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꼭 방문한답니다. 아무래도 제일 중요한 사업장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테오릭이 온다... 그럼, 가봐야겠네. 아드리안, 앞장서라.”
“예, 공자님.”
“크으, 도박장이라... 아, 나 도박 끊은 지 꽤 됐는데, 이거 오랜만에 실력발휘 좀 해 볼까?”
도박장에 간다는 말에 겔베르트가 손목을 까닥거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도박장 간다니까 아주 신이 난 표정이십니다, 로이터 경? 우리 지금 일하러 가는 겁니다, 놀러 가는 거 아니고.”
“어흠, 큼! 신이 나다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공자께서 잘못 보셨겠지요.”
“잘못 봤다? 그럼 또 내 눈이 잘못이네. 아이고, 내가 이 눈깔을 뽑아 버리고 새 눈깔을 사든지 해야지...”
“에헤이! 또 이러신다 또!”
***
겔베르트를 살살 약 올리며 천천히 걸어 도착한 카르셀의 도박장 앞.
“훠우... 엄청 큰데?”
겔베르트는 혀를 내두르며 눈앞에 보이는 건물의 규모에 놀라움을 표했다.
“그러게요, 업장 크기가 엄청난데?”
그의 말 그대로였다.
엄청나게 큰 규모의 건물이었다.
이건 뭐, 키르헨에 있는 영주 저택보다도 큰 거 같아 보이는데?
물론 키르헨에 있는 영주 저택이 다른 영지의 영주들이 머무는 성이나 저택보다 작은 편이긴 하다.
하지만 그걸 생각해도 눈앞의 도박장은 충분히 거대한 규모였다.
“이거 뭐야? 건물이 이거 뭐... 얼룩덜룩하네?”
겔베르트가 도박장 건물을 두고 얼룩덜룩이라 표현한 이유.
어느 곳은 벽돌을 쌓아 만들어졌고, 어느 곳은 목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드리안에게서 나왔다.
“원래는 도박장이 아니고 다른 목적으로 만들던 건물이었답니다. 성당을 올리려고 했는데, 이게 중간에 돈이 모자라서 짓다가 말았대요.”
“어허, 그런 안타까운 일이... 그래서?”
“그렇게 몇 년간 방치되어 있었는데, 도박장으로 쓸 장소를 찾던 테오릭이 이 짓다가 만 건물을 사들여서 도박장으로 꾸몄고... 그 이후에 장사가 너무 잘 되니까 확장을 한 모양입니다.”
“아, 그래서 어느 곳은 벽돌이고 어디는 목재로 만든 거구나?”
“예, 그렇죠.”
이제야 건물의 괴상한 생김새가 이해가 된다.
그나저나 추가로 확장 공사를 해서 규모를 키울 정도면 정말 장사가 잘 되나 본데?
“흐음...”
“공자님, 뭘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음, 생각할 게 좀 있어요. 자, 들어가죠.”
***
“아이, 씨발! 이번에도 개패잖아!”
“푸하하하! 땄다! 땄어!”
“후우... 야! 진짜 내가 돈 가져올 테니까, 다들 가지 말고 기다려!”
“아니... 이거 맞아? 부, 분명히 내가 이기는 판이었는데?”
“아이, 딱 한 판만 더 하자, 딱 한 판만! 응? 부탁할게!”
“여기 도박하는 사람 어디 갔나? 언제까지 기다려? 날 새겠네!”
“야, 너! 술 한 병만 더 가져와라. 여기 돈 받아가고!”
실로 장관이었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넓어 보이는 도박장 내부.
한데 그 큰 공간에 빈자리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환희, 비명, 탄식...
도박에 미친 인간들이 뿜어내는 뜨거운 열기가 가득 채워진 공간.
덥고 습한 공기와 퀴퀴한 냄새로 꽉 찬 그곳에, 마침내 발을 디뎠다.
“... 미친, 규모 진짜 엄청나네.”
혀를 내두른 겔베르트의 감탄에 동의한다는 듯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저도 처음 여기 왔을 때 엄청 놀랐습니다. 도박장을 처음 와본 것은 아닌데... 확실히 여기는 남다르다는 느낌이 오더라고요.”
“엥? 처음은 아니다? 아드리안, 너 살던 리트렌에도 도박장이 있었냐? 거기를 갔었어?”
겔베르트의 질문을 받은 아드리안이 어렸을 적 기억을 끄집어내어 대답한다.
“예, 있었습니다. 근데 이렇게 큰 규모는 당연히 아니었고, 그냥 테이블 대여섯 개 깔아놓은 정도의 작은 규모였죠. 제가 도박을 하러 간 건 아니고, 빈민가 살던 시절에 술 심부름하느라 몇 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어우, 우리 아드리안 열심히 살았네.”
“예, 뭐... 가진 것 없이 태어났으니 열심히 살아야죠. 덕분에 지금 출세하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그래, 고생 많았다. 아주 자랑스러워!”
한편, 나는 눈 앞에 펼쳐진 도박장의 풍경을 바라보며 꽤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 이거, 완전 제대로잖아?’
안으로 들어와 확인한 도박장의 모습은, 기대 이상이었다.
마구잡이로 판을 깔아놓고 아무렇게나 장사를 하는 게 아니라, 나름의 체계와 질서가 있다.
이 업장을 테오릭이 만들었다고?
‘... 원작 소설에선 그냥 힘만 센 깡패 새끼였는데? 이런 재주가 있다고?’
그렇게, 내가 도박장의 모습을 보며 의아함을 품던 그 순간...
콰앙!!!
“야이 씨... 이거 사기 아냐? 이 씨발 놈들이 누굴 상대로 사기를 치려고... 여기 책임자 어딨어? 책임자 나오라 그... 크억!”
도박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난동을 피우던 취객 하나가 도박장 경호원들에게 제압당해 밖으로 끌려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술 먹고 행패 부리는 놈 갖다 치우는 일이야 다른 곳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그 후의 대처가 나를 놀라게 했다.
“본의 아니게 잠시 소란이 있었습니다. 손님들께 불쾌감을 드려 죄송합니다. 대신 사죄의 의미로 술 한 잔씩 올리겠습니다.”
깔끔하게 옷을 빼입은 사내 한 명이 나와 방금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던 이가 있던 테이블에 고개 숙여 사과 말을 전하고 술을 돌리는 것이 아닌가?
‘... 뭐야, 저 시대를 뛰어넘는 서비스 수준은?’
지난 생애 마카오나 라스베이거스의 고급 카지노 업장에서나 볼법한 광경을 이 퀴퀴한 냄새 나는 판타지 세상의 도박장에서 보게 될 줄이야...
“공자님, 뭘 그렇게 신기한 듯이 보십니까?”
“저기, 옷 깔끔하게 차려입은 저 직원을 보고 있었어.”
“누구... 아, 저 사람.”
내가 보고 있던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아드리안이 알은 체를 했다.
“뭐야, 누군지 알아?”
“예, 압니다. 저 사람, 꽤 유명하더라고요.”
“누군데?”
“이 도박장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직원들 하는 말을 들어보니 마스터라고 부르더군요. 페드로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인데... 장사 수완이 대단하답니다. 이 도박장의 규모가 이렇게 커진 것도, 저 사내의 공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 흠...”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긴 나를 보던 아드리안이 나직한 목소리로 묻는다.
“페드로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볼까요?”
역시 아드리안, 이 눈치 빠른 녀석.
“그래, 부탁 좀 하자.”
“알겠습니다.”
“나랑 겔베르트는 여기서 분위기 좀 볼 테니까, 넌 따로 움직여. 이따 저녁에 숙소에서 보자. 항상 몸조심하고.”
“예, 공자님. 저녁에 뵙겠습니다.”
그렇게 아드리안에게 임무를 주어 떠나보낸 뒤, 나는 겔베르트의 어깨에 손을 두르며 말했다.
“자, 그럼... 우리는 지금부터 좀 유명해져 봅시다.”
“유명? 갑자기 무슨 말씀을... 아!”
뒤늦게 내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겔베르트가 씨익, 미소를 짓는다.
“돈 따자는 얘기시군요? 좋습니다, 공자님께 왕년에 날리던 도박사의 실력을 한 번 보여드리죠. 자, 가시죠!”
***
자신이 왕년에 도박장에서 꽤 날리던 실력이었다며 호언장담했던 겔베르트.
하지만 테이블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수중의 돈을 다 잃어버렸고, 결국 개털(?)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서고야 말았다.
“쓰읍, 이상하다. 분명 잘 했었는데... 패가 되게 안 붙네?”
“어휴, 왕년에 잘 나가던 것만 생각하시면 어떡해요? 지나간 세월이 얼마인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옛날에 하던 가락이 있는데...”
“세월 앞에 장사 없는 겁니다. 도박을 검술이라고 생각해봐요, 몇 년 동안 연습 한 번 안 했던 사람이 갑자기 검 잡는다고 예전 실력이 나오겠어요?”
“쓰읍, 그렇게 생각하니 또 그렇군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 겔베르트였다.
“이번엔 제가 해볼게요.”
“공자님께서요?”
자신이 일어난 자리에 내가 털썩 엉덩이 대고 앉자, 겔베르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거, 하실 줄은 아시죠?”
“당연히 알죠. 이거 예전에 저한테 가르쳐 주셨던 거 기억 안 나세요?”
“아, 맞다. 그랬었죠.”
내가 겔베르트를 대장이라 부르고 그가 나를 막내라고 부르던 시절, 그에게 카드 게임을 배운 적이 있었다.
사실, 게임의 룰 자체가 내가 아는 카드 게임들과 거의 같았기에 굳이 배울 것도 없었지만, 그때는 잘 모르는 척 분위기를 맞춰 줬었다.
한 마디로 ‘접대 카드’를 친 거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번엔 상대방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 실력을 온전히 다 발휘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야, 완전 땅 짚고 헤엄치기네.’
거듭 흡수한 히든 피스의 영향으로 인간의 기준을 까마득히 초월해버린 나의 시력(視力)은, 다른 이들의 눈동자에 반사된 카드의 모양을 읽어낼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즉, 상대방의 패를 다 읽고 카드를 친다는 얘기.
이러면, 질 수가 없지.
“자아... 어디, 재미있게 놀아봅시다.”
해맑은 웃음을 피워올리며, 나는 도박장 직원이 나누어준 내 카드 패를 집어 올렸다.
***
“마스터, 그놈이 또 왔습니다.”
부하의 보고를 들은 카르셀 도박장의 마스터, 페드로가 인상을 찌푸린다.
“또?”
“예. 이제 막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이런 시발...”
짜증 난다는 듯 머리를 쓸어넘긴 페드로가 직원에게 묻는다.
“그 새끼가 지금까지 따간 돈이 얼마야?”
“지난 3일 동안 모두 칠백사십 골드입니다.”
“칠백사십이라...”
금액을 듣고 나니 더욱 눈앞이 아찔하다.
대충 계산해봐도 지난 3일간 도박장에서 가져갔어야 할 수익 그 이상을 저 정체 모를 금발 머리 놈이 챙겨간 것이다.
‘테오릭 이 새끼가 알면 가만있지 않을텐데...’
매주 금요일마다 도박장에 찾아와 돈을 챙겨가는 테오릭의 얼굴을 생각하니, 가슴 한켠이 섬뜩해진다.
벌써 일주일 수익의 절반가량이 날아가 버린 상황.
이 정도면 싫은 소리 좀 듣는 정도로는 끝날 일이 아니었다.
“... 저 새끼, 살살 달래서 내 방으로 올려보네. 도박장 마스터가 좋은 술 한잔 대접하고 싶다고 말해서.”
“예, 알겠습니다.”
대체 어디서 온 뭐 하는 놈인지, 술 한 잔 따라주며 알아볼 참이다.
‘만약 별 볼 일 없는 놈이라면...’
그렇다면,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깔끔하게 놈의 모가지 따 버리고, 잃었던 돈을 다시 챙긴다.
만약에 어디 대단한 귀족 가문의 자식이라면?
그럼 그거대로 좋은 일이다.
테오릭에게 내밀 그럴듯한 변명이 생기는 것이었으니까.
“시발, 내가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되어서... 후우...”
테오릭에게 목줄을 잡혀 개처럼 부려지는 자신의 신세가 서러워 한숨을 내쉬는 페드로였다.
< 다닐렌츠 남부 평정전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