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95화 (91/197)

< 다닐렌츠 남부 평정전 (3) >

“아이고, 또 이겼네?”

내가 앉은 자리 앞에 구릿빛 육각 모양의 금속패가 수북이 쌓인다.

이곳 도박장에서 돈 대신 쓰이는, 일종의 ‘카지노 칩’ 같은 물건이다.

재질은 구리에 주석을 섞어 만든 청동(Bronze).

이 청동패 하나가 이곳 도박장에선 5골드의 가치를 지닌다.

즉, 지난 생의 화폐 가치로 따진다면, 하나당 5백만 원이라는 얘기다.

“아니, 어떻게...”

오늘만 해도 벌써 세 번째로 교체된 우리 테이블의 도박장 직원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본다.

이곳 도박장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일해온 그였지만, 이렇게 ‘단기간에’, 그것도 ‘한 사람에게’ 이토록 많은 돈을 잃어본 건 처음일 것이다.

“참나, 이거 판이 너무 쉬우면 그건 그거대로 재미가 없는데... 설렁설렁 봐주면서 하려고 해도 상대가 너무 형편이 없네. 에이!”

지난 며칠간, 나는 의도적으로 무례한 부잣집 도련님 행세를 했다.

싸가지 없는 말투에 싸가지 없는 행동.

그야말로 눈앞에 사람이 없는 듯한, 안하무인의 자세였다.

“뭘 멍청하게 서 있어? 새끼야, 빨리 패 안 돌려?”

“예? 어... 예.”

그렇게, 내 기세에 완전히 짓눌린 얼굴을 한 직원이 떨리는 손으로 새로운 판을 위해 카드를 섞기 시작하는데...

“저, 손님.”

“...?”

갑자기 뒤쪽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

슬쩍 고개를 돌려 확인해보니, 도박장 직원 한 사람이 내게 고개를 숙인다.

인상이 험하고, 한 덩치 하는 걸 보니 궂은일을 처리하는 쪽인 듯싶다.

“뭐야?”

나를 대신해 나선 겔베르트가 그에게 용건을 묻는다.

레벨 55, 숨기려고 노력해도 결코 숨길 수 없는 강자(强者)의 기운이 느껴진 것일까?

겔베르트의 시선을 받은 도박장 직원이 조금 주눅 든 표정으로 대답한다.

“아, 저... 저희 마스터께서 손님을 뵙고자 청하셨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잠깐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을지...”

“마스터?”

도박장 직원의 말을 들은 나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 걸렸어!’

지난 사흘 내내 도박장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줄기차게 돈을 따낸 보람이 있다.

하지만 냉큼 따라가면 없어 보이는 법!

“에이, 지금 막 기세 탔는데... 여기서 일어서면 난 뭐가 되나? 내가 딸 돈은 누가 보상해주는 건데?”

아직 패를 돌리지도 않았는데, 마치 다음 판에 걸린 돈도 당연히 내 것이라는 듯한 태도.

실로 뻔뻔한 모습이었지만, 지난 사흘 내내 도박장에서 보여준 나의 압도적인 실력을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기에 그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다.

“죄송합니다. 그, 하지만 저희 마스터께서...”

“아이씨, 마스터가 뭐 돼? 그래 봤자 한낱 도박장 주인 나부랭이가 누굴 오라 가라야? 낯짝도 안 비치고 건방지게...”

드르륵!

의자를 뒤로 밀치며 벌떡 일어선 내가 나를 데려가려 찾아온 직원에게 다가섰다.

짜악!

“억-!”

내게 뺨을 맞은 직원의 고개가 옆으로 홱 소리가 나게 돌아가고, 살짝 휘청거린 직원이 겨우겨우 몸의 중심을 되찾는다.

‘... 이거 봐라?’

나는 그런 직원의 반응을 보고 흥미를 느꼈다.

혹시나 내 정체를 의심할까 싶어 완전히 힘을 빼고 뺨을 때렸다.

한데 그런 허술한 손찌검을 맞고도 직원은 엄청 센 한 방을 맞았다는 듯 턱을 돌리고,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하, 이 새끼들... 재밌네.’

나는 그런 직원의 행동이 나 같은 ‘진상 고객’을 상대하기 위해 미리 준비된 반응이라는 것을 대번에 눈치챘다.

그 마스터라는 놈에 대한 나의 흥미도가 조금 더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야, 앞장서라. 그 마스터라는 놈, 가서 뭔 얘기 하는지 들어나 보자.”

“예, 제가 모시겠습니다.”

***

“죄송하지만, 경호원께선 옆방에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도박장 직원의 뒤를 따라 도착한 마스터의 방.

문을 열기 전, 우리를 안내해온 직원이 나와 함께 방으로 들어가려는 겔베르트를 제지하며 말했다.

“뭐? 아니, 씨... 뭔 개소리야 그게? 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우리 도련님 혼자...”

“난 괜찮아. 혼자 들어갈게.”

“하지만, 도련님!”

자신의 역할에 깊게 몰입한 겔베르트가 절정의 연기력을 선보이고 있다.

어이구, 누가 보면 진짜 부잣집 도련님 모시는 경호원인줄 알겠네.

‘... 뭐, 따지고 보면 차기 영주님 모시는 기사의 신분이니, 그게 그건가?’

아무튼, 나는 강하게 만류하는 겔베르트의 가슴팍을 손을 툭 밀치며 시건방진 말투로 답했다.

“괜찮다니까? 그냥 옆방 가서 기다리고 있어. 이깟 도박꾼 놈들이 뭘 할 수 있다고... 야, 문 열어.”

“예, 손님.”

똑똑똑-

“마스터, 손님 모시고 왔습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실내가 보인다.

생각보다 넓은 방의 크기.

그 너른 공간에 고풍스러운 원목 책상이 하나 놓여있고, 그 옆으로 손님을 위한 접객용 의자와 테이블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아, 오셨습니까.”

방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며 책상에 일어서는 한 사내.

덩치는 크지 않았지만, 어쩐지 실제보다 훨씬 크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음...’

이유를 알았다.

눈빛 때문이었다.

상대를 꿰뚫어 보는 듯한 저 강렬한 눈빛!

뭔가 도박장을 운영하는 인간이라 그런가, 살짝 맛이 간(?) 눈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 눈빛이 살아있네.’

그렇다고 막 엄청 순수하고 맑은 눈빛이란 얘기는 아니다.

그보단 또렷하고 강렬한 눈빛 가운데 위험한 느낌이 풍긴다고나 할까.

그 눈빛이, 짧은 순간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는 게 느껴졌다.

그 시선 처리가 어지간한 사람은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빨랐는데...

이걸 어쩌나.

나는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거든.

‘눈깔 돌리는 거 다 보인다 이 새끼야.’

내가 걸친 옷과 신발, 허리춤에 매인 검을 살피며 있는 집 자식인지 아닌지를 살피는 것일 테지.

“안녕하십니까, 이곳 업장을 책임지고 있는 페드로라고 합니다.”

“어, 반갑네. 난 데릭 발만. 안할트의 유서 깊은 명문가, 발만 가의 둘째 아들이지.”

페드로가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며 미리 준비해두었던 가짜 이름을 댔다.

“발만 가(家)라...”

내 입에서 나온 가문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읊조린 페드로로 금세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 그러시군요. 이토록 훌륭한 카드 솜씨를 지니신 발만 가의 공자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뭐, 나도 영광이오. 이렇게 마스터의 초대를 받게 된 건 오랜만이라... 나쁜 기분은 아니군.”

“제가 직접 내려가서 모셔 왔어야 하는 건데, 급한 일이 있어서 이리 결례를 범했습니다. 자,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흠...”

일단은 놈이 권하는 대로 접객용 의자에 앉았다.

내가 오기 전 미리 가져다 둔 것인지, 테이블 위에 찻주전자와 간단한 과일들이 놓여있는 게 보였다.

“어떤 취향이신지 몰라서, 일단은 차를 준비를 해봤습니다. 며칠 동안 손님께서 저희 업장을 이용하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는데, 술을 전혀 안 하시더군요.”

“카드 칠 때 술 마시면 쓰나. 술 먹으면 집중력이 흐트러져서 안 돼.”

“오, 역시... 고수는 다르십니다.”

그렇게 페드로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멀리 사라졌던 누군가의 기운이 다시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똑똑똑-

“어, 들어와.”

끼이익, 문이 열리고 방 안으로 들어선 도박장 직원이 나에게 꾸벅 인사를 건넨 뒤 페드로에게 다가선다.

그리곤 페드로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인다.

하지만...

‘다 들린다, 이 새끼야.’

제 딴에는 절대 안 들릴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마음먹고 집중했을 때 나의 청력(聽力)은 멀리서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다.

하여간, 그 압도적인 청력을 이용해 엿들은 놈의 귓속말은...

‘... 안할트 영지에 발만이라는 이름을 가진 가문은 없습니다.’

당연히 없겠지.

내가 만들어낸 이름이니까.

재미있는 것은 그 얘기를 들은 페드로의 반응.

그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목소리로 부하에게 명령을 내렸다.

“알았다, 그럼... 준비한 대로 진행하라고 해.”

“... 알겠습니다.”

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방 밖으로 사라지는 부하.

그리고 잠시 후,

와장창! 콰당!!! 콰아앙!!!

[아악!]

[으아아악!]

[시발... 커흑!!!]

[이런 개... 악!]

문밖에서 들려오는 무자비한 소음과 비명들.

바로 페드로의 부하들이 옆방에 있는 나의 경호원, 겔베르트를 덮치는 소리였다.

‘어이구, 미친놈들... 차라리 몬스터 둥지에 가서 대가리를 들이밀어라.’

하지만, 겔베르트의 실력을 알고 있는 나에겐 저 소란의 결과가 빤히 보였다.

하지만 일단은 눈앞에 앉아 있는 놈의 장단을 맞춰줘야 했기에, 당황하는 얼굴로 문 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뭐야? 이, 이거... 무슨 소리야?”

“아, 당황할 거 없어. 가만히 앉아 있어.”

나의 당황한 모습을 보며 비릿한 웃음을 보이는 페드로.

이어 그는 바짝 앞으로 당겨 앉아 있던 자세를 바꿔 등받이에 깊이 몸을 기대고, 다리 꼬았다.

“야, 꼬맹아. 너희 집 어디에 있어?”

“뭐?”

“발만 가문인가 발가락 가문인가 하는 너희 집, 어디에 있냐고.”

“이, 이놈이 지금... 어디 감히!”

스르릉-

날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단검 하나를 허리춤에서 꺼내든 페드로가 그 칼날 끝을 나에게로 향하며 말한다.

“목소리 높이지 마, 이 사기꾼 새끼야. 아가리 찢어버리기 전에.”

“...!”

“안할트의 유서 깊은 명문가? 하, 어디서 새파랗게 어린 도박쟁이 새끼 주제에 씨알도 안 먹힐 구라를...”

“아니, 그걸 어떻게...”

“야, 됐고. 시간 없으니까 본론만 얘기하자. 네가 사흘 동안 따낸 돈, 그것만 얌전히 제자리에 갖다 놔. 그럼 네가 신분 사칭하고 사기 도박한 거, 그건 용서해 줄게.”

“사기 도박이라니! 난 정말 실력대로 친 거야!”

내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하자 페드로의 얼굴 가득 짜증이 떠오른다.

“하아... 하여간 뻔뻔한 새끼들. 꼭 말로 하면 안 듣고 맞아야 말을 듣지?”

“뭐, 뭐하려고...”

“뭐하긴 새끼야, 네 버르장머리 고쳐줄...”

바로 그 순간 똑똑, 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 들어와.”

당연히 문을 두드린 이가 자신의 부하라고 생각한 페드로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고, 곧 문이 열렸는데...

“... 정리 끝났습니다. 문밖에 있을 테니, 편하게 말씀 나누십시오.”

“뭣...?!”

열린 문틈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페드로의 부하가 아닌 다른 이였고, 나는 그제야 얼간이 같았던 표정을 풀고, 원래의 내 목소리를 되찾았다.

“수고했어요, 겔베르트.”

“별말씀을. 그럼...”

끼익, 철컥-

다시 문이 닫히고, 나는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파악하지 못한 페드로에게...

퍼어억-!!!

“크헉!”

시원한 발차기를 먹여주었다.

와장창!!!

붕 떠서 날아간 페드로의 몸이 자신의 책상 위 집기들을 때려 부수며 바닥으로 처박힌다.

“어흐윽... 크윽!”

바닥에서 꿈틀거리며 일어서려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옆구리를 걷어찼다.

꽤 아픈, 그러나 뼈가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세심하게 힘을 조절해 먹인 일격이었다.

“커어억!!! 꺽...”

순간적으로 숨이 막힌 페드로가 꺽꺽거리며 몸을 비틀었다.

이 새끼, 맷집이 왜 이렇게 약해?

“엄살이 심하네... 야, 너처럼 허약해도 ‘밤의 형제단’에서 받아주냐?”

“으으... 으...”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아니, 지금은 말하지 마. 일단 몇 대 더 맞고, 이따가 얘기하자.”

“어으, 어...”

퍼퍼퍽!!!

격렬하고 진솔한, 몸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 다닐렌츠 남부 평정전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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