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닐렌츠 남부 평정전 (4) >
“아, 그러고 보니 아직 내 소개를 안 했군.”
나를 상대로 감히 칼을 들이밀었던 페드로를 상대로 한창 정신 및 육체 교육(?)을 실시하다가, 문득 내 정체를 말해주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으, 어... 테, 테오리.. 기... 너를... 가만... 가만 두지... 아늘...”
내게 얻어터져 퉁퉁 부은 얼굴로 뭐라 중얼거리는 페드로.
뭐라고 하는 건지 잘 들리진 않지만, 대충 ‘테오릭이 널 가만두지 않을 거다’ 뭐 이런 말을 하는 거 아닐까?
어디, 내가 누군지 듣고도 그 소리가 나오나 두고 보자.
“내 이름은 데미언 카릴베르크다.”
“...?”
뭐 어쩌라는 표정이네.
아, 맞다. 이 새끼 지금 맞아서 정신이 없지.
그럼 조금 더 친절하게 설명해줘야지.
“얼마 전 돌아가신 카릴베르크 가문의 전대 가주이시자, 다닐렌츠의 온당한 지배자이신 구스타브 남작님의 양자(養子)로서 곧 그분의 작위와 영주 자리를 물려받을 사람이지.”
“...?!!!”
페드로의 눈이 점점 커진다.
“아니...”
이어 크게 벌어진 그의 입에서 멍청한 목소리가 새어 나오던 것도 잠시.
철퍼덕! 쿵!
그제야 나의 정체를 명확히 알게 된 페드로가 그 즉시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이마를 바닥에 처박았다.
“라, 라, 라폰테인의 페드로가 온당하신 다닐렌츠의 지배자, 영주님의 핏줄을 뵙습니다!!!”
“어, 그래. 이제 좀 마음에 드는 반응이 나오는구나.”
원래 내가 이렇게 신분에 목매는 사람이 아니다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 만큼 써먹을 수 있는 건 다 써먹어야 한다.
“페드로 라폰테인... 카르셀의 유서 깊은 상계 가문인 라폰테인 가(家)의 셋째 아들로, 어렸을 적부터 도박장을 들락거리는 기행 끝에 가주인 아버지의 눈 밖에 났다고 들었다. 맞나?”
“... 예, 예! 그렇습니다!”
나의 정체를 깨닫고 순한 양이 된 페드로.
조금은 어눌했던 발음도 명확하게 돌아오고, 아까 전과 비교해 훨씬 공손하고 협조적인 태도였다.
그렇지, 이렇게 나와야지.
똑똑한 놈이라 그런지 태세 전환이 아주 빠르다.
마음에 드네.
“아니... 아무리 가주의 눈 밖에 났다고 해도 자네는 카르셀을 대표하는 명문가의 자식 아닌가? 어쩌다 테오릭 같은 자, 아니, 그런 개새끼 밑에서 일하게 된 거지?”
“그, 그게...”
내 입에서 테오릭의 이름이 나오자 순간적으로 페드로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아직까지도 테오릭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는 듯한 모습.
그런 페드로에게, 나는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페드로 라폰테인.”
“예... 예, 공자님.”
“내가 왜 이곳에 왔을 것 같으냐?”
“예...?”
바르르 떨리는 페드로의 눈동자.
지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거겠지.
그의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 뜸 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나는 이곳에, 테오릭을 죽이러 왔다.”
“...!”
그 말을 하는 동시에, 나는 의도적으로 눈빛에 막대한 살기를 담아 페드로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있는 사내에게, 진짜 두려워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큽...!”
내게서 뿜어지는 살기를 느낀 페드로가 감히 더 버텨내지 못하고 다급하게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살기(殺氣)란 말 그대로 ‘상대를 죽이겠다는 의지’의 발현.
흉악한 몬스터들조차 겁을 먹고 피해버릴 정도의 농밀한 살기를 훈련받은 기사도 아닌 페드로가 버텨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다시 묻겠다, 페드로 라폰테인. 어째서 테오릭 밑에서 일하고 있는 거지?”
대답 내용에 따라 그의 생사가 갈릴 것이다.
페드로는 분명 쓸모가 많은 인재이지만, 나의 신념을 꺾을 정도로 대단하진 않다.
만약 이놈이 테오릭과 별반 다르지 않은 정신 상태를 지닌 놈이라면...
‘고민할 거 있나, 바로 대가리를 깨버려야지.’
어차피 테오릭에게 붙어 수족 노릇을 한 놈들은 죄다 죽여버릴 생각이었으니까, 딱히 달라지는 것도 없다.
하지만 어느 정도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면, 살려서 두고두고 써먹을 생각이다.
“저, 그게...!”
바닥으로 향했던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린 페드로가,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느 날, 테오릭의 부하들이 저를 찾아와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제안이라?”
“예. 테오릭의 조직, 그러니까 ‘밤의 형제단’으로 들어와 자신들의 도박장을 운영하라는 제안이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않으면?”
“... 저희 가문, 가족들에게 해코지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하...”
이거야말로 전형적인 깡패 놈들의 일 처리 방식 아닌가?
가족을 볼모로 잡아서 협박하는, 아주 비열하고 간악한 방식이었다.
“차라리 저한테 협박을 했으면 어떻게든 버티던, 맞서 싸우던 했을 텐데, 죄 없는 가족들의 목숨을 쥐고 흔드니 버텨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 카르셀 경비대나 시장 측에 신고할 생각은 하지 않았나?”
나의 질문을 받은 페드로가 고개를 흔든다.
“어차피 다 한통속이 된 지 오래입니다. 시장과 경비대장을 비롯해 카르셀의 고위직들이 테오릭의 돈을 받아먹으며 놈들의 행동을 눈감아주고 있다는 건,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입니다.”
“이런 개새끼들이...”
으지직-!
나도 모르게 의자 팔걸이를 잡은 손에 힘을 줬더니, 단단한 원목으로 만들어진 팔걸이가 종이쪼가리처럼 짓이겨지며 음산한 비명을 토해냈다.
도저히 인간의 힘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괴력!
그 모습을 본 페드로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게 보인다.
“아니... 대체 어, 어떻게...”
“아, 내가 힘이 좀 세서. 아무튼, 하던 얘기나 계속하지. 후우우...”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기 위해 깊은 한숨을 한 차례 내쉰 후, 나는 페드로와의 대화를 재개했다.
“결국 저는 테오릭의 밑으로 들어가, 그가 시키는 대로 도박장을 세워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벌써 7년 전 일입니다.”
“근데, 네 얘기를 듣다보니 궁금한 게 하나 있다.”
“말씀하십시오, 공자님.”
“테오릭은 이 카르셀 바닥의 그 많은 도박쟁이 중에 왜 하필 너를 찾아와서 그런 제안을 한 거지?”
“음, 그게... 사실 제가 가문에서 쫓겨난 뒤 먹고 살길이 막막해 시내에 작은 도박장 하나를 차려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제일 잘 알고, 제일 잘 하는 게 그거인지라... 사업이 생각보다 잘 되었는데, 그걸 보고 저를 데려다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 듣고 보니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다른 건 몰라도 도박장의 체계를 만들고, 운영하는 능력만큼은 진짜배기인 페드로였다.
나도 처음 이 도박장에 왔을 때 지난 생의 마카오와 라스베이거스를 떠올렸을 정도였으니까 말이지.
‘이 바닥에 소문이 났겠지. 페드로라는 놈이 있는데, 이 자식이 아주 도박장 운영하는 솜씨가 기가 막히다고.’
그 능력을 탐낸 테오릭은 자연스럽게 페드로를 자신의 밑으로 끌어들이려 했을 것이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방법, 폭력과 협박으로 말이다.
“테오릭은 언제 도박장에 오지?”
“매주 목요일 오전, 도박장이 영업을 시작하기 전에 들러 일주일 치 수익을 가져갑니다.”
“목요일이라면...”
“예, 맞습니다.”
자신의 대답을 듣고 눈을 빛내는 나를 보며, 페드로가 고개를 끄덕인다.
“바로, 내일입니다.”
***
다음날_
“뭐야, 페드로 이 새끼는 어디 갔어?”
매번 도박장 수익금을 걷으러 올 때마다 마중을 나와 있던 페드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버럭 성질을 내는 사내.
테오릭 베케르트.
카르셀의 밤을 지배한다고 알려진 조직, ‘밤의 형제단’을 이끄는 인물.
번쩍이는 민머리에 우람한 체구를 한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인상을 쓰자, 그 느낌이 험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게... 어제 새벽 퇴근하시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크게 다치셨습니다.”
테오릭의 말에 대답하는 이는 이곳 도박장의 중간 관리자였다.
평소 도박장의 운영과 관련된 회의를 할 때마다 페드로가 데리고 다니던 인물이었기에, 테오릭 역시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 시발... 병신 같은 놈이. 이제 하다하다 제집 안방에서도 자빠져? 페드로 그 새끼, 어제 술 처먹었냐?”
“아닙니다. 그건 아닌데, 순간적으로 삐끗했던 것 같습니다.”
“지랄도 가지가지 한다. 돈은?”
그래도 도박장 운영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부하가 얼굴을 못 비칠 정도로 다쳤다는데, 그저 돈에만 관심을 두는 테오릭.
그가 평소 페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예, 장부랑 같이 사무실에 준비해뒀습니다. 들어가시죠.”
끼이익-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특수 제작한 도박장의 두꺼운 철문이 천천히 열린다.
이어 테오릭과 그를 경호하기 위해 따라붙은 부하들, 총 일곱 명의 인원이 그 열린 문을 통해 건물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뭐야, 왜 이렇게 썰렁해?”
건물 안으로 들어선 테오릭이 텅 비어 있는 도박장 내부를 보고 말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기에 손님들이 없는 것은 당연했지만, 영업 시작을 준비하는 직원들의 모습까지 보이지 않는 것은 이상했다.
청소를 하든, 장비 점검을 하든 뭐라도 하느라 정신없이 바빠야 할 시간 아닌가?
“죄다 페드로 그 새끼 병문안이라도 간 거냐? 이 미친 놈들이 장사할 생각은 안하고... 다 어디갔냐고!”
“어이, 주군께서 다들 어디 갔냐고 물으신다. 빨리 대답을...”
테오릭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 도박장 직원을 닦달하려던 경호원.
허나, 그들의 뒤를 따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왔어야 할 직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뭐야? 어디갔...”
끼이익- 쾅!
바로 그때, 그들이 지나온 도박장의 출입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이어 들려오는 차가운 금속음.
철그렁, 철컥! 철커덕!
그것이 도박장 출입문 손잡이에 쇠사슬을 거는 소리라는 걸, 건물 안쪽에 있는 테오릭과 부하들은 알 길이 없었다.
“이 시발... 뭐야 이거?”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뭔가가 있다는 걸 직감했지만, 그런 것치고 테오릭의 표정은 그렇게 불안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테오릭 본인의 실력도 상당하거니와, 자신이 경호원으로 부리는 부하들의 수준 또한 막강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여섯 명의 부하 중엔 기사급 실력자도 둘씩이나 됐다.
이 정도 전력이라면 저 멀리 키르헨에 있을 다닐렌츠의 군무관, 기사 발터 브라운이 직접 온다고 하더라도 문제없이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페드로 이 새끼... 결국은 주인을 물겠다 이거지?”
드르륵-
부하들이 잠긴 문을 발로 걷어차며 나갈 궁리를 하는 동안, 가까운 곳에 있던 의자 하나를 끌어다 앉은 테오릭.
지금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페드로를 어떻게 더 괴로운 방법으로 죽일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네가 테오릭이냐.”
“...?”
지금부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미리 알았다면, 페드로를 죽일 방법을 고민하던 그 시간에 어떻게 해야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묻잖아, 네가 테오릭이냐고.”
갑자기 도박장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 사람.
그는 훤칠한 키에 떡 벌어진 어깨를 지닌 금발의 미청년이었다.
“저 새끼는 또 뭐야?”
“시발... 페드로 이 새끼, 아주 재미난 짓거리를 해놨네?”
“아가야, 되도 않는 재롱떨지 말고 이리 와서 무릎 꿇어라. 하하하!”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에 살짝 당황했지만, 상대가 혼자인 데다가 새파랗게 어려 보인다는 점이 테오릭과 부하들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잠시 긴장했던 마음을 풀고, 툭툭 농담과 조롱을 던지는 경호원들.
그러나,
슁- 스각!!!
고요했던 실내에 별안간 불어닥친 한 자락의 돌풍.
푸화아아악!!!
그와 동시에, 가장 앞쪽에 서 있던 경호원의 머리가 몸통에서 분리되며 시뻘건 피를 뿌렸다.
“씨발! 뭐야?!”
“이 개새끼가...!!!”
“어, 어떻게...?!”
어느새 시퍼런 예기를 뿜어내는 검 한 자루가 금발 미청년에 손에 들려 있는 것을 확인한 경호원들이 허겁지겁 테오릭을 둘러싸며 자신의 무기를 꺼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방금의 한 수를 보고 깨달았다.
‘... 우리가 상대할 수 없는 실력이다!’
검을 휘둘러 동료의 목을 날리는 것은 고사하고 처음에 검을 뽑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그 얘기는 무엇인가.
눈앞의 금발 사내가, 자신들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는 뜻이다.
“... 누가 보낸 거냐. 너 정도 실력자가 페드로 따위의 명령을 듣고 있을 리가 없다.”
충격에 휩싸인 모두를 대신해 테오릭이 던진 질문.
그에 대한 상대의 대답은...
“보내긴 누가 보내. 내가 직접 내 발로 온 거다.”
“... 뭐?”
알 수 없는 대답을 들려주어 테오릭을 당황케 한 금발의 미청년.
이어, 그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 도시 카르셀에서 암약하며 준엄한 왕국의 법도를 어지럽힌 괴뢰 조직, ‘밤의 형제단’의 수괴 테오릭 베케르트. 너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
“뭐? 이런 미친 새끼가 무슨 소릴...”
휘잉, 촤락-!
테오릭이 뭐라 하건, 들고 있던 검을 한 차례 휘둘러 검날에 묻은 피를 털어낸 그가 나직하게 말한다.
거절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 의미를 지닌 선언이었다.
“다닐렌츠의 차기 영주이자 기사, 데미언 카릴베르크의 이름으로... 지금부터 형을 집행한다.”
< 다닐렌츠 남부 평정전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