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닐렌츠 남부 평정전 (6) >
한 사내가 카르셀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한데 그의 손에 들린 한 가지 물건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잿빛의 싸구려 천으로 만든 큼직한 보자기.
보자기 자체는 문제가 없었으나, 그 보자기의 아래쪽이 무언가에 축축하게 젖어있다는 게 문제였다.
붉은색의, 아니 그보다 더 진한 색으로 물들어가는 보자기.
그 모습을 본 사람들 모두가 수군거렸다.
“... 뭐야 저거?!”
“피... 피 같은데?”
“에이 설마! 진짜 피일까?”
“피 맞는 거 같아! 색깔이 너무...”
“그, 그럼 저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건 뭔데?”
“혹시 사람 시체 같은...”
“아이,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냥 고기겠지! 돼지고기나 사슴고기 같은 거!”
“근데, 저 남자는 뭐 하는 사람인데 저런 걸 들고 다니지?”
“칼 차고 다니는 거 보니 용병 같은 거겠지.”
“자자, 신경끕시다! 괜히 눈이라도 마주쳤다가 큰일 치르지 말고!”
놀라고 당황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으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사내.
그런 그의 곁에 어느새 다가온 잘생긴 얼굴의 청년 하나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한다.
“고생하셨습니다, 공자님.”
“고생은 뭘. 그나저나 얘기는 다 해놨나?”
“예, 지금 다들 공자님을 뵙기 위해 모여서 준비 중입니다.”
“네 얼굴 알아보던? 웬 미친놈이 와서 시장 만나겠다고 행패 부리는 줄 안 거 아냐?”
“하하, 저도 좀 그런 상황을 걱정했는데... 다행히 별일 없었습니다. 시장도 제 얼굴 바로 알아봤고요.”
“다행이네. 그럼 어디로 가면 되지?”
“카르셀 시청입니다. 그나저나, 손에 들고 계신 건 혹시...”
“네가 생각하는 그게 맞을 거다. 시장한테 선물로 주려고. 좋아할까 모르겠네?”
“뭐,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잊지 못할 선물은 될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자, 얼른 움직이자. 다들 기다린다며.”
“예, 공자님.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자신 있게 대답하는 잘생긴 얼굴의 청년, 아드리안.
그 뒤를 따라 ‘공자님’ 데미언 카릴베르크가 카르셀 시청으로 향했다.
***
“오, 오셨습니다!!!”
“어디? 어디!”
“저기 오신다!”
아드리안의 뒤를 따라 카르셀 시청 정문을 들어서니, 건물 입구에 모여 있던 수많은 사람이 호들갑을 떨며 내 앞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고, 공자님!!!”
그 무리 중에서도 가장 앞에서 사색이 되어 뛰어오고 있는 중년의 사내.
그가 바로 이곳 카르셀의 시장, 오토 벨스였다.
“카르셀의 시장직을 맡고 있는 오토 벨스, 다닐렌츠의 온당하신 지배자, 카릴베르크 가문의 후계자이신 데미언 공자님을 뵈옵니다!”
흙바닥에 철퍽, 소리가 나게 엎드린 카르셀의 시장이 머리를 조아리며 내게 인사했다.
“공자님을 뵙습니다!!!”
뒤이어 시장을 따라 나온 시청의 직원들과 경비대원, 무슨 일인가 싶어 주변에서 구경하던 카르셀의 주민들까지 모두 그 자리에 엎드려 내게 인사를 올렸다.
여전히 낯선 광경이었지만, 앞으로 다닐렌츠의 영주이자 귀족으로 살아가려면 적응해야 하겠지.
“다들 일어나시오. 그 옷에 묻은 것들도 좀 털고.”
“예, 공자님. 감사합니다.”
주섬주섬, 무릎에 묻은 흙을 털며 몸을 바로 세운 카르셀의 시장, 오토가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내게 말했다.
“여기 아드리안 경에게 공자님이 오셨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쩐 일로 이 먼 길을 다 오셨습니까? 미리 기별을 주셨다면 제가 사람을 보내서 진작 맞이했을 텐데요!”
나를 모르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내 얼굴을 똑똑히 알아본 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카르셀의 시장은 불과 몇 주 전 있었던 나의 아버지이자 다닐렌츠의 전(前) 영주, 구스타브 남작의 장례식에 찾아와 나와 직접 대화를 나눴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뭐, 영지 시찰 나왔습니다. 정식으로 취임한 후에 나오면 이래저래 복잡할 것 같아서.”
“아, 영지 시찰... 그, 그러셨군요!”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속은 그렇지 못한 것일까?
반쯤 벗어진 시장의 머리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세상의 어느 벼슬아치가 윗사람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환영하겠는가?
더욱이 나는 그냥 윗사람도 아니고 영지 내 모든 이들의 생사여탈권을 손에 쥐고 있는 절대자, 영주의 자리에 오를 사람이었으니 저토록 긴장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심지어, 내 눈앞에서 파리처럼 손을 싹싹 비비고 있는 카르셀의 시장은 여러모로 구린 데가 많은 인간이었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근데, 공자님 손에 들고 계신 건...”
“아, 이거 말입니까? 시장님 뵈러 오늘 길에 빈손으로 오기 그래서 선물 하나 준비했습니다. 자, 받으시죠.”
“예? 아, 예에...”
슬쩍 보기에도 불길한, 핏빛으로 물든 보자기를 건네받는 시장.
사정없이 떨리는 눈동자가 지금 느끼는 그의 심정으로 알려주고 있다.
“뭐하십니까? 열어보세요.”
“예? 어... 음...”
내 말을 듣고도 한참을 주저하던 시장이 천천히 보자기를 풀어 그 내용물을 확인하는데...
“흐이이익!!!”
보자기에 싸여 있던 것의 정체를 확인한 시장이 뒤로 자빠지며 비명을 질렀다.
“허으윽!”
“저, 저게 뭐야?”
“꺄아아악!”
“사람 머리잖아!”
그랬다.
내가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시장에게 건넨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의 머리통이었던 것.
“고, 공자님! 이게 대체...!”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내게 묻는 시장에게, 나는 싸늘한 목소리로 답했다.
“왜, 모르는 얼굴입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시장은 아실 줄 알았는데?”
“그, 그게 무슨...”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깨닫고 잘린 머리통을 다시 한번 살피는 시장.
그런 그의 시선이, 이내 경악으로 바뀐다.
“.... 테, 테오릭 베케르트?”
그리고 시장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들은 주변의 모두가 펄쩍 뛰듯 놀란다.
“테오릭? 시장님 지금... 테오릭이라고 하셨습니까?”
“뭐야, 테오릭이면... 밤의 형제단의 두목?”
“아니, 어떻게...”
“공자님께서 테오릭의 목을 베어오신 건가?”
“정말이야? 정말 테오릭이야?”
“와아! 공자님이 테오릭을 죽였다! 만세에에에!!!”
누가 먼저 시작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테오릭의 죽음을 인지하고 시작된 환호성은 사방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만세에!!! 테오릭이 죽었다!!!”
“잘 죽었다, 저 개자식!!!”
“데미언 공자님께서 카르셀의 악당을 처치하셨다!!!”
“다닐렌츠 만세!!! 카르셀 만세!!! 데미언 공자님 만세!!!”
환호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 열심히 내 이름을 외치며 만세를 부르는 아드리안이 보였다.
자식, 선동(?) 잘하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사람들의 환호성을 받아주었다.
이곳 카르셀을 포함한 다닐렌츠 전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될 사나이에게 어울리는, 자신만만하고 늠름한 미소와 함께였다.
***
“공자님!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오오오오!!!”
카르셀 시청에 도착한 뒤 고작 두 시간 만에, 나는 시장을 포함해 무려 다섯 명이나 되는 카르셀 시의 주요 인물들을 감옥으로 보내고, 두 사람의 목을 날려버렸다.
참고로 목이 날아간 둘은 도시 방위를 위해 키르헨에서 오래전 파견된 영지군의 지휘관들이었는데,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뻗대다가 그 같은 최후를 맞았다.
수년간 카르셀에만 머문 탓에 내가 어떤 성격을 가진 놈인지 몰랐던 게 놈들의 명을 재촉했다.
그다음으로 내 앞에 불려온 이는 카르셀의 경비대장.
이놈 역시 ‘밤의 형제단’과 결탁해 놈들의 범죄 행위를 눈감아주고 수도 없이 많은 뇌물을 받아먹은 자였다.
“아닙니다! 오, 오해십니다. 공자님! 저는 절대로 그러지 않았습니다!”
처절한 해명과 눈물을 내세워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는 카르셀의 경비대장이었지만,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온 내 앞에선 통하지 않는 변명이었다.
“그동안 카르셀에서 온갖 부정하고 불법적인 사업을 벌여왔던 괴뢰 조직 ‘밤의 형제단’의 수괴, 테오릭 베케르트와 결탁하여 영지민들의 고혈을 빨아온 네 놈의 더러운 짓거리를 모두 알고 있다. 여기, 이 장부에 네 이름이 몇 번이나 나오는지 알고 있느냐?”
내 손에 들린 것은 카르셀 도박장의 마스터였던 페드로에게서 얻은 뇌물 장부.
그 내용을 눈으로 확인한 경비대장의 안색이 놀라움으로 새하얗게 변한다.
“아, 아닛?! 이게 왜... 그, 공자님! 공자니임! 제 얘기를 한 번만 들어주십시오! 저는 그저 카르셀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그 더러운 입 닥쳐라, 이놈!!!”
퍼어억! 콰장창창!!!
“크허억!!!”
내게 배를 걷어차인 경비대장의 몸이 붕 떠서 날아가 시장실 구석에 놓여 있던 집기들을 부수고 바닥으로 처박힌다.
생각 같아선 단박에 쳐 죽이고 싶었지만, 카르셀의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마지막 순간 발에서 살짝 힘을 뺐다.
물론, 그래 봤자 경비대장의 비루한 실력 따위로 버텨낼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말이지.
“커흑... 끄르륵!”
내게 걷어차여 단박에 내장이 깨지고, 입과 코로 피를 토해내며 정신을 잃은 경비대장.
시장실 구석에 처박혀 미동도 하지 않는 그를 분노한 눈빛으로 한참 바라보던 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쪽에 서 있던 경비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 저놈도 지하 감옥에 처박아라. 그리고 치료사를 불러 목숨만 붙여 놓으라 이르도록. 저놈 역시 카르셀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처형할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사방으로 넘실거리는 나의 분노를 느낀 경비대원들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방금까지 자신들의 상관이었던 이의 축 늘어진 몸을 일으켜 사방이 피범벅이 된 시장실 밖으로 사라진다.
이로써, 시청 지하 감옥에 갇힌 사람의 수가 여섯 명으로 늘었다.
앞서 목이 날아간 두 놈을 합하면 카르셀 수뇌부에 총 여덟 명의 빈 자리가 생긴 셈.
그 많은 놈이 죄다 테오릭이 갖다 바친 구린 돈을 받아먹고 있었다는 사실에 너무 화가 나서 머리가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후우우... 예상은 했다만,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네.”
“전대 영주님 때엔 카르셀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이번에 공자님께서 썩은 부분을 도려내셨으니, 앞으론 그럴 일 없을 겁니다.”
“... 그래야지.”
아드리안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 나는 곧바로 그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아드리안.”
“예, 공자님.”
“너에게 카르셀의 임시 경비대장 권한을 주겠다. 여기, 장부에 등장하는 나머지 인원들에 대한 수사를 진행해라. 놈들이 눈치채고 도망치기 전에 서두르도록 해.”
“알겠습니다, 공자님. 단 한 놈도 빠짐없이 지엄한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나는 지금 바로 밤의 형제단 놈들의 성으로 가겠다.”
“지금... 바로 말입니까? 혼자 가시는 겁니까?”
내가 홀로 밤의 형제단을 치러 간다는 말을 들은 아드리안이 놀라 되물었다.
“그래. 지금쯤이면 테오릭이 죽었다는 소식이 놈들에게도 전해졌을 거다. 여기서 시간을 더 줬다간 놈들이 도망치거나 성에 모여서 제대로 농성할 준비를 하게 될 수도 있다. 그 전에 들이쳐야지.”
“그건 그렇지만...”
내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부하로서 응당 주군의 안위를 걱정할 수밖에 없는 아드리안.
그런 그의 눈을 보며,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페드로를 통해 장부도 손에 넣었으니, 살살 달래가면서 놈들이랑 얘기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으득, 나도 모르게 입안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놈들 싹 다... 지옥으로 보내고 돌아오마.”
< 다닐렌츠 남부 평정전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