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닐렌츠 남부 평정전 (8) >
키르헨에서 다닐렌츠 영지군 백오십에 용병 오십을 더해 총 이백 명의 병력을 이끌고 온 기사 마틴 페르텔.
주군인 데미언과 약속했던 시간에 정확히 밤의 형제단의 아지트로 쓰이는 고성(古城) 앞에 당도한 그였으나, 기대했던 전투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 이게 정말, 공자님께서 혼자 해내신 일이란 말입니까?”
넋이 나간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는 마틴.
그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은,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기사 아드리안이었다.
“어... 예, 그렇습니다. 저도 뒤늦게 와서 여기 상황 확인하고 어이가 없었어요.”
“세상에... 공자님의 실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건 아예 상상을 초월한 수준입니다. 허어...”
위험하고 격렬한 전투를 예상하고 잔뜩 긴장한 채로 달려온 마틴과 그의 병사들.
하지만 이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수북이 쌓인 시체의 산.
오랫동안 카르셀의 공포로 군림했던 이들, ‘밤의 형제단’이 몰살(沒殺), 한 마디로 떼죽음을 당한 광경이었다.
“자자, 빨리빨리들 옮겨! 어이! 거 시체에서 나온 거 슬쩍하지 말라고! 에이씨, 추접스럽게 뭐 하는 짓이야! 니들 거지야?!”
마틴의 명령을 받아 현장 지휘관 노릇을 하고 있던 용병대 푸른 방패의 리더, 엔리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다.
그의 능수능란한 지휘 아래 빠른 속도로 정리되는 전장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틴이 문득 생각난 것을 묻는다.
“그나저나... 공자님은 어디 가셨는지?”
“아, 공자님께서는 지금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지하?”
“거기에 뭐 챙길 게 있다고 하시던데...”
“감옥에?”
“예.”
“허참, 감옥에 뭐가 있다는 건지...”
아드리안의 대답을 들으며, 마틴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어린 주군이 향했을 고성의 지하 감옥 쪽을 바라보았다.
***
콰아앙-!!!
지하 감옥 제일 안쪽에서 두 번째 방.
그곳의 단단한 돌벽이 모래성처럼 무너진다.
망치도, 곡괭이도 아닌 그저 맨주먹 한 방으로만 이뤄낸 결과였다.
“아니, 어떻게...?!”
눈앞에서 내가 맨주먹으로 벽을 때려 부수는 모습을 본 카르셀 도박장의 마스터, 페드로가 휘둥그레진 얼굴로 말끝을 흐린다.
반면 나의 명령을 받아 카르셀 시내 모처에서 그를 보호하고 있었던 다닐렌츠의 기사, 겔베르트는 ‘늘 보던 것을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거 말고 얌전하게 문을 여는 방법이 있을 텐데, 내가 그 얘기를 듣기 전에 테오릭 목을 쳐 버리는 바람에... 하하하!”
주먹질로 벽을 때려 부순 나를 무슨 괴물 보듯 쳐다보는 페드로에게 멋쩍은 얼굴로 변명을 늘어놓은 후, 나는 겔베르트에게 손을 뻗었다.
“겔베르트, 횃불 좀.”
“예, 여기 있습니다.”
나의 요청에 들고 있던 횃불을 공손히 내어주는 겔베르트.
그에게 건네받은 횃불을 들어 내가 때려 부순 벽 안쪽의 공간을 비추었다.
“보자...”
흙먼지가 가라앉은 그 공간, 어둠이 물러선다.
“어? 문이 있습니다!”
“음...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벽 너머에 존재하는 작은 문을 발견한 페드로가 소리쳤고, 혹시 모를 위험을 걱정한 겔베르트가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저 문 뒤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는 나는 그런 겔베르트의 팔을 잡았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하지만...”
“저 뒤에 뭐가 있는지 알거든. 위험한 건 아니...”
겔베르트를 안심시키려 그렇게 말을 하다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 생각해보니, 제일 위험한 걸 수도 있겠군.”
“예?”
“테오릭 그 미친놈이 이거 때문에 한 짓들을 생각하면 말이야.”
“아니, 대체 뭐길래...”
“직접 봐.”
철컥, 끼이이익-
“헉!”
“이, 이게 대체...?!”
내가 열어젖힌 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것’을 본 겔베르트와 페드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작은 문 뒤에 숨겨져 있던 커다란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는 황금의 물결.
손에 들린 횃불의 빛을 받아 찬란하게 번쩍이는 금은보화를 바라보며, 내가 흐뭇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테오릭의 비밀 금고... 이젠, 우리 거야.”
***
테오릭의 금고에 쌓여 있던 금은보화의 가치는 어림잡아보아도 수천 골드에 육박하는 수준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금화 한 닢, 보석 한 조각 흘리지 않고 모조리 꺼내어 카르셀 시청 건물에 준비된 금고로 옮겼다.
그리고 그 후엔 카르셀의 신임 시장으로 ‘내정된’ 겔베르트에게 금고 열쇠를 건네주며 말했다.
“시장 일하다 보면 이래저래 돈 쓸 일 많을 거예요. 써야겠다 싶으면 아끼지 말고 쓰세요.”
“어후우... 부담스러워 죽겠습니다.”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얼굴인데요?”
“에이, 말은 그렇게 해야지요. 최소한의 예의라는 게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능글맞게 웃으며 나에게서 금고 열쇠를 받아가는 겔베르트였다.
“그리고... 페스텔 경.”
“예, 공자님.”
다음으로 나의 부름에 응한 이는 다닐렌츠의 기사 마틴 페스텔.
그 어떤 어려운 싸움이라도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굳은 각오를 다지며 키르헨에서 병력을 이끌고 내려왔지만, 내가 홀로 썰어버린 밤의 형제단 조직원들의 시체 치우는 일만 하느라 조금은 김이 새버린 그였다.
그런 마틴에게 못다 한 기사로서의 소임을 다할 수 있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대를 임시 카르셀 영지군사령관 자리에 임명하겠습니다. 정식 임명장은 내가 키르헨에 돌아간 이후 인편을 통해 보내주겠습니다.”
“...!”
“키르헨에서 데려온 병력을 이끌고 도시 주변의 몬스터와 도적들을 소탕하세요. 특히 키르헨과 이어지는 가도 근처의 숲을 안전하게 확보하는 게 중요합니다.”
“기사 마틴 페르텔, 명령을 받듭니다!”
이제야 기사다운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된 그가 조금은 벅찬 표정으로 내게 군례를 올렸다.
그리고 다음은...
“엔리케.”
자기는 기사도 아닌데 대체 왜 여기 불려온 건가 하는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저 남자의 차례다.
“나? 아니... 그, 아니! 예! 공자님!!!”
자신을 부르는 나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허둥거리는 엔리케.
기사 서임을 받고 제법 귀족적인 언사를 구사하는 겔베르트와 달리 여전히 나를 대하는 호칭이 오락가락하는 그였다.
“그대에겐 임시 카르셀 경비대장의 직책을 내립니다.”
“겨... 경비대장 말입니까?”
“예, 임시 시장인 겔베르트 경을 도와 시내 곳곳에 숨어 있는 밤의 형제단 조직원들을 소탕하세요. 그 밖에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를 조장하는 이들,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이들도 예외 없이 체포해 처벌합니다.”
“아, 알겠습니다!”
앞서 보여준 마틴의 군례를 어설프게나마 따라 하며 내게 고개를 숙이는 엔리케.
다시 뭉친 겔베르트-엔리케 콤비가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 내심 기대가 됐다.
“마지막으로... 페드로.”
“예, 공자님.”
앞서 내게 부름을 받았던 사람들과 달리 페드로는 바짝 긴장한 눈빛과 표정을 하고 있었다.
“테오릭의 목을 치고, 밤의 형제단을 완전히 무너뜨린 후에 너에 대한 처분을 내리겠다고 말했던 것, 기억하고 있겠지?”
“...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테오릭이 너의 가문을 볼모로 잡고 협박하여 어쩔 수 없이 밤의 형제단에 가입하였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하여 네가 가담했던 모든 범죄 사실들이 덮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처분을 내린다 하더라도 달게 받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하는 페드로였다.
“너의 지난 행적이 힘없는 일반인들을 괴롭히고, 갈취하는 등의 악랄한 범죄가 아닌 도박장 운영과 관리 쪽에 치중되었던 점, 그리고 이번 테오릭 제거에 큰 역할을 한 점을 참작하여 너에 대한 처분을 결정했다.”
“...”
긴장으로 바짝 말라가는 페드로의 입술을 바라보며, 나는 준비했던 그에 대한 처분을 발표했다.
“페드로 라폰테인, 너에게 향후 10년간 도시 카르셀을 위해 무급(無給)으로 일할 것을 명한다.”
“...!”
“향후 10년간 너는 내가 지시한 임무 외에 다른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으며, 수익을 창출하는 다른 모든 행위 또한 금지한다.”
“아...”
“또한, 업무와 관련된 공적인 사유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 너는 10년간 도시 카르셀을 떠날 수 없다. 알겠느냐?”
“... 며, 명을 따릅니다.”
내 입에서 흘러나온 처분의 내용을 들은 페드로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진다.
월급도 못 받고 10년간 일하며 도시 안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건 분명 무거운 형벌이었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밤의 형제단 주요 간부들의 목이 죄다 날아갔다는 걸 생각하면 상대적으로 가벼운 처분이기도 했다.
“단, 최소한의 생계유지를 위해 특별히 너의 가문인 라폰테인 가(家)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는 것은 허락하겠다.”
돈 한 푼 안 주고 계속 부려 먹다가 혹시라도 페드로가 굶어 죽을까 싶어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마련했다.
아무리 미운 놈이어도 자식이 굶어 죽는 꼴은 볼 수 없는 게 부모의 마음.
이렇게 빠져나갈 구석을 하나 만들어 놨으니, 알아서 라폰테인 가주가 페드로를 챙겨줄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공자님!”
내게 거듭 고개를 숙이며 관대한 처분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페드로였다.
***
며칠 후, 나는 키르헨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페드로에게 따로 명령을 내렸다.
“페드로, 테오릭과 밤의 형제단이 머물던 카르셀 외곽의 고성을 도박장으로 꾸며라.”
“... 예?”
뭘 잘못 들었나, 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페드로.
테오릭이 자신의 거처로 쓰던 성이 협소한 규모이긴 했지만, 그걸 통째로 도박장으로 쓰겠다는 발상은 해본 적이 없는 그였다.
하지만 이미 머릿속에 기가 막힌 사업의 밑그림을 그려놓은 나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재차 명령을 내렸다.
“뭘 그렇게 놀라나?”
“아니, 너무 갑작스러우신 명령이라... 죄송합니다.”
“뭐, 듣도 보도 못한 일이긴 하지.”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해볼 만한 사업이란 거다.”
“...!”
“성 외부는 딱히 손댈 필요 없고, 내부만 신경 쓰도록. 고급스러운 장식과 가구들로 안을 채우란 얘기다. 라폰테인 가문에서 자랐으니, 그런 것들을 알아볼 안목은 있겠지?”
“아, 예. 아무래도 보고 자란 것이 있으니... 필요하면, 가문의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겠습니다.”
“좋아. 거기에 솜씨 좋은 요리사를 고용해 성안에서 훌륭한 요리들을 맛볼 수 있게 해라. 비싸고 좋은 술도 들여다 놓고... 아, 실력 좋은 악사들도 여럿 데려다 연주를 시켜라. 도박장 내에 음악이 끊기지 않도록 말이야.”
“어, 말씀만 들으면 거의 귀족들의 연회장 같은데...”
“바로 그거다.”
내가 생각하는 사업의 콘셉트를 정확히 이해한 페드로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들의 연회장 같은,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지닌 도박장... 지금껏 세상에 없었던 그런 도박장을 만드는 것, 그게 내 목표다.”
“아...!”
내 말을 들은 페드로가 뭔가 느끼는 것이 있는 듯, 감탄한 표정을 짓는다.
“어, 어떻게 그런 생각을... 공자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래, 감탄이 절로 나오겠지.
잘 듣고 배워라, 이게 바로 다른 차원에서 온 문명인의 고급화 브랜딩이라는 거다.
“대신 성안으로 들어오는 손님들에겐 거액의 입장료를 받아라. 어설픈 도박꾼이나 뜨내기 용병들 따위는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정도의 금액이어야 할 거다. 한... 5골드 정도면 적당하겠지.”
오백만 원을 입장료로 태워야 한다면, 어지간히 도박에 미친 놈이거나 능히 그 정도 지출을 감당할 수 있는 형편의 부자일 것이다.
“아, 이해했습니다. 돈 많은 소수의 부자를 상대로 영업을 하시겠다는 거군요.”
“그래, 바로 그거다. 대신... 성 주변에 그보다 작은 규모를 지닌 보통의 도박장을 지어 평범한 손님들도 받아라. 부자들은 성안으로 들어가며 본인의 특별함에 우쭐할 것이고, 평범한 도박쟁이들은 성안으로 들어가는 그들을 보며 부러워하겠지. 그리고 새로운 삶의 목표를 만들 것이다.”
“나도 돈을 모아서 저 성에 들어가겠다, 라는...?”
“그래, 바로 그거다.”
알아서 척척 내 말을 알아들으니,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3개월을 주겠다. 3개월 후에, 내가 직접 카르셀로 내려와 결과를 살필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겔베르트에게 이 계획에 대해 말해두었다. 작업에 필요한 돈은 그가 내어줄 것이다. 눈치 보지 말고 가져다 쓰도록. 단, 어디에 그 돈을 썼는지 정확한 내역을 준비해둬야 할 것이다.”
“믿고 맡겨주신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페드로와의 대화를 마지막으로 나는 카르셀을 떠났다.
그리고 몇 주 만에 돌아온 키르헨에서,
“다닐렌츠의 새로운 영주, 데미언 카릴베르크 남작께 모두 예를 표하시오!!!”
나는 마침내, 남작령 다닐렌츠의 진짜 주인이 되었다.
< 다닐렌츠 남부 평정전 (8)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