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탄대로 (2) >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왕국 내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가난했던 다닐렌츠 영지.
영지 자체는 무척이나 넓었지만, 사방에서 창궐한 몬스터와 흉악한 도적들이 들끓어 농업이건 상업이건 도무지 발전 가능성이 보이지 않던 땅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옛일이 되었다.
지금의 다닐렌츠는 과거의 궁핍했던 모습을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부유한 영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땅의 중심인 주도(主都) 키르헨.
마차 두 대가 한 번에 지나도 될 만큼 널찍한 신작로(新作路)를 따라 양쪽으로 수없이 많은 신축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주거용 건물도 있고, 상업용 건물도 즐비했는데 어느 곳 하나 비어있는 곳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자, 오늘 아침에 멀리 튀링헨에서 넘어온 싱싱한 생선입니다! 다 팔리기 전에 얼른 들여가세요!”
“쫀득한 반죽을 뜨끈한 화덕에 넣어 갓 구워낸 맛있는 빵입니다! 안에 땅콩잼이 들어있어서 아주 고소해요!”
“에이, 이 골목 다 뒤져봐요! 이거보다 깔끔하게 만든 오크 가죽 갑옷 없다니까? 속고만 사셨어?”
“나움가르트 산 분홍 소금! 귀족들도 이거 쉽게 못 구해요! 오늘 특별히 싼 값에 팝니다! 귀한 분에게 드릴 선물용으로도 좋아요!”
그야말로 문전성시(門前成市).
파는 사람도 많고, 물건을 사겠다는 사람은 더 많았다.
다닐렌츠 영지의 경제 사정이 얼마나 좋은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다닐렌츠 영지군에 지원하십시오! 명예와 영광, 그리고 왕국 최고 수준의 보수가 당신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도시 광장의 한구석, 나무로 만들어진 높은 연단에서 열정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한 사람.
바로 다닐렌츠 영지군에서 나온 모병관이었다.
그의 뒤에는 각기 다른 형태의 옷을 입힌 사람 모형 몇 개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 모형의 옷차림이 광장을 지나는 청년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와, 저기 입혀 놓은 옷 뭐야? 엄청 멋있는데?”
“저거? 영지군 외출복이래.”
“외출복? 외출보-옥? 그게 뭔 소리야? 군인이 웬 외출복?”
“나도 저기 모병관한테 물어봐서 안 건데, 영지군한테 보급품으로 나오는 거래. 휴가 나갈 때 군복 대신 입는 옷이라나? 봄가을, 여름, 겨울까지 계절별로 세 벌씩 준다더라.”
“세, 세 벌? 외출복만 세 벌을 챙겨준다고?”
“와아... 옷감도 엄청 좋아 보이는데?”
“쓰읍... 나도 지원서 한 장 받아가 볼까?”
“엥? 너 영지군 지원하려고?”
“아니 뭐... 한 번 생각은 해본다고.”
“야, 근데 영지군 들어가면... 돈 거의 못 받지 않아? 완전 박봉 아닌가?”
과거, 다닐렌츠 영지군의 월봉은 직책이 없는 일반 병사를 기준으로 한 달 75실버에 불과했다.
그야말로 끔찍한 수준의 박봉이었지만, 사실 이 시대의 일반 병사들이 받는 봉급이라는 것이 거의 다 이 정도의 수준이었다.
급료가 적은 대신 식사과 주거지를 제공한다는 장점을 내세웠지만, 식사랍시고 병사들에게 내어주는 음식의 수준은 멀건 스프에 야채가 조금 들어있는 수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고기가 나왔지만, 양이 워낙 적어서 개인 당 고기 한두 점을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인 수준이었다.
병사들이 머무는 숙소의 사정은 또 어떠한가?
이와 벼룩이 득실거리는 오래된 막사엔 꿉꿉한 냄새가 진동했고, 이불로 사용하는 모포와 베갯잇에 배인 냄새와 묵은 때는 세탁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지붕이랍시고 만들어 놓은 곳엔 군데군데 구멍이 나 바람이 숭숭 들어왔는데, 여름엔 비가 새고 겨울이면 눈보라가 들이쳐 동상에 걸리는 이가 속출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영지군에 입대하는 것은 말 그대로 인생의 막장에 몰린, 더는 피할 곳이 없는 이들의 마지막 선택지 정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다닐렌츠의 새로운 영주가 된 사나이, 데미언 카릴베르크가 그 모든 것을 바꾸어 버렸다.
‘군의 명예와 긍지, 전투력은 지휘관의 일방적인 명령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병사들이 평소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얼마나 많은 대가를 받는지에 달렸다’
취임 첫날, 영지의 군무관인 발터 브라운을 불러 전했다는 그 말에 군(軍)을 바라보는 영주의 철학이 그대로 녹아있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영지군의 급료 체계 개선이었다.
지휘관과 병사의 구분 없이 모두 큰 폭으로 월봉이 올랐는데, 특히 병사들의 경우엔 2배 이상이 오르는 어마어마한 변화를 맞이했다.
“야, 예전에나 박봉이었지, 요즘은 아니래.”
“그래? 그건 어디서 들은 얘긴데?”
“우리 옆집 살던 형이 여름 끝날 즈음에 입대해서 얼마 전에 훈련 끝나고 휴가 나왔거든? 그 형한테 들어보니까 월봉이 180실버래.”
“뭐? 180실버?”
“와, 생각보다 훨씬 많이 주네?”
“그니까 말야. 원래 75실버였는데, 이번에 새로 취임하신 영주님이 다 갈아엎으라고 하셨다더라.”
“대박이네. 이제 막 훈련소에서 나온 신병한테 주는 월봉이 그 정도인데, 그럼 베테랑들은 훨씬 더 받을 거 아냐?”
“쓰읍, 나도 장사하는 거 때려치우고 영지군 입대할까?”
“야, 아서라. 넌 몸이 비리비리해서 군인 못해.”
“에이씨, 몸이야 훈련받다 보면 알아서 만들어지겠지!”
병사들에게 챙겨주는 월봉의 액수만 달라진 게 아니었다.
먼저, 식사의 변화.
다닐렌츠 영지군 장병들의 식탁엔 더는 죽인지 물인 알 수 없는 멀건 수프따윈 나오지 않았다.
푹 고아낸 닭 육수에 곡식과 야채를 양껏 때려 넣어, 한 그릇만 먹어도 든든함을 느낄 수 있는 양질의 수프가 나왔다.
뿐인가, 지난 3년간 무자비하게 몬스터를 때려잡으며 확보한 키르헨 주변의 광대한 토지에서 생산된 밀과 보리로 만든 빵이 끼니마다 먹고 싶은 만큼 제공되었다.
고기 요리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일주일에 한 번 나왔지만, 그 양과 질의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닭, 돼지, 소, 오리 고기가 번갈아 제공되었는데, 예전처럼 개인 당 한두 점 겨우 먹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한 끼 식사를 고기만으로도 때울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양이 나왔다.
예전의 고기 요리 메뉴가 구색 맞추기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진정한 ‘특식(特食)’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
그밖에도 신선한 과일과 우유, 각종 견과류 등을 간식으로 아낌없이 제공하니, 다닐렌츠 영지군 장병들의 몸 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다.
병사들에게 주어지는 군 보급품의 구성 역시 놀라울 정도로 개선되었다.
과거 영지군에 입대한 이는 갬비슨(천으로 만든 옷에 솜을 채워 만든 누비 갑옷) 한 벌과 싸구려 가죽으로 만든 투구, 아무 나무나 깎아 만든 기다란 봉에 잡철을 두드려 만든 날을 꽂은 허름한 장창 한 자루를 보급품으로 받았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 예컨대 장갑, 각반, 신발 등의 장비는 필요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알아서 구매해야 했다.
쥐꼬리만 한 병사들의 급료 수준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
하지만 매번 전장에 나설 때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병사의 입장에선 그 없는 돈이라도 아끼고 아껴서 추가 장비를 마련해야 했다.
하지만, 영주의 명령으로 영지군에 대한 보급 체계가 개선되며 더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우선, 병사들에겐 칼과 화살은커녕 멀리서 던진 돌멩이도 제대로 막아주지 못하던 기존의 얇디얇은 싸구려 갬비슨 대신 아마포와 솜, 헝겊을 충실히 채워 넣고 군데군데 고블린 가죽을 덧댄 고급의 갬비슨이 한 벌씩 주어졌다.
싸구려 가죽 대신 단단한 강철로 만들어진 투구가 주어진다는 것 역시 눈에 띄는 변화.
여기에 역시 고블린 가죽으로 만들어진 장갑과 전투화, 각반, 팔목 보호대가 추가로 보급된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앞서 도시 광장에서 청년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멋진 디자인의 계절별 외출복도 세 벌씩이나 주어졌다.
복식만 달라진 게 아니다.
병사들이 드는 무기의 품질도 훨씬 좋아졌다.
기존의 싸구려 장창 대신 나움가르트 광산에서 생산되는 품질 좋은 철광석으로 만들어진 날카로운 창날을 물푸레나무로 만든 단단한 자루에 꽂아 만든, 질 좋은 장창이 주어졌다.
과거에 비해 훨씬 좋은 갑옷과 장비, 무기를 든 병사들의 사기가 월등하게 치솟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곳의 환경도 완전히 바뀌었다.
솜씨 좋은 목수를 붙여 튼튼하고 깔끔하게 만들어진 막사엔 더 이상 냄새도 나지 않았고, 비가 새지도 않았다.
의식주(衣食住), 입는 것과 먹는 것과 머무는 곳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이 바뀌어 버린 다닐렌츠 영지군.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를 꼽으라면...
“더 빨리 못 뛰나!!! 뒤처지는 놈은 발가벗겨서 집으로 돌려보내겠다! 뛰어! 뛰라고 이 새끼들아!!!”
이전과 비교해 ‘악랄하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강해진, 훈련의 강도였다.
***
“... 이번 차수에 들어온 훈련병 128명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숫자는 61명입니다.”
“61명? 꽤 남았네?”
장식 하나 없는 투박한 느낌의 방, 책상 위에 놓인 여러 서류를 뒤적이며 업무에 몰두 중인 한 사내가 부하의 보고에 제법이라는 표정을 짓는다.
처음 들어온 숫자와 비교해 남아 있는 사람의 숫자가 반 토막이 났건만, 꽤 남았다는 표현을 할 만큼 훈련의 강도는 엄청났다.
“보자... 지금이 3주 차인가?”
“예, 그렇습니다.”
“아직 2주 남았으니까... 그중에서 다시 열댓 명은 떨어져 나갈 테지. 뭐, 그래도 준수하긴 하네. 한 50명 정도는 건지겠다.”
고개를 끄덕이며 보고 있던 서류 한쪽 끄트머리에 ‘50’이라는 숫자를 적어넣는 한 사나이.
메이슨 아르히펠트(Mason Archfeld).
그는 다닐렌츠의 영주인 데미언 카릴베르크와 함께 전장을 누볐던 용맹한 전사이자 베테랑 용병이었고, 현재는 영지 동북부에 자리한 군 훈련소의 수장이었다.
메이슨은 기존에 주먹구구식으로 대강대강 진행되던 다닐렌츠 영지군의 신병 훈련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뜯어고쳐 지금의 5주 훈련 체제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공을 인정받아 얼마 전 새로이 다닐렌츠의 기사로 서임 되어 아르히펠트라는 성(姓)을 수여 받고 준 귀족의 신분이 되었다.
“영주님께서 애들 정훈 교육 좀 더 강화하라는 지침을 내리셨다. 영지군에 대한 처우가 훨씬 개선된 만큼, 그에 맞는 품위를 지닐 수 있도록 제대로 교육하라는 말씀이셨지.”
“예, 소장님. 그럼... 정훈 담당 교관 불러들일까요?”
“어, 그래. 지금 바로 나한테 오라고 해. 관련 교재도 들고 오라고 하고.”
“예, 알겠습니다.”
부하가 빠져나간 방에 홀로 남아 업무를 계속하던 메이슨.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지난 기억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아르히펠트 경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어색하지만, 익숙해지도록 서로 노력해 보죠.’
‘가, 감사합니다... 영주님!’
‘아... 메이슨한테 그렇게 불리는 것도 엄청 어색한데, 그것도 익숙해지도록 노력해 볼게요. 하하하!’
자신을 기사로 만들어 준 것도 모자라 아르히펠트라는 멋진 성까지 내려준 주군, 데미언.
처음 만났을 당시의 그는 깡마른 몸에 독기 어린 눈빛을 지닌 작은 소년에 불과했다.
한데 그랬던 그가 어느새 자신이 올려다봐야 할 정도의 큰 키과 너른 어깨, 감히 따라갈 생각조차 하지 힘들 정도의 대단한 실력을 지닌 기사가 되었다.
“그쯤만 해도 짝을 찾기 힘든 어마어마한 사연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데, 그보다 더 앞을 향해 나아간 데미언은 왕국에서 가장 가난했던 이곳 다닐렌츠에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기적을 일으키고, 끝내는 영주의 자리에 올라 귀족이 되었다.
그다음은 또 어떤 기적이 기다리고 있을지, 부푼 기대감에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메이슨이었다.
“크흠, 이러다 나중에 나도 귀족 작위 하나 받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아닌가? 그건 너무 간 건가? 하하하!”
기사 서임식 준비를 위해 짧게 잘랐던 머리를 긁적이며, 메이슨이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 탄탄대로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