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탄대로 (3) >
“... 하여, 지난달에도 확인된 것만 일흔 명이 넘는 영지민들이 다닐렌츠 쪽으로 넘어간 것으로...”
“이런 제기랄!!!”
콰앙-!!!
영지 서기관의 보고를 듣던 한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주먹으로 앉아 있던 책상을 후려친다.
바렌부르크 영주, 폴커 야닝스(Volker Jannings) 남작.
올해 나이 쉰여섯, 반백의 머리칼을 하고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중년의 사내인 그는 최근 빠른 속도로 늘고 있는 영지민 탈주 현상 때문에 골머리를 썩는 중이었다.
“대체 다닐렌츠 그 거지 같은 촌구석에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넘어가는 거야?”
폴커 남작은 지금의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최근 몇 년간 빠르게 발전했다고는 하나 다닐렌츠는 수십 년간 왕국에서 가장 볼품없던 영지로 불렸던 곳.
‘몬스터를 토벌해서 활용 가능한 농지를 대폭 늘렸다고는 하지만...’
당장 경작되고 있는 농지의 크기만 따진다면 바렌부르크도 다닐렌츠에 못지않았다.
즉, 인구 부양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농업 생산량에서는 그다지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그럼 대체 왜?
“제가 파악한 바로는, 다닐렌츠의 세율은 5할이라고 합니다. 아마 그 점 때문에 영지민들이 다닐렌츠로 도망치는 게 아닌지...”
“뭐? 세율이 5할? 버러지 같은 놈들한테 절반이나 퍼준다는 얘기야?”
다닐렌츠 영지의 세율이 5할에 불과하다는 말을 듣고 기함하는 폴커 남작이었다.
“돈 버는 족족 술이나 처먹는 놈들한테 받을 돈의 절반이나 내어준다는 게 말이 되나? 돈을 그냥 땅바닥에 버리는 짓거리 아냐?”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다닐렌츠 영주 이 새끼, 원래 용병 출신이라고 했지? 근본 없는 새끼라 그런지 확실히 개념이 없구만.”
눈앞에 상대가 있다면 잘근잘근 씹어먹기라도 할 듯한 표정으로 다닐렌츠 영주를 욕하는 폴커 남작.
바렌부르크의 서기관은 그런 주군의 말에 냉큼 동조해 얼굴도 모르는 다닐렌츠의 영주를 헐뜯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심지어 올해 겨우 나이 스물이 되었다고 하니...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가 멍청한 짓을 한 셈입니다. 당장 세율이 절반이라는 말에 혹한 놈들이 많이 몰려들겠지만, 세금을 절반만 걷어서는 별 재미를 볼 수 없을 겁니다.”
“그렇지, 당장은 몰라도 멀리 보면 멍청한 짓거리를 한 거지.”
“예. 나중에 세수가 부족해져 뒤늦게 세율을 올리려고 하면 영지민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힐 겁니다.”
일반적인 이 시대의 영지 세율을 보통이 8할, 심한 곳은 9할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다닐렌츠가 적용 중인 5할의 세율은 그야말로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던 것.
시대의 보편적인 상식을 그야말로 깡그리 무시하는 정책이었기에, 폴커 남작과 서기관 모두 다닐렌츠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 어찌됐건, 내 밭을 갈아줄 노예들을 뺏어간 건 용서할 수 없다.”
“예, 영주님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 영지에서 넘어간 줄 뻔히 알면서도 영지민들을 돌려보내지 않은 것에 대해 죄를 물어야 합니다.”
“흠...”
서기관의 입바른 말을 흡족한 표정으로 들으며, 하얗게 센 반백의 머리를 쓰다듬던 폴커 남작이 선언한다.
“... 군무관을 불러라. 건방진 다닐렌츠의 애송이를 혼내줄 방법을 생각해야겠다.”
***
다닐렌츠의 주도 키르헨에서 약 두 시간 정도 말을 달려 닿을 수 있는 곳.
다각, 다각, 다각...
다가오는 겨울을 맞아 녹음을 잃어가는 들판의 한 가운데를 한 떼의 인마(人馬)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저기... 저 언덕으로 올라가 봅시다.”
“예, 영주님.”
일행의 선두에 선 나의 말에, 바로 옆에서 따라오고 있던 중년의 사내가 공손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군무관, 발터 브라운(Walter Braun).
행정과 실무를 포함한 다닐렌츠의 모든 군사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책임자이자, 영지가 자랑하는 베테랑 기사였다.
일행 모두가 내가 가리킨 언덕 쪽을 향해 천천히 이동하는데, 한발 앞서 언덕 위로 말을 달렸던 나의 호위 기사 아드리안이 양손을 들어 머리 위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인다.
위험 요소가 없다는 신호.
그게 아니어도 어지간한 위험 요소는 일신의 실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나였지만, 그래도 미리 확인해 나쁠 것은 없다.
“흠... 멀리서 보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시야가 좋군요. 올라와 보길 잘 했네요.”
“예, 그렇습니다.”
사방으로 탁 트인 시야.
주도 키르헨으로 향하는 가도에 가까운 위치도 마음에 들었다.
“브라운 경.”
“예, 영주님.”
“여기, 어떻습니까?”
앞뒤를 뚝 잘라먹은 불친절한 질문이었으나, 발터는 내 말이 뭘 뜻하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감제고지(瞰制高地: 적의 움직임을 살피기에 적당한 높은 지대)로 삼기에 아주 적당해 보입니다.”
“역시, 경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 베테랑 기사의 연륜이 나를 즐겁게 했다.
“이곳에 오십 명의 병사들이 머물 수 있는 막사 시설을 갖춘 요새를 세우도록 하세요. 영지 순찰대의 전진 기지로 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매번 말하는 내용이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에 머무는 병사들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잠자리와 취사 시설에 공을 들이세요.”
“명심하겠습니다.”
“시설이 완공되면, 경께서 직접 와서 확인하세요. 영지의 수뇌부들이 이곳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병사들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예, 영주님. 그리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기대하죠.”
믿음직스럽게 대답하는 발터에게 싱긋 미소를 보여준 뒤, 나는 모두에게 말했다.
“자, 이제... 집으로 돌아갑시다.”
***
“아, 오라버니! 이제 돌아오셨어요?”
키르헨으로 돌아온 나를 아름다운 미소로 맞이해주는 한 사람.
예상치 못한 삶의 전개로, 나와 남매지간이 된 소녀, 니나였다.
“영주님, 다녀오셨습니까?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 파스칼. 우리 니나 잘 가르쳐주고 있었나?”
니나와 함께 있던 금테 안경의 사내, 파스칼 긴터가 내가 깊이 허리를 숙인다.
니나와 파스칼이 함께 앉아 있던 책상 위엔 수많은 종이가 놓여 있었는데, 모두 영지의 재무(財務)와 관련된 문서들이었다.
그 문서들은 다닐렌츠의 재무관인 파스칼이 니나에게 영지의 재무와 관련된 지식을 가르치기 위해 가져온 일종의 ‘교재’로, 갖가지 복잡한 숫자들이 쓰여 있었다.
“그래, 니나.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니?”
비단처럼 부드러운 니나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내가 물었다.
그러자 곤란한 눈빛으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는 니나.
참, 우리 니나는 저런 표정을 지어도 예쁘다.
가히 사기적인 미모라 할 수준이었다.
“어... 열심히 하고는 있는데요...”
“근데?”
“... 너무 어려워요. 제가 좀 멍청한가 봐요.”
“뭐? 하하하하!”
스스로를 멍청하다고 말하며 울상을 짓는 니나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큰 웃음을 터트렸다.
몇 달 전, 나는 파스칼을 비롯한 영지의 수뇌부들을 불러 니나에게 영지 운영과 관련된 지식을 가르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영주인 내가 자리를 비우는 상황이 생겼을 때, 나를 대신하여 영지 운영을 담당해줄 니나를 위한 지시였다.
하여 영지의 수뇌부들은 한 달씩 돌아가며 니나에게 자신들의 전문 분야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지난달엔 서기관 세르지오에게 행정 서무 지식을 배웠고 이번 달은 파스칼의 차례였다.
“아무래도 재무 관련 지식이 어려운 편이지. 그래도 멍청하다는 얘기는 하지 마라. 듣는 선생님 속상하시겠다. 안 그래, 파스칼?”
“하하하, 맞습니다. 가르치는 학생의 좌절만큼 선생님께 가슴 아픈 일은 없지요.”
“앗... 죄, 죄송해요, 재무관님.”
깜짝 놀란 얼굴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 시늉을 하는 니나였다.
“아닙니다. 제가 더 쉽고, 재미있게 가르쳐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네, 재무관님. 저도 더 열심히 배울게요.”
“그럼... 영주님도 오셨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요? 아가씨,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아, 네! 재무관님, 오늘 수고 많으셨어요!”
부스럭거리며 책상 위의 문서들을 쓸어 담는 파스칼에게 인사하는 니나.
허리를 마주 깊이 굽히는 것으로 니나의 인사를 받은 파스칼이 내게도 고개를 숙여 보인다.
“그럼, 두 분 말씀 나누십시오. 저는 이만...”
“고생했어 파스칼, 가서 푹 쉬어.”
“예, 영주님.”
그렇게 파스칼이 떠나간 뒤, 나는 니나와 함께 책상 앞에 앉았다.
함께 오늘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 얘기하며 시간을 보내다, 문득 생각이 난 것인지 니나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근데... 오라버니. 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예전엔 나에게 ‘오빠’라는 호칭을 썼던 니나.
하지만 내가 영주의 자리에 오른 이후엔 예를 차려야 한다며 오라버니라는 달라진 호칭을 쓰기 시작했다.
‘쩝, 나는 오빠라는 소리가 더 좋은데...’
하지만 나의 위치가 달라진 만큼 작은 것에서부터 격식을 차려야 한다는 니나의 말 자체는 틀린 것이 없었기에, 얌전히 달라진 상황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어, 그래. 뭐가 궁금하니?”
“음, 세율이요.”
“세율?”
“예.”
“흐음... 세율이 궁금하다라, 정확히 어떤 게 이해가 안 간다는 거야?”
“우리 영지의 세율이요, 5할이잖아요?”
“음, 그렇지? 근데 그게 왜?”
“너무... 낮은 것 같아서요.”
“너무 낮다고?”
“예. 오라버니께서 영지민들을 생각하시는 마음은 알겠지만, 세금을 적게 거둬서 그만큼 영지의 살림이 어려워지지 않겠어요? 차라리 예전만큼 세를 거두고, 그렇게 모인 돈으로 우리가 영지민들을 위한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는 게 영지 발전을 위해 낫지 않을까요?”
예쁜 눈을 반짝이며 그렇게 답하는 니나.
그런 니나의 눈을 한동안 미소로 바라보다, 나는 설명을 시작했다.
“음, 그래. 그런 방법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영지민들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기회를 주고 싶었단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기회요? 어...”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는 표정이었기에, 나는 좀 더 친절한 설명을 해주기로 한다.
“자, 생각해봐. 예전엔 세율이 8할이었기 때문에, 밀 농사를 지어서 밀 10포대가 나오면 8포대를 영주에게 바치고 2포대만을 농사지은 영지민이 가져갈 수 있었지.”
“네, 알고 있어요.”
“2포대의 밀은 말 그대로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양이지. 굶어 죽지는 않겠지만, 배부르게 먹을 수도 없는 그런 양... 하지만, 지금은 어떠니? 예전과 달리 5할의 세를 거두니까, 곡식이 남는 사람들이 생겼겠지?”
“예.”
“이제 다닐렌츠의 영지민들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어. 남은 곡식을 아껴두려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냥 당장에 배부르게 먹으려는 사람도 있겠지. 그리고 그 남은 곡식을 다른 이에게 팔아 돈을 마련하려는 사람도 나올 거야.”
“아...”
내가 하는 얘기를 들으며 뭔가를 깨달은 것일까?
니나의 눈동자에 별빛 같은 반짝임이 어린다.
“과거에 그저 먹고 사는데 급급했던 사람들이 심리적인 여유가 생기고, 그로 인해 다른 소비 활동을 시작하면 새로운 시장이 열리게 되는 거야. 생존에 급급하지 않은 삶, 단순히 먹고 사는 것 이상을 원하는 마음... 나는 우리 다닐렌츠에 그런 변화를 만들어내고 싶거든.”
“그게... 가능할까요?”
“다행히 지금까진 꽤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듯하구나. 너도 파스칼에게 이것저것 들어서 알겠지만, 키르헨 시장만 해도 1년 만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규모가 커졌거든.”
내 말을 들은 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아, 네. 아까 들었어요. 상인들의 숫자가 배로 늘었다면서요?”
“그래. 만약 영주인 내가 무조건 이렇게 해라, 하는 식으로 일을 진행했다면 이렇게까지 빠른 발전을 이루진 못했을 거야. 단순히 시장의 덩치는 키울 수 있겠지. 하지만 물건 파는 사람도, 사려는 사람도 없었을걸?”
무릇, 시장(市場)이란 위정자 개인의 의지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파는 물건과 사려는 돈이 모두 존재해야 성립이 가능한 사회적 공간이었으니까.
나는 이곳 다닐렌츠의 사람들에게 삶의 여유를 선사하고, 그 여유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것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그 욕망으로부터 비롯된 사회 발전의 선순환(善循環).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영지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뭔가... 어려운데,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아요.”
“지금 당장 모든 걸 다 이해하려고 하진 마라. 시간은 많으니까.”
“네, 오라버니. 열심히 배우고 공부해서 저도 다닐렌츠에 도움이 되는 인재가 될 게요!”
“그래, 말만 들어도 아주 든든하구나. 하하하!”
학습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는 니나를 보며 나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몇 년 후, 내가 영지를 떠나 전장에 나설 때가 오면 나를 대신해 영지를 다스려야 할 니나였기에, 그녀의 발전은 나에게도 그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이었다.
‘보자... 시간이 얼마나 남은 거지?’
천천히, 머릿속으로 남은 시간을 헤아려본다.
‘1, 2... 그래, 이제 4년 남았구나.’
<로스트 킹덤>의 가장 뜨거운 무대가 될 ‘그 사건’이, 이제 4년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 탄탄대로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