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04화 (100/197)

< 영지전 발발 (1) >

해가 지나 신성력(神聖歷) 786년 3월.

겨우내 불던 찬 바람이 잦아들고 따뜻한 봄 햇살이 조금씩 내리쬐던 어느 날.

“그, 급보입니다!!!”

평화로웠던 다닐렌츠 전역을 강타한 소식.

전쟁이 시작되었다.

***

“... 지금까지 알려진 정보에 따르면, 라엔슈타인 요새로 진격해온 바렌부르크의 병력은 약 2천가량인 것으로 파악됩니다.”

영주 저택에서 급하게 소집된 영지 수뇌부 회의.

전반적인 회의 진행을 맡은 군무관 발터 브라운과,

서기관 세르지오,

재무관 파스칼 긴터,

마지막으로 다닐렌츠의 영주인 나, 데미언 카릴베르크까지.

다닐렌츠 영지의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네 사람이 모두 모였다.

무거운 회의실의 분위기.

당연했다.

자정이 넘은 깊은 새벽, 피를 토할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을 달려온 전령이 전한 단 한 줄의 소식.

[바렌부르크, 다닐렌츠 침공.]

그 충격적인 내용 앞에 심각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다른 이들과 나의 차이점이 있다면...

‘... 바렌부르크 새끼들, 내 이럴 줄 알았지.’

그것은 바로, 내가 바렌부르크의 침공을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는 점이겠지.

‘원래 바렌부르크가 전쟁을 일으키는 시기는 지금이 아니었는데...’

내 기억 속, 그러니까 <로스트 킹덤> 원작 소설에서 바렌부르크가 다닐렌츠를 침공하는 시기는 신성력(神聖歷) 787년 봄이었다.

하지만 내가 바꾼 역사의 흐름 때문일까?

현실에선 그보다 1년이나 일찍 바렌부르크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하긴... 전쟁의 원인이 된 바렌부르크 영지민의 이탈이 소설 속 시점보다도 더 빨리 진행되었으니, 바렌부르크 측의 인내심도 더 빨리 떨어진 것이겠지.’

소설 속에 묘사된 바렌부르크의 영주, 폴커 야닝스 남작은 성격이 급하고 매우 탐욕스러운 인물이었다.

그는 왕국 북서부 지역을 기반으로 광산업을 운영하는 야닝스 가문의 장자로 태어났다.

여러모로 좋지 못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상인의 피는 부모에게 제대로 물려받았는지, 젊은 시절부터 돈 냄새를 맡는 감각만큼은 기가 막힌다는 평을 들었다.

그는 가업인 광산업 외에도 여러 불법적인 사업에 손을 대었고, 젊은 나이에 어마어마한 재산을 모았다.

그리고 그의 나이 마흔 살이 되던 해, 왕국 북서부 지역의 대귀족 중 하나인 안할트 백작을 찾아가 그때까지 모은 거의 모든 재산을 바쳤고, 그 대가로 바렌부르크 남작의 작위를 얻었다.

‘대체 돈을 얼마나 많이 갖다 바쳤길래 귀족 작위를 살 수 있는 거지?’

나이 마흔에 귀족 작위를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모았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토록 어마어마한 돈을 가져다 바칠 만큼 귀족 신분에 대한 열망이 높다는 것도 신기했다.

내가 있던 세상에서는 그저 돈이 최고였는데 말이지.

아무래도 다른 세상에서 넘어온 내가 신분제가 뿌리 깊게 자리잡힌 이곳 세계에서 나고 자란 이들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어려운 것이겠지.

바로 그때,

“저... 영주님?”

“음? 어?”

상념에서 깨어나 주위를 살펴보니, 회의에 참석했던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아... 미안합니다. 잠깐 생각 좀 하느라. 우리 어디까지 얘기했죠?”

“침공을 시작한 바렌부르크 측의 병력이 2천 명 정도 될 것이란 얘기까지 했습니다.”

“2천이라...”

백작 이상의 대귀족들이 엮인 전쟁도 아니고, 그저 고만고만한 남작령끼리 얽힌 전쟁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엔 양측의 병력을 모두 합쳐 2, 3천 정도면 꽤 많은 축에 속했다.

즉 바렌부르크가 동원한 2천이라는 숫자는 꽤 대단한 수준의 병력이라고 봐야 했다.

“적은 라엔슈타인 요새를 노리고 있는 거겠죠?”

나의 질문을 들은 군무관 발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예, 맞습니다. 영주님. 바렌부르크 방면에서 우리 영지를 침공한다면 라엔슈타인을 두고 돌아갈 길은 없으니까요.”

“흠, 라엔슈타인에 2천이라... 날 풀리자마자 바로 움직인 걸 보니 겨울 내내 준비를 했군요. 용병들 사느라 돈을 꽤 많이 썼나 봅니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바렌부르크가 동원한 이천이라는 병력이 모두 정규군은 아닐 것이다.

많이 잡아봐야 전체 병력의 2할가량, 즉 4백 명 정도가 바렌부르크의 정규군일 것이고 나머지는 죄다 돈으로 끌어모은 용병들일 터.

“라엔슈타인에 지금 병력이 얼마나 있습니까?”

“현재 라엔슈타인 요새에는 5백 명의 정규군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5백이라...”

발터의 대답을 듣고 나니 한결 걱정이 가라앉는다.

단단한 요새에 들어앉아 수성(守城)하는 우리 측 5백 명의 병력.

한데 그 5백 명은 그냥 5백 명이 아니다.

무려 ‘리트베르크의 수호신’이라 불렸던 사나이, 백전노장 데론 베르켈이 지휘하는 5백 명이었다.

그들은 바렌부르크 측에서 돈으로 급하게 긁어모은 어중이떠중이 용병 5천 명과도 바꾸지 않을 정예 중의 정예.

고작 2천 명의 허술한 병력으로는 단기간에 라엔슈타인 요새의 성벽을 넘을 수 없을 것이다.

뭐, 그렇다고 데론에게 알아서 버티라고 손 놓고 있겠다는 얘기는 아니고.

“군무관, 지금 즉시 라엔슈타인으로 지원군을 보내겠습니다. 병력은... 영지군 5백에 용병은 천 명.”

“도합 천오백이군요.”

“지금 즉시 키르헨 용병 길드를 통해 전투에 파견할 용병을 동원하세요. 즉시 출발 가능한 5백을 추려 라엔슈타인 요새로 보내고, 추가로 동원 가능한 병력은 키르헨 내에서 대기시키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파스칼.”

“예, 영주님.”

나름 부름에 즉각 응답하는 재무관 파스칼이었다.

“다닐렌츠 상단을 통해 라엔슈타인 요새로 군수물자를 보낸다. 준비해.”

“알겠습니다. 군수물자의 수량은 어느 정도로 할까요?”

“요새에 있는 5백에 여기서 지원으로 보내는 천오백, 도합 이천 명의 병력이 한 달간 농성(籠城)한다는 가정하에 보급 계획을 세운다. 자세한 계획은 군무관과 상의해 진행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렇게 파스칼에게 지시를 내린 뒤, 내가 마지막으로 시선을 향한 이는...

“세르지오.”

“예, 영주님.”

영지의 서기관, 세르지오였다.

“이 회의가 끝나는 즉시 카르셀에 있는 아르미엔토 경에게 상황을 전하고 키르헨으로 불러들이도록 하세요. 최대한 빨리 도착해야 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아르미엔토(Armiento)’란, 얼마 전 새로이 작위를 받아 다닐렌츠의 기사가 된 엔리케에게 내가 친히 내려준 성(姓)이었다.

어디가 이질감이 느껴지는 아르미엔토라는 성은, 펠리노어 왕국이 아닌 멀리 대륙 남서부 에이다르 왕국 식의 작명법을 따른 결과였다.

엔리케의 부모가 에이다르 왕국 출신의 이민자 출신이었기에, 특별히 신경을 써서 지은 성이었다.

“영주님, 아르미엔토 경을 라엔슈타인으로 보낼 생각이십니까?”

내가 세르지오에게 내린 지시의 내용을 들은 군무관 발터가 질문을 던졌다.

엔리케의 귀신 같은 활 솜씨를 잘 알고 있는 발터였기에,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르미엔토 경은 저와 함께 다른 곳으로 갑니다.”

“다른 곳? 아니, 어디를 가신다는 건지...?”

이유를 묻는 그의 눈빛에, 나는 힘 있는 목소리로 답했다.

“장담컨대, 루테니아 역시 이번 전쟁에 참전할 겁니다. 우리의 모든 신경이 라엔슈타인 요새 쪽으로 쏠린 틈을 타 남쪽에서 치고 들어올 테죠. 아르미엔토 경을 불러들이는 것은 그 상황을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루, 루테니아가 말입니까?! 하지만 루테니아와 바렌부르크는 관계가 좋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데...”

“큰 이익 앞에선 적과도 손을 잡는 법 아니겠습니까? 분명 바렌부르크와 루테니아는 모종의 합의를 했을 겁니다. 우리 다닐렌츠가 가진, 여러 이권을 나눠 먹자는 식의 논의가 두 영주 간에 이루어졌을 테죠. 최근 몇 년간 우리 영지의 발전 때문에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곳들이니까요.”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 두 영지가 손을 잡고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과한 걱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렌부르크라면 모를까, 루테니아는 저희 측과 그렇게 사이가 나쁘지 않은...”

“아니요, 루테니아는 반드시 쳐들어옵니다.”

“허어...”

마치 바렌부르크 영주와 루테니아 영주가 만나서 얘기하는 모습을 보고 오기라도 한 듯 확신에 찬 나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은 군무관 발터.

잠깐의 침묵 후, 겨우 정신을 차린 그가 나에게 묻는다.

“... 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입수하신 것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영주님 말씀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내용 자체가 너무 엄청나서...”

“그게... 흠, 설명하자면 깁니다. 복잡하기도 하고요. 지금 제 말이 너무 무책임하게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저를 믿고 이 위기 상황에 대처해주시길 바랍니다. 부탁드립니다, 군무관.”

“... 알겠습니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발터의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 미안합니다, 군무관. 나로서도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네요.’

이거 다, 제가 책에서 봤던 내용이거든요.

***

며칠 후, 영지 군무관 발터 브라운이 직접 가려 뽑은 영지군 정예 병력 5백에 용병 천을 더한 도합 천오백 명의 지원 병력이 키르헨 도시 외곽에 집결했다.

지원 병력을 이끄는 지휘관은 데론 베르켈의 취임 이전 라엔슈타인 요새의 사령관이었던 베테랑 기사 에르발트 베링(Erwald Behring)이었다.

그는 머리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강철 투구를 쓰고, 단단한 오크 가죽 갑옷으로 온몸을 빈틈없이 가린 강인한 인상의 사내였다.

커다란 전마(戰馬) 위에 올라타 늠름한 눈빛을 보여주고 있는 베링에게,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것을 신호로 하여,

“... 다닐렌츠, 진군(進軍).”

베링의 입에서 진군을 알리는 명령이 떨어졌다.

“진구우우우우우우운!!!”

뿌우우우우우우우-

뒤이어 일선 장교들의 날이 선 외침과 진군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리고,

“움직여! 움직이라고 이 새끼들아!!!”

“어떤 새끼가 출발부터 얼어있어?! 지금 말해, 지금 말하면 멀리 안가고 여기서 죽여준다!!!”

“영주님이 보고 계신다! 발 똑바로 맞춰 이 새끼야!!!”

“힘차게 걸어라!!! 창 똑바로 들어 이 새끼야!!!”

병력 사이사이에 배치된 베테랑 고참 병사들의 살벌한 욕설도 들렸다.

“드디어 출병(出兵)이군요.”

조금씩 멀어지는 병사들의 뒷모습을 보며 꺼낸 내 말에, 옆에 서 있던 군무관 발터가 입을 열었다.

“예, 영주님께서 빈틈없이 지시를 내려주신 덕분에 아주 빠르게 지원 병력을 모아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하하, 저는 그저 군무관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지시했을 뿐입니다.”

“부족한 저의 의견을 믿고 따라주시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내가 전한 치하의 말에 겸손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이는 발터였다.

“남부 전선으로 갈 추가 병력도 되도록 빨리 준비해주십시오.”

“예, 그리하겠습니다. 한데...”

“...?”

“라엔슈타인으로 보낸 용병의 숫자가 천명에 달했던지라, 남쪽으로 보낼 병력 수급은 다소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지금 모인 숫자는 어느 정도입니까?”

나의 질문을 받은 발터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 이제 겨우 백 명을 채웠습니다.”

“백 명이라...”

확실히, 적다.

용병을 제외하고 키르헨에 남은 정규군 병력은 이제 삼백 명 남짓.

전과 비교해 몰라보게 커진 키르헨의 규모를 생각하면, 사실상 그 정규군 병력은 도시 방위를 위해 손댈 수 없다고 봐야 했다.

즉, 루테니아가 침공해올 남쪽 방면으로 보낼 수 있는 지원 병력은 돈으로 고용한 용병이 전부라는 것.

그것을 알고 있는 발터이기에 저토록 곤란한 표정을 짓는 것이겠지.

하지만...

“백 명이라, 적당하군요.”

그 백 명의 병력을 이끄는 사람이 다름아닌 ‘나’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하, 하지만 영주님! 병력이 너무 적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군무관. 카르셀에서의 일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발터 역시 카르셀에서 내가 해낸 일을 들었을 것이다.

홀로 도시를 지배하던 ‘밤의 형제단’ 병력을 모조리 도륙해버린, 그 날의 일을 말이다.

“... 혼자서도 오십이 넘는 병력을 상처 하나 없이 쓰러뜨린 접니다. 심지어 이번엔 백 명의 병력에, 귀신 같은 활 솜씨로 저를 도와줄 아르미엔토 경도 함께 싸울 텐데 뭘 그리 걱정하십니까?”

“그렇지만... 아, 아닙니다. 뜻대로 하시길.”

더 이상의 걱정은 영주인 나를 모욕하는 것임을 깨달은 발터가 조용히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나저나...”

나는 서서히 멀어지는 병사들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저 멀리 도시 카르셀이 있을 남쪽을 바라보았다.

“... 엔리케 이 양반, 언제 오는 거야?”

< 영지전 발발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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