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05화 (101/197)

< 영지전 발발 (2) >

“쏴라아아아아-!!!”

투투투투투투투퉁!!!

전장 지휘를 책임지는 선임 장교의 외침과 함께 수백 발의 화살이 동시에 발사된다.

본격적인 공성(攻城)을 시작하기 전, 수성(守城) 측의 기세를 꺾는 중요한 사전 공격 작업이었다.

쐐에에에에에엑!!!

무서운 속도로 하늘을 가로지르는 화살들.

목표는 눈앞에 보이는 성벽 위, 굳은 표정으로 아래를 바라보는 적의 병사들이다.

그러나...

“저, 저, 저게 뭐야?!”

그런 공격 측의 의도가 무색하게도, 요새를 지키는 수비군 측은 화살 공격에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화살이 날아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성벽 위의 병사들이 꺼내든 방패가 그 공격을 깔끔하게 막아냈기 때문이다.

텅! 터터텅! 텅! 터텅! 텅! 터터텅!

병사 한 명의 몸을 넉넉하게 가릴 수 있는, 널찍한 크기의 방패에 화살이 쉴 새 없이 내리꽂힌다.

소리는 요란했지만, 방패 아래 병사들에겐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한 화살 공격.

그 모습을 본 공격 측 지휘관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 이런 씨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성벽으로 날리는 화살 한 발 한 발이 모두 돈이었다.

일개 병사라면 모를까, 부대의 지휘관쯤 되면 단순히 전투의 결과뿐만 아니라 그 과정과 ‘비용’까지도 세세히 따지게 되는 법.

화살을 쏘는 족족 방패에 틀어박혀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그야말로 돈 지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썅! 사격 중지시켜!”

지휘관의 성난 목소리를 들은 일선 장교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궁수들의 사격을 중지시킨다.

“사격 중지! 사격 중지이이이이!!!”

“그만! 그만 쏘라고 이 병신 새끼들아!!!”

“너 이 새끼야! 활 안 내려놔? 뒤질래?”

사격 중지 명령이 떨어진 이후로도 미처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 병사들에 의해 화살 수십 발이 더 성벽을 향해 날아갔지만, 역시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짧은 순간 쏟아부은 수백 발의 화살만 아깝게 된 셈이다.

“사령관님, 어떡할까요?”

성벽을 지키는 적들의 기를 죽이려 기세 좋게 화살 비를 퍼부었건만, 되레 아군의 사기만 꺾여버렸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겨우겨우 씹어 삼킨 공격 측의 지휘관, 바렌부르크의 기사 켈 슈펭글러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부하 장교의 물음에 답한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이 새끼야? 용병 놈들 앞으로 돌격시켜! 쪽수로 밀어붙이라고!!!”

“알겠습니다!”

상관의 윽박지름에 쭈그러든 자라목이 된 부하 장교가 명령 전달을 위해 달려나가고, 켈은 이글거리는 시선을 돌려 성벽 위를 바라보았다.

“후우... 이거 어째 시작부터 꼬이는 기분인데? 좆 같네, 씨발.”

***

“흔들리지 마라!!! 놈들은 결코 이 성벽을 넘을 수 없다!!!”

바렌부르크 군이 쏟아낸 화살 공격을 간단하게 막아낸 수비 측 지휘관, 라엔슈타인 요새의 사령관 데론 베르켈이 위엄 어린 목소리로 성벽 위의 병사들을 독려한다.

몇 달 전, 영주의 명령으로 라엔슈타인의 모든 병사에게 일괄적으로 보급된 방패가 그 역할을 톡톡히 한 덕에 아군의 사기가 치솟고 있었다.

“사령관님! 놈들이 사격을 멈췄습니다!”

“계속 쏴봤자 화살 낭비라는 걸 깨달았을 테지. 곧 성벽으로 돌격해올 테니, 대응을 준비해라.”

“알겠습니다!”

턱-!

오른 주먹을 왼쪽 가슴 윗부분에 강하게 부딪히며 사령관 데론에게 군례를 올린 장교가 빠른 걸음으로 명령 수행을 위해 달려나간다.

“흠...”

성벽 아래 저 멀리,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 적병의 움직임을 살피던 데론이 긴장으로 바짝 말라붙은 입술을 손으로 쓸어낸다.

올해로 나이 60이 된 자신이다.

이제는 일선에서 은퇴하여 남은 생을 편안히 보낼 궁리를 하는 게 더 어울릴 나이.

하여 데론은 은퇴 계획을 밝히고, 자신을 대신해 라엔슈타인 요새의 지휘를 맡아줄 사람을 보내 달라 청했다.

그러나...

‘어휴, 은퇴라니요? 아직 한창이신데요!’

새로이 다닐렌츠의 주인이 된 손주 뻘의 어린 영주는 몇 달 전 어마어마한 양의 군수품과 함께 직접 라엔슈타인 요새까지 찾아와 자신의 은퇴를 만류하며 이렇게 말했다.

‘안됩니다, 은퇴는 안 돼요! 제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니, 흙이 들어가도 아직은 안 됩니다!’

‘허허허, 영주님. 농이 지나치십니다.’

‘농이라니요! 베르켈 경, 저 태어나서 지금처럼 진지했던 적이 없습니다.’

‘허허, 이제는 늙어서 눈도 어두워지고, 손발 쓰는 것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뒷방 늙은이에게 미련 버리시고, 젊고 유능한 사람을 찾아 이 자리에 앉히시지요.’

‘하하하! 세상 다 찾아봐도 방금 베르켈 경께서 제게 하신 이야기만 한 엄살은 없을 겁니다. 늙다뇨, 대체 누가 그런 말을 베르켈 경에게 한답니까? 여전히 제 눈엔 세상 둘도 없을 실력과 풍부한 경험을 두루 갖춘 기사 중의 기사로 보이십니다!’

‘영주님...’

자신의 늙고 주름진 손을 두 손으로 꼭 쥐어가며 연신 찬사를 늘어놓던 다닐렌츠의 새로운 영주, 데미언 카릴베르크 남작.

결국 그 진심 어린 간절함에 발목이 잡힌 데론은 은퇴 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 은퇴를 미루길 잘했군.’

오늘의 상황을 마주하고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영주님에게 받은 은혜를 갚을 기회가 온 거다.’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인연이었다.

백작령 바덴하임의 침공을 받아 속절없이 무너지던 그의 고향 리트베르크.

도시의 모든 것이 불타오르던 그 혼란의 밤, 데미언과 그의 동료들은 데론과 그의 어린 주인이었던 니나, 제자인 아드리안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그 뒤로 버니언 산맥으로부터 이 머나먼 왕국의 변방에 자리한 다닐렌츠 영지에 이르기까지, 말로 전한다면 몇 날 며칠을 이야기해도 시간이 모자랄 만큼 많은 일이 있었다.

수없이 많은 적과,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렀다.

그리고 그 거듭된 위기 속에서 나이와 경력에 비해 기이할 정도로 강했던 데미언의 검은 언제나 빛났다.

그 빛이, 모두를 구했다.

“... 이렇게, 군신(君臣)의 관계까지 될 줄은 몰랐지만.”

처음 리트베르크에선 영지 군무관과 일개 용병의 사이로 만났던 두 사람.

허나, 지금은 그 상하 관계가 역전되어 영지의 절대자인 영주와 그의 명령을 받는 봉신(封臣)의 관계가 되었다.

“그래서, 인생이란 게 참 재밌는 거지.”

남아 있는 날보다 지나온 날이 훨씬 더 많은, 지금의 이 나이가 되어도 인생이란 늘 알 수 없는 것.

새삼스러운 삶의 진리를 곱씹으며, 데론은 천천히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촤앙!!!

“오늘,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내일도,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간악한 적들 앞에, 다닐렌츠는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백전불굴(白戰不屈)의 노장, 기사 데론 베르켈의 우렁찬 외침.

그리고 그런 상관의 외침에 응답하는 병사들의 천둥 같은 함성과 함께,

“가자, 오늘 성을 떨어뜨린다!!!”

“싹 다 죽여! 죽여 버려어어어!!!”

“와봐, 이 씨발 놈들아아아!!!”

“드루와, 드루오라고 이 새끼들아!!!”

훗날, 다닐렌츠의 소금 광산을 노리고 시작됐다 하여 ‘소금 전쟁’이라 이름 붙여진 왕국 북서부 3개 영지의 거대한 혈투(血鬪)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바인호프(Bainhof) 요새는 루테니아에서 다닐렌츠로 들어오는 남부 접경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바인호프 요새를 통과하면 다닐렌츠의 최남단 도시 린츠브론(Linzbronn)이 나오고, 그곳에서 북쪽으로 하루 거리에 남부 최대의 도시인 카르셀이 있다.

‘동부에 라엔슈타인이 있다면 남부엔 바인호프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다닐렌츠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요충지(要衝地)에 존재하는 군사 요새였는데, 그 전략적 가치에 비해 규모는 그다지 볼품없는 수준이었다.

새로운 요새 사령관인 데론 베르켈의 부임 이후 거듭된 확장 공사를 거쳐 현재 1천여 명까지 동시 주둔 가능한 수준의 규모로 성장한 동부 라엔슈타인 요새와 달리 바인호프 요새는 200명이 수용 가능한 병력의 한계였다.

심지어 요새에 실제로 주둔하는 병력의 수는 고작 100명 정도에 불과했는데, 그나마도 내가 영주에 취임한 이후 늘린 것이었다.

예전엔 병사 50명이 배치된 인력의 전부였다지 아마?

“... 저, 영주님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바로 그 바인호프 요새로 향하는 길.

나와 함께 키르헨에서 급하게 고용한 백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이동 중이던 다닐렌츠의 기사, 엔리케 아르미엔토가 조심스럽게 일행의 선두에 선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 엔리케. 뭔데요?”

용병에서 기사로 신분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내겐 ‘친한 형님’이라고 할 수 있는 엔리케.

그런 만큼 그를 대하는 내 말투엔 편안함이 묻어났다.

반면 엔리케는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아니 많이 불편해진 것 같지만...

‘... 어쩔 수 없지. 명색이 귀족인데, 예전 용병대 막내 대하듯 함부로 반말을 깔 수는 없는 거니까.’

겔베르트도 꽤 고생하다가 요즘은 내게 존댓말 쓰는 것에 익숙해졌으니, 엔리케도 알아서 잘 적응하겠지.

그나저나, 뭐가 궁금하길래?

“뭐요, 불렀으면 얘길 해봐요.”

“아, 저, 그... 바인호프 요새 말입니다.”

“예.”

“‘동부에 라엔슈타인이 있다면 남부에는 바인호프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요한 요충지라는데... 거긴 왜 그렇게 규모가 협소한 겁니까? 라엔슈타인 요새는 꾸준히 확장해서 지금은 굉장히 커졌는데...”

“아, 그건 또 말 못 할 이유가 있죠.”

“... 말 못 할 이유, 말입니까?”

“예, 그래서 못 알려 드려요.”

“아니, 그...”

“왜요, 억울합니까? 그럼 영주하시던가.”

“크흠...! 아닙니다. 제가 어찌 그런 생각을...”

“왜요? 예전처럼 막 때리고 싶어요? ‘건방진 막내 시키야!’ 막 이러면서?”

“아, 아닙니다! 제가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 불경한 생각은 하지도 않았습니다. 커흐음!”

예전 같았으면 냅다 오른손을 뻗어 나의 뒤통수를 노렸을 엔리케.

하지만 지금의 나는 과거의 후배 용병이 아닌 영지 내 모든 이들의 생사여탈권을 한 손에 쥔 영주이자 자신이 충성을 맹세한 주군이었다.

애써 웃는 표정을 지으며 묵묵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엔리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 미안해요, 엔리케. 이건 정말로 나만 알고 있어야 하는 내용이거든.’

그 시기는 정확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루테니아가 바렌부르크와 손잡고 다닐렌츠로 쳐들어올 것이란 미래를 알고 있었다.

하여 바렌부르크 방면의 침공을 저지할 라엔슈타인 요새에 어마어마한 자금을 퍼부어 규모를 키우고, 시설을 개선했다.

하지만 루테니아 방면의 방어를 담당하는 바인호프 요새 쪽에는 주둔 병력만 조금 늘렸을 뿐, 시설 투자는 거의 지시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루테니아 영지와 우리 영지의 관계가 나쁘지 않아 전쟁의 위협이 거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속내는 달랐다.

‘라엔슈타인 요새처럼 제대로 보강했다가 루테니아 영주 그 쫄보 새끼가 안 쳐들어오면 낭패니까...’

그랬다.

루테니아의 영주인 라르스 제르펠트(Lars Zehrfeld) 남작은 탐욕이 철철 흘러넘치는 바렌부르크의 영주 폴커 야닝스 남작과 달리 보신(保身)의 성향이 강한 사람.

만약 바인호프 요새의 규모를 라엔슈타인 요새처럼 키우고 주둔 병력의 수도 수백 단위로 늘렸다면 언감생심 쳐들어올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루테니아 쪽으로 진출할 수가 없게 된다.’

라엔슈타인 요새가 바렌부르크의 공격을 버텨주는 동안 루테니아 방면으로 치고 나간다는 대전략을 준비한 내 입장에선 무조건 루테니아가 우리 쪽으로 쳐들어와야 했다.

‘루테니아의 선제공격을 유도해 정복 전쟁의 명분을 확보하는 거지.’

나의 이런 생각을 곧이곧대로 영지의 수뇌부들에게 늘어놓았다간 미친놈 소리를 듣기 딱 좋았다.

앞서 군무관인 발터만 하더라도 내가 엔리케와 함께 남쪽으로 가겠다는 얘길 했을 때 ‘루테니아가 바렌부르크와 손을 잡을 리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하여, 나는 그 설마 하는 상황을 유도하기 위해서 바인호프 요새를 ‘먹기 좋은 상태’ 그대로 놔두었다.

그리고 마침내...

“영주님, 전방에 루테니아 군으로 추정되는 병력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척후 임무를 담당했던 병사의 보고에, 나는 굳은 표정으로 유지하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결국, 그 소심하고 겁 많은 루테니아의 영주가 내가 준비한 미끼를 문 것이다.

< 영지전 발발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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