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06화 (102/197)

< 영지전 발발 (3) >

“저긴가? 바인호프 요새가?”

호화찬란한 은빛의 플레이트 메일을 차려입은 기사 하나가 큼직한 군마 위에 올라타 전방을 바라본다.

“예, 기사님. 맞습니다.”

기사의 곁에 있던 큼직한 덩치의 사내 하나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한다.

통일감 없이 제멋대로 챙겨입은 갑옷과 허리춤에 주렁주렁 달린 각종 무기의 모습을 보건대 용병인 듯싶었다.

한데, 이상한 것은 용병의 대답을 들은 기사의 반응이었다.

“이 새끼가!”

퍽!

“커흐윽!!!”

말 위에 올라탄 자세에서 그대로 발을 뻗어 용병의 등판을 걷어차는 것이 아닌가?

“으으...”

그 예상치 못한 일격에 바닥에 엎어진 용병이 신음을 흘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얼굴 가득 불쾌한 감정을 담은 기사는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용병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기사님이 아니라 사령관님이라고 똑바로 불러라. 한 번만 더 실수하면 목을 베겠다.”

“어, 예! 제가 실수했습니다, 사령관님! 부디 용서를...”

“멍청한 놈!”

말을 섞는 것조차 불쾌하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린 기사가 다시 시선을 돌려 정면에 보이는 요새를 바라본다.

“... 반나절이면 떨어뜨릴 수 있겠군.”

요새라고는 하나 끓는 기름을 쏟아낼 웅장한 성벽이나 화살비를 퍼부을 높은 망루 따윈 보이지 않는다.

그저 건장한 사내의 키보다 조금 더 큰 수준의 나무 장벽을 둘러치고, 그보다 조금 더 높게 세운 감시탑 몇 개가 존재할 뿐이다.

“멍청한 놈들...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고 저 지랄들인지.”

멀리서 본 바인호프 요새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분주해 보였다.

감시탑 위로 병사들이 오르내리고, 텅텅 비어 있던 나무 장벽 위를 다닐렌츠의 깃발을 든 병사들이 다급하게 채운다.

그들도 본 것이다.

루테니아의 깃발을 휘날리며 요새로 접근 중인 자신들의 병력을 말이다.

“저기 주둔하고 있는 놈들, 백 명 정도가 다라고?”

“예, 그렇습니다. 사령관님!”

직전에 기사의 발에 걷어차여 바닥을 굴렀던 용병이 이번엔 유독 ‘사령관님’이라는 호칭에 힘을 주어 대답한다.

그 대답이 마음에 든 것인가?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띤 기사가 힘이 실린 목소리로 말한다.

“오늘 저녁은 저곳에서 먹는다. 공성(攻城)을 준비해라!”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

“젠장! 루테니아 놈들이 쳐들어올 줄이야...”

바인호프 주둔군의 지휘관, 다닐렌츠 영지군 소속의 장교 하랄트가 긴장으로 하얗게 뜬 얼굴을 거듭 쓸어내리며 말했다.

동부 라엔슈타인 요새로 바렌부르크 놈들이 쳐들어왔다는 소리는 들었다.

바렌부르크는 그 전부터 호시탐탐 다닐렌츠 침공의 기미를 보인 놈들이기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렇게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전쟁 발발 사실 자체에 놀라긴 했어도 아예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으니까.

반면, 루테니아의 침공은 달랐다.

그야말로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역사상 다닐렌츠와 루테니아는 군사적 충돌을 벌인 사례 자체가 드물었다.

하여 두 영지의 접경지대에 자리한 바인호프 요새의 병사들은 자신들을 외적(外敵)의 침입에 대비하는 방위군이라기보다 루테니아로 향하는 가도 주변의 몬스터와 도적들을 처리하는 순찰 경비대 정도로 생각했다.

애초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의 수도 백 명밖에 되지 않으니, 조금 규모 있는 경비대 정도라고 생각한 게 틀린 것도 아니리라.

“... 아무리 적게 잡아도, 오륙백 명 이상은 되어 보입니다.”

멀리, 다닐렌츠와 루테니아를 잇는 가도를 따라 접근 중인 적병의 수를 가늠해본 부하 한 명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하랄트에게 말했다.

“영지군에 용병에... 하, 시발. 많이도 몰려왔네.”

눈앞이 아찔하다.

어쩌면 오늘 이곳이 자신의 무덤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될 수도 있는 게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되겠지.

다행인 것은 요새 내에 주둔 중인 백 명의 병력이 군기 빠지고 전투력이 볼품없는 초짜들은 아니라는 것.

현 다닐렌츠 영주인 데미언 카릴베르크 남작이 다닐렌츠 상단주로 일하던 시절부터 대대적으로 시행해온 몬스터-도적 토벌 작전의 영향으로 현재 다닐렌츠 영지군 소속 병사들의 실전 경험은 충분히 쌓여 있었다.

적어도 전투 상황이 벌어졌을 때 긴장하고 겁먹어서 아무것도 못 할 바보들은 아니란 얘기다.

‘... 하지만, 적이 너무 많아.’

병력의 ‘질’은 아군이 높지만, 그걸 상쇄할 정도의 ‘양’을 보유한 적군이었다.

아무리 실전경험이 많은 병사라도 눈먼 칼 서너 개가 동시에 찔러오면 속절없이 당한다.

그걸 극복하고 적을 제압할 수 있다면 일개 병사가 아니라 기사라 불리고 있을 것이다.

“후우우...”

도무지 답이 없는 상황에 하랄트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던 그때,

“대, 대장님!!!”

“... 뭐야?”

뒤쪽에서 허겁지겁 달려와 그를 부르는 한 병사의 목소리.

그런 병사를 하랄트가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는데, 놀라지 않고는 못 배길 소리가 돌아온다.

“여, 영주님이 오셨습니다!!!”

***

“다행히 딱 맞춰서 도착했군.”

병사들이 열어준 바인호프 요새의 후문으로 들어서며 내가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바, 바인호프 주둔군 지휘관, 다닐렌츠 영지군 소령 하랄트가 영주님을 뵙습니다!!!”

요새 정문 근처 감시탑에서 다급하게 뛰쳐 내려온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바닥에 황급히 엎드리며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낯이 익은 얼굴, 낯이 익은 이름이었다.

“소령 하랄트.”

너무 친근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차갑지도 않은 목소리로 바닥에 엎드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예, 영주님!”

“일어나게. 지금은 전시(戰時)이니, 그렇게까지 과한 예를 차릴 필요는 없으니.”

“알겠습니다!”

벌떡!

엎드리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몸을 일으키는 하랄트.

덩치만 큰 줄 알았는데 몸도 날랜 것이, 마음에 드는 녀석이다.

하랄트, 이름을 기억해두어야겠다.

“감시탑으로 올라가 직접 적을 살피겠다. 앞장서라.”

“예, 제가 모시겠습니다.”

하랄트의 안내를 받으며 엔리케와 함께 감시탑에 올랐다.

멀리 공성 준비에 한창인 적군의 모습이 보였다.

대충 봐도 우리 측 병력의 몇 배나 되어 보이는 숫자였다.

“적의 규모는? 파악되었나?”

“7백에서 8백 정도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용병이 대부분이고, 루테니아 영지군은 전체 병력의 2할에서 3할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도 한 2백 명 정도는 보냈나 보군. 루테니아의 ‘겁쟁이’ 놈이 꽤 무리를 했어.”

내가 언급한 ‘겁쟁이’란 다름아닌 루테니아의 영주 라르스 제르펠트 남작을 이르는 말이었다.

어지간해선 다른 영지로의 군사적, 외교적 도발을 하지 않고 그저 루테니아 내정만 신경 쓰는 것으로 유명한 그였다.

좋게 말하면 평화주의자이고, 나쁘게 말하면 겁쟁이 성향의 군주이겠지.

그런 이가 영지군 병력을 무려 이백 명이나 보내어 우릴 공격한 것을 보면 바렌부르크 영지 측에서 제안한 내용이 상당히 달콤했던 모양이다.

‘... 그래, 나움가르트의 소금 광산이 어지간히 탐났겠지.’

원작 소설의 내용을 꿰고 있는 나는 바렌부르크가 루테니아 측에 전쟁의 참여 대가로 제안한 조건을 알고 있다.

바로, 나움가르트에 있는 소금 광산의 소유권을 반씩 나누자는 내용이었다.

소금 광산이 지닌 어마어마한 경제적 가치를 생각하면 제르펠트 남작이 군사를 움직인 것도 이해가 됐다.

‘새끼들, 나움가르트에 소금 광산 말고 철광석 광산도 있다는 걸 알면 놀라서 기절하겠네.’

나움가르트에 소금 광산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왕국 북서부에 널리 알려졌지만, 철광석 광산의 존재는 아직까지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나는 철저한 보안 유지를 위해 철광석 광산에서 근무하는 광부들과 상단 직원들의 숙소를 나움가르트 외곽 지역에 따로 건설하고, 그곳에서만 생활하게 했다.

그리고 해당 숙소엔 입이 무겁고 믿을만한 이들로 가려 뽑은 영지군 병사들을 여럿 배치해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지켰다.

당연히 철광석 광산 근무자들은 휴가도 제한 되었고, 밖에 나가 술을 사 마실 수도 없었다.

가족을 포함한 누구에게도 철광석 광산의 존재를 발설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만약 정보가 새어나가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 당사자는 참수형을 당할 것이고, 주변 사람들 역시 가혹한 심문을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을 거듭 강조했다.

다소 가혹한 처사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내 생각과 달리 사람들은 이런 나의 조치에 별다른 반발을 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이곳은 영주가 영지민들을 자기 마음대로 부리는 것이 당연히 여겨지는 세상이었으니까.

‘이전에 살던 세상이었으면 권력에 미친 독재자나 할 짓인데...’

이럴 때마다 새삼 내가 중세 판타지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물론, 이런저런 생활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대신 그들에겐 일반 광부, 일반 상단 직원들의 서너 배나 되는 급료를 챙겨주었다.

무릇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은, ‘충분한 양의 돈’이 개연성으로 작용하는 법이었으니까.

아무튼, 이야기는 다시 바인호프 요새의 감시탑으로 돌아온다.

“... 전투를 준비해라. 곧, 공성이 시작될 것이다.”

“예, 영주님!”

“혹시, 요새 내에 기병이 있나?”

“기병... 말입니까? 중장기병은 없고, 척후 임무를 띠고 배치된 경기병이 8기 있습니다.”

“8기... 있으나 마나 한 숫자군.”

돌아온 대답을 들으며 쓰게 웃자, 나의 반응을 접한 하랄트가 크게 송구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친다.

“죄, 죄송합니다!”

“무얼. 자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나, 다 내가 잘못 판단한 거지. 루테니아 놈들이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미리 병력을 충원해두는 건데... 뭐, 지난 얘기는 됐고.”

고개를 돌려 엔리케를 바라본 내가 말했다.

“기병이 없으니, 그냥 나 혼자 나가야겠군. 엔리케, 엄호 사격 확실히 해주고.”

“예, 영주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보이는 족족 머리통에 바람 구멍을 내주겠습니다.”

“누가 더 많이 잡나 내기하자고. 그럼...”

“자, 잠깐! 영주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중간에서 나와 엔리케의 대화를 듣던 하랄트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다.

나는 그런 그에게, 무심한 표정을 답했다.

“공성이 시작되면, 나는 밖으로 나가 적을 요격할 거다. 이해가 됐나?”

“요, 요격? 영주님 혼자서 말씀이십니까?”

뭔가 잘못 들었다는 표정으로 재차 질문하는 하랄트.

툭툭-

나는 그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며 대답했다.

“그래. 왜? 안 될 게 있나?”

마치 산책이라도 다녀온다는 듯, 가벼운 목소리였다.

***

끼이이이이-

“무, 문이 열립니다!!!”

바인호프 요새의 정문이 천천히 열리는 것을 본 병사 하나가 큰소리로 외쳤다.

공성 준비를 마친 병사들에게 돌격을 명령하려던 루테니아 군의 사령관, 기사 카딤 베르덴의 눈에 의아함이 깃든다.

“뭔... 이 새끼들, 바로 항복하려는 건가?”

지금 이 상황에서 바인호프 요새의 문이 열린다면, 항복 의사를 전달하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고작 백 명 남짓한 병력을 가지고 성 밖으로 기어 나와서 회전(會戰)을 벌이는 건 그야말로 자살행위였으니까.

한데, 이어진 상황은 루테니아 군의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그림이었다.

다각, 다각, 다각...

“... 뭐야 저거?”

열린 문을 통해 나온 것은, 단 한 기의 기병이었다.

커다란 전마(戰馬)에 올라타고, 제법 값이 나가 보이는 사슬 갑옷에 서코트를 걸친 채 오른손에 커다란 장창 한 자루를 들고 있는 인물.

차림새로 보아 기사 같은데...

“저 새끼, 뭐야? 우리랑 혼자 싸우기라도 하려고 나온 거야? 푸흣!”

가장 앞 열에 서 있던 용병 하나가 머릿속으로 떠오른 생각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풋!”

“미친 새끼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푸하하하하!”

“야, 네가 왕국제일검도 아니고 혼자서 뭘 하겠다고 나오냐? 푸흐흣!”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전염되는 것이 웃음이라고 하던가?

최초의 웃음이 터져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루테니아 군 전체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쐐에에에에에엑-!!!

그 모두의 웃음을 삼켜버릴 정도로 크고 날카롭게 울려 퍼진 의문의 파공성.

그리고,

퍼어어억!!!

어디선가 날아온 큼지막한 철시(鐵矢) 한 발이 가장 먼저 배를 잡고 웃었던 용병의 머리통을 꿰어버렸다.

스르륵, 철퍼덕!!!

철시에 담긴 힘이 어찌나 강했는지 용병의 머리통은 철퇴로 후려친 듯 으깨졌고, 그는 비명 한 마디 지르지 못한 채 힘없이 바닥에 엎어졌다.

즉사였다.

“뭐, 뭐야!?”

“시발, 어디야?! 어디서 쏜 거야!?!”

황망한 표정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루테니아 군.

그리고 이내 모두는 그 무자비한 화살의 주인을 찾을 수 있었다.

“영주님, 제가 ‘선빵’ 날렸습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하하하하!!!”

바인호프 요새의 나무 장벽 위, 어지간한 사람의 키만큼이나 커다란 장궁을 들고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는 사나이.

엔리케 아르미엔토.

귀신도 울고 갈 기가 막힌 활 솜씨로 기사의 작위까지 받아낸 그 사내가 성벽 아래 외로이 서 있던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곧, 담담한 목소리의 대답이 들려온다.

“눈 똑바로 뜨고 엄호 사격 잘해. 괜히 내 등판에 맞추지 말고.”

“아이고, 제 실력 모르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지. 알아서 그러는 거야. 나인 거 알고 일부러 맞출까 봐.”

그렇게, 짓궂은 농담으로 팽팽했던 전장의 긴장감을 조금 덜어낸 그가 열려 있던 강철 면갑을 손으로 끌어내린다.

끼긱- 철컹!

그 음산한 쇳소리와 함께,

“... 가자.”

이히이이이이잉!!!

8백 명의 적을 향한, 단 한 사람의 돌격이 시작되었다.

< 영지전 발발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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