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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07화 (103/197)

< 영지전 발발 (4) >

그것은, 실로 경이롭다는 표현이 어울릴만한 광경이었다.

단기필마(單騎匹馬)로 8백 명의 적을 향해 달려든 정체불명의 사내.

콰콰콰콱!!!

힘차게 대지를 박차는 군마의 발끝에 걸린 흙덩이들이 장쾌하게 튀어 오른다.

쿠구궁! 쿠구궁! 쿠구궁!

발끝으로 전해지는 대지의 진동.

“허윽!”

그 떨림을 가장 먼저 느낀 전방의 병사 몇 명이 어깨를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결과가 뻔해 보이는 1 대 800의 격돌.

그러나, 기세 싸움에서 밀려나기 시작한 것은 절대다수의 후자였다.

“하아아아아아아!!!”

어찌 사람이 저렇게 큰 소리를 낼 수 있을까?

듣는 이의 고막을 저릿하게 만들고, 절로 다리 힘이 풀리게 만드는 천둥 같은 함성.

곧, 인간의 몸으로 하늘의 진노(震怒)를 표현해낸 사내가 루테니아 군의 정면으로 돌입한다.

휭! 촤악!!! 휘잉! 푸화아아악!!!

사내의 오른손에 들린 기다란 장창이 한 줄기 폭풍이 되어 사방을 찢고 할퀸다.

멀리 있을 땐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사내의 무기는 단순한 창이 아니라 자루 끝에 큼지막한 칼날을 매단 글레이브(Glaive, 언월도)였다.

시커먼 묵빛의 자루 끝에 달린 시퍼런 칼날이 사내의 앞을 가로막는 적병의 심장을 꿰뚫고, 목을 벤다.

막힘이 없었다.

그리고, 막을 수도 없었다.

“끄아악!”

“케헥!”

“아아아악!!!”

콰콰콰콰콰!!! 콰직! 으지직!!!

집채만 한 덩치를 자랑하는 흑빛의 군마가 창날이 쓸고 간 자리에 쓰러진 병사들의 몸을 무참히 짓밟는다.

인간의 나약한 육신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강대한 짐승의 완력.

말발굽에 밟힌 병사들의 내장이 터지고, 머리통이 부서져 사방으로 시뻘건 피와 살점을 흩날린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음에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파괴적인 광경의 연속.

평범한 인간, 아니 나름 전장의 죽음과 친숙한 용병과 병사들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공포가 파도처럼 밀려와 그들의 숨통을 죄었다.

“야, 튀어! 빨리 튀어, 씨발!!!”

“마, 막아! 막으라고!!!”

“이런 썅! 저걸 어떻게 막냐?!”

“할 수 있으면 네가 막아봐 이 개새끼야!!!”

“난 못해! 차라리 그냥 죽고 말지 씨발!!!”

“가, 같이 가 이 새끼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눈앞에서 치솟는 피 분수에 질겁한 병사들이 너도나도 무기를 거꾸로 쥐고 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파도에 쓸려나가는 모래성처럼,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하는 루테니아 군의 전열(戰列).

무방비로 노출된 그들의 훤한 등판과 목덜미를 새까만 흑마 위에 올라탄 금빛 머리칼의 사신(死神)이 마음껏 찍고 베어낸다.

“이런 미친 새끼들이! 뒤돌아서 싸워라! 도망치지 마라!!!”

“도망치는 자는 즉결 처형이다! 맞서 싸워라! 싸우라고 이 개새끼들아! 명령이다!!!”

“자리 지켜! 움직이지 마라! 자리를 지켜라아아!!!”

엉망진창이 된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루테니아 영지군의 일선 장교들과 동원된 용병대의 고참들이 악을 썼지만, 될 일이 아니었다.

사람의 의지로 몰려드는 폭풍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카악- 퉷! 이 씨발 놈들이!!! 내 손에 뒤지고 싶냐? 도망치지 말고 싸우라...”

푸화아악!!!

도망치는 부하들에게 분노 섞인 침을 내뱉으며 전투를 독려하던 용병대장의 머리통이 쪼개진다.

아니, 머리통만 쪼개진 것이 아니라 몸통 자체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의 정수리에 떨어진 큼지막한 창날이 가슴을 지나 명치까지 깊게 파고들었던 탓이다.

“으아아아아! 대장이 죽었다!!!”

“이런 니미, 저런 괴물이랑 어떻게 싸워?!”

“야, 빨리 튀자! 이미 글러먹었어!”

“야잇, 밀지 마! 이 씨발 놈아!!!”

싸움을 독려하던 자신들의 대장이 참혹하게 두 조각나 죽는 것을 목격한 용병들은 더는 고민하지 않았다.

이제 도망쳤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었다.

‘살고 싶으면 지금 도망쳐야 한다!’

몇 푼 안 되는 돈보다 자신의 목숨을 더 귀히 여기는 용병들의 생존 본능이, 지금 이 순간 강하게 발현되었다.

***

루테니아 영주, 라르스 제르펠트 남작은 이번 전쟁을 준비하며 한 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바로 값싼 용병대를 여럿 고용해 다닐렌츠 침공군에 포함 시킨 것이었다.

제대로 전쟁을 치러본 경험이 없으니 전장에서 값싼 용병대 여럿보다 값비싼 용병대 하나가 제 값을 한다는 것을 알 턱이 없는 그였다.

어차피 쪽수만 채우면 되는 것 아니냐며 싼값으로 후려쳐 사방에서 긁어모은 싸구려 용병들.

겉보기엔 여느 정예병 못지않게 든든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루테니아의 주도, 프롤린에서 다닐렌츠로 출병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제르펠트 남작은 속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어차피 소모품으로 한 번 쓰고 버릴 놈들인데, 굳이 비싼 놈들을 데려다 쓸 필요가 있나?’

남작이 품었던 그 의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바로 지금 이곳에 펼쳐지고 있었다.

“야이, 씨발! 똥 밟았다! 빨리 튀어!!!”

“야야, 같이 가 이 새끼야아!!!”

“에이 썅! 어쩐지 어제 꿈자리가 사납다 싶었다!”

“그쪽 아니야 병신아! 이쪽으로 가야 한다고!”

“으으, 시발! 내가 앞으로 다닐렌츠 쪽으론 오줌도 안 싼다! 으아아!”

800명에 달하는 루테니아 측 병력의 대다수를 이루던 용병들.

전투 시작 전까지만 해도 개선장군처럼 기세등등하던 그들이 눈앞에 당도한 거대한 재앙 앞에 겁먹은 아이처럼 머리를 감싸 쥐고 사방으로 도망친다.

전황이 아무리 불리해도 전장에서 물러서지 않고, 맡은 바 임무를 끝까지 완수하는 용병의 미덕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추태였다.

용병의 몸값이란 그들이 손에 쥔 무기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투에 임하는 마음가짐에 주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제르펠트 남작.

만약 그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용병계의 유명한 격언인 ‘가장 비싼 용병이 가장 싼 용병이다’라는 말의 진의(眞意)를 깨달을 수 있었을 테지만, 아쉽게도 그는 지금 여기 없었다.

아니, 어쩌면...

여기 없는 게 다행일 수도 있다.

허약한 양 떼 틈에서 마음껏 날뛰는 저 금빛 사자의 용맹을 직접 목격했다면, 안 그래도 콩알만 한 그의 심장이 더욱 쪼그라들었을 테니까.

***

다가닥! 다가닥! 다각, 다각, 다각...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았던 폭풍이 서서히 잦아든다.

“푸르릉! 푸흥!!!”

용광로처럼 달아오른 몸을 식히며 거친 숨을 토해내는 흑마.

말의 체력이 다한 것일까?

아니면, 말을 이끄는 이에게 어떤 문제가 생겨서?

‘허약한 양 떼’, 루테니아 측엔 아쉽게도 나의 돌진이 멈춘 이유는 그 둘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내가 멈춘 이유.

그건, 나의 눈앞에 더는 짓밟을 적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예상은 했지만, 진짜 개판이네.”

앞서 바인호프 요새의 지휘관, 하랄트의 안내를 받아 감시탑 위에 올랐을 때.

꽤 먼 거리에 떨어진 적들이었지만, 나는 내게 허락된 초인적인 시야로 그들의 면면을 세세하게 살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바인호프 요새를 점령하겠다며 기세등등하게 몰려온 이놈들이, 실은 돈 몇 푼에 불려온 싸구려 용병들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냐고?

‘... 모를 수가 있나. 내가 그동안 먹은 짬밥이 있는데.’

과거 수년간 용병 업계에서 직접 뛰고 구르며 열심히 활동했던 나였다.

심지어 내가 속했던 용병대 ‘푸른 방패’는 실력이나 그 신용 면에서 모두 한 영지를 대표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던 곳.

그런 곳에서 ‘진짜배기’들과 몇 년을 함께하다 보니, 이제 싸구려 용병과 진짜 한 가락 하는 용병들은 서 있는 자세만 봐도 구별할 수 있었다.

그래서 확신했다.

이따위 허접한 놈들 따위, 몇백 명이 아니라 몇천 명이 몰려와도 혼자 쓸어버릴 수 있다고.

그리고, 결과는 보다시피...

“흠, 어디 보자... 이제 한 2백 명 정도 남았나?”

처음과 달리 휑해진 요새 앞의 들판.

저 멀리 숲속으로, 언덕 너머로 부리나케 도망치는 용병과 영지군 병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얼마나 군기가 개판이면 단 한 사람의 돌격에 이렇게 박살이 날 수가 있을까?

“... 라기엔, 내가 좀 많이 쓸어버리긴 했네.”

바인호프 요새로부터 내가 서 있는 곳까지.

일직선으로 길게 그어진 핏빛의 지옥이 보인다.

바닥을 나뒹구는 시체들.

주인 잃은 머리과 반 토막이 난 몸통들, 잘려나간 팔다리.

차 한잔 마시기에도 부족한 짧은 시간이었으나, 족히 백여 명의 적들을 베어냈다.

단 한 사람이 만들어낸 광경이라기엔 지나치게 잔혹한 그림이요, 믿기 힘든 결과였다.

“푸릉! 푸르르!!!”

“워워, 착하지. 그래그래.”

적들을 짓밟으며 느낀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것인지, 연신 바닥을 긁으며 투레질을 하는 흑마의 갈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얼핏 보면 자신의 말과 교감하는 다정한 주인의 훈훈한 모습일 터.

그 행동만 보면 무척 훈훈한 광경이겠으나, 말과 사람 모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적들의 피로 시뻘겋게 물든 모습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

“자, 블리츠. 한 번 더 해보자.”

‘번개(Blitz)’라는 의미를 지닌 흑마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며, 나는 천천히 말머리를 돌렸다.

아직 남아있는 적들을 향해, 다시 한번 죽음의 공포를 선사하기 위해서.

***

“저런 미친...!”

다닐렌츠 침공군 사령관, 루테니아의 기사 카딤 베르덴의 두 눈동자가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처럼 잘게 떨린다.

그는 방금 가을날 농부의 낫에 걸린 밀알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병사들의 머리통을 보았다.

곡식 자루를 노리다 걸린 쥐새끼들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치는 용병들의 모습도 보았다.

무엇보다 단숨에 루테니아 군의 전열을 돌파하여 하나로 뭉쳐 있던 병력을 두 동강 내버린 정체불명의 사내를 보았다.

같은 피와 살로 이뤄진 인간이라기엔 믿기지 않는 무용(武勇).

두려움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망토 자락으로 애써 감춘 베르덴이 부하들에게 물었다.

“저, 저게 누구냐? 바인호프... 아니, 다닐렌츠에 저런 기사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허나, 돌아오는 대답이라고는 죄다 쓸모없는 것들뿐이다.

“저,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어떡합니까, 사령관님?!”

“남은 병력이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이대로라면...!”

“사령관님, 퇴각을! 퇴각을 해야합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나 같이 머저리 같은 답변으로 일관하는 부하들.

물론, 루테니아 영지군 장교들이 능력적으로 크게 뛰어나지 않은 건 사실이었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들이 유달리 멍청하고 모자라서 빚어진 상황이 아니었다.

상대가 문제였다.

상대가, 너무 강한 게 문제였다.

“젠장, 어디서 저런 괴물 같은 게 튀어 나와서...!”

말 그대로 바인호프 요새의 문을 열고 홀로 ‘튀어나온’ 존재.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아니 애초에 자신들처럼 이름이 붙은 인간이 맞나 싶은 압도적 강함을 보여준 정체불명의 기사.

그 기사가, 말머리를 돌렸다.

목표는 아마도...

“어, 어어? 이쪽으로 오는 것 같습니다! 흐어어!”

루테니아 군의 사령관인, 베르덴 자신.

“마, 막아라! 어서 막아! 저놈이 이쪽으로 오지 못하게 해!”

기사로서의 체면도, 사령관으로서의 위엄도 모두 내던진 베르덴이 비명을 지르듯 명령했다.

“흐아아아아!!!”

휘우웅- 카캉! 푸화악!!!

군인으로서의 한 가닥 의무감이 남아있던 것인지, 베르덴의 명령을 받고 용감히 달려나갔던 기병 장교 한 명이 목 없는 시체가 되어 낙마했다.

그가 처절한 심정을 담아 휘둘렀던 검 역시 상대의 묵빛 창 자루에 부딪혀 무참하게 깨어졌다.

말라 비틀어진 우물 바닥에 남은 몇 방울의 물처럼 간신히 남아있던 희망마저 날려버리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저, 저런!”

“시발, 도망쳐! 도망치라고!”

도저히 막아낼 수 없는 상대가 전하는 무자비한 공포의 전염.

“으으으으!!!”

콰콰콰콰콰콰콱!!!

금빛 사신의 말발굽 소리가, 베르덴의 눈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 영지전 발발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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