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테니아 (1) >
“나, 나는! 루테니아 제일의 명문, 베르덴 가(家)의 적자이자 영주이신 라르스 제르펠트 남작님께 기사의 작위를 받은 몸이다! 그에 맞는 예를 갖춰 대하라!!!”
루테니아의 다닐렌츠 침공군 사령관, 카딤 베르덴이 성난 목소리로 연신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그가 소리를 지르건 말건, 주변 그 어떤 사람도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마치 ‘너는 짖어라, 우린 할 일을 하겠다’라는 식의 분위기.
그 철저한 무시가 카딤을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이이...! 내 말이 안 들리는 것이냐! 요새의 지휘관을 불러라! 나와 대화를 나눌 격을 갖춘 이를 데려오란 말이다!”
그의 현 상황은 실로 비참했다.
그가 그토록 자랑했던, 은빛의 풀 플레이트 메일은 어디로 갔는지 지금은 그저 안쪽에 받쳐 입었던 누런 빛의 갬비슨만 입고 있었다.
뿐인가, 손목과 발목, 허벅지까지 모두 밧줄로 꽁꽁 묶여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자신을 보좌하던 루테니아 군 장교 몇 명이 카딤 자신과 비슷한 꼴로 묶여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악을 쓰는 카딤과 달리 현재 상황에 체념한 듯, 멍하니 땅바닥만 바라보며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제대로 된 선전포고도 없이 일으킨 침략 전쟁에서 패배해 포로로 잡힌 그들의 끝이 그다지 좋지 못할 것이란 사실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하지만 그런 부하들과 달리 카딤은 기사 작위를 받은 준 귀족의 신분.
적의 손에 포로로 잡혔다고 한들,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는 그였다.
‘씨발, 어쩌다가 내가 이 꼴이 돼서... 하!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전투의 마지막 순간, 그는 상대의 공격에 당해 말에서 떨어진 후 정신을 잃고 기절했다.
그리고 눈 떠보니 이 지경이었다.
‘이런 미친놈들! 기사인 나를 일개 병사들처럼 대우해?!’
그는 자신이 이렇게 일개 병사처럼 밧줄에 묶여 흙바닥에 방치되고 있는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그가, 손발이 묶인 볼품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연신 입을 놀렸다.
“다닐렌츠는 왕국의 법도조차 따르지 않는 무례한 이들이란 말인가? 항복한 기사에게는 응당 그 격에 맞는 대우를 해야 옳다! 어서 이 밧줄을 풀고 내가 머물 방으로 안내해라!”
어지간히 감정이 올라온 것인지, 얼굴이 붉게 변하고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목소리를 높이는 루테니아의 기사 카딤.
하지만 그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다닐렌츠 군 장병들은 그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 뿐 별다른 조치를 해주지 않았다.
바로 그때,
“음? 어... 저기! 이보게! 다닐렌츠의 기사여!”
“...?”
근처를 지나던 낯익은 인상의 기사를 발견한 카딤이 애타게 그를 불렀다.
그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발걸음을 멈추고 카딤을 바라보는 기사.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빈틈없이 갑옷을 차려입고 있음에도 가려지지 않는 전신의 탄탄한 근육.
그리고, 그 장대한 체구에 걸맞지 않은 미소년 풍의 얼굴까지.
틀림없었다.
홀로 800명에 달하는 루테니아 군을 궤멸시킨, 바로 그 괴물 같은 실력의 기사가 분명했다.
“... 뭐지? 할 말이 있나?”
“어, 그게...”
막상 불러놓고 보니, 본능적인 두려움에 목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으, 뭐야 이거?’
밧줄로 꽁꽁 묶어 놓은 손발이 잘게 떨리기 시작한다.
마치 열병에 걸린 듯, 전신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오한.
눈앞의 저 기사가, 홀로 800명이나 되는 자신의 병력을 깨부수던 그 무시무시한 광경이 기억난 탓이다.
‘...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수준의 미친 실력자다.’
다른 건 둘째치고, 일단 보여준 힘 자체가 같은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대체 뭐로 만든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시커먼 묵빛의 창을 휘두를 때마다 대여섯 명의 병사들이 쪼개지고 부서졌다.
사람한테 ‘부서진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그 표현 말고는 딱히 갖다 댈 것이 없었다.
“이, 이름 모를 다닐렌츠의 기사여, 그대의 초절(超絶)한 무용을 존경하오!”
“...?”
두려움으로 달달 떨리는 입술을 움직여 간신히 첫 마디를 뗀 카딤.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상대는 서 있는 자세에서 천천히 팔짱을 끼며 어디 더 해보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나, 루테니아의 기사 카딤 베르덴! 오랫동안 수많은 전장을 누볐으나 그대와 같은 이는 처음이오!”
“...”
“오늘 보여준 그대의 놀라운 활약은 그 옛날 왕국 모든 적들을 발아래 두었던 ‘사자심왕(獅子心王)’ 카델린 아치 국왕 폐하의 재림을 보는 듯했소! 이 루테니아의 카딤이 힘을 다해 그대와 겨뤄보았으나, 이미 인외(人外)의 경지에 도달한 이의 실력엔 당할 재간이 없구료! 내 사내이자 기사로서 오늘의 결과에 속이 쓰리나, 그대 같은 영웅에게 패배한 것을 다행이자 영광으로 생각하겠소! 그런 의미에서...”
“... 칭찬 고맙군.”
휙-
“...?!”
상대를 한껏 칭찬하여 분위기를 좋게 만든 뒤,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을 풀어달라는 얘기를 하려던 참이었다.
한데 상대는 정작 중요한 얘기는 듣지도 않고 돌아서 버렸다.
“저, 저, 저기! 이보시오! 다닐렌츠의 기사여! 내 말을 끝까지... 에잇! 이보시오! 야! 야아아!”
듣기 좋은 말만 받아먹고 사라져 버리는 상대의 모습에 결국 울컥한 카딤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이런 무도한... 다닐렌츠의 기사는 왕국의 법도조차 무시한단 말인가! 기사란 작자가 어찌 제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고 이토록 상대를 무시하고 핍박하...!”
퍼억-! 철퍼덕!!!
바인호프 요새의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큰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치던 카딤이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바닥으로 얻어진다.
“커흑! 으윽...!”
손발이 묶인 상태였기 때문에, 카딤은 속절없이 바닥에 얼굴을 처박을 수밖에 없었다.
“아, 되게 시끄럽네. 왜 이렇게 손을 쓰게 만드나? 나도 교양있게 살고 싶은 사람이야. 읏차!”
“아흑! 으아아아!”
거친 흙바닥에 부딪혀 입술이 터지고, 코와 볼이 상해 엉망이 된 카딤의 머리채를 잡아 일으키는 한 사람.
짧게 자른 흑갈색 머리 아래 강인한 인상을 지닌 사내.
바로, 다닐렌츠의 기사 엔리케 아르미엔토였다.
“어, 반갑네. 우리가 만난 상황이 좀 좆 같지만, 반가운 건 진심이라고.”
“누, 누구냐?”
“나? 아, 나는 다닐렌츠의 기사, 엔리케 아르미엔토. 성(姓)이 좀 특이하지? 하하하!”
“허억, 허억! 기사? 용병이 아니고?”
한눈에 봐도 기사보단 용병 쪽에 가까워 보이는 엔리케의 모습에, 카딤의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하지만 엔리케는 그 같은 말을 듣고도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어깨를 으쓱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뭐, 얼마 전까지는 용병이긴 했지”
“하, 꽤 실력이 좋은 용병이었나 보군. 기사 작위를 받았을 정도이니...”
“음, 나쁘진 않은 편이지.”
넉살 좋게 카딤의 말에 대답한 엔리케가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얻는다.
“그나저나... 자네 말이야, 너무 시끄러운 거 아냐? 포로면 포로답게, 조용하고 얌전히 있어야지.”
“나는 기사다. 기사는 왕국 어디서든 귀족에 준하는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다. 지금이 설령 전쟁 포로의 신분이라 할지라도!”
“어, 뭐... 그 말이 맞는 말이긴 한데... 지금은 아냐. 그 모가지가 어깨 위에 붙어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한 줄 알아.”
“... 뭐?”
쓰읍, 하며 쓴 입맛을 다신 엔리케가 쭈그리고 앉아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카딤과 눈을 맞춘다.
“그, 이름이 카딤이라고 했나?”
“... 카딤 베르덴이다. 루테니아 제일의 명문가인 베르덴 가문의 적자이며...”
“아이고,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얘긴 하지 말고. 그래, 루테니아의 카딤 베르덴 씨. 당신이 ‘감히’ 검을 들이댔던 사람이 누군지 알아? 응?”
“... 저 기사를 말하는 건가?”
“어, 맞아.”
저 멀리, 바인호프 요새의 지휘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정체 모를 기사의 모습을 곁눈질로 슬쩍 바라본 카딤이 고개를 젓는다.
“모른다. 내게 이름도 말해주지 않더군. 그 실력은 대단하나, 기사로서의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않는...”
“우리 영주님이시다.”
“... ?!”
엔리케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은 카딤의 표정이 멍해진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라는 얼굴.
그의 얼빠진 표정을 본 엔리케가 유쾌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저분이 바로 나의 주군이시자 다닐렌츠의 영주, 데미언 카릴베르크 남작님이시다. 그런 분께 감히 욕을 내뱉고 검을 들이밀었으니, 모가지가 뎅겅 썰려도 할 말이 없는 거지. 안 그래?”
“저, 저, 정말이냐? 저자가, 그러니까 홀로 요새를 뛰쳐나와 우리 루테니아 군을 괴멸시킨 저 기사가 다닐렌츠의 영주라고?”
“아, 이 양반. 속고만 살았나? 딱 보면 몰라? 봐봐,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인사하고, 어려워하는 분위기인 거, 안 보여? 보이지?”
“어으...”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무려 영주씩이나 된 자가, 그런 엄청난 무력을 지니고 있다고?
‘아니, 기본적으로 영주가 전쟁터에 직접 나온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기본적으로 영주, 아니 귀족들이란 제 몸 아끼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이들이다.
단순히 그들이 몸을 사려서, 혹은 비겁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영주란 모름지기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영지에 대한 통치력을 상징하는 존재.
죽는 것은 물론이고 마음대로 다쳐서도 안 된다.
영주가 한 끼라도 밥을 거르면 가신들이 하늘이 무너지는 듯 난리를 치는 것도, 다 영주의 건강이 영지 통치의 정당성과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하여,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전쟁터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괜히 위험한 전쟁터를 어슬렁거리다가 눈먼 화살에 맞기라도 하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젊었을 적 기사로 명성이 자자했던 이들이 영주에 취임한 이후 죄다 점잖게 영주성이나 영주 저택에 처박혀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근데, 영주란 작자가 800명이나 되는 적군에게 혼자서 돌격을 해?’
자신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떠올린 카딤이 헛웃음을 지으며 엔리케에게 말했다.
“다닐렌츠의 가신들은 죄다 미쳤군. 영주가 전쟁터에서 그런 무모한 짓을 하는데 말리지도 않...”
그러다 문득, 싱글싱글 웃고 있는 엔리케의 표정을 보고 깨닫는다.
“... 미친, 너희들은 알았던 거군?”
“응? 뭘?”
“영주가, 800명을 상대로 돌격하고도 무사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야.”
“아, 그거야 뭐...”
자신이 떠올린 생각에 충격을 받아 식은땀까지 흘리며 말하는 카딤을 바라보며, 엔리케가 피식 웃는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냐? 오우거도 혼자 때려잡는 분이 너희 같은 오합지졸 몇백 상대로 털끝 하나 다치겠어? 하하하!”
***
내가 루테니아의 기사 카딤 베르덴을 베어버리지 않은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그가 검을 뽑아 나에게 달려들며 외친 가문의 이름 때문이었다.
“나, 나는 루테니아의 기사 카딤 베르덴이다! 무슨 간악한 술수를 부려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저, 정체를 밝혀라아!”
두려움에 덜덜 떨며 간신히 내뱉은 가문의 이름.
‘베르덴 가문의 자식이군?’
영주의 자리에 오르기 전, 상단 업무를 위해 여러 번 루테니아에 방문한 나였다.
그래서 알았다.
베르덴 가문이 루테니아 제일의 명문가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으나, 일단 뜯어낼 돈은 많은 집구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 살려서 돈이나 뜯어야겠군.’
하여, 나는 들고 있던 창의 방향을 살짝 돌려 날이 아닌 면으로 달려드는 카딤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터어어어어엉-!!!
“크에엑!!!”
마치 철판으로 무언갈 후려치는 듯한 큰소리가 났고, 동시에 루테니아의 기사 카딤은 타고 있던 말 등에서 튕겨 나가 바닥을 구르며 정신을 잃었다.
혹시나 머리부터 잘못 떨어져서 뒈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나름 기사랍시고 운동신경이 없지는 않았는지 떨어지는 와중에 어설프게나마 낙법을 쳐서 즉사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정신을 잃은 카딤과 항복한 루테니아의 병사들을 밧줄로 줄줄히 묶어 바인호프 요새 안으로 데려왔던 거다.
“... 너희 가문이 나와 다닐렌츠에 보여주는 성의를 확인한 후, 너의 처분을 결정하겠다.”
“거, 걱정하지 마십시오! 베르딘 가문이 남작님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엔리케를 통해 나의 정체를 들은 카딤은 몰라보게 비굴해진 모습으로 내게 거듭 고개를 숙였다.
그의 손에는 내가 내어준 종이와 펜이 들려 있었는데, 자신의 가문에 보내는 편지를 쓰는 중이었다.
편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나에 대한 찬양이 대부분이었고 결론적으로는 다닐렌츠 측이 달라는 대로 자신의 몸값을 내어달라는 거였다.
“자, 대충 여기 상황은 정리가 된 것 같으니...”
소금 광산을 노린 루테니아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의 명분은 챙겼다.
이제, 우리 쪽에서 나아갈 차례다.
“엔리케.”
“예, 영주님.”
이제는 제법 기사로서의 태가 나는 엔리케에게,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내일 새벽 동이 트자마자 루테니아 방면으로 출병한다. 그전까지 병사와 용병들의 아침 식사를 끝내놓도록.”
“예, 알겠습니다!”
< 루테니아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