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테니아 (2) >
“이런 씨발!”
와장창!!!
지휘관 막사 구석에 놓여 있던 다탁(茶卓)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져 나간다.
막사의 주인인 바렌부르크의 기사, 켈 슈펭글러(Khel Spengler)가 힘껏 발로 걷어찬 탓이다.
“으으, 제기랄! 젠자아아아아아앙!!!”
콰쾅! 쾅! 와장창!!!
다탁을 발로 차 부숴놓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것인지, 켈은 막사 안의 집기들을 때려 부수며 계속해서 악을 썼다.
라엔슈타인 요새를 지키는 다닐렌츠 군을 상대로 무려 열흘 동안 진행된 공성전(攻城戰).
허나 그 열흘이라는 시간이 흐를 동안 켈이 이끄는 바렌부르크 군은 단 한 발짝도 요새 안으로 발을 내딛지 못했다.
“4백 명... 4백 명! 으아아아아!!!”
와장창!!!
공성이 진행되는 동안 죽거나 크게 다쳐 더는 전투에 투입할 수 없게 된 바렌부르크 측의 병력이 무려 4백여 명.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의 병력이 2천이었으니, 무려 5분지 1에 해당하는 전력이 깎여나간 셈이다.
황당한 것은, 그 열흘의 공성 기간 중 처음 엿새 동안은 요새를 지키는 병력의 수가 불과 5백에 불과했다는 점.
처음엔 전력의 차이가 확연했기에, 큰 어려움 없이 성을 떨어뜨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켈이 이끄는 바렌부르크 군을 상대한 다닐렌츠 군의 지휘관은 바렌부르크 군의 반(半)의 반(半) 밖에 안 되는 그 병력을 가지고도 흔들림 없이 라엔슈타인 요새를 지켜냈다.
그 후 공성 이레째가 되던 날, 다닐렌츠의 주도 키르헨에서 출발한 지원 병력이 라엔슈타인 요새에 도착하면서, 안 그래도 답답했던 전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아니, 이제는 거의 이기기 어려워졌다고 봐야겠지.
“빌어먹을... 빌어먹을! 이 시발! 으아아아아!!!”
와장창!!!
한편, 그야말로 미쳐 날뛰고 있는 켈의 지휘관 막사 앞엔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얼굴을 한 사내 몇 명이 서 모여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바렌부르크 군을 이끄는 장교들이었는데, 전혀 진전이 없는 전황에 군을 물리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막사 안에서 전해지는 흉험한 각종 소음을 듣고선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 다들 돌아가자. 지금은 안 되겠다.”
“예, 알겠습니다.”
가장 선임인 이의 말에 나머지 장교들이 힘없이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신성력(神聖歷) 786년, 3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
“사령관님, 나움가르트에서 군수물자를 실은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음, 아마 석궁용 볼트일 거다. 무기고로 안내해서 담당자에게 인계하도록.”
“알겠습니다!”
보고를 마친 장교가 물러간 뒤,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돌린 라엔슈타인 요새의 사령관 데론 베르켈.
저 멀리, 불어오는 봄바람에 가볍게 나부끼는 ‘침략자’ 바렌부르크 군의 깃발이 보였다.
바람에 힘없이 나부끼는 그 깃발의 모습이, 전에 없이 풀죽은 기색이다.
“보아하니 꽤 급한 성격인 것 같던데... 지금쯤이면 몸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랐을 테지.”
얼굴조차 본 적이 없는 적장이건만, 데론은 상대의 성격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지난 열흘 동안의 전황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요새를 들이쳤던 바렌부르크 군.
오백 대 이천이라는, 수적 우위를 살리려 속전속결을 추구한 것은 알겠으나 그저 기세만 드높았을 뿐 세부적인 전술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공격이었다.
사다리 외엔 제대로 된 공성 장비 하나 없었고, 그저 ‘돌격 앞으로!’만 외치는 막무가내 지시만이 바렌부르크 군이 보여준 전술을 전부였다.
‘... 짐작하건대 너른 들판에서의 회전(會戰)만 치러보았을 뿐, 공성(攻城)의 경험이 없는 지휘관일 것이다.’
데론의 판단은 정확했다.
바렌부르크 군을 이끄는 사령관 켈 슈펭글러는 분명 뛰어난 검술 실력을 지닌 강한 기사였으나, 일군을 이끄는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은 부족한 자였다.
특히나 군을 이끄는 지휘관의 자리에서 공성전을 치러본 경험이 단 한 차례도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회전과 공성의 양상은 완전히 다르지... 그 차이를 모르는 지휘관이 이끄는 군은, 절대 이 데론이 지키는 성벽을 넘을 수 없다.’
피식,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데론의 한쪽 입가가 슬며시 올라가던 그때...
“하하, 무슨 생각을 하시길래 그리 미소를 보이고 계십니까?”
옆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익숙한 목소리.
데론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이를 돌아보았다.
“음, 베링 경.”
“예, 사령관님. 바렌부르크 놈들을 살피고 계셨습니까?”
다닐렌츠의 기사, 에르발트 베링(Erwald Behring).
그는 데론이 부임하기 이전까지 수년간 라엔슈타인 요새의 사령관직을 수행했던 사내였다.
그는 기사치고 키가 작은 편인 데론보다도 살짝 더 작은 체구를 지닌 사내였지만, 용감하고 대담한 성품 탓에 많은 휘하 장병들의 흠모를 받는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뭐, 곧 죽을 놈들 보면서 바람이나 쐬고 있었지.”
“곧 죽을 놈들이라... 사령관님이 말씀하시니, 꼭 그리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허허, 자네가 마냥 단단한 사내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부드러운 구석도 있군. 다 늙은 노인네 어르는 말솜씨가 아주 제법이야.”
“아니, 다 늙은 노인네라니요? 여기 어디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오른쪽 눈 위에 손을 가져다 댄 에르발트가 과장된 동작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시늉을 했다.
다른 이들 앞에선 그저 근엄한 모습만을 유지하는 에르발트였지만, 거의 스무 살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나는 대선배 데론 앞에선 종종 이런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평소에 부하들한테도 그런 모습 좀 보여주지 그러나?”
“그건 좀... 사령관님이야 저보다 경험이며 연배며 훨씬 윗줄이시니 상관없지만, 부하 놈들에겐 어설픈 모습 보이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나한테는 어설퍼도 된다 이건가?”
“어설퍼도 된다기보단... 제가 뭘 해도 어차피 사령관님 눈엔 어설퍼 보일 테니 차라리 마음 편하게 굴겠다, 이런 마음가짐에 가깝습니다.”
“허허, 거참...”
나이 마흔을 넘긴 후배의 재롱 아닌 재롱에 너털웃음을 터트리던 데론.
지난 열흘 내내 유지하던 팽팽한 긴장감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후배와의 대화였다.
“그래, 지난 회의 때 지시했던 건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예, 안 그래도 그걸 말씀드리려 찾아왔습니다.”
“벌써? 쉽지 않았을 텐데... 말해보게.”
데론의 말에 다소 흐트러졌던 자세를 바로 한 에르발트가 군기가 바짝 든 목소리로 보고를 올린다.
“라엔슈타인 요새 주둔군 소속 인원을 제외하고, 제가 키르헨에서 이끌고 온 지원 병력 중 지원자를 받아 마상 전투가 가능한 일백 명의 병력을 추렸습니다. 전원이 출병 대기 상태에 들어갔고, 오늘 밤이라도 당장 작전 투입이 가능합니다.”
“흠, 좋군. 수고했네.”
에르발트의 보고를 듣고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 데론이 다시 고개를 돌려 바렌부르크 군의 진영을 바라보았다.
무슨 명령이 내려왔는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인마(人馬)의 흐름이 보였다.
“... 슬슬 또 움직이려나 보군. 이만 내려가지.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겠어.”
“예, 사령관님!”
***
“저긴가? 올베른 요새가?”
“예, 영주님. 맞습니다.”
나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하랄트.
그는 현재 자신의 원 소속지였던 바인호프 요새를 떠나 루테니아로 향하는 나의 병력에 합류해 있었다.
“우리 측 접경지대에 지어진 바인호프 요새에 대응하기 위해 루테니아 측에서 세운 요새입니다. 주둔 병력은 약 200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군.”
“맞습니다. 저희와 마찬가지로 루테니아 측도 상호 간의 군사적 갈등 발생 방지를 위해 굳이 접경지대에 많은 군사력을 투입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 크흡!”
내게 보고를 하던 하랄트의 목소리가 마지막 순간 잦아들었다.
‘상호 간의 군사적 갈등 발생 방지’를 위해 노력했다던 놈들이, 무려 800명이나 되는 병력을 투입해 우리 영지를 침공한 것이 불과 이틀 전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 이 시발 것들이 진짜... 생각할수록 열 받네. 하랄트 소령, 안 그런가?”
혹시라도 자신의 설명이 나의 심기를 거스른 것을 아닐까 눈치를 보는 하랄트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나는 일부러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농담처럼 물었다.
하지만...
“어, 읏! 죄, 죄송합니다, 영주님!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
뭔가 내가 생각하던 의도와 반대로 받아들인 것 같은 하랄트의 반응.
민망한 기분에 그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슬며시 치우고 다시 정면에 보이는 올베른 요새를 바라보았다.
“바인호프 요새보단 낫군요. 일단 요새 장벽의 높이 자체가 바인호프보다 훨씬 높습니다. 규모 자체도 더 크고요.”
“음...”
날카로운 눈썰미로 올베른 요새의 상태를 파악한 엔리케의 말이었다.
그의 말처럼 올베른 요새를 둘러싼 나무 장벽의 높이는 바인호프보다 훨씬 높았다.
적어도 3층짜리 건물 정도는 되는 느낌?
뭐, 그래 봤자 내가 작정하고 뛰어오르면 못 오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 다른 사람들에겐 충분히 부담스러운 높이지.’
지금 내가 이끄는 병력의 숫자는 총 백오십.
키르헨에서 고용한 용병 백 명에 바인호프 요새에서 하랄트와 함께 데려온 영지군 병력이 오십이었다.
이 병력으로 다른 영지를 먹겠다며 쳐들어가는 게 제정신인가 싶겠지만, 놀랍게도 나를 따르는 이들 중 그 누구도 우리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 모두가 이틀 전 내가 홀로 800명의 루테니아 군을 무너뜨리는 것을 목격한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혼자서도 수백 명의 적을 도륙하는 초인적인 무력의 지휘관을 수장으로 두고 있는 그들의 눈엔 저까짓 나무 장벽을 두른 작은 요새 따위는 눈에 차지도 않을 것이다.
허나, 나의 입에서 나온 명령은 모두의 예상을 벗어난 내용이었다.
“올베른 요새를 우회하여 계속 전진한다.”
“... 예?!”
“여, 영주님?”
하랄트를 포함해 나의 명령에 놀란 몇몇 지휘관들의 눈이 커진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작은 규모라고는 하나 명색이 요새라 불리는 군사적 거점을 내버려 두고 그냥 지나친다는 게 너무나 위험한 판단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영주님, 죄송하지만... 어찌하여 그런 명령을 내리신 것인지, 연유를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연유라?”
“예, 올베른 요새를 그냥 지나친다는 것이 저의 짧은 식견으로는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부디... 어리석은 저를 일깨워 주소서.”
질문을 던진 이는 하랄트였다.
말투 자체는 조심스러웠으나, 결론적으로는 내 의견에 반대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속으로 꽤 놀라움을 느꼈다.
‘이 새끼, 깡 좋은데?’
기사도 아니고 일개 영지군 장교의 신분으로 영주의 의견에 반기를 든다?
성질 더러운 영주였다면 명령불복종으로 그냥 목을 쳐버려도 무방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하랄트의 모습이 기껍게 느껴졌다.
무릇 군 지휘관이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밑에 딸린 부하들의 목숨까지 함께 어깨 위에 지고 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가 이해할 수 없는 상부의 명령에 의문을 품고,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태도였다.
물론, 그런 태도를 받아들이는 윗사람이 어떤 인간인지가 중요하겠지만...
‘... 이번 전쟁 끝나면 계급 올려줘야겠다. 싹수가 보이네.’
앞뒤 꽉 막힌 이 시대의 꼰대... 아니, 귀족들과는 다른 문화, 문명권에서 자란 나는 이런 하랄트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하랄트 소령.”
“예, 영주님.”
“자네가 걱정하는 것은, 우리가 올베른 요새를 지나쳤다가 추후 놈들에게 뒤를 찔릴까 두려워하는 것이겠지?”
“예, 그렇습니다.”
“바로 그게 내가 바라는 것일세.”
“... 예?”
내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하랄트.
그런 그에게, 옆에 있던 엔리케가 툭 던지듯 말을 꺼내놓았다.
“굴속에 처박혀 나오지 않는 너구리를 밖으로 꾀어내려면, 맛있어 보이는 미끼를 흔들어야 하는 법이지.”
“...!”
***
.... 그로부터 하루 뒤.
루테니아의 주도 엘스터로 향하는 가도 위에서,
“영주님! 적입니다! 앞뒤에서 우리 군을 압박하며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적들에게 포위를 당했다.
< 루테니아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