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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10화 (106/197)

< 루테니아 (3) >

“후방에 올베른 요새에서 추격해온 적병들이 나타났습니다! 그 수는 3백 정도로 추산! 약 20분 거리에서 접근 중입니다!

“전방에도 적입니다! 숫자는 약 2백여 명! 30분이면 우리 군과 조우합니다!”

우리 군의 전후방 척후를 담당하는 병사들이 내게로 달려와 다급한 목소리로 적의 출현을 알린다.

올베른 요새를 함락시키지 않고 그냥 지나친 순간부터 이리될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병사가 전한 말 속엔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뭐? 올베른에서 따라온 병력이 3백이나 된다고? 그게 무슨... 대가리 수가 갑자기 왜 늘어난 건데?”

척후병의 보고를 들은 우리 쪽 용병 하나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누구 한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기보단, 답답함에 내뱉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이해는 간다.

분명 올베른 요새의 주둔군은 많아 봐야 2백 명 정도라고 했는데, 우리를 추격해온 병력은 그보다 많은 3백이라 하니 나온 반응이겠지.

웅성거리는 주변의 분위기 속, 용병의 질문을 들은 하랄트가 그럴듯한 추측을 내어놓는다.

“혹시 바인호프 전투에서 도망친 루테니아 군 일부가 올베른으로 향한 것이 아닐까?”

그의 말을 들은 주변 몇몇 이들이 ‘아...’ 하는 짧은 감탄사를 내뱉는 것이 보였다.

나 역시 하랄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인호프 요새 전투에서 홀로 돌진한 나에게 박살 나 사방으로 흩어졌던 8백 명의 루테니아 군.

어림잡아 백 명 정도는 그 자리에서 내 손에 목이 떨어졌고, 그 비슷한 수가 사령관이었던 케딤 베르덴과 함께 포로로 붙잡혔다.

나머지 6백의 병력 중 대다수는 뿔뿔이 흩어져 멀리 도망쳤을 테지만, 일부는 아군이 있는 올베른 요새로 향했을 터.

“... 그러다, 올베른 요새의 지휘관에게 등 떠밀려 억지로 우리 뒤를 따라붙은 거겠지.”

우릴 추격해온 병력의 정체를 확정 짓는 듯한 나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조금은 밝게 변한다.

3백이라는 숫자에 적잖이 긴장했는데, 놈들의 대다수가 나에게 영혼까지 털리고 냅다 도망쳤던 패잔병들이라는 말을 들으니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진 탓이다.

“영주님, 그럼 뒤에서 따라오는 놈들부터 들이치실 겁니까?”

곧 펼쳐질 상황에서의 대응책을 묻는 엔리케에게, 나는 영주다운 위엄이 서린 목소리와 눈빛으로 대답했다.

“아니, 올베른에서 따라온 놈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

“...?!”

뒤쪽에서 접근하는 적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나의 말에 질문했던 엔리케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오랜 전우(戰友)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 그리고 그와 비슷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부하들의 궁금함을 해소해주기 위해 나는 지체하지 않고 설명을 이어나갔다.

“뒤쪽에서 접근하는 놈들 대다수가 바인호프에서 내게 호되게 당한 놈들이다. 8백 명이나 되는 전력을 가지고도 내게 박살이 났는데, 그 절반도 안 되는 병력을 가지고 나를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을 거다.”

“아...”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엔리케였다.

“음,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뒤쪽에서 따라온 새끼들, 영주님이 휘두르는 창에 맞아 뒈질까 봐 무서워서 못 덤벼들 거라는 뜻이죠?”

“... 뭔가 느낌이 많이 달라졌긴 한데, 의미 자체는 정확하다.”

다소 품격은 떨어지지만, 내가 한 설명을 더욱 알아듣기 쉽게 풀이해내는 엔리케였다.

“크, 그럼 일이 간단해졌군요. 앞쪽에서 몰려오는 놈들만 시원하게 때려잡으면 뒤쪽에서 살살 눈치 보면서 따라오던 놈들은 알아서 꼬랑지 내리고 도망갈 거다, 뭐 이런 얘기 아닙니까? 흐흐흐...”

뚜두둑-

말을 마친 엔리케가 굳어있던 손가락을 이리저리 꺾으며 소리를 낸다.

곧 다가올 전투에서의 매서운 활약을 예고하는 듯한 그의 모습이었다.

***

투우우우웅-!!!

나움가르트 산(産) 강철을 수십, 수백 번 망치로 때려 만든 철시(鐵矢) 한 발이 대기를 가른다.

쐐에에에에에엑!!!

공기를 찢어발기는 굉음!

그 소리에서 나무를 깎아 만든 보통의 화살과는 근본부터 다른 위력이 느껴진다.

퍼어억!!!

“크히이이이잉!!!”

철시에 적중당한 군마의 머리가 수박 깨지듯 터져나간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붉은 피와 허연 뇌수.

화살을 맞은 군마는 물론이고, 그 위에 타고 있던 기수 역시 낙마와 동시에 목이 부러져 즉사하는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다.

“하하! 이 좆밥 새끼들! 다 드루와! 드루와 봐!”

단 한 발의 화살로 적 인마(人馬) 일체를 동시에 제거해버린 사나이.

다닐렌츠의 기사, 엔리케 아르미엔토.

평상시 행동거지는 제법 기사다워졌지만, 전투 상황에서만큼은 용병 시절의 천박함(?)만큼은 아직 버리지 못한 그가 거친 목소리를 토해낸다.

동시에 빠르게 등 뒤로 넘어갔던 오른손엔 예의 그 잿빛 강철 화살이 쥐어져 있다.

으지지지직!!!

엔리케의 손에 들린 활이 시위에 화살을 문 채로 힘껏 휘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그의 활은 다닐렌츠 북부 지역에 서식하는 몬스터 오록스(Aurochs)의 뿔을 기반으로 여러 가지 재료를 더해 만들어진 특수한 무기였는데, 보통 사람들은 시위를 잡아당기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탄성을 가지고 있었다.

허나 엔리케는 그 어마어마한 물건의 시위를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투우우우우우웅!!!

전방에서 달려드는 적들을 향해 힘차게 또 하나의 화살을 쏘아낸다.

퍼어어어억!!!

결과는?

이번에도 여지없다.

엔리케의 시선에 잡혔던 기마병 하나가 머리통을 잃고 달리는 말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쏘는 족족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목표물에 맞아들어가는 엔리케의 화살.

정확성도 대단했지만 그 속도도 엄청난 수준이어서, 벌써 아홉 번째 기마병이 그가 쏘아낸 화살의 제물이 되었다.

“허어어...”

엔리케의 곁에 서서 다가올 전투를 준비하던 하랄트가 무지막지한 화살의 위력에 전율한다.

사람의 머리에 틀어박히는 수준이 아니고 아예 뼈째로 깨부수는 화살이라니?

엔리케가 활시위에 걸어 날려 보낸 것이 화살이 아니라 돌멩이나 쇳덩어리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니, 어떻게 화살이 사람 몸을 관통하질 않고 때려 부수는 건지?!

엔리케와 알고 지낸 기간이 불과 며칠에 불과한 하랄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

물론, 그와 달리 나는 엔리케의 화살이 보여주는 무자비한 위력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 몬스터의 뿔을 써서 무식하리만큼 위력을 높인 활에 특수제작한 화살을 썼으니, 저런 결과가 나오는 거지.’

거기에 더해, 엔리케가 쓰는 강철 화살엔 끝부분을 망치로 때려 의도적으로 뭉툭하게 만든 무거운 납 화살촉이 달려 있었다.

덕분에 관통력과 비거리는 다소 떨어지지만, 저지력 하나만큼은 어마어마하게 높았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현대 문명의 슬러그(Slug) 탄 같은 거랄까?

“이런 씨발! 이게 무슨 화살이야?!”

“바, 방패! 방패로 막아!!!”

“또 날아온다! 으아아아아아!!!”

엔리케의 화살이 보여준 끔찍한 위력을 코앞에서 목격한 루테니아 군 병사들이 허둥거린다.

득달같이 달려가 건방진 다닐렌츠 놈들을 단숨에 짓밟아 주리라 생각했던 기마병들이 차례로 머리 없는 시체가 되어 바닥을 구르는 꼴을 본 직후였으니, 그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으하하! 이번엔 여러 발이다!!!”

투웅! 투웅! 투웅!

엔리케가 자랑하는 필살기, 세 발의 화살을 동시에 쏘아내는 기술이 나왔다.

물론 한 발을 쏘아내기에도 엄청난 힘이 필요한 철시는 아니었고, 나무와 새의 깃털로 만든 평범한 화살 세 발이었다.

쐐에에에에에에엑!!!

퍽! 퍼억! 퍽!

“커흑!”

“켁!”

“으아악!”

하지만 그 평범한 화살도 누가 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법.

엔리케의 화살에 적중당한 루테니아의 병사 셋이 각각 눈과 목, 가슴팍을 움켜쥐며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아직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원거리 사격만으로 열 명이 넘는 적의 병력을 깎아낸 것이다.

“다닐렌츠! 전원 전투 준비이이이이이!!!”

또 다른 화살 한 발을 자신의 활에 재며, 엔리케가 전투 준비 명령을 내린다.

사격과 병력 통제를 동시에 해내는 것은 용병 시절부터 갈고 닦아온 그의 놀라운 장기 중 하나였다.

멍한 얼굴로 신기에 가까운 엔리케의 활 솜씨를 지켜보던 우리 측 병사들과 용병들이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자신들의 무기를 움켜쥐었다.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 엔리케의 화살 공격에 한 움큼 물어뜯긴 루테니아 군과의 격돌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자, 시발! 젖내나는 루테니아의 어린놈들에게 진짜 사나이가 뭔지 보여주자! 다닐렌츠, 돌겨어어어어억!!!”

“와아아아아아아아!!!”

***

한편, 엔리케가 이끄는 백오십의 우리 군 병력이 도시 메프하임(Mepheim)에서 달려온 이백여 루테니아 군과 전투를 시작하던 그 시각.

“...”

나는 이틀 전 바인호프 요새에서 그러했듯, 말에 올라탄 채 우리 군의 뒤쪽에서 접근 중인 올베른 요새의 추격자들을 홀로 마주하고 있었다.

“... 저것들, 뭐 하는 거야?”

평범한 인간의 수준을 아득하게 초월한 시력을 지닌 덕분에, 나는 저 멀리 진군을 멈추고 한데 모여 쑥덕거리는 적 지휘관 서너 명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씩씩거리는 표정과 정신없이 움직이는 양손.

뭔가 격렬하게 대화를 하는 모습이다.

그들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대강 구분할 수 있는 그들의 입 모양으로 보건대 아마도 저 대화 내용은...

“... ‘이쯤에서 상황을 지켜보자’, ‘더 접근하지 말자’ 뭐, 이런 대충 이런 얘긴가?”

그랬다.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올베른 요새부터 우리의 뒤를 밟아 추격해온 저 병력의 대다수는 바인호프 공성전에 참전했다가 내게 박살 나 도망쳤던 패잔병들이었다.

생전 본 적도, 들은 적도, 상상한 적도 없는 거대한 무력 앞에 처절한 공포를 맛봐야 했던 이들.

비록 까라면 까야 하는 군대의 법을 어기지 못해 나의 뒤를 따라왔으나, 오만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그들의 앞을 막아선 내 모습에 지레 겁을 먹고 발길을 멈춘 것이다.

말하고 보니 지금 내 모습이 마치 <삼국지연의> 속 조조의 대군을 장판교에서 홀로 막아선 장비 같기도 하다.

“그럼... 저기 혼자 꽥꽥 소리 지르면서 화를 내는 녀석은 바인호프 요새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던 놈이겠군.”

그러니 3백이나 되는 병력을 거느리고도 내 앞에 달려들기를 주저하는 동료들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저토록 화를 내는 것이겠지.

“... 이해가 안 된다면, 이해가 되도록 도움을 주어야겠지.”

터어엉-!

말에서 내린 나는 이틀 전 바인호프 요새 앞 들판에서 수없이 많은 적의 목숨을 거두었던 예의 그 묵빛 글레이브를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저 들고 있던 창을 바닥에 꽂아 넣었을 뿐인데, 나를 바라보는 적들의 시선이 흔들리는 게 느껴진다.

보기만 해도 무서울 것이다.

생각만 해도 두려울 것이고.

이해는 간다.

듣도 보도 못한 크기와 무게를 지닌 이 무식한 검은 색 창에 찔리고, 베이고, 찢겨 날아간 목숨이 어디 한둘이었어야지.

그렇게, 창을 땅에 꽂아 넣으며 자유로워진 나의 두 손.

스륵-

허리춤에 꽂혀 있던 손도끼 한 자루가 내 오른손에 들려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보통의 손도끼보다 살짝 크고, 무게도 조금 더 나가는 나의 손도끼.

바로 그 손도끼가,

“흐으읍...!”

탁, 탁, 탁, 탁, 타아악!

몇 번의 도움닫기를 마친 나의 손으로부터 빛살처럼 쏘아져 나간다.

휘우웅! 휘우웅! 휘우웅!

내 손을 떠난 손도끼는 한줄기 폭풍이 되어 단숨에 먼 거리를 날아갔고,

“피, 피해!!!”

“이런 씨발...!?”

퍼석!!!

앞서 나를 왜 공격하지 않는 거냐며 홀로 화를 내던 그 지휘관의 이마 한가운데 보기 좋게 틀어박혔다.

< 루테니아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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