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테니아 (4) >
그걸로 끝이었다.
내가 던진 손도끼에 전투를 주장하던 올베른 요새의 지휘관이 이마가 쪼개져 죽던 그 순간, 안 그래도 도망칠 구실만 찾고 있던 나머지 놈들이 부리나케 퇴각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퇴, 퇴각! 어서 물러서라! 어서!!!”
“저놈의 공격 범위 밖으로 물러서야 한다! 에잇, 빨리 안 움직이고 무엇하느냐!!!”
“시발, 내 살다살다... 활을 쏜 것도 아니고, 이 거리에서 손도끼를 던져서 사람을 맞춰? 이게 말이 되냐고!”
“말이 되니까 아까 그 양반이 뒈졌지! 잔말 말고 뛰라고 새끼야!”
“으흐흑! 시발, 내가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
야단도 그런 야단이 없었다.
얼마나 다급하게 도망을 치던지, 들고 있던 무기를 던지고 몸만 빼서 튀는 놈도 보이고 옆 사람이 넘어졌는데 그 몸을 짓밟고 뛰는 놈도 보였다.
뭐,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상대의 표정이 겨우 보일락 말락한 먼 거리에서 도끼를 던져 사람 머리통을 쪼개는 인간을 상대해야 하는 이 상황이 얼마나 공포일 것인가?
다른 건 다 제쳐두고서라도, 내가 다음에 던지는 손도끼의 목표가 자신이 되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없다.
“아아악! 나 밟았잖아!”
“엄살 피우지 말고 일어나! 빨리 뛰라고 새끼야!”
“커흑! 대장님! 대장님! 저도 데려가십쇼!!!”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대열을 무너뜨리며 도망치는 추격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는데...
“후욱, 후욱... 끝났습니다, 영주님!”
등 뒤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
굳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나는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고생했어, 엔리케 경.”
이제는 제법 그럴듯해진 하대(下待).
“아닙니다, 영주님.”
그리고, 역시 자연스러워진 엔리케의 존대(尊待)가 뒤따른다.
“병력은 얼마나 상했지?”
“서른 명 남짓이 죽고, 비슷한 수가 다쳤습니다. 사상자 대부분이 용병들이고, 영지군 병력 중엔 죽은 자가 없습니다.”
“병사를 다 살렸다니, 잘했네.”
전투 상황에서 돈 주고 부리는 용병들의 피해가 훨씬 많은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해당 영지가 보유한 일종의 ‘자산’ 개념인 영지군과 달리 용병은 돈을 지불해 일시적으로 소유하는 전투력.
고용 기간이 끝나면 잃게 될 그 용병들의 전투력을 최대한 사용하는 것은 지휘관이 갖춰야 할 당연한 덕목이었다.
“포로는? 얼마나 잡았지?”
“약 70여 명을 사로잡았고, 비슷한 수를 격살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도망쳤습니다.”
“백오십 명으로 이백 명을 쳐서, 30을 잃고 70을 죽였다... 선방했군. 잘했어, 훌륭하네.”
“혼자서 삼백 명이나 되는 적을 쫓아버린 영주님께 그런 칭찬을 들으니 민망합니다! 하하하하!”
내 칭찬을 듣고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린 엔리케가 문득 생각난 게 있다는 듯 질문을 던진다.
“저, 근데... 영주님.”
“음?”
“영주님께서 쫓아낸 놈들 말입니다, 저기 가는 저 등신들.”
“어, 그래.”
“저놈들, 올베른 요새로 다시 기어들어 가면 괜히 골치 아파지는 거 아닙니까? 그러지 말고 차라리 지금 추격해서...”
“아니, 놔둬. 어차피 갈 곳도 없는 놈들이야.”
“갈 곳.... 이 없다?”
나의 말을 듣고 의아한 얼굴이 된 엔리케.
한껏 쳐 죽인 적들의 피를 온몸에 뒤집어쓴 무시무시한 모습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갸웃거리는 그 표정이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하하, 뭔 소린지 전혀 감이 안 잡히는 얼굴인데?”
“어, 예. 그렇습니다.”
“그럼... 음, 단서를 하나 주지.”
“예, 듣겠습니다.”
“이번 루테니아 원정, 내 옆에 늘 붙어 다니던 녀석 하나가 안 보이지 않아?”
“어... 아드리안 말씀이십니까?”
아드리안.
영주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그림자처럼 날 따라다니며 곁을 지킨 충성스럽고 믿음직한 사내.
이제는 다닐렌츠의 기사, ‘아드리안 쉬라흐(Adrian Schirach)’로 불리며 나날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맞아, 아드리안 얘기야.”
“그 녀석, 영주님께서 따로 맡길 일이 있다고... 그래서 키르헨에 남겨두고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따로 맡긴 일이, 내가 아까 한 말과 연관이 되어 있지.”
“어, 그럼 혹시...”
뭔가를 눈치챈 듯 놀란 표정을 짓는 엔리케.
그런 그에게, 나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생각하는 혹시가 맞을 거야. 아마 지금쯤이면... 내가 시킨 일의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
먼 거리에서 손도끼를 날려 적을 격살한 나의 놀라운 무용에 놀라 허겁지겁 머리를 싸쥐고 왔던 길을 따라 도망친 올베른 요새의 추격자들.
처음 도망칠 땐 3백에 가까웠던 병력이 눈앞에 올베른 요새가 보일 즈음이 되자 절반 가까이 줄어 있었다.
오는 길에 운 없는 고블린 무리를 하나 만나 한 차례 전투를 치르긴 했지만, 그게 병력의 숫자가 이 정도로 급격히 줄어든 이유는 되지 못했다.
이들의 병력이 반 토막 난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탈영(脫營)’이었다.
“이런 미친 새끼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행군 중에 도망을 쳐?”
“충성심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씨발 놈들!”
“어디 숲속에서 고블린한테 뜯겨 고깃덩어리나 되라!”
“에이, 퉷! 난 진즉에 그 새끼 도망칠 줄 알았다니까?”
남은 이들은 도망친 이들에게 온갖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실은, 진작에 그들처럼 도망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 이 전쟁에서 루테니아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다닐렌츠의 기사가 그들에게 준 충격은 그토록 거대했다.
그렇게, 등 떠밀려 나간 추격전에서 극도의 피로감과 마음의 상처만 가득 안고 돌아오는데...
“으응? 저... 저게 뭐야?”
“왜, 뭔데?”
“집에 다 와놓고 뭐 때문에 호들갑을... 흐억!”
요새 성문 아래 도착한 루테니아 군 병사들이 뒤늦게 발견한 무언가.
어느새 올베른 요새 장벽 위로 모습을 드러낸 수많은 깃발들.
한데 그 깃발에 찍힌 문양이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달랐다.
저 문양이 찍힌 깃발은, 절대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물건이었다.
“저, 저, 저거... 다닐렌츠 영지 문장이잖아?!”
그랬다.
몸과 마음 모두 넝마가 되어 돌아온 루테니아 군을 맞이한 것은, 올베른 요새를 점령한 다닐렌츠 군이었던 것이다.
“집 버리고 튀어나갔던 비루한 개새끼들이 돌아왔구나! 그래, 가서 뭐라도 좀 얻어먹고 왔느냐?”
“...?!”
올베른 요새 장벽의 한 가운데에 서서 루테니아 군을 내려다보며 비꼬듯 말하는 한 사나이.
그는 붉은빛이 살짝 감도는 갈색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지닌, 훤칠한 키의 젊은 청년이었다.
전반적으로 마른 듯해 보이지만, 탄탄한 근육이 빈틈없이 전신을 감싸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탄탄한 느낌을 들게 한다.
이 청년이 바로 삼백에 달하는 전력이 빠져나간 틈을 타 올베른 요새를 점령한 다닐렌츠 군의 지휘관.
기사, 아드리안 쉬라흐였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들에게 내어줄 방은 없다! 썩 꺼지든, 아니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든 지금 이 자리에서 선택해라!”
스르릉- 촤아앙!
뒤이어, 장벽 위의 아드리안은 자신의 검을 뽑아 크게 당황한 루테니아 병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면, 내가 직접 내려가서 이 검으로 손님맞이를 하길 바라는 건가? 그렇게 해줄까?”
촤라라라라라라라락!!!
아드리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숨어있던 다닐렌츠 군의 궁수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장벽 아래의 루테니아 군에게 화살을 겨누었다.
얼핏 보아도 족히 오륙십 명 가까이 되어 보이는 숫자.
저들이 동시에 쏟아내는 화살 세례를 맞는다면, 안 그래도 지친 루테니아의 병사들은 버텨낼 재간이 없으리라.
결국,
챙강- 챙강- 땡그렁-!!!
“하, 항복! 항복하겠습니다!!!”
다닐렌츠의 영주, 데미언 카릴베르크의 무위(武威)에 짓눌려 패주했던 루테니아의 병사들이 기사 아드리안의 계략에 걸려 손에 쥔 무기를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
그로부터 사흘 뒤,
“영주님,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루테니아의 도시 메프하임(Mepheim)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어느 언덕의 위에서, 나는 아드리안을 다시 만났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올베른 요새 정리한 것도 포함해서 말이지.”
“아닙니다, 영주님. 어차피 텅 비어있던 거나 마찬가지였던 요새인걸요.”
나의 칭찬에 고개를 숙이며 겸손하게 대답하는 아드리안이다.
“그래도 놈들이 병력을 빼낸 시점에 정확하게 도착해서 요새를 점령하는 건 쉬운 게 아니지. 잘했다.”
“감사합니다.”
“여어, 올베른 요새를 깔끔하게 점령하고 행차하신 잘생기고 용감한 기사 아드리안 아니신가! 하하하!”
아드리안과의 재회를 손꼽아 기다리던 또 다른 한 사람, 엔리케가 호탕하게 웃는다.
아드리안도 아드리안이었지만, 그가 데려온 6백 명의 병력 또한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그였다.
덕분에 앞선 전투의 사상자를 제외하고 약 백여 명 정도의 병력이 남았던 우리의 전력이 단숨에 7백 명 수준으로 뛰어오르게 되었다.
“짧은 시간에 지원 병력을 마련하느라 군무관님께서 애를 많이 쓰셨습니다.”
“아, 우리 훌륭하신 브라운 경! 흰머리가 더 늘어나셨겠군. 하하하! 키르헨으로 돌아가면 술 한잔 사드려야겠어!”
“예, 안 그래도 그걸 많이 기대하고 계십니다.”
“좋아, 이 사나이 엔리케! 기대에 충분히 부응해드려야지. 그나저나 네가 데려온 병력, 구성이 어떻게 되지?”
“예, 영지군 2백에 용병 4백입니다. 용병은 아시다시피 죄다 보병 전력이고... 영지군 2백은 궁수가 80명, 기병 20명에 나머지는 보병입니다.”
“궁수가 80명이나? 좋네!”
누가 활잡이 아니랄까 봐 궁수가 80명이나 왔다는 소리에 함박웃음을 짓는 엔리케였다.
한편, 나는 아드리안과 엔리케의 대화를 들으며 저 멀리 언덕 아래 자리한 도시 메프하임을 바라보았다.
내리쬐는 봄날의 햇살 아래 훤히 드러나 보이는 도시의 내부.
보다시피 메프하임은 도심을 보호하는 외부 장벽이 존재하지 않는 도시였다.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왕도 카를리온이나 쾨니히슈타인 같은 이름난 대도시들이야 위엄이 철철 흘러넘치는 성벽으로 도시 전체를 두르고 있었지만, 보통의 도시는 잘해봐야 나무 장벽이었고 대부분의 도시는 그마저도 없었다.
도시 전체를 보호할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방어시설을 건설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어마어마한 예산이 필요한 일이다.
가뜩이나 루테니아의 영주가 군 관련 예산을 투자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저기 보이는 메프하임이 저토록 외적의 침입에 허술한 모습을 지닌 이유를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싸울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주제에, 어째서 이따위 무리한 전쟁을 벌인 것인지... 저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한숨을 내쉬며 쏟아낸 아드리안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뭐, 굳이 그걸 이해할 필요가 있나?”
“?”
“우리 입장에서야 감사한 일 아닌가. 우리 병사들이 덜 다치고, 손쉽게 도시를 먹을 수 있게 됐으니까 말이야.”
“그거 그렇지만...”
“아드리안, 지금은 그저 전투에서 이기는 것에만 집중해라. 그런 ‘평화로운’ 고민은, 집에 돌아간 이후에 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씩씩하게 대답하는 아드리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며,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나의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두 시간 후 도시로 진군한다. 오늘 저녁은 저기 보이는 메프하임의 시청 건물에서 먹으면 되겠군.”
< 루테니아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