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12화 (108/197)

< 루테니아 (5) >

‘메프하임이 적의 손에 떨어졌다!’

다급하게 달려온 전령이 전한 그 소식에 루테니아의 주도, 프롤린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다닐렌츠 군이 메프하임을 점령했다는데?”

“아니... 영지군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그보다 우리가 먼저 시작했던 전쟁 아닌가? 상황이 왜 이렇게 된 거야?”

“제대로 된 전쟁 한번 못 치러봤던 새끼들이 먼저 쳐들어간다 어쩐다 설칠 때부터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사령관이었던 카딤 베르덴 경은 생사조차 모른다던데... 다닐렌츠 놈들한테 벌써 죽었겠지?”

“모, 목이 잘렸나? 아니면 교수형?”

“뭔 소리야? 지금 베르덴 가문에서 그 둘째 아들 살리려고 몸값 준비하느라 난리야, 난리!”

“아, 그래?”

“참나, 기사나 귀족 가문 자식놈들은 이래서 좋은 거지. 전쟁에 져서 적한테 사로잡혀도 죽을 일이 없잖아!”

“우리 옆집 사는 한스 씨 아들은 이번에 병사로 끌려갔다는데...”

“죽었대?”

“아이, 나야 모르지! 근데 뭐 다닐렌츠 군이 이렇게 코앞까지 쳐들어온 거 보면...”

프롤린 시내 곳곳에서 두 사람 이상만 모였다 하면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전쟁은 모름지기 인류 문명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무자비한 화마(火魔)와 같은 것.

모든 것을 파괴하고, 서로를 죽고 죽이는 그 끔찍한 비극 앞에 다른 모든 것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목전에 밀어닥친 전쟁의 불길에 활기 넘쳐야 할 도시의 분위기가 죽을 날 받아놓은 중환자의 모임처럼 우울해지자 루테니아 영지의 위정자들은 점점 더 다급해졌고, 결국 무리한 방법을 동원하게 되었다.

“어이 거기! 모여서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거냐? 다들 집으로 들어가, 어서!”

“작업 등 정당한 사유 없이 다섯 이상이 모이면 불순분자로 여기고 경비대에서 체포하겠다!”

“영지를 노리는 적군의 위협이 그칠 때까지 당분간 술집 영업은 금지한다! 명을 어길 시 처형까지도 가능하다!!!”

사람들이 모여 불안한 소리를 떠드는 것을 막기 위해, 루테니아의 위정자들은 아예 모임을 금지하는 방침을 내어놓는다.

뒤이어 앞선 전황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보인 다닐렌츠 군을 상대하기 위해, 도시 내에 징집령을 발동했다.

“영주님의 명령이다! 도시의 사내들은 영지 수호를 위한 신성한 부름에 응하라!!!”

“이 집에도 아들 있지 않았나? 그 머리색 빨간... 그 자식 어딨어? 숨길 생각하지 마, 십오 세 이상이면 무조건 징집 대상이야!!!”

“거기 너! 어딜 도망가! 이 새끼야, 죽고 싶어?!”

프롤린 영지군과 경비대 소속의 병력이 모두 동원되어 도시 내부를 이 잡듯이 뒤졌다.

병사로 동원 가능한 신체 건강한 남성을 찾아내기 위함이었다.

“이런 미친 새끼들! 우리 애가 몇 살인데 잡아가?! 이제 겨우 열다섯인 애를...!”

“우리 아버지, 나이 먹고 오늘내일하시는 양반인데도 잡아갔어요. 경비대 새끼들, 제 정신이 아니야!”

“무능한 영주 같으니! 그러게 감당도 안 되는 전쟁을 왜 벌여서 이 사달을 만들어?!”

앳된 티가 역력한 어린 소년에서부터 나이 들어 쇠약한 노인에 이르기까지.

무기를 들어 올릴 수 있는 사내라면 무조건 끌고 가는 영지군, 경비대 소속 병사들의 가혹한 행태에 프롤린 주민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지시한 루테니아의 영주, 라르스 제르펠트 남작의 신념은 굳건했다.

‘불만? 그 불만도 발 디딜 곳이 있어야 하는 거다! 나라를 잃고 나면 그 불만조차 사치였다는 걸 깨닫게 되겠지... 하, 됐다! 멍청한 아랫것들의 목소리까지 일일이 들어가며 어떻게 대국을 운영하겠나? 무시해라!’

자신과 가문에게 남은 마지막 보루, 프롤린을 사수하려는 남작의 의지는 철벽처럼 단단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그가 생각하는 ‘발 디딜 곳’과 저 아래 평범한 영지민들이 생각하는 ‘발 디딜 곳’의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

루테니아의 주도, 프롤린에서 약 반나절 거리에 자리한 다닐렌츠 원정군 주둔지.

그곳의 한 가운데 자리한 지휘관 막사에서, 나는 방금 올라온 척후의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병신 같은 놈. 제프펠트 남작 이 새끼는 끝까지 멍청한 티를 내는구나. 어휴...”

프롤린 도시 내에 징집령이 내려졌다는 보고서 내용을 읽고 난 뒤 내뱉은 나의 감상이었다.

영주의 위엄에 손상이 갈만한 노골적인 욕설이었으나, 지금 내 곁엔 내가 가장 믿는 오른팔 아드리안뿐이었기에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

“적이 코앞으로 육박하였으니 징집령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내 말을 들은 아드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원칙적으론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틀렸다.

“훈련 한번 제대로 받아본 적 없는 평범한 일반인들을 억지로 끌어다 놓은 들, 전투에 얼마나 도움이 될 것 같나?”

“하지만... 눈먼 칼에 맞아도 사람은 죽습니다.”

“그건 손에 제대로 된 칼이 들려 있을 때 얘기지.”

“...?!”

내 대답을 듣고 뭔가를 깨달은 듯한 아드리안의 표정.

그런 그의 생각에 확신을 주는 나의 설명이 이어졌다.

“올베른 요새 접수할 때 너도 봤지? 걔네 상태가 어땠어? 보급 상황 말이야.”

“어... 개판이었습니다. 식량이나 무기나 뭐, 제대로 준비된 게 없더군요.”

“그렇겠지. 애초에 루테니아는 군무 쪽 예산을 거의 배정하지 않는 곳이야. 전쟁을 남의 일로 생각하는 놈들뿐이거든. 죄다 대가리가 꽃밭인 놈들 투성이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

다 아는 방법이 있다.

내가 누군가? 수년 전 영지의 이름을 딴 ‘다닐렌츠 상단’을 세워 왕국 북서부 상권의 절대 ‘갑’ 위치에 올려놓은 경영의 천재 아닌가?

‘천재라기엔 순전히 미래를 알고 있어서 거저 먹은 수준이지만...’

뭐, 남들 눈엔 천재로 보일 테니 넘어가자.

아무튼, 나는 상단을 이끌며 본거지인 다닐렌츠 영지는 물론 지금 쳐들어온 루테니아 영지의 상공업 흐름에도 아주 깊숙이 관련 지식을 쌓았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루테니아의 영주, 제르펠트 남작이 얼마나 군무(軍務)에 관심이 없는지를 말이다.

“루테니아는 평시에 군량이나 무기 구매에 전혀 돈을 쓰지 않아. 그렇다 보니, 전쟁에 대한 보급 체계 같은 게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지.”

“개판이군요.”

“개판이지. 뭐, 한마디로 얘네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전쟁 나면, 그냥 ‘돈 써서 해결하면 된다’라고 말이야. 루테니아가 돈 없는 영지가 아니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야. 틀린 말은 아닌데... 너도 잘 알겠지만, 전쟁이란 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잖아?”

“맞습니다.”

제르펠트 남작이 간과하고 있는 것.

전쟁 준비가 그렇게 시장에서 물건 사는 것처럼 돈만 있다고 뚝딱 되는 게 아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고, 용병도 써본 놈이 잘 쓰는 법!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바인호프 요새 앞에서 벌어졌던 전투의 기억을 떠올려보자.

숫자만 많았을 뿐, 전투엔 하등 도움 안 되는 싸구려 용병들만 즐비하게 끌고 왔던 루테니아 군.

놈들이 맞닥뜨린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였다는 게 좀 많이 불운하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루테니아 군의 상태는 너무나 형편없었다.

뿐인가, 잡아놓고 확인해보니 용병들은 물론 영지군 병사들의 무장상태도 개판이고 군량조차도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루테니아 군을 이끌었던 사령관, 카딤 베르덴을 족쳐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바인호프 요새를 점령한 후 요새에 비축되어 있던 다닐렌츠 군의 군수품으로 보급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었다고 했다.

“... 이것만 봐도 루테니아 새끼들이 얼마나 전쟁에 대해 모르는 저능아들인지 알 수 있지.”

“영주님 말씀에, 완벽히 공감합니다.”

“그래. 이런 새끼들이 전투 임박을 앞두고 급히 일반인들을 징병해서 병력을 늘린다고 한들 그게 도움이 될까?”

고개를 저으며, 나는 단언했다.

“절대 도움 안 되지. 이건 그냥... 제르펠트 남작, 그 병신 같은 놈이 벌이는 최후의 발악일 뿐이야.”

***

다음날,

루테니아의 주도, 프롤린_

“마, 막아라!”

쿠우웅-!!!

주변의 지축을 흔드는 듯한 묵직한 충격음.

공성추(攻城椎).

적의 성문을 부수기 위해 탄생한 거대한 나무 몽둥이가 쉬지 않고 프롤린의 성문을 두드리고 있다.

쿠우웅-!

명색이 한 영지의 주도인 만큼 프롤린은 도시를 둘러싼 성벽으로 보호받고 있었다.

이 공성추는 프롤린을 둘러싼 그 성벽, 정확히는 성문을 깨부수기 위해 내가 준비한 공성 병기였다.

성문을 직접 타격하는 크고 두꺼운 통나무 위로 자리 잡은 삼각형 모양의 지붕.

목재로 만든 그 지붕 위엔 물에 적신 고블린 가죽을 두껍게 올려 혹시 모를 적의 화공(火攻)에 대비했다.

그리고 그 내부엔 열두 명의 가려 뽑은 베테랑 용병들이 투입되어 자신들의 임무를 다하고 있었다.

“자, 다시 가자! 하나! 두우우울! 셋! 흐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

쿠우우웅!!!

공성추가 성문을 후려칠 때마다 거센 진동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 가공할 힘에 질려버린 성벽 위 루테니아의 병사들.

저마다 발을 구르며 공성추를 막아 내기 위해 애를 써보지만, 딱히 뾰족한 수는 나오질 않는다.

“부, 불화살! 불화살 없어?!”

“시발, 그냥 화살도 없는데 불화살이 어디 있냐?”

“그, 그럼 저걸 어떻게 막아?!”

“야, 이 새끼들아! 공성추부터 막아야 해! 끓는 기름, 끓는 기름을 가져와! 어서!”

“아이고, 대장님! 갑자기 기름을 어디서 구해옵니까?!”

“시발, 그럼 물이라도 끓여 와 이 새끼야!”

“갑자기 무슨 수로 물을 끓이라는... 여기 땔감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매서운 기세로 밀어닥친 적들을 맞이한 프롤린의 루테니아 군은 수성(守城)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불화살과 기름 등의 전투 물자 하나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

그 결과...

콰아앙!!!

“뚫렸다!!!”

“됐다! 좆 같은 성문이 부서졌다아아아아!!!”

연이은 공성추의 공격을 버티지 못한 프롤린의 성문이 부서졌고,

“좋다, 엔리케! 아드리안! 성문 안쪽으로 돌입해라!”

“예, 영주님! 갑니다, 으하하하!”

“기사 아드리안, 명을 받듭니다! 이랴아!!!”

나의 명령을 받은 다닐렌츠 두 기사, 엔리케 아르미엔토와 아드리안 쉬라흐가 각각의 병력을 이끌고 프롤린으로 진입했다.

그 이후엔 쉬웠다.

오랜 기간 평화에 절어 있던 루테니아의 나약한 병사들과 수준 떨어지는 삼류 용병들은 지난 몇 년간의 몬스터 토벌 경험과 우수한 장비로 무장한 우리 병사들을 당해내지 못했다.

“죽기 싫은 새끼는 대가리 박고 엎드려라! 아니면 뒈지는 거다! 흐아아아!”

투웅! 투웅!

“크악!”

“켁!”

엔리케의 신묘한 활 솜씨는 시가전에서도 변함없었으며,

“흐읍, 하앗!!!”

카캉! 카앙- 촤아악!!!

“아아악!!!”

틈날 때마다 내가 각을 잡고 검술을 가르친 아드리안의 실력은 루테니아의 나약한 기사들이 넘보기엔 너무나 고강했다.

그렇게, 우리는 약 7백여 명의 병력으로 영지군과 용병, 급히 동원된 일반인 징집병을 합쳐 천오백 명에 달하던 프롤린의 수비군을 보기 좋게 깨뜨렸고...

“이, 이거 놔라! 무엄하다! 이 건방진 자들이 내가 감히 누구인지 알고!?”

“누구인지 알아, 그러니까 닥치고 엎드려.”

“이이익... 으헉!”

철퍼덕-!

엔리케의 우악스러운 손에 이끌려, 내 앞에 볼품없이 나자빠진 중년의 사내.

얼굴 가득 두려운 감정이 역력한 그 사내에게, 나는 한껏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반갑소, 제르펠트 남작. 드디어 얼굴을 보게 되는군.”

“누, 누구...”

“누구긴 누구겠어, 당신이 그렇게 보고 싶지 않았던 불청객이지. 어휴, 문 안 열어줘서 억지로 열고 들어오느라 고생했네.”

과장된 목소리로 괜한 너스레를 한번 떤 내가, 이내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 그럼... 우리, 이 다사다난했던 첫 만남에 대한 정산을 좀 해볼까?”

“...?!”

< 루테니아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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