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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13화 (109/197)

< 바렌부르크 (1) >

영지 루테니아의 주도(主都), 프롤린 시내 한가운데 자리 잡은 영주 저택에선 다닐렌츠와 루테니아 간에 벌어진 영지전의 종전(終戰) 협상이 열리고 있었다.

“자, 거기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존경하는 제르펠트 남작님.”

나는 잉크가 묻은 깃털 펜을 들고 손을 덜덜 떨고 있는 루테니아의 영주, 라르스 제르펠트 남작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으으으...”

하지만 자신의 눈앞에 놓여 있는 문서의 내용을 살피는 제르펠트 남작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분노와 두려움이 마구잡이로 뒤섞인 그 무언가.

아무래도 순순히 서명할 것 같지는 않은 그 모습에, 나는 협상의 다른 한 축으로서 도움을 주기로 했다.

“왜? 생각해보니 영 내용이 마음에 안 듭니까? 그럼 뭐, 때려치우시고... 아드리안?”

“예, 영주님.”

“가져온 그거, 남작님한테 드려라.”

“알겠습니다.”

터엉!

내 명령을 받은 아드리안이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나와 루테니아의 영주 라르스 제르펠트 남작이 함께 앉아 있던 각진 원목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둔탁한 소음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다름 아닌 한 자루의 검.

대단한 보검 같은 건 아니었고, 그냥 아무 대장간이나 가도 살 수 있는 그런 싸구려 철검이었다.

“그래, 나도 명색이 사내놈인데 이까짓 종이 쪼가리에 서명 몇 번 하는 거로 전쟁의 끝을 내는 건 적잖이 찝찝했소.”

“...?!”

“우리, 시원하게 각 영지의 수장끼리 생사결(生死決)로 맞붙어서 결론을 냅시다. 그게 깔끔하고 남들 보기에도 멋져 보이겠지. 자, 준비하시오.”

“아, 아니! 이보시오, 카릴베르크 남작! 생사결이라니?! 나는 그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바인호프 요새 전투에서 단기 돌진으로 800명에 달하던 루테니아 군을 뭉개버린 인간이 목숨을 걸고 한 판 붙자는 이야길 하자,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제르펠트 남작이 손을 휘저으며 다급하게 말한다.

하지만 이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그런 상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행동했다.

“뭣들 하느냐! 다닐렌츠와 루테니아를 상징하는 두 사내가 영지와 가문의 명예를 걸고 신성한 결투에 임할 것이다! 준비해라!”

“예, 영주님!”

“일단 다른 것보다 이 탁자부터 치우... 아니, 됐다.”

나는 제르펠트 남작과 나 사이에 놓여 있던 원목 탁자를 치우기 위해 다가오는 병사들을 손짓으로 만류했다.

그리고는,

휘잉- 콰아앙!!!

그대로 주먹을 내리쳐, 탁자를 박살 내버렸다.

“흐어억!!!”

눈앞에서 부서져 내리는 탁자의 모습을 본 제르펠트 남작이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도끼로 찍어도 쪼개는데 한참은 걸릴 정도로 대단한 두께를 지닌 탁자였는데, 그런 물건을 주먹질 한 방에 부숴버렸으니 놀라는 게 당연하지.

아마 곧 자신의 머리통도 저런 꼴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상상도 했을 것이다.

“아이고, 이런... 검이 바닥에 떨어졌네.”

나는 처참하게 부서져 내린 원목 탁자 사이, 아드리안이 올려두었던 싸구려 철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검을 뽑았다.

스르릉-

“흐... 흐읍...!”

내가 자신의 눈앞에서 검을 뽑아 들자, 제르펠트 남작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온다.

혹시나 그 검으로 자신의 목을 냅다 쳐버리는 것은 아닌지 겁을 먹은 것이다.

명백하게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그림이었지만, 불행히도 이 장소에 나의 행동을 제지할 수 있는 루테니아 측의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종전 협상이 벌어지고 있는 이곳 영주 저택 내외부에 모여 있는 모든 인물이 죄다 우리 다닐렌츠의 사람들이었으니까.

... 이렇게 말하니 내가 되게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지만, 어디까지나 이 전쟁은 우리 영지의 소금 광산을 노린 루테니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것이란 사실을 잊지 말자.

아무튼, 나는 그렇게 검집에서 뽑아낸 검을 들어 슬쩍 눈으로 살피다 짐짓 화가 난 척 말했다.

“아드리안! 다른 이도 아니고 남작님께서 들고 휘두르셔야 할 검인데 이딴 싸구려 칼을 준비하면 어찌하느냐? 이건 예의가 아니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제르펠트 남작님께도 사과드립니다.”

“아, 아니! 아닙니다! 사과할 일이 전혀 아니고...!”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럼... 남작님께 제 검을 대신 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영주님?”

전혀 죄송하지 않은 표정으로 내게 뻔뻔하게 묻는 아드리안에게, 나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됐다. 어찌 기사의 생명과도 같은 자신의 검을 타인에게 빌려주려 하느냐. 차라리 검이 없이 겨루는 것이 낫지. 흐음!”

이어 나는, 오른손으로 들고 있던 검의 날 부분을 왼손으로 잡아...

티이이이이잉-!!!

들고 있던 검을, 냉큼 부러뜨려 버렸다.

“...?!?!?!”

아무리 싸구려 칼이라 한들, 엄연히 달군 쇳덩이를 두드려 만든 물건이었다.

그런 물건을 그냥 맨손으로 붙잡고 나뭇가지 부러뜨리듯 두 조각내어 버렸으니, 나를 바라보는 제르펠트 남작의 얼굴이 귀신을 본 듯 시퍼렇게 변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제르펠트 남작, 상황이 이러하니 그냥 검을 들지 말고 맨손 박투로 승부를 겨룹시다. 뭐, 주먹으로 때려도 충분히 생사결을 할 수는 있으...”

“아닙니다! 서, 서명하겠습니다! 지금 합니다! 서명! 어흐윽!”

맨손으로 검을 부러뜨리는 인간과 주먹 싸움을 벌이라니, 차라리 검으로 목을 자신의 목을 베어버리는 게 더 낫겠다 싶은 제르펠트 남작이었다.

“허윽! 어디... 어디 있어!”

그는 부서진 탁자 더미를 정신없이 뒤져 구겨진 종전 협상 문서를 찾아내었고,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이름 아래 서명했다.

“여, 여깄습니다!”

귀족의 체면이고 뭐고 다 내던진 것인지, 내게 무릎을 꿇은 채로 기어와 방금 서명한 문서를 건네는 제르펠트 남작.

그런 그에게 나는 미소를 보여주며 따뜻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제르펠트 남작. 우리, 앞으로도 두 영지 간에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봅시다. 하하하하!”

***

처음 키르헨에서 급히 고용한 백 명의 용병들을 이끌고 바인호프 요새로 출발했을 때부터, 나의 목표는 루테니아의 병탄(倂呑)이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로선 다닐렌츠 내부의 일만 해도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 루테니아까지 흡수하면, 아마도 나를 비롯한 영지의 수뇌부들은 과로로 제 명에 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 그래서, 종전 협상문이 이런 내용으로 채워지게 된 거지. 이해가 좀 됐어?”

“예, 이제야 알겠습니다.”

영지전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도 어째서 루테니아를 병탄하지 않느냐는 아드리안의 질문에 나는 귀찮아하지 않고 성실히 답변해주었다.

겔베르트가 내게 아버지이자 큰 형 같은 존재라면, 아드리안은 아끼는 막냇동생 같은 녀석.

그런 아드리안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될 가르침이라면 얼마든지 시간을 낼 수 있다.

“무조건 입에 쑤셔 넣는다고 끝이 아니야. 삼킨 걸 제대로 소화할 능력이 없으면, 함부로 먹겠다고 덤벼들지 말아야지. 아드리안, 너도 명심해라. 인생의 선택이란 스스로 가진 능력에 따라 결정되어야지, 욕망을 앞세워 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옙, 영주님. 말씀 감사합니다.”

짧은 ‘가르침의 시간’ 뒤, 손에 들고 있던 종전 협상문 내용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드리안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근데... 이 정도면 차라리 루테니아 측에선 다닐렌츠에 흡수되는 편이 더 낫다고 할 정도의 내용 아닙니까?”

“으흠, 뭐...”

아드리안이 내게 이렇게 말하는 이유.

그것은 바로, 종전 협상문의 핵심인 어마어마한 전쟁배상금 때문이었다.

[... 남작령 루테니아는 신성력(神聖歷) 786년 봄 일으킨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남작령 다닐렌츠 측에 전쟁배상금 명목으로 총 84만 골드를 지불한다.

지불 기한은 이 협상문에 서명한 순간부터 10년이며, 매년 최소 8만 골드 이상의 배상금이 다닐렌츠 측에 지불되어야 한다.

해당 전쟁배상금의 지불 기한을 지키지 못했을 경우, 남작령 루테니아의 영주 라르스 제르펠트는 본인이 지닌 영주로서의 모든 권한을 다닐렌츠 영주 데미언 카릴베르크 남작에게 넘긴다.]

전쟁배상금 84만 골드.

작년 기준, 영지 운영의 모든 분야를 총망라하여 우리 다닐렌츠 영지가 집행한 예산이 약 14만 골드 정도였다.

참고로 내가 영주 자리에 오른 이후 영지 발전을 위해 쏟아붓고 있는 돈의 양은 어지간한 백작령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런 다닐렌츠 영지의 예산을 기준으로 무려 6년을 버틸 수 있는 금액을 전쟁배상금으로 설정한 것이다.

“이러면... 루테니아 영지민들이 우리 쪽으로 넘어오는 빈도가 더 증가하겠군요.”

“그럴 테지. 제르펠트 남작 그 새끼가 없는 돈을 어떻게든 영지민들한테 쥐어 짜내려 할 테니까... 뭐, 그런 의도로 일부러 더 말도 안 되는 전쟁배상금을 설정한 이유도 있고.”

“혹시, 제르펠트 남작이 돈 안 갚고 우리 뒤통수칠 생각을 하면 어쩌죠?”

“하하하!”

아드리안의 걱정에,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얘네가 우리 뒤통수를 친다고? 어떻게? 너도 이번에 봤잖아? 루테니아 애들 싸움 더럽게 못 하는 거.”

“예, 그런 그렇지만...”

“이 정도로 형편없는 전투력을 지닌 놈들이면 한두 해 돈 퍼부은다고 개선되지 않아. 애초에 그 퍼부을 돈도 없겠지만 말이지.”

“혹시 다른 놈들이랑 손을 잡고 저희를 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번 전쟁처럼요.”

“아, 그건 그렇지.”

아드리안의 말에 몇 차례 고개를 끄덕여 준 내가 가볍게 웃음 지으며 말했다.

“... 그래서 이제 정리하러 가는 거잖냐. 루테니아 새끼들이랑 손잡고 우리한테 칼 들이댄, 그 ‘다른 놈’들 잡으려고 말이야.”

루테니아를 내장까지 털어먹은 우리의 다음 목표물.

바로, 이번 ‘소금 전쟁’의 진정한 원인제공자인 남작령 바렌부르크였다.

***

다닐렌츠 동부 접경지대에 자리한 요새 라엔슈타인.

선전포고라고 이름 붙이기에도 민망한 서신 한 통으로 시작된 바렌부르크와의 전쟁도 벌써 한 달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침공 측인 바렌부르크의 본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그들은 라엔슈타인 요새를 지나 다닐렌츠 영토 깊숙이 진군한 뒤, 북부 나움가르트의 소금 광산 소유권을 놓고 종전 협상을 벌이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달리 월등한 장비와 압도적인 보급 능력을 등에 업은 다닐렌츠 군은 라엔슈타인을 완벽하게 지켜냈고, 바렌부르크 군은 다닐렌츠 침공의 첫 단계에 걸려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사령관님, 척후의 보고에 따르면 적들에게 지원군이 도착한 것 같습니다.”

“지원군이라, 흐음...”

라엔슈타인 요새를 지키는 주둔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모두 모인 회의실.

상석에 앉아 전체적인 회의의 진행을 주관하던 사령관 데론 베르켈이 턱수염을 쓸어내린다.

지난 한 달간 그가 얼마나 치열한 시간을 보냈는지를 보여주듯, 짧았던 턱수염이 손에 잡힐 정도로 자라났다.

“혹시 다른 경로로 접근해 우리 요새를 압박하는 것인가? 혹시 보급로를 노린다던지...”

“아닙니다. 곧바로 우리 요새를 공격 중인 기존 바렌부르크 병력에 합류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공성 과정에서 잃은 병력이 너무 많았던지라, 병력 충원을 위해 이리로 합류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걱정할 것이 없다.”

만약 바렌부르크 군이 라엔슈타인 요새를 우회하여 보급로를 노린다거나 다른 도시를 공격했다면 일이 복잡해졌을 터.

하지만 그저 라엔슈타인 요새를 떨어뜨리겠다는 목적 하나로 몰려오는 것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다.

“놈들에게 지원군이 얼마나 와서 붙든, 달라진 건 없다. 우리는 지금껏 해왔던 방식 그대로 일치단결하여 흔들림 없이 성벽을 지켜낸다. 모두 알았나?”

“예, 사령관님!”

“그래... 아, 보급 담당관은 현재 남은 군량과 소모품의 수량을 파악해서 저녁까지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만...”

“사령관님!”

데론이 지휘관 회의를 마무리 지으려던 그때, 연락 장교 하나가 다급하게 회의실 내부로 달려 들어왔다.

“음, 그래. 무슨 일인가?”

다른 이였다면 지휘관 회의 중 난입한 것에 대해서 뭐라 한소리를 했겠으나, 그가 다름 아닌 연락 담당 장교이기에 침착하게 용건을 묻는 데론이였다.

“예, 사령관님! 방금 루테니아 방면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전령? 루테니아 쪽에서 말인가?”

장교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데론.

루테니아는 바렌부르크와 손을 잡고 다닐렌츠를 침공한 명백한 적(敵).

그런 이들이 어째서 자신들에게 전령을 보냈단 말인가?

“대체 무슨... 혹시, 바렌부르크와 루테니아의 동맹이 결렬된 것인가? 그래서 우리 쪽으로 돌아서겠다고?”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뒤이어, 왜인지 잔뜩 흥분한 표정의 장교가 큰소리로 외쳤다.

들어보니 과연, 흥분할만한 내용이었다.

“영주님께서 프롤린을 점령하시고 루테니아의 영주에게 항복을 받아낸 뒤, 바렌부르크 쪽으로 기수를 돌리셨다 합니다!”

“...?!”

< 바렌부르크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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