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14화 (114/197)

바렌부르크 (2)

바렌부르크의 영주, 폴커 야닝스 남작은 올해로 쉰일곱이 되었다.

쉰일곱이라는 나이는 온갖 종류의 전염병과 잦은 전쟁으로 남성들의 기대 수명이 40대 중후반에 머무는 펠리노어 왕국에서 그는 충분히 노인 소리를 들을 만한 나이였다.

오랜 세월을 지나 마침내 찾아온 인생의 황혼(黃昏).

폴커 야닝스는 지나온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차분하게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준비...

... 하기는 개뿔.

세상 모두가 노인이라 부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폴커 야닝스의 가슴 속엔 여전히 젊은 날 못지않은 야망이 들끓고 있었다.

그 야망은 더 큰 영토를 차지하고, 더 많은 재물을 벌어들여 자신을 함부로 부리는 나이 어린 주군, 안할트 백작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까버리겠다는 필생의 목표로 점철되어 있었다.

문제는...

“대체 왜! 아직도 라엔슈타인을 떨어뜨렸다는 소리가 안 들리는 것이냐?! 뭐가 문제야? 어?!”

그 필생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게 해줄 첫 번째 발판, 다닐렌츠 침공이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처음 보낸 병력 2천에, 얼마 전엔 지원 병력으로 천 명이 넘는 용병을 추가로 보냈다! 안 그래도 빠듯한 영지 예산을 쥐어짜서! 그런데도 아직까지 그 쥐좆만한 요새 하나를 못 떨어뜨려서 한 달 넘게 시간을 죽이고 있어?!”

콰앙!!!

분노로 목 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야닝스 남작의 주먹이 집무실 책상을 후려쳤다.

“슈펭글러 그 무능한 작자는 대체 내 병사들을 데리고 뭔 지랄을 하고 있는 거냐! 다닐렌츠 놈들이랑 모닥불 옆에 사이좋게 둘러앉아 와인이라도 나눠 마시는 거냐!!!”

“여, 영주님! 고정하십시오!”

불같이 타오르는 야닝스 남작의 분노에, 옆에 서 있던 바렌부르크 영지의 군무관 리엠 몰트케(Riem Moltke)가 식은땀을 흘렸다.

“슈, 슈펭글러 경은 분명 용맹하고 능력 있는 기사입니다! 조만간 자랑스러운 승전보를 들려줄 겁니다!”

“용맹하고 능력 있는 기사? 군무관이 지금 말하는 이가 내가 아는 그 슈펭글러가 맞나? 응? 다른 사람과 착각한 것은 아니고? 하!”

그렇게 비꼬는 말로 군무관의 속을 긁은 야닝스 남작이 다시금 술잔을 들어올리는데...

“그, 급보입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에, 야닝스 남작은 들어 올리던 술잔을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급보라? 이리 가져와라!”

“예, 예엣!”

본래대로라면 군무관을 거쳐 영주에게 올라가야 할 전령의 문서였지만, 그 두 사람이 모두 모여있는 자리에서야 그 순서를 지킬 필요가 없었다.

촤륵-

병사가 공손하게 전한 문서 두루마리를 펼쳐보는 야닝스 남작.

그런데, 그의 반응이 심상치가 않다.

“이... 이이!”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

경악의 감정으로 물드는 눈동자.

주군의 그러한 반응을 보며, 군무관 몰트케는 뭔가 심상치 않은 소식이 전해졌음을 직감했다.

“여, 영주님...? 대체 무슨 내용이...”

“... 루테니아가 무너졌다.”

“예...?”

당최 이게 무슨 소리인가?

루테니아가 무너져? 아니, 모르는 사이 남쪽에 큰 지진이라도 났단 말인가?

눈을 껌뻑거리며 멍한 표정을 짓는 군무관 몰트케에게, 야닝스 남작이 손에 들고 있던 문서를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진다.

“직접 그 두 눈으로 확인해봐! 나도 보고서도 믿을 수가 없는 소리니까!”

“어으, 옛!”

펄럭이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문서를 간신히 낚아채 그 내용을 확인한다.

안 그래도 분노로 몸이 뜨끈뜨끈하게 달아있던 야닝스 남작을 반(半) 미치광이로 만든 문서의 내용은...

[다닐렌츠 군 루테니아의 주도 프롤린 점령 후 라르스 제르펠트 남작과 종전 협상 체결.]

놀랍게도, 바렌부르크와 맞붙은 동부 전선을 유지한 상태에서 다닐렌츠가 일부 병력을 돌려 루테니아를 그대로 무너뜨렸다는 소식이었다.

아무리 루테니아 놈들이 싸움 못 하는 병신들이라고는 하나, 전력의 대부분이 동부 전선에 몰려 있는 상태에서 급히 편성한 소수 전력으로 루테니아를 무너뜨리다니?

상황이 이렇다면,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다닐렌츠의 전력이 훨씬 강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루테니아가 항복했다는 소식이 주는 충격도 다음 줄에 쓰인 내용에 비하면 소박한 수준이었다.

[... 루테니아 방면의 다닐렌츠 군, 우리 영지의 남부 접경지대 방면으로 북상 중. 해당 방면으로의 침공에 대한 대비가 필요.]

“이, 이런 미친...?!”

현재 바렌부르크가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의 대부분은 서쪽 전선, 즉 다닐렌츠와의 접경지대에 모두 몰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테니아 방면으로 새로운 적의 공세가 시작된다면, 막을 방법이 없었다.

“여, 영주님! 이걸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라니, 그걸 지금 나한테 묻는 건가? 네가 고민하라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거 아냐 이 병신 같은 새끼야!!!”

“으헉!”

탱그렁!!!

야닝스 남작의 손에서 던져진 은제 술잔이 집무실 한쪽 벽에 부딪혔다가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군무관의 머리통을 대신해 남작의 분노를 받아낸 집무실의 한쪽 벽면이 술잔이 토해낸 와인으로 범벅이 되었다.

검붉은 와인의 색으로 물들어 가는 벽의 모습이, 마치 피 흘리는 누군가의 모습 같아 보여서, 야닝스 남작은 섬뜩함을 느꼈다.

“지금... 지금 당장 튀어가서 이 상황을 대비할 방도를 찾아라. 그렇지 않으면, 내일 아침 저택 정문에 네 모가지가 걸려 있을 거다.”

“예, 예엡! 알겠습니다!”

야닝스 남작의 목소리에 깔린 진득한 분노의 냄새를 맡은 군무관 몰트케가 부리나케 집무실 밖으로 달려나간다.

홀로 남은 야닝스 남작, 그는 자신의 집무실 책상 위에 놓인 지도를 바라보았다.

훤히 열린 남부 루테니아와의 접경지대가 눈에 들어왔다.

“이런 씨발...”

눈앞의 라엔슈타인만 바라보고 있던 사이, 어느새 다가온 다닐렌츠의 날카로운 창끝이 바렌부르크의 옆구리를 노리고 있었다.

***

우리 영지의 라엔슈타인 요새를 떨어뜨리기 위해, 바렌부르크는 지원군을 합쳐 무려 3천 명이 넘는 병력을 동원했다.

하지만 그 병력은 새로이 ‘다닐렌츠의 수호신’으로 거듭난 데론 베르켈이 지휘하는 2천의 다닐렌츠 군에게 가로막혀 여전히 라엔슈타인 요새에 발이 묶여 있었다.

그 사이, 나는 키르헨에서 급하게 끌어모은 용병들과 이제 막 훈련소에서 튀어나온 따끈따끈한 신병들이 대다수인 영지군 약간을 데리고 루테니아를 무너뜨렸다.

그 과정에서 보여준 나의 초인적인 무위(武威)에 영지군 장병들과 용병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고, 고작 한 달이라는 시간에 영지 하나를 자빠뜨린 눈부신 업적까지 더해지자 이제 나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은 하늘을 찌르는 수준이 되었다.

“하하하! 하긴 영주님께서 싸우는 걸 보면 누구든 열렬한 ‘데미언 교(敎)’의 신도가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저 또한 그랬으니까요. 바인호프 요새에서 루테니아 놈들 8백 명을 상대로 보여주신 그 단기 돌진은 정말이지...”

“워워, 거기까지. 잡담은 회의 끝나고 하도록.”

또다시 나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기 위해 엉덩이를 들썩거리던 하랄트의 입을 막은 뒤, 나는 내 뒤에 놓인 지도를 가리켰다.

서로 인접한 세 영지, 다닐렌츠와 바렌부르크, 루테니아의 접경지대를 그려 놓은 지도였다.

“내일이면 우리는 바렌부르크 영지 내로 들어선다. 반나절 거리에 남부 접경지 방위를 관할하는 지엘론(Zielon) 요새가 있다. 이곳을 무너뜨리면 주도 엘스터(Elster)까지는 고작 이틀 거리다.”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은 채로 나의 말을 경청하는 지휘관들.

그들의 눈엔 나에 대한 존경과 절대적 믿음의 감정만이 떠올라 있다.

“현재 바렌부르크는 라엔슈타인 요새 공성에 영지 대부분의 전력을 몰아넣은 상태다. 단숨에 요새를 떨어뜨리고, 키르헨까지 육박하여 전쟁의 승기를 잡으려 했겠지. 허나, 라엔슈타인 요새 사령관인 데론 베르켈 경과 그 장병들의 분투로 놈들은 여전히 그곳에 발목이 잡힌 상태다.”

잠시 말을 이야기를 끊고 내 앞에 놓여 있던 물잔을 들어 목을 축인다.

그 잠깐의 침묵이 오히려 회의의 집중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 만약 놈들이 우리를 막기 위해 병력을 나눈다면, 아마도 지금 유지되는 전장의 균형이 깨어지겠지.”

“요새의 주둔군이 공세(攻勢)로 전환하겠군요.”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정확히 잡아낸 아드리안의 목소리에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베르켈 경께서 그런 기회를 놓칠 분이 아니니, 병력 분산으로 전력이 한껏 깎여나간 놈들은 요새 주둔군의 밥이 될 거다.”

애초에 그와 관련된 언질을 전령을 통해 전달하기도 했으니, 알아서 베르켈 경이 시의적절한 지시를 내려줄 터.

“만약, 놈들이 전력을 나누지 않고 모든 병력을 돌려 우리 쪽으로 향하면 어떡합니까?”

이번엔 엔리케의 질문.

하지만, 그에 대한 답도 당연히 준비되어 있었다.

“놈들이 모든 병력을 돌려 우리 쪽으로 온다고 해도 거리의 차이가 있는 만큼 절대 우리보다 먼저 엘스터에 도착할 수 없다. 더욱이, 베르켈 경이 놈들이 순순히 물러나도록 놔둘 리가 없지.”

베르켈 경이 어떤 사람인데 놈들이 얌전히 도망치도록 두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놈들의 탐스러운 뒤통수를 얼얼하도록, 아니 머리통이 깨져 피가 철철 흐르도록 찰지게 후려쳐줄 것이다.

“지엘론 요새에 주둔군이 다소 있겠지만, 걱정할 것 없다. 내가 선두에 서서 성문을 열어젖힐 테니 말이다.”

“영주님...”

부하들이 우려 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당연한 반응이다.

세상 어떤 부하들이 영주가 직접 전투의 선두에 서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단 말인가?

분명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그만큼 위험하고 걱정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부하들의 눈빛을 담담하게 받아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용맹함과 만용을 구분하지 못하는 머저리가 아니다. 저항이 거세어 위험한 상황이 되면 주저 없이 몸을 빼낼 것이니, 그대들은 나를 믿고 모두 용감히 전투에 임하라. 모두 알겠나?”

대답은, 즉각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영주님!!!”

***

이후의 전황은 우리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남부 지엘론 요새의 함락 소식에 크게 놀란 바렌부르크 측은 라엔슈타인 요새를 공격하던 병력의 일부를 돌려 주도 엘스터로 귀환토록 했다.

추후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거대한 패착(敗着)이었다.

요새를 공격하던 바렌부르크의 병력이 쪼개지자마자, 한 달 내내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지키기만 했던 라엔슈타인의 주둔군들이 공세로 전환했다.

“가자! 저 탐욕스러운 바렌부르크 놈들의 뱃가죽에 다닐렌츠의 강철 검을 꽂아주는 거다!!!”

“가자아아아아아아!!!”

지금껏 본적 없었던 무자비한 석궁 일제 사격이 가해진 뒤, 사령관 데론 베르켈의 명령을 받은 다닐렌츠의 기사 에르발트 베링이 잘 무장된 일백 기의 기마병을 이끌고 요새 밖으로 나와 바렌부르크의 주둔지를 들이쳤다.

해당 기마병들은 바로 이런 순간에 쓰기 위해 데론이 철저히 아껴둔 병력으로, 모두가 나움가르트 산 강철 검을 들고 질 좋은 오크 가죽으로 만든 갑옷으로 무장한 강력한 병종이었다.

설마하니 주둔군이 성문을 열고 튀어나올 줄, 그것도 기마병의 공격을 받으리라 생각지 못했던 바렌부르크 군은 그 공격 한 번에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이런 시발! 다들 정신 차려라 이 새끼들아! 적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기병 방진을 꾸려라!!!”

바렌부르크 군의 사령관, 켈 슈펭글러가 악을 쓰며 겁에 질린 병사들을 수습하려 했지만, 될 일이 아니었다.

한 달 가까운 야전 생활로 지칠 대로 지치고 사기마저 떨어져 버린 바렌부르크 군이었다.

앞서 가해진 수백 발의 석궁 일제 사격만으로도 셀 수 없이 많은 병사가 다치고 상했다.

뒤이어 득달같이 기마병들이 달려드니, 바렌부르크의 병사들은 맞서 싸우긴커녕 사방으로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리고 그 지독한 혼란의 와중에 바렌부르크 군은 또 하나의 지독한 불운을 겪게 되었으니...

“하! 나는 다닐렌츠의 기사 에르발트 베링이다! 적장의 목을 가지러 왔다!!!”

“이런 제기랄...! 내가 바로 바렌부르크의 켈 슈펭글러다!!!”

단숨에 주둔지 중심의 지휘관 막사까지 말을 달려온 베링을 맞상대하기 위해 자신의 검을 뽑은 켈 슈펭글러.

그는 분명 영지 바렌부르크에서 손꼽히는 실력을 지닌 기사였으나, 사방에서 들려오는 부하들의 비명은 그가 눈앞의 싸움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카캉! 캉! 카아앙! 푹! 촤아악!!!

“커읍!!!”

스륵, 쿠웅!!!

결국, 베링의 검에 심장을 정통으로 찔린 켈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말 아래로 떨어졌다.

지난 한 달간 이어지던 라엔슈타인 요새 전투의 끝을 알리는 새빨간 핏물이 그의 꿰뚫린 가슴팍에서 울컥거리며 솟아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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