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15화 (115/197)

바렌부르크 (3)

라엔슈타인 요새를 공격하던 바렌부르크 군의 사령관, 켈 슈펭글러가 다닐렌츠의 기사 에르발트 베링의 검에 목숨을 잃던 그 시각.

“드디어...”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도시의 전경에, 하랄트가 복잡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린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본 엔리케가 피식 웃으며 하랄트의 등을 두드렸다.

“허이구, 이 친구 보기보다 감성적이네?”

“예? 아...”

“뭐, 저 동네랑 얽힌 개인적 사정이라도 있나? 아니면 여자 문제? 숨겨둔 자식? 뭔데?”

싱글거리며 묻는 엔리케의 얼굴과 달리 한없이 진지한 표정을 지은 하랄트가 대답을 내놓는다.

“그런 건 아니고... 사실, 저를 비롯한 다닐렌츠 영지군의 모두가 훈련소 시절부터 바렌부르크를 가상의 ‘적(敵)’으로 상정하고 훈련을 받습니다.”

“아... 그, 그래?”

자신이 반쯤 농담 삼아 던진 말을 하랄트가 너무나 진지한 대답으로 받아내자 조금 당황한 엔리케였다.

“예. 그뿐만이 아니라 어렸을 적부터 어른들이 바렌부르크 놈들 욕하는 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그렇다 보니... 저를 비롯한 다닐렌츠 토박이들에겐 저 도시를 점령하는 게 역사적 사명처럼 여겨지는 구석이 있습니다.”

“다닐렌츠 인들의 역사적 사명이라...”

“사실, 어렸을 땐 어른들의 그런 말이 잘 와닿지 않았습니다. 과거부터 바렌부르크와 우리 다닐렌츠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는 하나 제 생전에 두 영지가 전쟁을 벌이거나 하지는 않았으니까요.”

“어, 그럼 마지막으로 두 영지가 싸운 건 언젭니까?”

이번엔 아드리안의 질문.

하랄트는 상관인 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아주 오래전, 이미 돌아가신 저희 할아버지가 젊으셨을 적의 일이니 한 6, 70년 전쯤 될 겁니다. 그때를 마지막으로 두 영지 간에 전면전이라고 불릴 정도의 큰 싸움은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음...”

“심지어 그때는 지금처럼 ‘남작령 바렌부르크’도 아니고, ‘백작령 안할트에 속한 바렌부르크 지방’이었죠. 뭐, 자잘한 소규모 순찰대 병력들이 다툼 정도는 계속해서 있었다지만, 대놓고 전쟁이라고 부를 정도의 큰 충돌은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다닐렌츠에서 태어나 평생을 다닐렌츠에서만 자라난 토박이 하랄트.

반면, 영주인 나는 물론이고 지금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엔리케와 아드리안 모두 타지(他地)에서 넘어온 인물들이었다.

그런 만큼 우리가 다닐렌츠와 바렌부르크 사이의 해묵은 악감정을 어릴 적부터 가슴 속에 품고 자란 하랄트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가만히 서서 하랄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이겠지.

“바렌부르크 놈들, 그 옛날부터 사사건건 우리 영지를 멸시하고 괴롭혀 왔답니다. 다닐렌츠가 왕국 북서부 변방, 고립된 지역에 자리 잡은 걸 약점 삼아 툭 하면 통행로를 가로막고 협박했다죠. 흉년이 들면 곡물을 싣고 다닐렌츠로 향하는 상단 마차를 붙잡아 우리 영지민들이 굶어 죽도록 하고, 몬스터들이 창궐했을 땐 무기를 나르는 마차를 가로막았답니다.”

“허어...”

여기까지 들었을 때, 나의 입에서 짧은 감상이 툭 튀어나왔다.

“... 이 새끼들, 알고 보니 완전 개새끼들이네?”

“여, 영주님!”

지나치게 친근한(?) 나의 표현에, 옆에 있던 아드리안이 깜짝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왜, 내 말이 틀렸어?”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런 표현은 좀... 누가 들을까 무섭습니다. 영지의 지배자로서 체통을 지키셔야지요.”

“체통은 무슨... 됐어, 내가 뭐 날 때부터 푸른 피 타고난 것도 아니고. 용병 바닥에서 개 같이 구르다 온 길거리 출신인 거, 다 아는 사실 아니냐.”

“푸흐흣, 그건 맞지요. 무려 이 엔리케의 시중을 들던 푸른 방패 용병대의 직.속.후.배. 아니셨습니까? 푸하하하!”

엔리케의 시원한 웃음 덕에 조금은 유쾌해진 분위기.

나는 하랄트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 말을 끊어서 미안하네. 하던 말 계속해봐.”

“아, 예. 영주님.”

크흠, 짧게 목을 가다듬은 하랄트가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처음 영지군에 입대했을 때부터, 저의 소원은 바렌부르크 놈들을 때려잡는 거였습니다. 물론 제가 바라던 것과는 다르게 루테니아 방면으로 배치되어서 지나가는 타 영지 상단들에게 통행료나 걷는 징수관 노릇을 하게 됐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바렌부르크 깊숙이 쳐들어가 자랑스러운 다닐렌츠의 깃발을 휘날리리라, 그런 꿈을 꾸었었죠.”

거기까지 말을 마친 하랄트가 잠시 침묵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 제가 군복을 벗기 전 그 꿈을 이루게 해주셔서, 그 역사적인 순간에 함께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영주님.”

그렇게 말하며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는 하랄트에게 나는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흠, 아직 감사하다는 말은 이른 거 아닌가?”

“... 예?”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나를 보는 하랄트에게, 나는 가벼운 턱짓으로 저 멀리 보이는 도시를 가리켰다.

“고맙다는 말은 저기 보이는 성벽 위에 우리 영지 깃발 꽂은 후 다시 듣는 걸로 하지. 알겠나?”

“아...! 예, 영주님! 알겠습니다!”

남작령 바렌부르크의 주도(主都),

엘스터(Elster)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

바렌부르크 시내 중심부에 자리한 영주 저택.

바로 그 옆에, 영지의 모든 군무(軍務)를 담당하는 군무관 리엠 몰트케의 집무실 건물이 존재한다.

“다들 모였나? 그럼 회의 시작하지.”

사나운 성질머리로 유명한 바렌부르크의 영주, 폴커 야닝스 남작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고 구박받는 신세였지만 사실 리엠 몰트케는 그렇게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펠리노어 왕립사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 장교 출신으로, 수년간 왕국군에서 장교로서 군 경력을 쌓았고 이후 고향인 바렌부르크로 돌아와 영지군 지휘관이 되었다.

영지군의 다른 장교들을 압도하는 뛰어난 지휘 능력으로 일찌감치 두각을 드러냈고, 마침내 기사 작위를 받아 영지 내의 모든 군사적 업무를 총괄하는 군무관이 되었다.

일신의 뛰어난 무력을 인정받아 다닐렌츠 침공군 사령관으로 파견되었던 켈 슈펭글러조차 검이 아닌 군략(軍略) 면에선 리엠 몰트케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평이 있었을 정도다.

그런 리엠 몰트케가, 지금 사력을 다해 엘스터를 지켜내기 위한 싸움을 준비 중이었다.

“화살은? 창고 안에 화살은 충분한가?”

“매일 5천 발 이상 적들에게 화살을 퍼붓는다는 가정 하에, 약 2주 정도면 현재 화살 재고는 모두 소진될 것 같습니다.”

“2주? 하, 젠장! 혹시 그럼 볼트는... 아니야, 물어보나 마나겠군.”

석궁용 화살인 볼트의 가격이 일반적인 화살에 비해 훨씬 비싸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볼트의 재고를 묻는 건 하등 무의미한 질문이었다.

“비축된 군량은 얼마나 되지?”

“비슷합니다. 보름 남짓 버틸 정도의 밀가루, 약간의 고기와 채소가 있습니다.”

“그래? 그럼... 오늘부터 식사 배급량을 평시의 7할 정도로 줄이도록.”

“엇, 하지만 군무관님! 그렇게 되면 병사들의 불만이 속출할 겁니다.”

“식량을 줄여야 성벽 안에서 최대한 오래 버틸 수 있다. 그게 싫다는 놈은 곧 엘스터에 들이닥칠 ‘그 새끼’랑 한판 붙고 싶은 것으로 알고 성문 열어준다고 해.”

“... 알겠습니다.”

몰트케가 언급한 ‘그 새끼’가 얼마나 무서운 놈들인지 알고 있는 부하 장교들이 단번에 입을 다문다.

지금까지 수집된 정보에 의하면, ‘그 새끼’는 실로 공포스러운 상대였다.

어지간한 군마들은 망아지처럼 작아 보이게 만드는 거대한 흑마(黑馬)에 올라타 창질 한 번에 병사 대여섯 명의 머리통을 날리는 괴력의 기사.

놈은 저 멀리 다닐렌츠 남쪽의 바인호프 요새에서 무려 8백여 명의 적들을 상대로 단기필마로 달려들어 백여 명의 병사들을 찌르고 베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거대한 흑마의 말발굽으로 짓밟아 죽였다고 했다.

뿐인가, 그 기세를 휘몰아 고작 몇 주 만에 루테니아를 무너뜨리고 며칠 전엔 바렌부르크와 루테니아를 잇는 길목에 세워진 지엘론 요새까지 함락시켰다.

“노, 놈은 악마입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같은 인간이라면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놈은 도움닫기 몇 번만으로 그 높은 요새의 장벽을 뛰어넘었고, 창질 한 번에 두꺼운 통나무로 만든 감시탑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놈이 정말 인간이라면 어찌 그런 게 가능하겠습니까?”

“혼자서 요새 안으로 뛰어든 놈을 막기 위해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이 달려들었습니다. 그 중엔 지엘론 요새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튀넨 경도 있었지만... 모두, 한 명도 빠짐없이 그 괴물 놈의 손에 다 죽었습니다!”

“튀넨 사령관님 말입니까? 어흐윽, 말도 마십시오! 그 괴물 새끼가 휘두른 창에 머리통이 터져 죽었습니다! 들고 있던 검은 휘둘러 보지도 못했습니다!”

“창(槍)이라... 그런 걸 창이라고 부를 수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놈의 창과 부딪히는 족족 우리 편이 휘두른 무기들은 모조리 깨져나갔습니다. 그건 그냥... 그냥 무식하게 큰 쇳덩어리 자체였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무기가 아닙니다!”

“놈은 손찌검 한 방으로 제 동료를 때려죽였습니다. 예? 주먹질을 잘못 말한 게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제가 바로 옆에서 똑똑히 보았는데 주먹질이 아니었습니다. 손바닥으로 뺨을 후려쳤는데, 맞은 제 동료의 턱과 광대뼈가 단박에 부서졌습니다. 그건 손바닥이 아니라... 그냥 철퇴였습니다!”

지엘론 요새에서 간신히 탈출해 엘스터로 도망쳐 온 패잔병들의 증언은 대강 이러했다.

당연히, 처음엔 믿지 않았다.

패잔병(敗殘兵)이란 무엇인가?

적을 맞이해 끝까지 용감하게 맞서 싸우긴커녕, 제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해 등 돌리고 도망친 놈들이었다.

그런 놈들이 스스로의 비겁함을 덮기 위해 무슨 말이든 못하겠는가?

맞서 싸운 적의 전력을 부풀리고, 있지도 않은 불운을 만들어내 어떻게든 패배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패잔병들의 습성이다.

하지만, 이번 지엘론 요새 전투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뭐가 그렇게 달랐냐고?

‘... 패잔병들이 증언한 내용이, 너무 얼토당토않은 수준이었지.’

그랬다.

함락당한 지엘론 요새에서 겨우겨우 도망쳐 나온 바렌부르크의 병사들이 입을 모아 증언한 패배의 요인.

바로, 다닐렌츠 군을 이끄는 괴력의 기사였다.

‘심지어, 그 기사가 다닐렌츠의 영주라는 얘기도 있다.’

처음 어느 병사에게서 그 얘길 들었을 땐,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지껄이지 말라며 호통을 쳤던 몰트케다.

지금까지 들은 소문의 절반만 맞아도 해당 인물은 신화 속에나 등장하는 반신(半神) 급의 영웅이었다.

근데 심지어 그 영웅이 이제 갓 스물한 살이 된 다닐렌츠의 신임 영주, 데미언 카릴베르크다?

상상으로 뽑아낸 헛소리도 이 정도면 가히 예술의 경지라 할만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내용을 담은 증언이 패잔병들의 입을 통해 하나둘씩 쌓이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홀로 800명의 루테니아 군을 격퇴한 용감무쌍한 기사.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에 영지 하나를 무릎 꿇린 군략의 귀재.

그리고, 지엘론 요새의 장벽을 뛰어넘어 바렌부르크 주둔군을 궤멸시킨 신화적인 무위(武威)의 주인공.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바렌부르크는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몰트케를 비롯한 바렌부르크 영지군 수뇌부들이 머리를 맞대어 짜낸 방책은 바로...

“... 우리는 나가서 싸우지 않는다. 성벽의 견고함에 기대어 조금만 버티면, 곧 안할트 백작령에서 ‘그’가 올 것이다.”

온갖 흉흉한 소문을 몰고 다니는 다닐렌츠의 기사를 막기 위한, 최강의 패를 내미는 것이었다.

“‘안할트의 늑대’ 마티아스 괴츠... 왕국 북서부 최강이라 불리는 그의 검이라면, 그 말 같지도 않은 다닐렌츠 촌놈의 창을 넉넉히 꺾어낼 수 있을 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