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렌부르크 (4)
바렌부르크의 주도(主都), 엘스터 포위 사흘째_
“영주님, 정찰 다녀왔습니다.”
“음, 그래. 수고했다.”
나의 명령을 받아 일단의 기마병들을 이끌고 엘스터 주변을 정찰하고 온 아드리안이 내가 머무는 지휘관 막사 안으로 들어와 공손히 인사하며 흙먼지로 더러워진 투구를 벗는다.
어허, 그놈 참... 누구 부하인지 참 잘 생겼다!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를 정리하는 녀석에게, 나는 직접 따른 냉수 한잔을 내어주었다.
“옛다, 일단 시원하게 한 잔 마셔라.”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뭔 비싼 술도 아니고, 고작 물 한잔을 내준 것인데도 저리 깍듯하게 인사를 하다니.
안 그래도 아끼는 녀석인데, 하는 행동도 저러하니 예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 별일은 없었고?”
“예, 없었습니다. 바렌부르크 놈들, 아주 성벽 안에 콕 처박혀서 나올 생각을 안 합니다. 성벽 근처까지 꽤 가까이 다가갔는데, 멀뚱멀뚱 쳐 보기만 하지 화살 한 발조차 쏘질 않았습니다.”
“그럴 테지. 아마 화살 한 발 쏘는 것도 아까워서 그러는 걸 거다.”
우리 너무 빨리 지엘론 요새를 점령하고 엘스터까지 달려온 탓에, 바렌부르크 군은 농성(籠城) 준비를 제대로 할 시간이 없었다.
식량도, 무기도 부족한 상태에서 부랴부랴 성문을 닫아걸고 우리를 맞이한 엘스터의 바렌부르크 주둔군.
하지만 공성 측인 우리 다닐렌츠도, 수성 측인 바렌부르크도 급하게 싸움을 벌일 생각은 없었기에 그저 성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쏘아보며 대치하는 상황이 사흘째 이어지고 있었다.
“바렌부르크 놈들은 지금 안할트 쪽에서 보내줄 지원군을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때까진 최대한 전투를 피하려 들겠지.”
“지원군이라... 근데, 저희가 나갈 문을 다 틀어막고 있는데 안할트 영지랑 어떻게 연락을 합니까?”
멍한 표정으로 묻는 아드리안.
그의 말처럼, 현재 엘스터에서 외부로 나갈 수 있는 길은 모두 우리 다닐렌츠 군이 틀어막고 있었다.
도시의 정문 역할을 하는 남문(南門)은 내가 이끄는 다닐렌츠 군 본대가, 후문 역할을 하는 북문(北門)은 엔리케와 하랄트가 지휘하는 별동대가 포위했다.
즉, 전령을 통해 직접 서신을 전달하는 방법으론 외부와 연락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 굳이 요청하지 않아도, 안할트에선 알아서 엘스터를 구원하기 위해 병력을 편성하고 있을 거다.”
“어째서입니까?”
“당연한 거지. 안할트의 영주와 바렌부르크의 영주는 서로 봉신(封臣) 계약을 맺은 주군과 가신의 관계니까. 이쪽의 전황을 안할트 백작에게 보고하는 정보망이 분명 형성되어 있을 거다.”
“아...”
“보통 사람들은 주군의 부름에 가신이 응하는 것만을 생각하지만, 반대로 가신의 영지가 위험에 처했을 때 주군이 도움을 주는 상황도 생긴다.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지키는, 수호(守護)의 의무랄까?”
“흐음...”
왕국 북서부 지역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백작령 안할트와 검을 맞대야 하는 상황에 긴장이 된 것일까?
아드리안의 잘생긴 이마가 심각하게 찡그려진다.
“그럼, 저희도 빨리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지금 라엔슈타인 방면에서 오고 있을 지원군에게도 더 빨리 진군하도록 연락을 전하고...”
“하하, 괜찮아. 안할트 놈들이 그렇게 빨리 오지는 않을 거다.”
“예? 아까는 이미 엘스터를 구원하기 위한 병력을 편성하고 있을 거라고 하셔놓고...”
“편성은 해두겠지. 근데... 아마 천천히 올 거야. 아주 느릿느릿, 여유롭게.”
“엥? 대체 그럴 이유가 어딨습니까? 바렌부르크 남작은 안할트 백작의 가신인데요.”
의문 가득한 아드리안의 눈동자가, 마치 형을 찾아와 문제의 답을 묻는 막냇동생의 눈빛 같았다.
“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일이지. 하지만, 정치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돼.”
“정치적이라면... 후우, 어렵습니다.”
“응, 어렵지. 당연한 거야. 설명이 좀 길어질 것 같으니까... 여기, 이리 와서 앉아라.”
“예, 영주님.”
지휘관 막사 한쪽에 놓인 다탁 앞 의자에 아드리안을 앉힌 뒤 나는 본격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현재 바렌부르크의 영주로 군림하고 있는 폴커 야닝스 남작은, 불과 제 아버지 때까지만 해도 귀족이 아니었지. 심지어 폴커 본인조차 중년의 나이가 될 때까진 그저 돈 많이 버는 상인 가문의 가주였을 뿐이야.”
“예.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다 폴커의 나이 마흔 살에 그때까지 번 돈을 모조리 싸 들고 당시 안할트의 영주였던 그레고르 다벨 백작을 찾아갔어. 가진 돈 다 드릴 테니, 귀족 작위 하나만 달라고.”
“아... 그게, 지금의 바렌부르크 남작 자리군요?”
“맞아. 돈으로 작위를 산 거야. 처음에야 뭐 근본 없다고 손가락질 좀 받았다지만, 그 후로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은 그런 말 하는 사람은 찾기가 어렵지.”
사실, 그를 비웃는 이들이 사라졌다기보단, 그런 생각을 감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거의 20년 가까이 별 탈 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바렌부르크 남작, 폴커 야닝스의 권세가 그들의 침묵을 만들었다.
애초에 돈으로 샀건 도박판에서 따냈건, 그가 얻은 귀족의 자리는 주군인 안할트 백작의 권위가 살아있는 한 계속될 자리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폴커가 충성을 맹세했던 전대(前代) 안할트 백작, 그레고르 다벨이 죽은 다음이야. 그레고르의 아들이었던 현(現) 안할트 백작 울리히 다벨과 폴커의 관계가 그리 좋지 않거든.”
“어우, 또 그런 사정이 있었습니까?”
“응. 듣자하니 울리히는 아버지 그레고르에게 영주 자리를 이어받기 전부터 폴커를 멸시하는 발언을 자주 했다더군. ‘천한 장사치 출신 따위가’, ‘파에르모의 노예 주제에’, 뭐 대충 이런 거 아니었을까?”
“... 모두 상인들을 얕잡아 부르는 말이군요.”
내가 다닐렌츠 상단에서 일하던 시절, 밤낮으로 나를 보필했던 아드리안이기에 상계에 떠도는 상인들의 멸칭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백작 가문의 도련님으로 태어나 안하무인으로 자란 울리히가 상인 출신인 폴커의 속을 긁을 대로 긁은 거지. 폴커는 당연히 분노했고, 울리히가 아닌 그레고르의 다른 자식들이 백작 위를 물려받도록 뒤에서 이런저런 수작을 부렸던 모양인데... 뭐, 보다시피 뜻대로 잘되지 않았던 모양이야.”
“영주님 말씀을 듣고 보니 서로 좋을 수가 없는 사이군요.”
“그래. 내 짐작이 맞다면, 이번 기회에 울리히는 폴커의 버릇을 고쳐놓으려 할 거야. 그러기 위해선, 엘스터가 정말 점령되기 직전의 위기 상황까지 몰려야 할 것이고... 한데, 울리히 그 작자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있거든.”
“어떤...?”
스윽, 지휘관 천막 책상 위로 뻗은 내 오른손에 지휘관 전술 회의 때 썼던 문서 한 장이 잡힌다.
안할트 영지에서 보낼, 지원군의 규모를 예상한 문서였다.
“울리히 그놈은 설령 지원군 투입이 늦어져 우리가 바렌부르크를 점령해버린다고 해도 금세 다시 빼앗아 올 수 있으리란 착각을 하고 있지. 하지만... 과연 그럴까?”
***
바렌부르크의 주도(主都), 엘스터 포위 나흘째_
나의 지시로 군수물자 보급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나갔던 아드리안이 지휘관 막사로 돌아왔다.
“영주님, 보고 드리겠습니다.”
“어, 말해.”
“먼저 키르헨에서 온 보급품 상황 보고드리겠습니다. 군량으로 쓸 밀과 보리가 3주 분량, 특식으로 장병들에게 제공될 돼지고기와 닭고기가 약 5회분 도착했습니다.”
“3주에 5회분이라... 그거 기준이 지금 병력으로 계산한 거지?”
“예, 그렇습니다.”
“그럼... 지원군이 오면 좀 기간이 줄겠군. 일단 알았고, 또 있나?”
“예, 나움가르트에서 온 무장 보급품 보고 드리겠습니다. 병사용 고블린 가죽 흉갑이 5백 령(領, 갑옷을 세는 단위), 강철 검 백 자루, 나무 방패 이백 개, 화살 5만 개와 볼트 1만 개, 그리고...”
말을 많이 해서 인지, 아드리안이 잠시 숨을 고른 뒤 보고를 이어 나간다.
“공성 병기 제작을 위한 기술자 열다섯 명이 함께 도착했습니다.”
“오, 왔는가?”
공성 병기 제작자들이 도착했다는 소리에 나는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공성 병기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성을 공격(攻城)’하기 위한 특수한 장비를 의미한다.
투석기와 공성추, 공성탑, 트레뷰셋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워낙 크고 무거운 장비들이었기에 대부분의 경우 미리 만들어 이동시키기보단 전투가 벌어지는 곳까지 자재를 운반한 후 현장에서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그리고 당연히, 그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기 위해 관련 지식을 갖춘 공성 병기 전문 기술자들이 필요했다.
‘예전엔 다닐렌츠 내에 공성 병기 만들 줄 아는 기술자들이 하나도 없었지만...’
지금은 못해도 오륙십 명 정도는 될 거다.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변화였는데, 이 또한 내가 다닐렌츠에서 이뤄낸 업적 중 하나였다.
과거의 다닐렌츠는 기술자들에게 전혀 매력적인 영지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인구가 원체 적었던 탓에 기술자들의 입장에선 소위 ‘밥벌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가파르게 상승하는 인구로 인해 각종 공업품에 대한 수요가 많아졌고, 특히 나움가르트에서 철광석을 생산하기 시작하며 관련 산업들이 일제히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영지의 발전상을 전해 듣고 혹하여 제 발로 찾아오는 이들도 많았지만, 현재 다닐렌츠에서 활동하는 대다수의 기술자는 영지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추진한 기술자 모집 정책에 의해 외부에서 영입된 후 정착한 이들이었다.
해당 정책은 영주 자리에 오르기 한참 이전인 다닐렌츠 상단장 시절, 내가 전대 영주인 구스타브 카릴베르크 남작과 행정관 세르지오를 설득해 시행한 제도였다.
정확히 무슨 제도냐고?
그야 당연히...
‘... 돈 뿌리는 거지, 돈! 후우, 내가 기술자들 긁어모은다고 사방 천지에 뿌린 금화가 대체 몇 개냐?’
못해도 수백, 아니 족히 수천 골드는 될 것이다.
이제 왕국 곳곳으로 그 활동 무대를 확장해나가고 있는 다닐렌츠 상단의 영향력을 이용해 실력 좋은 기술자라면 무조건... 아니, 인성에 문제 있는 놈 빼고는 다 데려왔다.
쇳밥 먹는 대장장이와 가죽 다루는 가죽장이, 활과 화살, 석궁을 만드는 조궁장이, 그릇 빚는 옹기장이와 나무 깎는 목수 등등.
영지 발전에 도움이 될 기술을 갖춘 이라면 웃돈을 줘서라도 끌고 왔다.
물론 ‘창검(槍劍)의 고향’이라 불리는 바페슈타트과 왕도 카를리온, 쾨니히슈타인에 자리 잡은 명성 높은 장인들의 경우엔 돈으로 불러올 수 있는 양반들이 아니니 깔끔하게 포기.
그래도 쏟아부은 돈이 워낙 어마어마했던지라, 꽤 준수한 실력을 지닌 기술자들을 대거 구해 다닐렌츠에 정착시킬 수 있었다.
“좋아. 그럼 공성 병기 제작 바로 시작하도록 지시해. 필요한 인력 있으면 얼마든지 가져다 쓰라고 하고.”
“예, 알겠습니다.”
“보급도 왔으니 오늘 저녁은 풍족하게 먹을 수 있도록. 돼지고기도 왔댔지? 성벽 쪽에서 잘 보이는 곳에 장작불 차려 놓고 통으로 구워버려.”
“하하하! 바렌부르크 놈들, 우리 애들이 거하게 먹는 거 보면 부러워서 죽으려고 할 겁니다.”
“그러라고 하는 거야. 그렇다고 너무 긴장 풀진 말고. 술은 절대 금지. 나가 봐.”
“예, 영주님!”
그날 저녁, 라엔슈타인에서 출발한 천여 명의 지원군이 우리 본대에 합류했고...
“전군, 돌겨어어어억!!!”
“와아아아아아아아!!!”
포위 닷새째가 되는 날 아침, 공들여 만든 여러 공성 병기들과 함께 우리 군은 엘스터 성벽을 향해 돌격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