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17화 (117/197)

바렌부르크 (5)

“쏴라아아아!!! 놈들이 사다리를 못 걸게 막아!!!”

엘스터 성벽 위, 바렌부르크 군 장교가 처절한 목소리로 병사들을 지휘한다.

“다닐렌츠 개새끼들!!!”

“다 뒤져, 씨발!!!”

퉁! 투투둥! 투웅! 퉁! 퉁!

그의 명령을 들은 병사들이 이를 악물고 활 시위를 당긴다.

적에게 포위당해 보급이 끊긴 상황에서 지난 며칠간 아끼고 아껴왔던 화살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저 성벽 아래에서 기어오르는 다닐렌츠의 개새끼들을 하나라도 더 주신(主神) 아르닌의 곁으로 보내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니까.

“저 새끼들, 장난 아닌데요? 영 맹탕인 줄 알았는데...”

격렬한 바렌부르크 군의 저항을 멀리서 지켜보던 아드리안이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도시를 함락시키지 못할 거란 걱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다치고 죽어갈 다닐렌츠의 병사들이 걱정된 것이다.

그런 아드리안의 마음을 짐작한 나는, 녀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표정 펴라, 인마. 너의 분위기가, 표정이, 네가 내쉬는 숨소리 하나하나가 우리 병사들의 사기에 영향을 끼치는 거야.”

“아, 예. 죄송합니다!”

나의 지적에 아드리안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인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고강한 검술 실력을 지녀 기사의 자리에 올랐지만, 아직도 배울 것이 많았다.

“전황이 녹록지 않고, 계획과 다르게 흘러가서 곤란한 상황이 되더라도 저 아이펠 산맥의 고봉들처럼 담대하게 행동해라. 널 바라보는 다닐렌츠 병사들의 시선을 생각해라, 기사 아드리안.”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아드리안에게 짧은 가르침을 내린 후, 나는 다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성벽을 바라보았다.

느릿느릿, 거북이처럼 전진하던 우리 군의 공성추가 마침내 엘스터의 성문 앞에 도달하는 것이 보였다.

“... 시원하게 때려 부숴보자. 자, 드가자!”

***

쿠우우우웅!!!

멀리 나움가르트에서 파견된 열다섯 명의 공성 병기 기술자들과 조수로 투입된 스무 명의 병사들이 밤을 꼬박 새워가며 만들어낸 공성추가 굳게 닫힌 엘스터의 성문을 후려친다.

지난 프롤린 공성전 때 사용했던 공성추와 비교해 훨씬 크고, 웅장한 규모로 만들어진 공성추.

양쪽으로 경사지게 떨어지는 나무 지붕 아래, 건장한 병사가 양손으로 껴안으면 겨우겨우 손가락 끝이 닿을 정도로 두꺼운 통나무를 매달았다.

그리고 다시, 그 통나무 끝에 강철로 만든 뚜껑을 씌워 파괴력과 내구력을 높였다.

쿠우우우우웅!!!

두 번째 충격음이 들렸다.

으직!

성문 뒤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파열음.

필시 성문에 걸린 빗장에 금이 가는 소리일 터!

“야! 시발, 빗장 쪼개진다!!! 얼마 안 남았어! 다시 한번 가자!!!”

공성추의 내부.

가려 뽑은 열여섯 명의 건장한 병사들로 이루어진 성문파괴조(城門破壞組).

그들을 이끄는 조장 역할의 병사가 동료들을 독려하며 힘차게 소리쳤다.

“자, 하나아아아!!!”

“으아아아!”

“더 세게!!! 두우우우우울!!!”

“흐아아아아!!!”

“쫌 부서져라 시바알!!! 세에에에엣!!!”

그의 구령에 발맞춰 다시 한번 힘을 쓰는 병사들.

촤르르르륵!

통나무를 매달고 있는 여섯 개의 굵은 쇠사슬이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벅찬 신음을 토해낸다.

다시, 뒤로 한껏 밀려났던 통나무가 맹렬한 기세로 앞을 향해 달려나간다.

그리고,

쿠우우우우우웅! 우지직-!

강렬한 세 번째 충격음, 그리고 명백하게 들려오는 성문 뒤쪽의 파열음!

공성 측인 다닐렌츠 군에겐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그 소리가, 수성 측인 바렌부르크 측엔 사신의 발소리처럼 들렸으리라.

“서, 성문! 성문이 부서진다!!!”

“안돼 시발!!! 공성추부터 부숴버려!!!”

“끓는 기름! 기름을 부어라!!!”

무너지기 직전인 성문의 상태에 성벽 위 바렌부르크 군은 패닉에 빠져들었고, 곧 공성추의 움직임을 저지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콰쾅! 콰콰쾅! 쾅!

돌멩이와 도끼, 전투 망치 등 묵직한 충격을 전할 수 있는 물건들이 마구잡이로 던져져 공성추의 지붕을 때렸다.

그러나...

“저거 왜 안 부서져? 왜?!”

꿈쩍하지 않는 공성추의 모습에 크게 당황하는 성벽 위의 바렌부르크 군.

허겁지겁 미리 준비해두었던 끓는 기름을 부어보지만,

치이익-!

그 또한 효과가 별로 없었다.

한번 쓰고 버릴 공성추를, 대체 얼마나 꼼꼼하고 견고하게 만든 것인가?!

“부, 불화살! 불화살을 쏴라!!! 기름을 먹였으니 불이 붙을 거야! 그냥 태워 버려라!”

“알겠습니다!”

화살 끝에 기름 먹인 천을 감아 불을 붙이고, 서둘러 성벽 아래로 쏘아내는 바렌부르크 병사들.

퉁! 투웅! 퉁!

길게, 마치 혜성의 꼬리처럼 시커먼 연기를 물고 쏘아진 여러 대의 불화살들이 엘스터 성문을 두들기는 공성추에 연이어 꽂혔다.

화르륵!!!

앞서 뿌렸던 기름에 불화살이 닿아 거센 불길이 일었다.

곧 나무로 만들어진 다닐렌츠 군의 공성추는 불덩이가 되어 주저앉을...

“뭐야?!”

당장이라도 공성추를 삼켜버릴 듯 힘차게 타오르던 불길이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잦아든다.

그리고, 불꽃이 사라진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 가죽?!”

그랬다.

다닐렌츠 군의 공성추 지붕을 덮고 있는 무언가.

그것은 바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의 가죽이었다.

“아니 시발... 아무리 가죽이래도 그렇지, 기름까지 먹였는데 그걸 버텨? 뭔데? 저 가죽 정체가 뭐냐고?!!!”

***

“뭐긴 뭐야, 트롤 가죽이지.”

멀리서 바렌부르크 군의 화공(火攻)을 너끈히 버텨내는 공성추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누군들 상상이나 했을까.

부르는 게 값인 트롤 가죽을 공성추에 덕지덕지 발라 성벽으로 돌진시킬 줄 말이다.

“트롤이야 뭐, 또 잡으면 되니까.”

처음 도착했던 몇 년 전에 비하면 엄청나게 숫자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다닐렌츠 곳곳엔 많은 수의 몬스터가 서식했다.

‘트롤 그까짓 거 뭐, 하루 날 잡고 숲속이나 산속 들어가서 칼질 몇 번 하면 되는 거지.’

이처럼 호쾌한(?) 영주를 둔 덕에, 얼마 전 도착한 나움가르트의 공성 병기 기술자들은 공성추의 방염(防炎) 처리를 위해 트롤 가죽을 사용하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그렇게, 아마도 왕국 역사상 가장 비싼 몸값을 지녔을 공성추가 탄생했고...

쿠우우우웅-! 콰앙!

결국, 그 공성추의 우악스러운 공격 앞에 굳게 닫혀있던 엘스터의 성문은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 끝났군.”

성문이 무너졌다면, 이제 어려울 것이 없다.

공성전의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성벽인데, 그 성벽을 넘어섰으니 어려울 게 뭐가 있겠는가?

“와아아아아아아!!!”

“성문이 무너졌다! 돌입하라!!!”

활짝 열린 성문을 지나 엘스터 도심으로 돌입하는 다닐렌츠 군.

“내가 선두에 선다! 가자!!!”

그리고, 그 대열의 선두에 서서 병사들을 이끄는 기사 아드리안.

그 용맹한 모습을 보며, 나는 한껏 뿌듯함을 느꼈다.

“그래. 오늘의 1등 공신은 너다, 아드리안. 마음껏 날뛰어 봐라! 하하하!”

***

콰콰콰콱!!!

거칠게 내딛는 말발굽에 채여 흩날리는 흙덩이들.

열댓 기로 이뤄진 한 떼의 기병들이 깊은 숲속을 달리고 있었다.

“으윽! 다닐렌츠 이놈들! 오늘의 치욕은 절대 잊지 않겠다!!!”

이를 갈며 일행의 중심에서 말을 달리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바렌부르크의 영주, 폴커 야닝스 남작.

엘스터가 적의 손에 떨어질 상황에 몰리자, 그는 처자식까지 팽개치고 영주 저택 지하에 마련된 비밀 통로를 통해 도시 밖으로 빠져나왔다.

“영주님, 이쪽입니다!”

선두에서 말을 달리던 호위 기사가 갈림길에서 일행을 인도한다.

그가 선택한 방향은 바렌부르크의 북동부에 위치한 안할트 백작령으로 향하는 길.

우선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을 안할트의 지원군과 만난 뒤, 다시 엘스터를 수복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폴커였다.

‘이런 젠장! 울리히 그 개자식이 날 벌레 쳐다보듯이 보겠군!’

과거 백작의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사사건건 자신에게 시비를 걸고 모멸적인 시선을 보냈던 현(現) 안할트 영주, 울리히 다벨.

아버지의 오랜 가신이자 다벨 가문의 견실한 충복인 자신을 한낱 번견 다루듯 함부로 하는 꼴이 불쾌해 봉신 관계를 정리하고 독립하는 꿈을 꿔왔다.

하지만 그 독립의 꿈을 이루기 위한 발판으로 과감하게 시도했던 다닐렌츠 침략은 철벽과도 같았던 라엔슈타인 요새에 틀어막혀 물거품이 되었다.

그뿐인가? 오히려 역으로 쳐들어온 다닐렌츠 군에게 동맹을 맺었던 루테니아는 영혼까지 털리며 항복했고, 자신 역시 주도 엘스터까지 내어주고 개처럼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 상황에서, 울리히에게 군사를 빌어 빼앗긴 영지의 주도를 되찾아 달라 사정한다면?

안 그래도 눈앞에 사람이 없는 듯, 무례하게 굴던 놈이 얼마나 더 함부로 굴 것인가?

앞으로 겪어야 할 수모를 생각하니, 폴커 야닝스의 머릿속은 끓어오르는 수치심과 분노로 새카맣게 타버릴 것만 같았다.

“... 일단은 엘스터를 되찾는 게 최우선이다. 그 다음에... 그 다음이 되면... 으드득!”

나무들로 빽빽하게 채워져 한껏 어두워진 깊은 숲속의 풍경이 자신과 바렌부르크의 앞날인 것만 같아서, 폴커의 가슴속엔 피눈물이 흘렀다.

***

“엘스터가... 함락되었다?”

“예, 그렇습니다!”

바렌부르크 북동부 접경지대의 어느 들판.

영지 정규군과 용병으로 이루어진 약 2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제 막 바렌부르크 영지 내부로 발을 디뎠던 한 사내는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이르게 도착한 소식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가 얼굴을 찡그리자 왼쪽 눈썹 부근에서 턱까지, 사내의 얼굴을 길게 가로지르는 상처가 흉측하게 꿈틀거렸다.

아마도 검에 의한 상흔으로 보였는데, 사내를 처음 보는 이라면 누구나 섬뜩함을 느낄 만큼 깊은 상처였다.

“어떻게 벌써... 혹시 도시 안에서 반란이 일어났나?”

“어... 아닙니다, 척후조의 보고에 그런 내용은 없었습니다.”

“반란도 아닌데, 고작 일주일도 안 되어서 도시가 함락당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바렌부르크의 주도 엘스터가? 기이한 일이군.”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내.

어디 구석에 처박힌 소도시도 아니고, 나름 견실한 성벽과 망루를 갖춘 대도시, 그것도 영지의 주도씩이나 되는 곳이 고작 일주일도 버티지 못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그런 사내의 곁, 아마도 부관 정도로 보이는 위치의 기사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희가 생각했던 것보다 다닐렌츠 군의 전력이 강한 모양입니다.”

“음, 그럴 수도 있겠지.”

“확률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엘스터의 조기 함락 또한 우리 군의 예상 속에 있었던 일. 크게 동요할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흠... 그래. 경의 말이 옳다.”

부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느낀 것인지 사내 역시 선선히 대답한다.

곧, 사내의 기색을 살피던 부관은 눈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병사를 손짓으로 물리친 후 재차 입을 열었다.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적의 손에 떨어졌던 엘스터를 탈환해 바렌부르크 영주의 손에 돌려준다면, 주군께서 얻게 되실 명예와 실익이 더욱 커질 겁니다.”

“오, 맞습니다!”

“구구절절 옳으신 말씀입니다!”

뒤쪽에 늘어서 있던 지휘관 몇몇이 부관의 말에 동조하듯 소리쳤다.

깊은 검상의 사내 역시 부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천천히 명령을 내렸다.

“다닐렌츠 놈들이 어수선한 도시의 분위기를 수습하고 수성(守城) 준비를 끝마치기 전에 들이쳐야 할 것이다. 전군, 진군 속도를 높인다.”

“예, 알겠습니다!”

상처 입은 한 마리 맹수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다닐렌츠 군의 손에 떨어진 엘스터를 탈환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는 사내, 마티아스 괴츠.

안할트와 바렌부르크, 루테니아, 다닐렌츠를 포함한 왕국 북서부 최강의 기사로 불리는 ‘안할트의 늑대’가 다닐렌츠의 살점을 물어뜯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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