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할트의 늑대 (1)
마티아스 괴츠(Matthias Goetz).
안할트-바렌부르크-루테니아-다닐렌츠로 이어지는 왕국 북서부 지역에 발 딛고 사는 이라면 칼밥을 먹고 사는 이가 아니라 할지라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법한 이름.
백작령 안할트를 대표하는 검이자, 전대(前代) 영주였던 그레고르 다벨 시절부터 무수히 많은 무훈을 세워온 최강의 기사.
지난 20여 년간 그의 검에 쓰러진 이름난 기사의 수만 해도 열 손가락을 넘어갔다.
서늘한 기운이 담긴 특유의 눈빛과 얼굴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깊고 진한 검상(劍傷).
늘상 위험함을 풍기는 이 사내에게 세상은 ‘안할트의 늑대’라는 호칭을 선사했다.
***
“... 엘스터로 남하 중인 안할트의 지원군이 2천 명 정도라고?”
“예, 그렇다고 합니다.”
바렌부르크의 주도 엘스터의 영주 저택에서 이뤄진 다닐렌츠 군 지휘관 회의.
회의 탁자의 끄트머리, 상석에 앉은 나는 휘하 제장 중 최선임인 에르발트 베링의 보고를 들으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많군. 많아야 천 명 정도를 생각했는데...”
단순히 숫자로만 보면 현재 엘스터에 주둔 중인 우리 군의 병력도 크게 밀리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병사들은 지난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루테니아-바렌부르크 군과 잇따른 전투를 치르며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상황.
이제 처음으로 전투에 투입된 안할트 병사들의 상태가 쌩쌩할 것을 고려하면 우리의 전력이 훨씬 밀릴 것은 자명한 일이다.
나의 목소리에 섞인 걱정을 읽어낸 것일까?
지휘관 회의 참석자 중의 하나인 엔리케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하! 우리 예상보다 많기는 해도 2천 명 정도면 넉넉하게 깨부술 수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영주님!”
주군인 나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씩씩하게 소리치는 엔리케.
하지만 그의 넘치는 자신감을 에르발트의 침착한 목소리가 묵직하게 내리눌렀다.
“아르미엔토 경, 안할트 군은 루테니아, 바렌부르크 군과는 차원이 다른 전투력을 지닌 강군일세. 앞서와 같은 쉬운 싸움을 생각해서는 안 되네.”
“크흠, 그... 그렇습니까?”
실력과 인품, 나이와 기사로서의 경력까지.
모든 면에서 존경받아 마땅할 선배 에르발트의 말에 엔리케는 민망한 얼굴로 코끝을 훔쳤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한껏 진지해야 할 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푸른 방패의 부대장이었던 메이슨 이후로 이토록 엔리케를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상대가 또 있었을까 싶다.
“... 그렇다고 아르미엔토 경의 용맹을 나무라는 것은 아니니, 너무 기분 나빠하지는 말게.”
“하하, 아닙니다! 기분 나빠하다뇨! 선배님의 충고는 늘 감사하게 듣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나 역시 고맙네.”
금세 되돌아온 장내의 훈훈한 분위기를 느끼며, 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회의를 이끌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안할트 군과의 싸움에 어떻게 대비할지 의견들을 내보도록 합시다. 뭐든 좋습니다. 기탄없이 말해보세요.”
나의 말에 주변의 반응을 살피다 조심스럽게 손을 드는 한 사람.
그는 이 자리에 모인 사람 중 유일하게 기사 작위가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요 지휘관 회의 참석자 명단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 인물.
하랄트였다.
“... 여기 계신 다른 분들에 비하면 실력이나 경험 모두 부족하지만, 감히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한껏 겸손을 차린 말로 입을 연 하랄트에게, 나의 질책이 쏟아진다.
“실력과 경험이 부족하다라... 자네, 방금 한 그 말이 무슨 의미를 가진 것인지 아나?”
“예?”
“나는 능력이 부족한 이를 이 중요한 지휘관 회의에 들일 만큼 관대한 사람이 아니야. 나를 욕보이지 말게나, 하랄트.”
“어읏, 옛! 제,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나의 목소리에 바짝 긴장한 하랄트가 각 잡힌 목소리로 대답했다.
반면, 그 모습을 본 주변의 다른 이들은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짐짓 엄하게 혼을 내는 듯했지만, 실은 내가 스스로의 능력에 대해 과소평가하는 하랄트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의도란 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기사의 신분이 아님에도 기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로 영주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것.
그 의도를 파악한 장내의 모두가 하랄트에게 신뢰의 눈빛을 쏘아 보내주었다.
“아무튼, 계속해보게.”
“예, 영주님. 그... 우선, 현재 이곳 엘스터의 상황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회의 참석을 위해 미리 준비한 자료를 살펴보며, 하랄트가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모두 알고 계시겠지만, 현재 엘스터의 성문은 우리 군과 바렌부르크 군의 전투로 인해 완파(完破)되었습니다. 성벽 또한 군데군데 무너진 상태이며, 급하게 보수 작업을 시행하고는 있지만 건축 자재 수급의 어려움으로 작업 완료엔 최소 2주 정도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정상적인 수성 전략을 펼치기에 적합지 않은 환경입니다.”
“그 얘기인즉, 성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안할트 놈들을 맞이하는 건 피하자?”
“예.”
단호하게 대답하는 하랄트에게 옆에 있던 아드리안이 물었다.
“하지만... 부서진 성벽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보통의 경우라면 당연히 그렇겠지만, 이번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 것인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안할트 군은 왕국 북서부에서 단연 최강으로 꼽히는 강병(强兵)입니다. 당연히 전투에 대한 경험도 많지요. 그런 적을 상대로 불완전한 성벽에 기대어 물러설 수 없는 결전을 치르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큽니다. 분명 상대는 무너진 성문과 성벽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 것이고, 그로 인한 피해는 어마어마할 겁니다. 그럴 바에야 나가서 싸우며 병력 기동의 유연성을 추구하는 것이 낫습니다.”
“음... 고견, 잘 들었습니다.”
하랄트의 설명을 들은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인다.
애초에 하랄트에게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궁금함을 해소하기 위한 질문이었기에, 의문이 해결된 후 선선히 물러난 것이다.
“저 역시 수성전을 피하자는 하랄트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이유는 앞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엔리케를 얌전하게 만든 사나이, 에르발트가 후배인 하랄트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개인의 무력을 제외하고, 지휘관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전술적 역량만 따진다면 여기 모인 이들 중 단연 최고라 할 수 있는 에르발트였다.
그가 하랄트의 말에 동의하는 것을 보고나니, 나 역시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있었다.
“좋아, 그럼 수성전(守城戰) 대신 밖으로 나가 적을 상대하는 것으로 방향성을 잡도록 하지. 그럼 어느 장소에서 적을 맞이해야 할지를 결정해야겠군. 지도를 가져와라.”
“예, 알겠습니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변에 서서 대기하고 있던 부관들이 엘스터 주변의 지형을 표기한 커다란 지도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깔았다.
그 뒤로도 다닐렌츠 병력을 표시하는 푸른색 말판과 적인 안할트의 병력을 뜻하는 붉은색 말판을 지도 위에 늘어놓고, 내가 쓸 기다란 지휘봉도 가져왔다.
“준비 끝났습니다, 영주님.”
“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조심스럽게 물러나는 부관들.
그들이 가져다준 지휘봉을 집어 들고, 본격적으로 회의를 진행하려는데...
“... 저, 베링 경.”
“음? 뭔가.”
뒤에 서 있던 에르발트의 부관 하나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신의 상관에 작게 귓속말을 건네는 것이 보였다.
분명 에르발트만 들으라고 작게 말한 것일 테지만, 미친 청력 덕분에 나에게도 다 들린다는 건 함정이다.
“방금, 북쪽 방면으로 정찰을 나간 척후조로부터 지급으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 지급으로?”
안할트 군이 밀고 내려오는 북쪽 방면으로 정찰을 나갔던 척후조가 ‘매우 급하게’ 보내온 연락.
상황이 주는 엄중함에 긴장하며 부관이 건넨 쪽지를 에르발트가 천천히 펼쳐보는데...
“... 이런.”
“베링 경, 무슨 내용인가?”
귀가 밝은 만큼 눈도 좋았지만, 종이를 투시(透視)하는 능력까진 없었기에, 더는 참지 못하고 에르발트에게 쪽지의 내용을 물었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영주님. 안할트 군을 이끄는 지휘관이... ‘안할트의 늑대’라고 합니다.”
“...!”
안할트의 늑대, 마티아스 괴츠.
그 이름을 듣자마자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상대가 그만큼 거물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그 이름이 지금 나올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안할트의 늑대가 온다고? 지금 이 타이밍에?’
내가 알고 있는 원작 소설의 흐름에 따르면, 놈이 등장하는 타이밍은 지금으로부터 몇 년 후.
다닐렌츠의 영주가 된 니나가 ‘모종의 이유’로 군사를 일으켜 안할트 영지를 침공하는데, 마티아스는 그때 처음으로 등장한다.
‘... 엄청나게 충격적인 등장이었지.’
안할트의 주도, 파사우 근방 들판에서 벌어진 다닐렌츠 군과 안할트 군의 회전(會戰).
안할트 영지의 명운을 걸고 벌어진 그 격렬했던 싸움에서 마티아스는...
‘... 다닐렌츠 측의 선봉장이었던 에르발트를 쓰러뜨린다.’
그랬다.
원작 소설 <로스트 킹덤>의 모든 독자들을 큰 충격에 빠뜨렸던 그 장면.
주군인 니나의 명을 받아 안할트의 주도 파사우의 턱밑까지 밀고 들어갔던 다닐렌츠 군의 사령관, 에르발트 베링이 적장인 마티아스 괴츠의 검에 베여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이었다.
‘에르발트의 죽음을 지켜본 아드리안이 각성하는 바람에 어찌어찌해서 마티아스를 잡아내는 것에는 성공했다지만...’
군무관 발터 브라운과 함께 영지의 군 관련 업무를 책임지던 든든한 기둥 에르발트의 죽음은 다닐렌츠의 입장에선 너무나 큰 손실이었다.
‘그 이후에 발터와 아드리안은 말 그대로 갈려 나가는 수준으로 격무에 시달리게 됐지.’
하지만, 만성적인 인재난에 시달리던 소설 속 니나와 달리 현실의 나는 진즉 사망했어야 할 등장인물들을 모두 살려 다닐렌츠로 데려왔다.
겔베르트, 메이슨, 그리고 엔리케.
이제는 다닐렌츠의 로이터 경, 아르히펠트 경, 아르미엔토 경으로 불리게 된 세 명의 걸출한 기사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이제는 다닐렌츠 수뇌부 모두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고 있는 ‘백전노장’ 데론 베르켈까지.
소설 원작과 비교해 훨씬 화려하고 묵직해진 우리 다닐렌츠의 인재 목록.
그들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멋진 활약을 펼쳐주고 있기에, 나는 인재 부족에 대한 어려움은 크게 느끼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르발트가 죽도록 가만히 놔둘 수는 없지.’
에르발트는 살려둔다면 무조건 도움이 되는 인재.
이미 소설의 흐름과 많은 부분이 달라진 상황이라 그가 마티아스랑 만난다고 해서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리란 확신은 없었지만, 굳이 그의 목숨을 걸고 모험할 필요는 없었다.
‘문제는, 나를 빼면 지금 여기서 그 놈을 혼자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건데...’
과연 여기 모인 지휘관들이 늑대 잡겠다고 영주인 내가 직접 뛰쳐나가는 꼴을 용인할까?
글쎄, 절대로 허락해주지 않을 것 같다.
‘거기에 군의 사기 문제도 있지.’
강적이 나타날 때마다 영주가 직접 뛰쳐나가서 적장과 검을 맞대고 싸운다면, 휘하 장수들의 사기는 엉망이 된다.
주군이 자신들의 실력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식의 메시지를 전하는 꼴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하, 이거 머리 아프네.’
영주라는 자리는 하나의 행동을 하더라도 거기서 파생될 여러 가지 영향을 고려해야 하는 자리였다.
젠장, 머리가 아팠다.
마티아스 그놈이 이렇게 일찍 등장할 것을 알았다면 차라리 라엔슈타인 요새 방비를 에르발트에게 맡겨두고 데론 영감님을 데려왔을 것이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고는 하나 한번 사자는 영원한 사자.
데론 정도의 실력이라면 단번에 마티아스를 때려잡지는 못해도 다른 이를 노리지 못할 정도로 붙잡아 둘 수는 있으리라.
‘그럼 지금이라도 데론을 불러들일... 아니, 잠깐?’
불현듯 생각이 났다.
우리 다닐렌츠엔, 데론을 제외하고도 저 멀리 안할트에서 내려온 사나운 늑대를 잡아낼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 겔베르트.”
그는 얼마 전 나의 지시를 받아 다닐렌츠 남부의 도시, 카르셀의 임시 시장직을 내려놓고 키르헨으로 복귀해 있었다.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혹시라도 주도 키르헨에 준동할지 모를 불순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를 복귀시켰던 것인데...
“... 이렇게 된 이상, 늑대 사냥부터 시켜야겠군.”
잠시 후, 영주만이 쓸 수 있는 값비싼 전서응(傳書鷹)이 잿빛 날개를 펄럭이며 서쪽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