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할트의 늑대 (2)
다닐렌츠의 주도, 키르헨_
영주인 데미언 카릴베르크 남작을 비롯해 영지의 주요한 기사들이 모두 전쟁 수행을 위해 바렌부르크 전선으로 나가 있었다.
그 병력의 공백 상황에서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불미스러운 상황에 빠르게 대처하기 위해, 남부 도시 카르셀의 임시 시장으로 일하고 있던 기사 겔베르트 로이터는 키르헨에 복귀하여 도시 내외를 순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다각, 다각, 다각...
오늘도 겔베르트는 군무관 발터 브라운이 휘하 병력으로 배정해준 기마병 몇 명으로 이뤄진 순찰대를 이끌고 키르헨 시내를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기마병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강력한 치안 유지 수단이 된다.
평범한 짐말이나 승용마와는 덩치 자체가 다른 군마(軍馬)와 잘 훈련받은 기수의 조화.
그런 기마병들이 거리를 왔다 갔다 하기만 해도 좀도둑과 소매치기들은 겁을 먹어 골목 구석으로 모습을 감추게 되는 것이다.
“슬슬 점심 먹을 때 됐네.”
선두에서 일행을 이끌던 겔베르트가 부하들을 돌아보며 대화의 물꼬를 텄다.
그야말로 해가 중천에 뜬 시간.
새벽부터 도시 치안 유지를 위해 애썼던 그들 모두 허기를 느낄 때가 되었다.
“오늘은 뭐 먹을래? 얘기 좀 해봐라.”
“하하, 대장님이 사주십니까?”
“뭐라는 거야, 이 새끼들이... 언제는 너희가 샀냐? 당연히 내가 사야지. 돈도 못 버는 거지 새끼들이...”
“푸하하하하! 맞네, 우리 거지 맞습니다!”
“어후, 사주시면 저희야 너무 감사하죠!”
서로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순찰대 소속의 기마병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상관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겔베르트에겐 보통의 기사들에게서 볼 수 있는 특권 의식을 전혀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거칠기로 이름난 기병들의 마음까지 단번에 휘어잡은 겔베르트 특유의 털털한 성품.
그것은, 밑바닥 용병 출신으로서 검을 든 모든 자의 꿈이라고 할 수 있는 기사의 자리까지 도달한 사나이만이 가질 수 있는 빛나는 아우라였다.
“아, 맞다. 내가 엊그제 저기 시장에 있는 닭요리 집에 갔는데, 거기 진짜 맛있더라고. 오늘은 거기 가자.”
“어어, 닭요리? 혹시 그 시장 제일 안쪽에 있는 집 아닙니까? 주인장이 좀 뚱뚱하신 아주머니이신?”
“어, 거기 맞는 거 같다. 아는 데야?”
“아휴, 알죠. 거기 진짜 맛집입니다!”
“좋아! 오늘은 거기다. 가자, 내가 쏜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그렇게 겔베르트가 순찰대 부하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이동하려는데...
“로이터 경!!!”
“...?”
멀리, 대로변에서 다급하게 말을 달려오는 한 명의 병사가 보였다.
“어, 저거 뭐야?”
“뭔일 났나?”
급하게 달려오는 모양새만 보아도 예삿일은 아니었기에, 방금까지 맛난 점심을 먹을 생각에 들떠있던 모두의 표정이 굳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히이이이이잉!!!
겔베르트의 코앞까지 달려온 병사가 거칠게 말고삐를 잡아채며 멈춘다.
“로이터 경!”
“어, 그래. 무슨 일이야? 이렇게 급하게 달려오고...”
“전선에 나가계신 영주님께서 로이터 경에게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영주님께서?”
“예. 전서응에게 들려 보내신 것을 보아 화급한 일인 듯 싶습니다.”
“전서응? 어서 줘 봐라!”
정말 급한 일이 아니면 영주 전용으로 쓰이는 전서응까지 날릴 이유가 없었다.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직감한 겔베르트가 손을 내밀었고, 곧 병사는 그에게 엘스터에서 날아온 영주의 서신을 건네주었다.
“이건...”
서신에 적힌 내용은 짧았다.
하지만 그 짧은 내용은 순식간에 겔베르트의 피를 끓어오르도록 만들었다.
[안할트 지원군 2천, 엘스터로 남하(南下) 중.
적 지휘관 ‘안할트의 늑대’, 마티아스 괴츠로 확인.
기사 겔베르트 로이터, 지원 요망.]
“하...”
안할트의 늑대.
마티아스 괴츠.
그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겔베르트는 머릿속에 번개가 치는 듯한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실로 오래된 인연(因緣)이자, 부정할 수 없을 악연(惡緣)의 이름.
신기한 것은,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주군인 데미언에게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자신의 어린 주군은 그를 콕 집어 전선으로 호출했다.
뭔가를 알고 그를 부른 것인지, 아니면 정말 우연에 의한 선택인지.
주군의 생각은 아직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 또한 존재했다.
‘... 영주님께선, 내가 늑대를 사냥하길 원하신다!’
악연 또한 운명이라는 생각을 하며, 겔베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순찰대 부하들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 밥은 너희랑 같이 못 먹을 것 같다.”
“어, 옙! 알겠습니다.”
순찰대원들도 바보가 아닌 만큼, 돌아가는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혹시... 전선으로 가십니까?”
“음, 그래. 영주님께서 나를 간곡히 찾으신다네? 아무래도 바렌부르크에 나가 있는 사람 중에 나만큼 잘 생긴 사람이 없는가 보다.”
이 와중에도 농담을 던지는 겔베르트를 보며 미소를 짓는 순찰대원들.
그런 그들에게, 겔베르트는 품을 뒤져 나온 가죽 주머니 하나를 집어 던졌다.
휭- 터억!
“대장님? 이게 무슨...?”
“그 안에 있는 돈으로 점심 사 먹고, 남은 돈은 너희들끼리 알아서 나눠 가져라. 아니면 저녁에 퇴근하고 회식을 하던가. 난 간다.”
“...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적선이다, 거지 새끼들아.”
그렇게, 고생하는 부하들에게 아낌 없는 사랑을 베풀어준 겔베르트가 자신을 부르기 위해 달려온 병사와 함께 영주 저택으로 말을 몰았다.
***
바렌부르크 북부,
안할트 지원군 주둔지_
달빛조차 흐릿해진 깊은 새벽이었다.
오랜 행군으로 지친 병사들이 곤히 잠든 시간.
꿈과 현실의 경계를 노니는 그 몽롱한 순간을 노려, 적들의 날카로운 화살이 날아들었다.
퓨퓨퓨퓨퓩!!!
“커흑!”
“켁!”
“으아악! 내 눈! 내누우우운!!!”
사방이 어두워 잘 보이지도 않는 깊은 새벽 쏟아진 화살이 무방비로 늘어져 있던 안할트 병사들의 몸에 틀어박힌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 화살이 어디서 날아오는 것인지, 얼마나 쏘아대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더욱 답답하고 괴로운 것은, 이 같은 습격이 벌써 사흘째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적습이다! 무장을 갖춰라!”
“다닐렌츠 이 개새끼들이! 켁!”
“빨리! 무기 들고 튀어나와!!!”
“일어나! 일어나, 이 새끼들아!”
순식간에 어지러워진 주둔지의 분위기.
누가 얼마나 다쳤는지 알 수가 없으니 더 답답한 노릇이었다.
“부상자들은 방패를 들어라! 궁수들은 화살이 날아오는 쪽으로 응사해라!”
“아악!!!”
“젠장! 이 개새끼들이!!!”
며칠 동안 비슷한 습격이 계속 이어져 왔기에 나름 대비를 한다고 했건만, 다닐렌츠 군은 늘 예상치 못한 시간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공격을 해왔다.
바로 그때,
“부, 불화살이다아아아!!!”
멀리, 캄캄한 새벽의 하늘을 밝히며 날아오는 불화살의 모습이 보인다.
마치 별똥별처럼 밤하늘을 수놓는 그 모습이 일견 아름다웠으나, 그 불빛들이 땅으로 내려앉은 후의 풍경은 그저 끔찍하기만 했다.
“아아악! 내 몸에 불! 불이 붙었어!!!”
“어디냐! 어디서 날아왔어?!”
“적습의 방향을 파악하라!”
“주둔지 서쪽입니다! 서쪽에서 화살이 날아왔습니다!”
“아니... 동쪽에서도 날아왔습니다! 제가 봤습니다!”
“날아온 불화살의 수를 볼 때 적은 얼마 되지 않는다! 동요하지 말고 침착하게 대응... 커헉!!!”
잠결에 뛰어나와 정신없는 병사들을 지휘하던 안할트의 장교 하나가 머리통에 화살이 꽂혀 쓰러진다.
마구잡이로 쏘아지던 다른 화살들과는 확연히 다른 세기와 정확도.
그 모습을 본 안할트 지원군의 사령관, 마티아스 괴츠가 어둠 속에서도 번쩍이는 빛을 뿜어내는 눈을 돌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응시한다.
“... 감히!”
판단은 빨랐고, 반응은 찰나였다.
인간의 몸으로도 저토록 빠른 속도를 보여줄 수 있는가?
촤아아아앙-!
그야말로 맹수와 같은 몸짓으로, 자신의 검을 뽑아 손에 든 마티아스가 안할트 군 주둔지 외곽을 둘러싼 울타리를 뛰어넘어 어둠 속의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
“저, 저, 저 새끼 뭐야?!”
안할트 군의 주둔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작은 숲.
몇 시간 전부터 그 숲에 숨어들어 안할트 군이 잠들기만을 기다렸다가 한바탕 불화살을 쏟아부었던 다닐렌츠 군 별동대의 지휘관, 엔리케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그는 현재 영주 데미언의 명령을 받아 약 백여 명으로 구성된 별동대를 이끌고 안할트의 주둔지를 공격 중이었다.
엔리케 외에도 에르발트와 아드리안이 역시 비슷한 수의 병력을 이끌고 각기 다른 방향에서 안할트 군을 습격해 괴롭히고 있었는데, 이 작전의 목표는 빠른 속도로 남하 중인 그들의 진군 속도를 늦추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최대한 병력을 깎아낼 수 있다면 금상첨화.
상대의 손실을 최대화하고, 아군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 적이 잠들어 있을 시간을 노려 기습한 것인데, 효과가 아주 좋았다.
한데 갑자기 안할트 군 주둔지에서 기사 한 명이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름을 물어본 것도, 캄캄한 어둠 속에서 얼굴을 알아본 것도 아니지만 그 모습을 지켜본 모두는 그가 안할트 군을 이끄는 적장, 마티아스 괴츠 임을 확신했다.
“저, 저, 저 미친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혼자 뛰어와?!”
최고 지휘관씩이나 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저렇게 무모한 돌진을 하는 경우가 대체 세상에 어디 있...
아, 한 명 더 있구나.
지금쯤 엘스터에 있을 나이 어린 주군의 얼굴을 잠시 떠올렸던 엔리케가 활을 들고 있지 않은 오른손을 퍼덕거리며 뒤쪽의 병사들에게 명령한다.
“야, 퇴각! 퇴각해! 저 새끼 도착하기 전에 빨리 다 튀어!!!”
“퇴각! 퇴가아아아아악!!!”
“물러서라!!! 안할트의 늑대가 온다아!!!”
엔리케의 명령을 받은 다닐렌츠의 병사들 역시 깜짝 놀라기는 마찬가지.
그 명성 높은 ‘안할트의 늑대’가 휘두르는 검에 두 조각 나기 싫었던 그들은 엔리케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등을 돌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사실, 챙겨왔던 화살을 거의 다 쏟아부은 상태였기에 도망칠 타이밍이 맞기도 했고.
“빨리 뛰어 이 새끼들아! 흐으읍!!!”
부하들의 안전한 퇴각을 돕기 위해, 엔리케는 본인의 장기를 발휘하기로 했다.
투웅! 퉁! 퉁!
곧, 그의 활에서 동시에 쏘아져 나간 세 발의 화살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오는 적장, 마티아스를 향했다.
각각 얼굴과 가슴, 허벅지를 노리고 날아가는 세 발의 화살.
보통 사람이라면 당황해서 어어, 하다가 화살을 맞고 쓰러지겠지만, 마티아스는 그 보통 사람의 범주에 속해있지 않는 이였다.
카카캉!
달려드는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은 채로, 검을 휘둘러 자신에게 날아든 세 발의 화살을 모조리 쳐낸 마티아스.
어지간한 말의 속도 만큼이나 빨랐던 그의 두 발이, 마침내 엔리케가 몸을 숨기고 있던 숲의 영역으로 성큼 들어섰다.
“이런 씨발!!!”
퉁퉁!!!
빠르게 뒷걸음을 치며 연신 활시위를 당기는 엔리케.
거의 동시에 쏘아내었다고 믿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간 두 발의 화살이 투구조차 쓰지 않은 마티아스의 맨 얼굴로 향했으나...
“흡!”
이번에도 마티아스는 달리는 도중 고개를 까닥이는 것으로 그 두 발의 화살을 흘려 버렸다.
“대장니이이임!!!”
상관의 위기를 직감한 몇몇 용감한 병사들이 뒷일을 생각지 않고 달려드는 적의 앞으로 달려든다.
휘잉!
양 옆에서 달려든 두 명 병사가 힘 있고, 정확한 동작으로 창을 찔러넣는다.
카캉!
그러나, 그 두 병사 모두 자신들이 원하던 결과를 얻는 것에는 실패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으로 휘두른 막대기를 상대하듯, 마티아스가 가볍게 손목의 힘만으로 그 공격을 쳐냈기 때문이었다.
“으윽!”
“큽!”
동시에 그들은 창대를 타고 전해지는 어마어마한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비명을 터트렸고,
콰직! 푸화아아악!!!
그 찰나의 틈을 보인 대가로 머리통이 쪼개지고 목이 날아가는 비극을 겪게 되었다.
“으으, 이런 미친 새끼...!”
방금 마티아스가 보여준 한 수만으로도 그의 실력이 자신보다 위라는 것을 직감한 엔리케가 이를 악물며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활 솜씨가 제법이군. 이 정도 실력을 지닌 이가 이름 없는 무장은 아닐 터, 정체를 밝혀라.”
“... 다닐렌츠의 기사, 엔리케 아르미엔토다. 그대가... 안할트의 늑대인가?”
이글거리는 눈빛을 한 엔리케의 물음에, 겨울철 북풍한설과도 같은 싸늘한 시선을 한 상대가 대답한다.
“그래, 내가 바로 안할트의 기사 마티아스 괴츠다. 내 검에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라, 다닐렌츠의 엔리케.”
“영광은 시발, 뒈지게 생겼는데 뭐가 영광스럽겠냐? 나는 사는 쪽이 훨씬 더 좋다. 정 영광 따질 거면 네가 내 손에 죽어 주던가.”
흐흐흐, 치밀어 오르는 긴장을 숨기기 위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린 엔리케가 깊게 내쉬었던 숨을 뱉어낸 후 바닥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