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할트의 늑대 (3)
숲속 깊은 곳에서 시작된 두 기사의 격돌이었다.
카아아아앙!!!
마티아스와 처음으로 검을 맞대는 순간, 엔리케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런 미친...?! 뭔 놈의 힘이?!’
손목이 부러질 듯 아팠고, 어깨는 당장이라도 빠질 것 같았다.
단 한 수로 명백하게 나눠진 실력의 고하(高下).
엔리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자신이 죽을 수도 있음을 실감한다.
“검이 가볍군.”
안할트의 늑대, 마티아스는 한마디 말로 엔리케의 사기를 꺾으려 들었다.
이 상황에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엔리케는 적의 평가를 호락호락 들어줄 만큼 순한 사내가 아니었다.
“좆 까는 소리 하네, 어디 이것도 가볍나 받아봐 이 새끼야! 흐아아아!!!”
휘잉- 카아아앙!!!
좌에서 우로, 정직하게 후려친 검을 마티아스가 어렵지 않게 받아낸다.
소리는 컸지만, 위력은 없는 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이어진 공격 모두 하품이 나올 정도로 가벼웠다.
‘... 겨우 이 정도인가?’
상대 공격의 부실함에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마티아스.
그러다 문득, 이상함을 깨닫는다.
‘속임수?’
가벼워도 너무 가벼운 검.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이지 않은 그 공격의 세기에, 별안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은 마티아스가 본능적으로 왼쪽 어깨를 뒤로 뺀다.
쉬잉-!!!
그 직후, 마티아스의 심장이 있던 자리를 향해 쏘아지는 엔리케의 검.
하지만 이미 이상함을 눈치채고 몸을 뺀 덕에 마티아스는 그 매서웠던 공격을 피해낼 수 있었다.
“씨이... 그걸 피해?!”
작정하고 펼쳐냈던 기술이 먹혀들지 않자 실망감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엔리케.
하지만 마냥 실망만 하고 있기엔 상황이 너무 좋지 못했다.
“하! 제법이군.”
뒤로 물러났던 몸을 반전시킨 마티아스가 번뜩이는 눈빛으로 다시 검을 들어 올린다.
달라진 그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위협감에, 엔리케는 온몸의 털이 올올이 서는 느낌을 받는다.
“하, 하, 하! 제법이지? 그럼 이쯤하고 오늘은 그냥 돌아가는 게 어떨...”
“선물을 받았으니, 이제 답례를 해주지.”
“아니, 아니이! 그런 거 필요 없... 이런 썅!”
반격은커녕 쳐내기조차 쉽지 않은 마티아스의 강력한 공격이 연이어 펼쳐졌다.
카캉! 휘이이잉! 캉! 슈각! 휘잉! 휭!!!
검을 타고 전해지는 충격이 어찌나 강력한지, 손목과 팔은 물론 발바닥까지 얼얼하다.
갈수록 누적되는 충격에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었다.
휘잉- 카아앙! 퍼억!!!
“어흑!”
위태위태하게 마티아스의 검을 받아내던 엔리케가 예상치 못한 발차기에 허벅지를 걷어차이며 나뒹군다.
“아흐윽!!!”
하지만 넘어지는 와중에도 기민함을 잃지 않는 엔리케, 땅바닥을 잽싸게 구르며 마티아스와의 거리를 벌린다.
“하아, 하아... 어, 뭐야?”
슬쩍 곁눈질로 살핀 어깨와 팔뚝에서 새빨간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그새 베인 건가.
다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끄응... 존나 아프네.”
쓰라린 통증이 올라오는 게 느껴져서 절로 얼굴이 구겨지는 엔리케였다.
자세히 보니 옆구리에도 검에 베인 상처가 있었는데, 어깨와 팔뚝의 상처는 애교로 보일 만큼 깊이 베여서 쏟아지는 피의 양이 달랐다.
“... 씨발, 하마터면 내장 쏟을 뻔했네.”
크흐음,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옆구리의 상처를 손으로 누르는 엔리케.
그의 손가락 사이로 시뻘건 피가 울컥거리며 쏟아지기 시작한다.
“꽤 아파 보이는군.”
엔리케의 옆구리를 바라보며 음험한 미소를 보이는 마티아스.
그 웃는 꼴을 보는 게 싫어서, 엔리케 역시 지지 않고 대꾸했다.
“아니, 뭐... 버틸 만한데?”
“허세가 제법이구나.”
“허세는 무슨... 시발, 난 모기가 물어뜯은 줄 알았다!”
피가 흘러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는 와중에도 끝까지 입씨름을 벌이는 엔리케였다.
“그, 이쯤이면 답례 선물을 충분히 받은 것 같은데. 내 생각엔 더 필요 없을 것 같거든? 이쯤 하고 헤어지는 건 어떨까?”
“훗!”
말 같지도 않은 제안을 늘어놓는 엔리케의 말에 코웃음을 친 마티아스가 다시 검을 들어 올린다.
“네놈들의 같잖은 수작으로 자다 깬 우리 병사들이 잔뜩 화가 났다. 네 놈 머리통 정도는 들고 가야 사령관으로서 면이 서지 않겠나?”
“하아, 시발... 더럽게 체면 따지네, 얼굴에 칼빵 난 새끼가!”
이 싸움을 도무지 끝낼 생각이 없는 마티아스의 모습에, 엔리케는 답답함을 느꼈다.
‘아니, 답답한 게 아니라...’
...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이를 악문 엔리케가 정면의 마티아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뒤쪽의 누군가에게 소리쳤다.
“야아, 이 새끼들아! 진짜로 다 도망갔냐?! 어!!!”
엔리케의 외침에, 부리나케 도망치던 다닐렌츠의 병사들이 멀찌감치서 대답한다.
“아니, 아까는 빨리 도망가라면서요!”
“이 새끼들이...! 아무리 그대로 대장은 데려가야지! 지들끼리만 내빼냐? 어?! 이 의리도 없는 새끼들아! 너네 살리다가 나 뒤지게 생겼다! 으윽!”
피가 철철 흐르는 꼴을 한 채로 빽 소리치는 엔리케.
곧, 숲속 사방으로 도망치던 다닐렌츠 별동대 병사들이 연달아 화살을 쏘아낸다.
퉁! 투웅! 퉁! 퉁! 투두둥!
여러 병사가 쏘아낸 십여 발의 화살이 동시에 마티아스에게로 향한다.
엔리케가 쏘아낸 화살에 비하면 세기나 정확도 모두 볼품없는 공격이었지만, 눈먼 화살에도 맞아 죽는 것이 바로 인간이었다.
마티아스 역시 그 사실을 알기에, 날아오는 화살들을 감히 경시하지 않았다.
“... 귀찮은 놈들!”
팅! 티잉! 탱! 티이잉!!!
쉴새 없이 날아오는 화살을 검을 움직여 튕겨내는 마티아스.
굳이 검을 댈 필요가 없는 것들을 팔다리를 가볍게 움직이거나, 몸의 방향을 슬쩍슬쩍 비트는 것으로 피해낸다.
결국, 다닐렌츠 병사들이 쏘아낸 수십여 발의 화살 중 마티아스의 몸에 닿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와, 저 미친 새끼...!”
부하들이 벌어준 시간을 틈타 도망치려던 엔리케가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한 발 정도는 몸에 스치기라도 할 줄 알았건만, 저 망할 놈은 긁힌 곳 하나 없이 멀쩡해 보였다.
“대장! 이제 화살이 없습니다!”
멀리서 마티아스에게 화살을 쏘아대던 부하 중의 한 명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애초에 안할트 영지군 주둔지 기습에 준비했던 화살을 몽땅 퍼부었던 그들이었다.
남은 것은 개개인의 호신(護身)을 위한 비상용 화살 몇 발뿐이었는데, 그마저도 방금 엔리케를 구하겠다고 다 써버린 것이다.
삶과 죽음을 가를 선택의 상황, 병사들을 굳은 표정으로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고 달려들려고 했으나...
“야! 말 같지도 않은 짓거리 할 생각하지 말고 빨리 튀어! 도망가라고 이 새끼들아! 이 늑대 새끼한테 물려 죽고 싶냐?”
부하들의 생각을 눈치챈 엔리케가 큰 소리로 그들을 만류했다.
“아까는 치사하게 우리끼리 도망치냐고 뭐라고 했으면서!”
“그건 인마, 화살 날려달라는 신호였지! 근데...”
착 가라앉은 눈빛을 한 엔리케의 입가에 허탈한 미소가 걸린다.
“... 다 의미 없는 짓거리였네. 시발, 저 새끼, 진짜 이름값 한다. 존나 센 놈이었어!”
“대장! 저희가 합공하겠습니다!”
“합공은 니미... 야, 지랄 말고 빨리 도망가! 살 수 있는 놈은 살아야지! 우리가 다 덤벼봤자, 답 없는 새끼다 저거!”
그렇게 휘하 부하들에게 소리친 엔리케가 다시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인정하긴 싫지만, 난 여기서 뒤질 것 같다! 내 몫까지 잘 살아라 이 새끼들아! 으아아아아!!!”
그리고, 이어진 엔리케의 돌진.
그 짧은 순간 그동안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어린 시절의 기억, 푸른 방패의 이름 아래 동료들과 용병 일을 할 때의 추억...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엔리케는 다닐렌츠의 기사로서 죽고자 한다.
‘갈 때 가더라도 칼침 한 방은 먹이고 간다, 이 개새끼야!’
그렇게, 엔리케가 필사(必死)의 각오로 검을 쥔 채 달려나가는데...
“흐하아아아앗!!!”
“?!”
그보다 먼저, 마티아스를 향해 떨어지는 검의 주인이 있었다.
“이런...!”
카아아앙!!!
무성한 풀숲을 뚫고 그야말로 벼락처럼 날아든 공격이었다.
“흐읍!”
위로 높이 뛰어올랐다가 떨어지며 온몸의 무게를 실어서 내리친 검격.
감히 무시할 수 없는 위력에, 마티아스는 몸의 방향을 완전히 돌려 전력으로 그 공격을 막아냈다.
“흐앗차!”
카캉! 캉! 휘이잉! 카앙!
측면에서 튀어나와 마티아스를 습격한 사내는 이어지는 몇 차례의 연속 공격으로 그와의 거리를 벌린 뒤 천천히 엔리케의 곁으로 다가왔다.
낯익은 얼굴, 낯익은 복장.
엔리케의 입장에선 모를 수가 없는 얼굴, 그야말로 천군만마와 같은 그 사내의 이름은...
“베링 경!!!”
바로, 다닐렌츠의 기사 에르발트 베링이었다.
“하아, 하아... 죽어라 뛰어온 보람이 있구만. 자네 목이 아직 어깨 위에 붙어 있는 걸 보니.”
“어후, 몇 초만 늦게 오셨어도 바닥에 굴러다니는 제 머리통이랑 인사를 나누셨을 겁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그 꼴 안 봐서 다행이야. 뭐, 지금 그 꼴도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만...”
농담 아닌 농담을 건네며 엔리케와 인사를 나눈 에르발트가 다시금 검을 잡은 두 손에 힘을 불어넣으며 입을 연다.
“인사가 늦었군, 안할트의 늑대. 나는 다닐렌츠의 기사 에르발트 베링이다.”
“... 에르발트 베링?”
에르발트의 이름을 들은 마티아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한다.
“이런, 꽤 유명한 분이었군.”
“내 이름을 아나?”
“물론. 라엔슈타인 요새의 터줏대감 아니신가? 꽤 먼 곳까지 행차하셨군. 고향 땅에나 얌전히 처박혀 있을 것이지... 혹시 객사(客死)하는 게 소원인가?”
빈정거리는 말투로 도발하는 마티아스.
하지만 대답하는 에르발트의 내공도 만만치가 많았다.
“우리 영주님께서 늑대 털가죽으로 카펫을 만드실 요량인지 지나가다 늑대를 보면 잡아 오라고 명하셨지. 보아하니 여기 아르미엔토 경이 늑대 사냥을 하려는 것 같길래 그 공을 뺏기기 싫어 급히 달려왔다. 슬슬 늑대 가죽을 벗겨봐야지.”
“크하하하하!”
에르발트의 만만치 않은 도발을 들은 마티아스가 웃음을 터트린다.
마치 상대의 말이 가소로워 참을 수 없다는 듯한, 그의 느낌을 담은 웃음이었다.
“재밌구나, 베링. 그 명성은 검이 아니라 혓바닥으로 얻은 모양이군.”
“혓바닥보단 검이 조금 더 낫지. 좀 더 확인해 볼 텐가?”
끝까지 기세 싸움에서 지지 않겠다는 듯, 검을 곧추세운 채로 마티아스를 노려보는 에르발트.
그의 옆으로, 검을 버리고 자신의 주 무기인 활을 든 엔리케가 활시위에 화살을 거는 모습이 보였다.
몸 이곳저곳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성치 않은 상태에도 불구하고 활을 잡은 그의 모습은 검을 들었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 모습에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을 느낀 것일까?
스르릉- 탁!
두 사람의 모습을 잠시 노려보던 마티아스가 손에 들고 있던 검을 검집으로 돌려보냈다.
“... 다음엔 그 머리통을 반드시 잘라주마, 다닐렌츠의 쥐새끼들.”
“가죽 벗겨진 늑대의 꼴은 어떨지 궁금하구만. 다음에 알게 되겠지.”
“건방진... 개소리는 그쯤하고 꺼져라. 오늘은 곱게 보내주겠다.”
마티아스를 바라보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로, 천천히 뒤쪽으로 물러난 에르발트와 엔리케.
악명 높은 늑대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