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할트의 늑대 (4) >
세 갈래로 병력을 나눠 마티아스 괴츠가 이끄는 안할트 군의 주둔지를 습격했던 다닐렌츠 별동대.
그중 일익을 이끌던 기사 엔리케 아르미엔토가 적장인 마티아스와 조우한 후 맞대결을 펼쳤고, 그로 인해 큰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후방으로 빠르게 전해졌다.
“... 엔리케가 다쳤다고? 얼마나?”
“전신에 검상을 입었습니다. 다행히 뼈가 베이거나 내장을 쏟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만...”
나의 질문에 대답하는 하랄트의 표정 또한 무척이나 어두웠다.
녀석 역시 이번 전쟁 내내 엔리케와 붙어 다니며 정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 엔리케는 어딨어?”
“엘스터로 후송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오늘 내로 도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엘스터 다 뒤져서 교단에서 만든 힐링 포션 있는 대로 구해놔. 실력 좋은 치료사들도 다 불러. 돈은 신경 쓰지 말고.”
“알겠습니다.”
“아, 에르발트와 아드리안은 어떻게 하고 있지?”
“엔리케 경을 후송시킨 후 하던바 임무를 계속해서 이어나가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엔리케 경이 이끌던 병력은 각각 두 사람의 별동대에서 나눠 운용하기로 했습니다.”
“잘했군.”
하랄트와의 짧은 대화를 마친 후, 나는 고민에 빠졌다.
‘... 마티아스 이 새끼, 그냥 내가 가서 조져 버려야 하나?’
엔리케가 다쳤다.
이 <로스트 킹덤>의 세계에 떨어진 이후 내가 알게 된 사람 중 가장 아끼는 이들인 ‘푸른 방패’의 핵심 멤버.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는 하나, 자칫 엔리케의 얼굴을 영영 볼 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분이 아찔했다.
‘하지만, 겔베르트가 그렇게 간곡하게 부탁을 했는데...’
내 집무실 책상 위, 이틀 전 전서구를 통해 날아온 겔베르트의 서신.
그 서신 안엔 익숙한 필체로 적힌, 담백하고 짧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영주님, 마티아스 괴츠를 제가 상대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밤을 낮 삼아 전력으로 달려가겠습니다.]
내가 아는 겔베르트란 사내는 절대 이런 말투를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데 이렇게 간곡하게 부탁을 한다는 건?
‘...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모르는 무슨 사정이 있는 건가?’
원작 소설의 겔베르트는 초반에 사망하는 캐릭터였기에, 마티아스와 만나는 장면 자체가 나오질 않았다.
즉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사연이 얽혀 있는지, 내 입장에선 도통 알 수가 없다는 얘기다.
‘차라리 겔베르트한테 연락을 하지 말 걸 그랬나?’
연락하지 말고 그냥 내가 가서 안할트의 늑대인지 똥개인지, 개 잡듯이 패버리는 편이 나았을...
‘... 아니야, 지금은 휘하 기사들의 명성을 끌어올려야 할 때다.’
이곳은 소설이 게임 속이 아닌 엄연한 현실.
나 홀로 돋보이기보단 나와 함께 새로운 다닐렌츠를 만들어 나갈 휘하 인물들의 능력과 명성을 골고루 끌어올려 주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번 바인호프 요새 전투 때처럼 내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등장해 초인적인 활약을 펼치고 명성을 얻을 기회는 앞으로도 많이 남아 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우리 영지가 걸물들이 우글거리는 용담호혈이라는 느낌을 주어야 해.’
오랜 세월 왕국 변방에 처박혀 있던 볼품 없던 땅, 다닐렌츠.
그곳이 사람들의 옛날 이야기 속에나 등장하는 일세의 영웅들이 득시글거린다는 소문을 왕국 곳곳에 퍼트려야 한다.
그래야 몇 년 후 벌어질 그 ‘사건’에서도 우리 다닐렌츠의 몸값이 높아질 테니까 말이지.
“엔리케가 후송되면 바로 나에게 알려라. 그리고 군수품 보급 상황 정리해서 저녁까지 가져와.”
“알겠습니다, 영주님.”
***
안할트의 늑대에게 호되게 물린 엔리케가 엘스터로 후송된 후, 남아서 별동대를 지휘하게 된 에르발트와 아드리안.
다행히 두 사람 모두 침착하고 이성적인 성격이었기에, 적장인 마티아스를 잡아 엔리케의 복수를 하겠다는 식의 무리수를 두지는 않았다.
“습격이다! 습겨어어어억!!!”
“다닐렌츠 이런 씨발 놈들이...!”
“불부터 꺼라! 물! 물 뿌려!!!”
대신 그들은 철저하게 안할트 군을 괴롭히며 그들의 진군 속도를 늦추는 것에만 집중했다.
주둔지 근방으로 접근해 몰래 불화살을 쏜 후 곧장 도망가거나 그들이 식수원으로 정한 냇가에 몰래 배앓이를 유발하는 독을 푸는 식이었다.
가끔은 주둔지 주변에서 뿔피리를 불거나 효시(嚆矢)를 쏘아 올려 곤히 잠든 병사들을 깨우기도 했다.
죽거나 다치는 사람 많이 발생하지 않았으나, 다닐렌츠 군의 거듭된 습격으로 안할트 군은 정신적 피로를 호소하게 되었다.
그 결과...
“... 오늘은 더 이동하지 않고 이곳에 주둔지를 설치한다. 대신 주둔지 주변 순찰 병력의 수를 두 배로 늘려라. 다닐렌츠 놈들이 숨어 있지 않은지, 주번의 숲을 철저하게 수색해라.”
“알겠습니다.”
“식수원 관리를 철저히 하도록. 주변에서 장난질 치는 놈들이 없는지, 상류까지 확실하게 확인해라.”
“옙, 사령관님!”
명령을 받은 부하들이 지휘관 천막에서 빠져나간 뒤, 마티아스는 며칠 간의 강행군으로 푸석해진 얼굴을 쓸어내렸다.
“... 개 같은 새끼들.”
다닐렌츠 군의 공격은 실로 집요했다.
한 줌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뭘 할 수 있겠나 비웃었지만, 막상 당해보니 귀찮기가 이를 데가 없었다.
차라리 정면으로 싸움을 걸어오면 한 방에 박살을 내 버릴 텐데, 눈에 불을 켜고 뛰쳐나가면 이미 도망가고 없어 매번 헛물만 켰다.
“그때 만났던 두 놈을 그 자리에서 다 베어 버렸어야 했는데...”
그날 자신에게 된통 당한 후 더욱 은밀해지고 조심스러워진 다닐렌츠 군의 움직임.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생각한 것 이상으로 강단 있는 놈들이었다.
“하지만 그 같잖은 수작질도 이제 끝이다.”
다닐렌츠 놈들의 수작질로 이동 속도가 많이 늦춰졌지만, 그래도 진군을 멈추진 않았다.
그 결과, 목표였던 바렌부르크의 주도 엘스터에 반나절 거리로 접근했다.
다닐렌츠 놈들의 잡스러운 짓거리도 이제 끝이다.
내일이면 모두 목 없는 시체가 되어 엘스터 성벽에 걸리게 될 테니 말이다.
***
엘스터 북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너른 벌판.
나는 휘하 기사들과 함께 일단의 병력을 이끌고 도시 밖으로 나가 전방을 살피고 있었다.
마침내, 북쪽에서부터 천천히 다가오는 안할트 군의 모습이 보였다.
근데 생각보다 숫자가 좀 많아 보였다.
그리 많은 수는 아니어도 지난 며칠 동안 우리 별동대가 열심히 병력을 깎아냈다고 들었는데... 왜지?
“병력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아 보이는 것 같은데? 혹시 중간에 충원이 있었나?”
나의 질문에 옆에 있던 아드리안이 냉큼 대답을 꺼낸다.
“예, 확실하진 않지만 약 5백 명 정도가 안할트 방면에서 남하해 마티아스가 이끄는 본대에 합류했습니다. 복색으로 보아 정규 영지군은 아니고, 용병으로 보였습니다.”
“역시 백작령은 다르군. 저렇게 추가 병력 편성이 빠르게 진행되다니...”
처음 보고되었던 2천의 병력에서 우리 별동대의 기습으로 몇백 명의 병력을 깎아냈으나, 다시 5백이 충원되어 되레 수가 더 많아진 안할트 군이다.
반면 우리 군은 별동대 활동에서 잃은 병력이 족히 오십 명 정도는 되었고, 루테니아-바렌부르크 군과 연이어 치른 전투에서 입었던 부상이 심해져 전력 외로 분류된 숫자 또한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현재 우리 군의 가용 병력은 천오백 명 정도에 불과했다.
물론, 우리는 성벽에 기대어 수성(守城)하는 측이니 아주 병력이 부족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 혹시라도 저놈들이 마구잡이로 돌격해 들어오면 어쩝니까?”
서서히 다가오는 안할트 군의 모습에 긴장한 아드리안의 물음.
적들이 두렵다기보다는 모시는 주군이 혹시라도 위험에 처하게 될까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런 녀석에게 짧지만 명쾌한 대답을 해주었다.
“절대 안 와. 너 공성전 안 해봤냐? 일단 주둔지 설치한 다음에 애들 밥도 좀 먹이고, 공성 병기도 좀 만들고 해야지. 오자마자 앞뒤 안 가리고 성벽에 들이박으면 개죽음 당하는 거야.”
“아니, 그래도... 여기 영주님이 계신 걸 눈치채고 막 들이닥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뭐... 성안으로 도망가면 되지. 뭘 그렇게 걱정이 많냐 너는?”
동네 마실이라도 나온 듯 태평한 내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아드리안의 눈빛에서 불안함이 가시질 않았다.
어이구 새끼, 문제 생기면 이 형님이 어련히 알아서 해결해 줄 텐데 걱정은 무슨...
바로 그때, 화살의 사정거리보다 살짝 더 떨어진 위치에 도달한 안할트 군이 마침내 이동을 멈췄다.
“영주님, 놈들이 저곳에 주둔지를 설치할 모양입니다.”
이번에 말한 것은 아드리안과 함께 별동대를 이끌며 안할트 놈들을 괴롭혔던 에르발트 베링.
이래저래 초조해하는 아드리안과 달리 베테랑인 그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전방의 적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딱 우리가 예상한 곳에 진을 쳤군요.”
“예, 맞습니다. 저 정도 위치가 공성 측엔 적당하죠.”
내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에르발트가 나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영주님, 이제 슬슬 성 안으로 돌아가시는 게... 쉬라흐 경의 말처럼 마구잡이로 들이닥치진 않겠지만, 그래도 여기 계속 계시는 건 위험하지 싶습니다.”
“흠, 그래도 손님이 왔는데 인사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
내 입에서 나온 엉뚱한 말에 벙찐 표정을 짓는 에르발트.
“하하,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이랴아!!!”
주변 이들이 뭐라 더 이야기하기 전에, 나는 말 배를 박차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저, 저, 저!!! 영주님!!!”
“안 됍니다, 영주님! 위험합니다!!!”
“안 돼! 아무도 따라오지 마! 따라오면 더 위험해져! 뒈지기 싫으면 오지 마!!”
그렇게 뒤를 따르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협박으로) 묶은 뒤, 나는 주둔지 설치를 위해 바삐 움직이는 안할트 군의 앞으로 말을 달렸다.
다가닥! 다가닥! 다가닥!
놈들도 보는 눈이 있고 듣는 귀가 있으니, 누군가가 자신들에게로 접근한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다가오는 이가 나 혼자였기에 뭔가 대응을 하는 대신 ‘저건 웬 미친놈인가?’ 하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병사들의 시선을 뻔뻔하게 받으며, 나는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다닐렌츠 군의 지휘관이다! 안할트 군을 이끄는 수장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병사들이 화들짝 놀랄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가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과장을 조금 보태 입에서 천둥이 울리는 듯한 느낌.
하지만 그 놀라움은 내 입에서 뒤이어 나온 말의 내용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었으리라.
“내 이름은 데미언 카릴베르크, 다닐렌츠 영지의 온당한 지배자인 카릴베르크 가문의 주인이다!”
“...?!”
“카, 카릴베르크 가문이라면...”
“다닐렌츠 영주...!?”
“아니, 어떻게 영주가 이곳에...”
“저 미친... 간덩이가 부어도 유분수지...”
“여길 어떻게 혼자 온 거지? 저게 말이 돼?!”
나의 소개를 들은 안할트 병사들이 기겁하는 표정을 짓는다.
푸른 피의 귀족이 이 험한 전장의 한 가운데 나타났다.
심지어 호위 병력도 없이 적진의 코앞까지 달려와 인사랍시고 말을 건네고 있으니,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 주는 정신적 충격이 어마어마했다.
“나는 바렌부르크와 루테니아의 불의(不義)한 침략에 대항하여 군사를 일으켰고, 나와 내 영지민들의 안녕을 지키기 위한 신성한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
다들 하던 일을 접고 멍한 얼굴이 되어 나를 바라보는 안할트의 병사들.
그런 그들의 귓가에, 쩌렁쩌렁 울리는 나의 목소리가 쉴새 없이 때려 박힌다.
“이런 나의 병사들을 핍박하는 안할트의 사내들이여, 그대들의 행동이 진정 부끄럽지 않은가? 부디 그대들의 수장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어 이에 대한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안할트의 늑대인지 똥개인지, 당장 튀어나와라.
우리 엔리케 형님 몸에 칼침 놓은 그 잘난 면상 좀 보자.
겸사겸사 레벨 확인도 하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