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할트의 늑대 (5) >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컸기에, 듣지 않으려 해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
“... 다닐렌츠의 영주라고?”
하지만 그 내용이 너무 황당했기에, 명백하게 들리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쉬이 믿을 수가 없었다.
“사령관님, 지금 주둔지 입구에 자신을 다닐렌츠의 영주라고 주장하는 자가 찾아왔사온데...”
“... 내가 가서 확인해보겠다.”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확인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서서, ‘나라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아무리 본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다 하더라도, 맨몸으로 적진 앞에 찾아와 당당히 적의 수장과 인사를 하겠다고 요구를 해?
그게 말이 되나?
한데, 그런 일이 정말로 벌어지고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뭔지 모를 초조함에 마티아스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그리고 마침내,
“그대가 안할트 군의 수장인가?”
“...!”
마티아스는 자신을 다닐렌츠의 영주라 주장하는 자를 만났다.
그는 이제 겨우 외곽 울타리 정도가 세워진 안할트 군의 주둔지 입구에 말을 탄 채로 서 있었다.
사람도 사람이었지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일반적인 군마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는 새카만 흑마(黑馬).
보는 이를 주눅 들게 만드는 거대한 흑마의 위용에 마티아스는 흠칫 놀라야 했다.
‘저게 말이라고? 몬스터가 아니고?’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그 말을 애써 삼킨 채, 마티아스는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사내의 모습을 천천히 살폈다.
그는 큰 키에 널따란 어깨를 지닌 젊은 사내였다.
아마도 몬스터의 근육으로 만들어진 듯한, 담백한 생김새의 갑옷 아래 탄탄한 근육질의 몸이 눈에 보이듯 느껴진다.
바람을 맞아 천천히 휘날리는 금발과 깎아놓은 듯 날카로운 콧날, 강건함과 날렵함이 조화를 이룬 턱선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마티아스의 시선을 빼앗은 것은, 온 세상을 내리깔아보는 듯한 저 오만한 에메랄드 빛 눈동자였다.
분명 다닐렌츠의 영주는 이십 대 초반에 불과한 어린 나이라 들었는데, 어찌 저런 눈빛을 지닐 수 있는가?
머릿속에서 정신없이 피어오르는 여러 의문을 뒤로하고, 마티아스는 뜨거운 숨을 토해내듯 앞선 물음에 대답했다.
“그렇소. 내가 안할트 군을 이끄는 사령관이오.”
상대가 다닐렌츠의 영주라고 신분을 밝힌 만큼, 마티아스는 상대와의 신분의 차이를 생각해서 존댓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이리 불쑥 찾아와 미안하네. 하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이렇게 얼굴 보고 차분하게 얘기 나눌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말이지.”
“... 괜찮소.”
홀로 적진을 찾아온 상대의 대담함에 밀리지 않기 위해, 마티아스 역시 빳빳하게 고개를 세운 채로 태연함을 가장했다.
“그래, 우리 늠름하신 사령관 나리의 이름을 내가 알 수 있겠는가?”
“안할트의 기사 마티아스 괴츠, 그게 내 이름이오.”
“아, 괴츠 경! 너무나도 유명하신 분이었군.”
마티아스의 이름을 들은 다닐렌츠의 영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안할트 군이 영지 경계를 넘어 바렌부르크 땅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보고를 통해 알고 있었을 자신의 이름이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마치 처음 듣는 이름이라는 듯한 얼굴을 한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세상 사람들이 자네들 두고 안할트의 늑대라고 부른다지? 늑대, 늑대라... 사람에게 늑대라니, 그것참 멋진 칭호로군.”
잔혹하고, 집요하며, 용맹한 전사로 이름 높은 안할트의 기사 마티아스 괴츠.
세상 사람들은 그에게 ‘늑대’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자신의 진짜 이름보다도 훨씬 더 유명한 그 별명을 입에 담는 상대의 얼굴엔 가소롭다는 느낌이 묻어나고 있었다.
‘늑대? 너 따위가?’
상대의 그런 의도가 명확하게 느껴져서, 마티아스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향해 왼손을 가져다 대었다.
‘... 그냥 여기서 베어버릴까?’
물론,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다.
전투에 앞서 상호 간에 인사를 나누겠다며 적진 앞으로 홀로 찾아온 ‘명예로운’ 귀족을 상대로 검을 휘두른다?
그런 짓을 했다간 마티아스 본인은 물론이고 안할트 영지 역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사교계에서의 평판은 바닥까지 떨어지고, 그 일은 죽는 순간까지 꼬리표처럼 자신의 뒤를 따라다니겠지.
‘하지만, 죽이진 않아도 어느 정도 겁은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듣자 하니 다닐렌츠 영주는 제법 검을 쓸 줄 아는 자라고 했다.
얼마 전엔 루테니아 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800명이나 되는 적을 단기 돌진으로 물리쳤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었고.
당연히 아랫것들의 입을 통해 말도 안 되게 과장된 소문일 테지만, 어쨌건 검을 들고 전장에 나가기를 즐기는 이라는 뜻일 터.
‘그런 자일수록, 압도적인 실력 차이를 보여줘 짓누르는 재미가 큰 법이지.’
그렇게, 마음의 결정을 내린 마티아스가 검 자루를 쥐려고 하는데,
“...!”
마티아스는 순간 얼굴이, 아니 몸 전체가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너무 오랜만에 접한 느낌이라 순간적으로 몸에 무슨 이상이 생긴 것인가 착각했지만, 마티아스는 이내 자신이 느끼는 이 기묘한 감각의 이유를 알아챌 수 있었다.
살기(殺氣).
모두가 공인하는 강자의 경지에 오른 이후 오랫동안 느껴본 적 없던 압도적인 살기가 그의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크흠...”
자신도 모르게 불편한 신음을 흘리는 마티아스.
가슴이 답답하여 숨 쉬기가 어려웠다.
그런 그에게, 다닐렌츠의 영주가 무심한 말투로 질문을 던진다.
“그 검, 뽑을 건가?”
“... 뭐?”
“인사 나눌 요량을 찾아온 상대에게 다짜고짜 검을 뽑는다라... 그래, 그것이 안할트 기사들의 명예인가 보군. 어디, 마음대로 해보게.”
하지만 그 뻔한 조롱의 말을 듣고도 마티아스는 검을 뽑을 수가 없었다.
뽑지 않은 것이 아니다.
뽑을 수가 없었던 거다.
‘... 지금 검을 뽑으면, 죽는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명백한 경고.
이토록 농밀한 살기를 느껴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마티아스였다.
그냥 강한 수준을 넘어, 이 왕국 북서부에서 감히 검을 맞댈 수 있는 이가 없다는 평을 받는 자신을 이토록 두렵게 만드는 상대라니?
주르륵-
마티아스의 이마를 타고 흐르는 한 줄기 땀방울.
그 땀방울에 담긴 두려움의 감정을 눈치챈 것일까?
“아, 이런... 인사하겠다고 찾아와 놓고 결례가 심했군. 미안하네.”
다닐렌츠 영주가 꺼내놓은 그 말과 동시에, 마티아스의 전신을 압박하던 살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손을 검 자루에 댄 채로 옴짝달싹하지 못했던 지난 시간이 거짓말이었다는 듯, 자유롭게 풀어진 팔다리가 어색하게 느껴져서 마티아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나의 병사들과 검을 맞댈 상대가 누구인지, 한 번쯤은 미리 만나 보고 싶었네. 전장에서 마주치면 이렇게 고상하게 인사할 여유가 없거든. 머리통을 부수거나, 목을 쳐야 하니까.”
“...”
“그래, 상호 간의 인사는 이쯤이면 된 듯하고... 혹시 나한테 할 말이 있나?”
“...”
“흠, 없나 보군. 그럼, 전장에서 만나도록 하지. 만나서 반가웠네.”
뭐라 할 말을 잃은 마티아스를 두고 홀로 대화를 마친 상대가 이번엔 자신의 흑마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한다.
“자,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블리츠. 이럇!”
히이이이이잉!!!
덩치만큼이나 우렁찬 울음소리를 터트리는 흑마와 함께, 몸을 돌리는 다닐렌츠의 영주.
짧은 순간 흘린 땀으로 등이 흥건하게 젖은 마티아스와 그런 상관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안할트의 병사들은 그가 천천히 멀어지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
마티아스와의 짧은 만남을 마치고 엘스터로 돌아온 나는 잔뜩 화가 난 아드리안에게 한동안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영주님! 대체 정신이 있으신 겁니까, 없으신 겁니까? 거기가 어디라고 혼자 가십니까? 예?”
“아휴, 귀 따가워. 그만해 인마. 그만하고 이제 저녁이나 먹...”
“저녁이요? 지금 밥이 넘어 가십니까? 저는 영주님 걱정에 그 잠깐 동안 살이 다 빠졌습니다! 대체 어쩌자고 적진에 홀로 쳐들어가셔서...”
“쳐들어가긴 누가 쳐들어갔다고 그래? 얌전히 가서 인사만 하고 온 거야, 인사만.”
엄마에게 잔소리하는 큰딸처럼 목소리를 높이는 아드리안.
녀석을 피해 엘스터 영주 저택에 마련된 내 임시 집무실로 바삐 발걸음을 옮겼으나, 아드리안은 내 뒤를 졸졸 따라오며 계속해서 입을 놀렸다.
“아니 그러니까! 좀 있으면 서로 창칼 들고서 베고 찌를 사이끼리 뭔 인사를 하시겠다고 간 겁니까? 예?”
“이 자식이 진짜! 야, 네가 내 엄마냐 아빠냐? 왜 이렇게 잔소리가 심해? 베링 경, 이놈 빨리 데리고 성벽으로 가십시오!”
나의 다급한 구원 요청을 받은 에르발트 베링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아드리안의 팔을 잡아 이끈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영주님. 이보게 쉬라흐 경, 그만 열 내고 나랑 애들 전투 준비 상황이나 점검하세.”
“아니, 베링 경! 지금 이게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
“에헤이, 영주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셨는데 뭐가 문제인가? 내가 말했지? 영주님 혼자 다녀오시는 게 오히려 안전하다고.”
“그야, 그렇지만...!”
“오늘 일로 영주님은 또 하나의 전설을 쓰신 걸세. 세상 그 어떤 귀족이 홀로 적진 앞으로 나아가 적의 수장과 인사를 나누고 온단 말인가? 그 담대함, 그 패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기사로서의 미덕 아닌가?”
“... 맞습니다.”
“그러니, 더는 영주님을 핍박하지 말게나. 자, 가세나. 얼른 가서 병사들 무장 상태도 점검하고, 성벽 보수 상황도 챙겨놔야지. 안할트 놈들은 여간내기들이 아니라네.”
그렇게, 에르발트와 아드리안이 빠져나간 뒤 홀로 남게 된 집무실에서 나는 마티아스와의 만남을 되새겨 보았다.
정확히는, 스킬 ‘창조주의 눈’으로 엿본 놈의 상태창 내용을 떠올렸다.
『 마티아스 괴츠 / Lv. 57
소속: 백작령(伯爵領) 안할트
클래스: 기사
고유 특성:
- 안할트의 늑대 』
과연 왕국 북서부 최강의 기사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대단한 능력치였다.
레벨 57.
‘몬스터의 제왕’이라 불리는 오우거를 홀로 상대할 수 있는 상급 기사의 경지가 대개 레벨 60부터 시작한다는 걸 생각하면, 마티아스는 그 자체로 오우거 못지않은 파괴력을 지닌 ‘전술병기’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내가 훨씬 더 강하다.
팟-!
『 데미언 / Lv. 83
소속: 남작령(男爵領) 다닐렌츠
클래스: 기사
고유 특성:
- 창조주(創造主)
- 검성(劍聖)
- 무골지체(武骨之體)
- 붉은 송곳니의 대군주
보유 스킬:
- 창조주의 눈(신화 등급)
- 리히테나워 류(전설 등급)
- 오크 왕의 분노(전설 등급)
보유 아이템:
- 초대형 강철 글레이브(고급 등급)
- 트롤 가죽 갑옷(고급 등급) 』
오랜만에 살펴보는 나의 상태창이었다.
영주 자리에 오른 뒤 몬스터 사냥에서도 거의 손을 뗀지라 레벨이 정체기에 있었는데, 이번 전쟁에 직접 참전하여 미친 듯이 날뛴 결과 83까지 레벨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레벨 57인 마티아스를 때려잡기엔 부족함이 없는 수치.
하지만, 그를 쓰러뜨리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이’의 몫이었기에 나의 강함은 이 상황에선 큰 의미가 없었다.
“빨리 좀 와줬으면 좋겠는데, 그래야 둘이 싸움을 붙여도 될지 말지 내가 판단을 하...”
바로 그때,
똑똑-
누군가가 내가 있는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냐?”
“영주님, 키르헨에서 로이터 경이 도착하셨습니다.”
“...!”
이 아저씨, 양반은 못 되는구나.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는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들어오라는 말 대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가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철컥!
힘차게 열어젖힌 문밖의 복도, 먼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려왔기 때문인지 흙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머리를 하고서 나를 바라보는 그가 있었다.
“겔베르트!”
“... 다닐렌츠의 기사 겔베르트 로이터, 영주님의 부름에 응하고자 달려왔습니다.”
장장 일주일에 걸친 강행군의 여파로 피곤함이 역력한 얼굴이었지만, 결코 기사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은 겔베르트가 차분하게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그가 다시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을 땐...
팟-!
『 겔베르트 로이터 / Lv. 59
소속: 남작령(男爵領) 다닐렌츠
클래스: 기사
고유 특성:
- 신념의 수호자 』
내가 가장 신뢰하는 최강의 대전사(代戰士), 겔베르트.
마침내 그가 전장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