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전사(代戰士) (1) >
아르민(Armin)은 안할트 영지의 자그마한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비록 못 배우고 가난한 이들이었지만, 자식에겐 한없이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나이가 10살 정도 되었을 때부터 아르민은 나무꾼이었던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그의 일을 도왔다.
안 그래도 건장한 체력에 남다른 힘을 지니고 태어났던 아르민.
아버지와 함께 매일 같이 산과 숲을 오가며 고된 나무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근육이 붙고, 체력이 강해졌다.
다시 시간이 흘러 아르민이 열다섯이 되자, 이제는 또래 소년들은 물론이고, 마을 어른 중에서도 그를 힘으로 당해낼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영지군 모병관이 방문했다.
정기적으로 시행하는 몬스터 토벌 작전에 동원할 지원병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누가 봐도 개죽음이 예약된 자리.
하지만, 아직 나이 어린 아르민은 그런 사실을 눈치채기엔 너무 세상에 대한 경험이 없었다.
그저 모병관이 떠들어대는 장밋빛 미래와 함께 따라온 병사들이 차려입은 멋들어진 갑옷과 무기에 반해, 아르민은 홀린 듯이 그들의 뒤를 따라 마을을 떠났다.
당연히 어린 아들의 선택을 반대했을 두 부모에겐 알리지 않은 채로 몰래 입대를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안할트 영지의 주도 파사우(Fassau) 근방에 자리 잡은 영지군 신병 훈련시설에서 아르민은 자신의 상상과 너무나도 다른 현실을 마주한다.
열악하기 그지없는 대우, 폭력적이고 잔혹한 지휘관과 고참병들의 괴롭힘.
모병관을 따라왔던 병사들의 것과는 너무나 다른, 사실상 거적때기나 다름없는 형편없는 품질의 갑옷과 무기들.
모든 것이 어린 소년이 꿈꾸었던 멋진 군인의 삶과 너무나 동떨어진 환경이었다.
그제야 아르민은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되돌리기엔 너무 늦어있었다.
***
“방패를 들어라! 궁수들은 대응 사격을 실시해라아!!!”
“사다리를 밀어낼 장대를 준비해라! 침착하게 상대하면 된다!!!”
“끓는 기름! 기름은 준비되고 있나?”
“예, 사령관님!”
“좋다! 불을 계속 지펴라! 안할트 놈들이 성벽을 타고 올라오면, 그 더러운 면상에 한 바가지씩 퍼주는 거다!!!”
도시 엘스터의 임시 방위사령관으로 임명된 에르발트 베링이 기운찬 목소리로 병사들을 독려했다.
그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다닐렌츠의 병사들.
노도(怒濤)와 같은 기세로 몰려드는 안할트 군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들의 눈빛엔 조금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안할트, 바렌부르크의 쭉정이 새끼들이랑은 차원이 다르군.”
눈앞에서 동료들의 머리통이 깨지고, 손발이 뎅겅뎅겅 잘려나가는 잔혹한 상황에서도 안할트 군은 흔들림 없이 공성을 지속했다.
강군(强軍)의 기본은 흔들림없는 전열 유지 능력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촤아악-!
“끄아아아아아!!!”
“아악! 내 눈! 내 누우우운!!!”
성벽에 사다리를 대고 기세 좋게 달려 올라오던 안할트 병사들의 머리 위로 펄펄 끓는 기름이 쏟아졌다.
물보다 훨씬 높은 온도를 지닌 기름의 습격에, 앞장서서 사다리를 오르던 병사의 얼굴이 녹아내렸다.
살이 타는 매캐한 냄새와 끔찍한 비명이 뒤섞이는 인세의 지옥.
그러나 부하들이 잔인하게 죽어나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면서도 성을 공격하는 공성 측의 최고 지휘관, 마티아스 괴츠의 의지는 강철처럼 단단하기만 했다.
“성문 좌측 성벽으로 병사들을 더 투입해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슬슬 공성추 투입을 준비해라. 화공에 대비해 물 먹이는 것 잊지 말고.”
“예, 사령관님!”
지시를 하달받은 부하 지휘관이 자리를 뜬 이후, 마티아스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뜨겁게 진행되는 전장의 풍경을 살펴보았다.
여전히 그가 찾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일부러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이 마티아스가 전장에 들어가는 상황을 노리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닐렌츠 영주, 데미언 카릴베르크 남작.
그는 북서부 최강의 기사라 불리는 자신을 내뿜는 살기 하나만으로 옴짝달싹 못 하게 묶어버린 사내였다.
그런 이가 이토록 중요한 전투의 현장에 등장하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 안할트 측의 최대 전력인 마티아스를 상대하기 위한 포석일 터였다.
“그냥 위험을 감수하고 들이받아야 하나...”
지금껏 전장에서 물러섬이 없었던 사나이, 마티아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었다.
***
놀랍게도, 아르민은 빠르게 군 생활에 적응해나갔다.
거기엔 어차피 벌어진 상황에 후회만 하고 있기보단 뭐라도 하면서 빨리 현실에 적응해나가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아르민의 판단이 있었다.
거기에 더해, 그는 그러한 자신의 판단을 뒷받침할 만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군인에게 필요한 재능이란 무엇인가?
신체적 능력, 즉 타고난 힘과 체력 등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전투에서 적을 상대할 때 물러서지 않는 용기(勇氣)와 투지(鬪志)가 중요했다.
그리고 아르민은 그 모든 것을 갖추고 태어난 사내였다.
“아르민, 들었어? 너 조장으로 임명됐대!”
“와, 나이 열여섯에 조장이라고? 그게 말이 돼?”
“진짜 타고난 놈이다, 타고난 놈이야! 난 저 자식이 진즉 저럴 줄 알았어!”
“첫 출전에 오크 대가리를 썰었잖아. 충분히 조장시켜 줄만 하지!”
영지군에 입대한 지 고작 6개월 만에, 아르민은 열 명의 병사들을 이끄는 조장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2년의 시간이 흘러 아르민이 성년의 나이가 되었을 때, 아르민은 마침내 백 명의 병사들을 이끄는 백인대장의 자리에 올랐다.
전례가 없을 정도로 파격적인 승진이었으나, 아르민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 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던 안할트 영지군의 관계자들은 아무도 이 같은 조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르민 또한 자신의 백인대를 이끌고 여러 전장에서 활약하며 스스로의 자격을 증명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르민, 내가 보기에 너는 지휘관의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녀석이야. 너의 무력과 병사를 지휘하는 능력 모두 흔히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거든.”
“칭찬 감사합니다.”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내 말은 그러니까... 혹시, 기사가 되어볼 생각이 없냐는 질문이다.”
“...!”
“원하면 언제든지 말해라. 나의 종자로 삼아주마.”
“가... 감사합니다!”
평소 이 어린 백인대장의 실력을 눈여겨보던 안할트 영지의 기사가 그에게 자신의 종자가 될 것을 제안했고, 아르민은 그 기회를 감사히 받아들였다.
***
엘스터 전투 7일째_
다닐렌츠 군은 여전히 굳건하게 성벽을 지키고 있었고, 소득 없이 피해만 누적되고 있는 안할트 군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다닐렌츠 놈들의 반응이 기민합니다. 공성추가 성문 근처로 접근이 어렵습니다.”
“반응도 반응이지만, 놈들의 보급 상황이 우리 군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좋은 듯싶습니다. 공성추에 던져대는 돌멩이과 불화살, 끓는 기름의 양이 좀처럼 줄어들지를 않습니다.”
“3일 내내 그렇게 쏟아부어 놓고도 아직도 물량이 남은 건가?!”
“하, 참나! 대체 보급을 얼마나 받은 것인지... 미치겠군!”
비록 도시를 낀 수비군의 입장에서 싸우고 있지만, 엄연히 말해 다닐렌츠 군 역시 안할트 군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기반인 다닐렌츠 영지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바렌부르크로 원정을 떠나와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슬슬 군량과 물자 걱정을 하기 시작한 안할트 군과 달리 다닐렌츠 군은 좀처럼 보급의 문제를 겪고 있지 않았다.
바로, 압도적인 물량 공세로 군의 뒤를 받쳐주는 다닐렌츠 상단의 존재 덕분이었다.
“병력의 손실이 늘어가면서, 도시를 둘러싼 우리 군의 포위망이 헐거워지고 있습니다.”
“어제도 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보급 마차를 놓쳤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도시 서편의 쪽문을 통해 물자가 들어갔다는데, 거기까지 견제할 병력이 없습니다.”
“지원이 필요합니다, 사령관님!”
“맞습니다. 파사우에 지원 요청을 해야 합니다!”
“어서 결단을!”
“...”
쏟아지는 지휘관들의 우는 소리를 묵묵히 듣고 있는 안할트 군의 사령관 마티아스.
현재 그의 머릿속은 대단히 복잡했다.
그 고민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파사우로의 지원 요청을 더는 할 수 없다는 것에 있었다.
백작령 안할트는 아이펠 산맥이 자리한 서쪽을 제외하고 북, 동, 남으로 각각 서로 다른 영지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한데 북쪽과 동쪽에 존재하는 영지들 모두 안할트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방면을 지키는 병력을 빼서 남쪽 바렌부르크 전선에 투입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 지휘관이라는 것들은 지원 요청하자는 소리만 늘어놓고 있었으니, 마티아스의 속이 답답할 수밖에.
“... 도시 서쪽으로 병력을 투입해 놈들의 보급선을 끊는다. 지금 상황에선 그게 우선이다.”
마침내, 마티아스가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사령관님, 현 상황에선 그쪽으로 병력을 많이 보낼 수가 없습니다!”
“맞습니다. 애초에 병력을 많이 빼면 다닐렌츠 놈들이 눈치채고 성 밖으로 튀어나올 수도 있을...”
“내가 직접 간다.”
“...!”
“내가 직접 가서, 다닐렌츠 놈들의 보급 물자를 털어오도록 하지. 그러니 많은 병력은 필요 없다. 기병 50기만 추려 놓도록 해라.”
“알... 알겠습니다!”
***
아르민의 종자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
워낙 가진 재능이 충만한 그였기에, 다른 이들이 2년에 걸쳐 배울 것들을 1년 만에 모두 습득할 수 있었다.
그렇게, 종자 생활을 마무리 짓고 영지의 견습 기사가 된 아르민.
위에서 지시한 몇 차례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내며, 정식 기사 선임에 대한 꿈을 키워가던 어느 날...
“여기가... 반역자들의 거점이라고요?”
영지를 전복시키려는 반역자들의 거점이라는 얘기를 듣고 병사들과 함께 찾아간 곳.
하지만 그곳의 정체는 영주의 가혹한 수탈에 버티다 못해 도망친 이들이 모여 사는 깊은 산속의 화전민(火田民) 마을이었다.
“그래, 감히 백작 각하의 통치에 불응하는 참람된 마음을 품고 도망친 반역도당이 모여 있는 곳이지.”
아르민과 함께 화전민 마을을 찾아온 선배 견습 기사 한 명이 아르민의 물음에 싸늘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선배님, 하지만... 여긴 그냥 화전민들이 사는 마을 아닙니까? 반역은 무슨... 말도 안 됩니다!”
“그냥 화전민? 어디? 내 눈에는 왕국과 우리 영지의 법도를 어지럽히는 악랄한 반역자들만 보이는데?”
“선배님!”
스르릉- 촤앙!
“더 허튼소리를 한다면, 너도 함께 베겠다. 백작 각하의 명령을 따르는 군인으로서 임무에 충실해라, 아르민!”
“... 임무? 하, 임무는 씨발!”
“뭐?”
“죄 없는 사람들 쳐 죽이는 게 군인의 임무입니까? 우리 임무는 이런 사람들 지키고 보호하는 거잖습니까! 그게 영지군의 존재 이유이고요!”
“아르민 네 놈, 감히 백작 각하의 명령에 반기를 드는 것이냐?”
날이 시퍼런 검을 빼 든 선배 견습 기사의 물음에,
촤아앙-!
“그래 시발! 이 사람들 죽이려거든 나도 죽여봐, 새끼야!”
아르민은 검을 마주 뽑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날, 아르민은 화전민을 죽이려던 선배 견습 기사의 얼굴을 베어 쓰러뜨리고, 병사들을 쫓아낸 뒤 마을의 화전민들을 모두 도망치게 했다.
그 후 아르민은 백작 영지군의 추격을 피해 안할트를 떠났고, 멀리 왕국 남부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들었던 이름을 버리고 가명을 지은 뒤, 용병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
“... 아르민?”
엘스터 서쪽에 자리한 숲속.
다닐렌츠 군의 보급 마차가 등장했다는 소식에 50기의 기병을 이끌고 급히 달려왔던 안할트 군의 사령관, 마티아스는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한 남자를 보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20여 년 전, 안할트의 어느 화전민 마을에서 상대의 검에 맞아 생긴 얼굴의 상처가 불에 덴 것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아르민, 아르민이라... 그 이름 참 오랜만에 듣네.”
다각, 다각-
천천히 말을 몰아 마티아스에게 접근해오는 남자.
“네가 아는 아르민은 20년 전에 죽었다. 이미 너무 낡아서 먼지가 된 이름이지... 지금은, 다른 이름을 쓰고 있거든.”
“... 뭐?”
한때 아르민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그 남자가 자신의 오랜 악연(惡緣), 마티아스에게 말한다.
“나, 다닐렌츠의 기사 겔베르트 로이터.”
“...?!”
스르릉- 촤앙!
“오늘, 이곳에서 안할트의 늑대를 잡을 것이다. 적들은 감히 살아 돌아가기를 바라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