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24화 (124/197)

< 대전사(代戰士) (2) >

“영주님, 로이터 경이 우리 군의 보급 마차를 노린 안할트 군의 기동대와 조우했습니다!”

거친 숨을 토해내며 달려온 병사가 내게 전해온 소식.

예상대로, 안할트 군은 우리의 보급선을 끊어 내기 위해 병력을 따로 빼냈다.

‘걸렸다, 이 새끼들.’

공성전이 시작된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다닐렌츠 상단으로부터 든든한 후방 지원을 받는 우리 군과 달리 안할트 측은 슬슬 보급에 대한 압박을 느끼고 있었을 터.

나는 그런 안할트 측의 공격을 유도하기 위해서 지난 며칠간 의도적으로 우리 군의 보급선을 적에게 노출했다.

‘... 그리고, 놈들이 치고 들어올 장소를 예상해 겔베르트를 보냈다.’

그리고 지금, 그 예상이 제대로 맞아떨어졌다는 보고를 받았다.

지휘관으로서 보람과 기쁨을 느끼기 충분한 순간이었지만, 아직은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답을 듣지 못했기에 침착함을 유지하며 물었다.

“... 안할트 기동대의 지휘관은 누구지?”

“예, 기사 마티아스 괴츠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됐어!”

타앙! 우지직!

병사의 대답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앉아 있던 책상을 힘껏 내리쳤다.

당연히 책상을 내 힘을 버티지 못하고 안쓰럽게 부서져 나갔는데...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베링 경과 쉬라흐 경을 불러와라. 지금 당장!”

“예, 알겠습니다!”

잠시 후, 성벽 위를 바삐 오가며 다음 전투를 준비하고 있던 엘스터의 임시 방위사령관 에르발트 베링과 아드리안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 방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 중 선임이라 할 수 있는 에르발트가 각 잡힌 자세로 입을 연다.

“부르셨습니까, 영주님.”

“그래요, 긴말하지 않고 바로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티아스가 움직였습니다.”

“...! 영주님, 방금 그 말씀은...?”

기대감을 숨기지 않고 묻는 에르발트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우리 작전이 성공했습니다. 마티아스가 우리 보급선을 끊기 위해 기동대를 이끌고 전선을 이탈했다고 합니다.”

“계획대로 됐군요!”

“예, 맞습니다. 그러니 바로 다음 계획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준비해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마티아스의 전선 이탈이 확인된 상황에서, 우리가 준비한 다음 계획.

그것은 바로, 성안에 웅크리고만 있던 상태에서 벗어나 적을 요격하러 성 밖으로 출진하는 것이다.

“성은 제가 지키고 있겠습니다. 베링 경께서는 아드리안과 함께 병사들을 이끌고 요격 작전을 직접 지휘해주십시오.”

“하하! 그렇게 말씀해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뒤를 봐줄 터이니 나가서 싸우라는 말에 신난 표정을 숨기지 않는 에르발트.

지난 일주일 내내 밖으로 뛰쳐나가 적들의 머리통을 쪼개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참고 있던 그였다.

적진 한가운데 웅크리고 있을 마티아스의 존재 자체도 큰 부담이었지만, 그보다 방위사령관이라는 직책의 무게감 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이유가 더 컸다.

하지만 영주이기에 앞서 다닐렌츠 최강의 기사인 내가 나서서 그의 짐을 덜어주겠다는 말을 했으니, 표정이 좋아질 수밖에.

한편, 성 밖으로 뛰쳐나가 안할트 놈들의 머리통을 수확(?)할 생각에 미소짓고 있는 에르발트와 달리 아드리안의 얼굴은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녀석이 어떤 이유에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인지, 대강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아드리안.”

“예, 영주님.”

“너무 걱정하지 마라.”

“...!”

“겔베르트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 그러니, 혹시라도 그가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은 버려도 좋아.”

“...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영 편치 않은 표정의 아드리안.

겔베르트가 얼마나 강한 사나이인지 나만큼이나 잘 알고 있는 녀석이었지만, 마티아스라는 지난 십수 년간 이 지역에서 ‘최강’이라는 표현의 대명사로 쓰였던 단어.

당장 아드리안 자신과 비교해도 한 수 위의 실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는 엔리케를 어린아이 농락하듯 몰아붙였던 인물이 마티아스였으니, 걱정스러울 만도 하겠지.

나는 그런 아드리안의 불안함을 해소해줄 요량으로, 일부러 엄한 목소리로 다그치듯 말했다.

“장담컨대 겔베르트는 승리하여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요격 작전에 집중하도록.”

“... 알겠습니다, 영주님.”

***

콰아아앙!!!

검과 검이 격돌하여 내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크기의 파열음이 터져 나온다.

후득! 후드득!

뒤이어, 사방으로 튀어나간 흙더미와 작은 돌멩이들이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이런 미친...”

적의 보급 마차를 습격하기 위해 달려온 안할트 군의 기병들.

“말이... 말이 되나 저게?”

그리고, 아군의 보급선을 끊으려 몰려올 적을 기다리며 숨어있었던 다닐렌츠의 병사들까지.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흉험한 창검을 휘두르고 있어야 할 그 모든 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무기를 내리고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아아앙! 캉!!! 콰아앙!

고막을 찢는 파열음과 가슴을 진탕 시키는 듯한 폭음이 연이어 들려온다.

저것이 정년 그들과 같은 인간들의 싸움이 맞는가?

그들의 몸이 부딪칠 때마다 숲속을 메운 두꺼운 소나무가 뚝뚝 부러져 나가고, 휘두르는 검에 맞은 큼지막한 바윗돌들이 무딘 버터처럼 쩍쩍 갈라진다.

‘안할트의 늑대’라 불리는 왕국 북서부 최강의 기사, 마티아스 괴츠.

그리고 다닐렌츠의 기사, 겔베르트 로이터.

콰아아앙! 쾅! 휘이잉- 카캉!!!

두 사람의 검이 맞닿으며 만들어낸 새빨간 불꽃이 사방으로 튀어 올라 깊은 숲속의 어둠 속을 밝혔다.

오래전 같은 깃발 아래서 싸우며 기사의 꿈을 키웠던 두 청년.

이제 그 두 사람은 마흔을 넘긴 중년의 나이가 되어 서로의 생을 건 마지막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흐으으읍!!!”

날카로운 몇 차례의 찌르기 공격으로 상대와의 거리를 벌린 마티아스가 이를 악물고 검을 든 오른손을 휘두른다.

휘아아아앙-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검을 중간에 회수하는 건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듯, 어마어마한 힘을 담아 휘두른 검.

평범한 이라면 어찌어찌 막아낸다 하더라도 무기와 함께 몸이 두 동강 나버릴 만큼 막대한 힘이 실린 공격이었다.

하지만,

카라라라랑! 촤앙!!!

그런 마티아스의 검을 절묘한 방어로 튕겨내는 겔베르트.

상대의 공격에 실린 막대한 힘을 검을 기울여 자신의 뒤쪽으로 흘려내는 그 모습이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제법이구나, 아르민!”

늑대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위협적인 목소리로 마티아스가 상대의 이름을 부르자,

“그 이름 이제 안 쓴다니까, 20년 전 나한테 칼 맞을 때 머리도 많이 다친 거냐?”

겔베르트가 특유의 능글거리는 말투로 가볍게 받아친다.

“이런 건방진 새끼가!!!”

그 목소리에 담겨 있는 여유로움에 울컥한 마티아스가 애써 누르고 있던 감정을 폭발시킨다.

휘우웅!!! 카앙! 카카캉!!!

들끓는 마음만큼이나 거칠어진 그의 검이 겔베르트의 전신을 사정없이 난타한다.

머리에서 목으로, 목에서 옆구리, 다시 옆구리에서 머리.

위, 아래, 왼쪽, 오른쪽, 앞과 뒤를 가리지 않고 폭풍처럼 몰아치는 마티아스의 검격.

힘과 체력, 그리고 기술까지.

검사(劍士)에게 필요한 모든 조건이 극에 달한 이만이 선보일 수 있는 경이적인 공격이 그의 검 끝에서 쉴 새 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미쳤다, 진짜!”

“와아... 검을 저렇게 쓸 수가 있나?”

“한 수, 한 수가 치명타야, 이건 막을 수가 없어!”

“역시 안할트의 늑대!!!”

보통 사람이라면 단 몇 수만에 몸이 갈려져 나갈 듯한 무자비한 마티아스의 공격에 그가 데려온 안할트의 기병들이 열광하며 소리쳤다.

반면, 자신들의 상관이 변변찮은 반격 한번 펼치지 못하고 있자 다닐렌츠의 병사들의 눈빛엔 불안함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만약 여기서 겔베르트가 쓰러진다면, 자신들의 목숨 또한 장담할 수가 없게 된다.

그렇기에 다닐렌츠의 병사들은 진심을 담아 자신들의 상관인 겔베르트를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로이터 경, 제발!!!”

“힘을 내십시오! 할 수 있습니다!!!”

“알았어, 새끼들아! 흐아아아아!!!”

카아아앙!!!

***

실로 먼 거리였지만, 하늘을 나는 매보다도 더 좋은 시력을 지닌 나의 눈에는 코앞의 풍경처럼 똑똑히 보였다.

빛살처럼 휘둘러진 아드리안의 검이 상대의 검을 옆으로 쳐낸 뒤 그 반동을 이용해 그대로 사선으로 그어지며 안할트 기사의 가슴을 갈랐다.

“커흐윽!!!”

푸화아아아악!!!

시뻘건 피가 사방으로 뿜어진다.

하지만 그 피를 뒤집어써야 할 아드리안은 이미 그 자리에 없다.

타고 있는 군마와 혼연일체가 된 듯 군더더기 하나 없이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적진을 돌파하는 아드리안.

저렇게 빠른 속도로 말을 달리며 검을 휘두르는 것은 대단한 연습과 수련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타고난 재능에다 훌륭한 스승에게 좋은 가르침을 받고 노력까지 멈추지 않았던 지금의 아드리안에겐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아!”

콰직! 푸화아아악!!!

그런 아드리안의 반대편, 역시나 압도적인 실력을 앞세워 안할트 군을 장작 패듯 쪼개며 전진하는 기사 에르발트 베링.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기어들어 오느냐!!!”

그가 자신에게 호통치며 앞을 막아선 안할트 기사를 향해 말없이 검을 휘두른다.

카아앙!!!

“컥!!!”

검에 실린 힘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안할트의 기사가 맥없이 손에 쥔 검을 놓치며 짧은 비명을 질렀다.

훤히 열린 상대의 가슴.

그리고, 에르발트는 그 기회를 놓칠 만큼 허술한 기사가 아니었다.

쉬이익- 푸욱!!! 촤아악-!

“크허억!!”

에르발트의 검에 심장 어림을 깊숙이 찔린 안할트의 기사가 몸을 뒤집으며 말 아래로 떨어진다.

기세 좋게 등장했던 것에 비해 허무할 정도로 빠른 죽음이었다.

히이이이이이잉!!!

힘있게 말고삐를 잡아챈 에르발트의 눈에 정신없이 뒷걸음질을 치는 안할트 군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눈동자에 떠오른 감정은 명백한 두려움과 공포.

더 볼 것도 없다.

이 싸움은 우리의, 다닐렌츠의 승리였다.

“모두 죽여라! 감히 다닐렌츠의 것을 탐낸 이들에게 어떤 최후가 기다리는지를 똑똑히 알려주어라!!!”

“와아아아아아!!!”

에르발트의 목소리를 들은 다닐렌츠의 병사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돌진한다.

안할트 군은 분명 강군이었지만, 최고 지휘관인 마티아스가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그 역할을 대신해줘야 할 기사들이 족족 목이 떨어져 나가니 제대로 된 전투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에르발트와 아드리안의 검은 주둔지에 남아있던 기사들의 실력으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일반 병사들의 입장에선 재앙과도 같았다.

순식간에 바닥에 쌓이는 안할트 병사들의 시신들.

간혹 거칠게 저항하는 이들이 보였지만, 그때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말을 달려온 에르발트와 아드리안의 검이 그들의 몸을 베고 머리통을 쪼갰다.

“... 끝났군.”

멀리 엘스터의 성벽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늘 이 싸움으로 왕국 북서부 전역에 다닐렌츠의 용맹한 기사, 에르발트 베링과 아드리안 쉬라흐의 이름이 널리 퍼져나가게 되리라.

“... 그나저나, 슬슬 연락 올 때가 됐는데? 아직 안 끝났나?”

그리고 아마도 가장 큰 명성을 얻게 될 사나이, 겔베르트 로이터.

그가 있을 도시 서편의 짙은 소나무 숲을 향해,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무성한 그 수풀 속에서, 나를 대신해 사나운 늑대를 사냥하고 있을 한 사내의 얼굴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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