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25화 (125/197)

< 대전사(代戰士) (3) >

에르발트 베링과 아드리안 쉬라흐, 다닐렌츠가 자랑하는 두 기사의 돌진에 오랜 공성전으로 지쳐있던 안할트 군이 맥없이 쓸려나가고 있던 그 순간.

엘스터 서쪽에 자리한 소나무 숲 깊은 곳에선 여전히 두 사내의 오랜 악연(惡緣)을 끝낼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카캉! 카아아앙!

검과 검이 부딪혀 만들어낸 뜨거운 불꽃이 쉼 없이 튀어 오르고,

빠각! 으지직!!!

평범한 이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주먹과 발차기가 오가며 주변의 숲을 초토화한다.

왕국 북서부 최강의 기사, 마티아스 괴츠.

그리고 영주의 명령을 받아 그를 잡으러 온 다닐렌츠의 기사 겔베르트 로이터.

격돌 초반엔 제법 대등해 보였던 두 사람의 대결은 갈수록 한쪽으로 승부의 추가 기우는 일방적인 그림이 되어가고 있었다.

“뒈져라 이 새끼야!!!”

냉정하다 못해 냉혹(冷酷)하다는 소리까지 듣던 평소와 달리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감정의 동요를 숨기지 않고 있는 마티아스는 쉴 새 없이 때리고,

“하아, 말 더럽게 많네 진짜! 흐읍!”

그러한 감정의 균열을 만들어 낸 원인 제공자, 겔베르트는 계속해서 막는다.

카아앙! 까드득- 스릉, 촤아아앙!

보는 이들조차 숨 한번 편히 쉬기 어려운 초인적인 공방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가운데,

“흐아아아아아아!!!”

부러진 나무의 몸통을 밟고 위로 힘껏 뛰어올랐던 마티아스의 전력을 실은 강격(强擊)이, 겔베르트의 머리 위로 벼락처럼 떨어졌다.

콰아아앙!!!

검과 검의 충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폭음이 터지고, 두 사람 주변에서 어마어마한 흙먼지가 솟구쳐 시야를 가렸다.

“큭! 커흡!”

뿌연 흙먼지 속, 마티아스의 검이 준 충격에 뒤로 다섯 걸음이나 밀려난 겔베르트의 잇새로 괴로운 신음이 터져 나온다.

울컥,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차오르는 핏물.

머리통이 단박에 쪼개지는 것은 피했으나, 마주 댄 검을 통해 쏟아진 강렬한 충격이 겔베르트의 속을 진탕시켰다.

“크흐음, 퉷!”

들어 올렸던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의 중심을 유지한 겔베르트가 속을 거북하게 만드는 피를 뱉어낸다.

두 사람의 격돌로 엉망이 된 흙바닥이 겔베르트가 토해낸 검붉은 피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크으으...”

“후후, 이제 제법 보기 좋은 얼굴이 됐구나, 아르민. 아니... 다닐렌츠의 기사 겔베르트라고 했나? 크크큭!”

겔베르트가 바닥에 뱉어낸 핏물을 지켜본 마티아스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다.

오랜 악연에게 피를 토할 정도의 일격을 가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쁜 그였다.

그의 두 눈 속에 넘실대는 깊은 광기와 이글거리는 분노의 감정을 마주하며, 겔베르트가 힘겹게 입을 연다.

“하, 시발... 이제야 제대로 이름을 불러주네? 좋냐? 어? 크흑, 퉷!”

목구멍을 타고 끓어오르는 핏물을 한 번 더 뱉어낸 겔베르트.

직전의 충격이 아직 남아 있는지 살짝 시야가 어지러웠지만, 여전히 능글거리는 말투였다.

얻어맞고도 떠들 여력이 남았다는 듯 이죽거리는 그 말투가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마티아스는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그 뒤틀린 속만큼이나 일그러진 얼굴을 한 그가 으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검을 세게 쥐었다.

“... 어디, 그 목이 떨어져 나가고도 계속 지껄일 수 있나 두고 보자! 흐아아아아!!!”

“소리 지르지 마라, 귀 아프다.”

말투는 여유로웠지만 다급하기 그지없는 몸짓으로 겔베르트는 날아드는 마티아스의 공격을 향해 자신의 검을 치켜들었다.

콰아아아앙-!!!

***

누가 봐도 일방적인 싸움의 흐름.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는 양측 병사들의 표정은 시간이 갈수록 큰 차이를 보였다.

의기양양하여 응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안할트의 기병들.

겔베르트가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며 안 그래도 안 좋던 안색이 거멓게 죽어가는 다닐렌츠의 보병들.

그들 모두가 마티아스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장소에 있는 모든 이들 중 유일하게 겔베르트의 승리를 예상하는 이가 있었으니...

‘이 새끼, 완전히 리듬이 깨졌다!’

바로, 대결의 당사자인 겔베르트 그 자신이었다.

싸움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마티아스는 계속해서 강공(强攻) 일변도의 검을 뿌려대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널리 알려진 그의 검은 원래 이렇지 않았다.

‘아주 개판이네. 이 새끼, 지금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고 닥치는 대로 검을 휘두르고 있어.’

마티아스 괴츠는 대체 왜 ‘안할트의 늑대’라 불리게 되었는가?

그것은, 사냥하는 늑대처럼 상대방을 집요하게 몰아붙이다 결정적인 한 방을 찔러넣어 승부를 내는 그의 냉정한 싸움 방식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마티아스는 그런 자신의 검술을 완전히 잊어버린 듯한 모습으로 겔베르트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공격, 공격, 그리고 또 공격!

평상시의 그가 ‘냉정한 사냥꾼’에 가까웠다면, 지금의 모습은 눈이 허옇게 돌아버린 ‘광전사’에 가까운 모습이랄까?

그리고 겔베르트는 그가 어째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제 얼굴에 저토록 무지막지한 칼자국을 남긴 원수가 20년 만에 떡하니 나타났으니... 제 놈이 교황 성하가 아닌 이상 침착할 수가 없지.’

아니, 이건 교황이라도 눈이 돌아갈 만한 일이다.

심지어 마티아스와 싸운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 겔베르트와 달리, 상대는 갑자기 전쟁터에서 튀어나온 불구대천의 원수와 20년 만에 칼을 맞대게 된 상황이었다.

심지어 평소에 이름을 듣고 지냈던 적국의 이름난 기사가, 사실은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맨 그 원수였다?

이런 상황에서 심리적 동요가 없다면, 그건 인간도 아닐 것이다.

‘그래서, 검을 쓰는 동작 자체에 힘이 과하게 들어가고 체력의 배분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겔베르트를 칼로 쳐 죽이기 위해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검을 휘두르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나저나 검 위력 한번 살벌하네. 제대로 막았는대로 이렇게 충격이 전달될 정도이니... 크흑!’

아무리 감정이 잡아먹혀 닥치는 대로 검을 휘두른다 할지라도 마티아스는 기본적으로 상급 기사의 경지에 근접한 초인적 기량의 검사.

평소의 세밀함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몇 배나 되는 힘을 담아 밀어붙이는 그 검의 기세는 과연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 그래 봤자 영주님의 공격에 비하면 버틸만해.’

한때 겔베르트가 창설한 용병대에 소속된 부하였던, 하지만 지금은 관계가 역전되어 겔베르트가 충성을 바치는 대상이 된 사나이.

다닐렌츠 영주, 남작 데미언 카릴베르크.

간간이 그와 대련을 할 때마다 겔베르트는 그 인간 같지도 않은 기량에 경악해야 했다.

힘과 속도, 기술 모두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큰 격차를 지닌 데미언이었기에 그는 겔베르트와 대련을 할 땐 손속에 사정을 두었다.

하지만 가끔 힘 조절이 제대로 안 될(아니, 일부러 그런 것일지도?)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겔베르트는 전신을 부스러뜨리는 듯한 충격 속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몇 날 며칠을 앓아야 했다.

평소에 상대하는 이가 그런 수준이니, 마티아스가 보여주는 지금의 공격 따위는 웃으며 버텨 낼 수가 있는 거다.

“흐아아아아!”

자신의 공격을 얄밉도록 잘 받아내는 겔베르트의 모습에 격분한 마티아스가 함성을 지르며 검을 뻗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과도하게 힘이 들어간 공격이다.

어깨가 필요 이상으로 옆으로 빠지고, 바닥을 디딘 두 발의 위치도 불안정하다.

그리고 그 순간,

‘... 걸렸다!’

카앙- 쉬이익!!!

눈을 빛낸 겔베르트의 검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마티아스의 검을 쳐낸 뒤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공간을 가르며 전진했다.

반격의 시작이었다.

***

“흡!”

번개같이 찔러온 상대의 검이 자신의 목을 노리자, 마티아스가 기겁하며 몸을 뒤틀었다.

직전과 완전히 반대로 움직이는 무리한 동작이었건만, 오랜 세월 쌓아온 경험과 육신의 반응이 어우러져 불가능할 것 같았던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촤아악!!!

상상 이상으로 빨랐던 겔베르트의 검이 마티아스의 가슴을 베고 지나간다.

생명에 지장이 가지 않을 만큼 얕게 베였지만, 피를 보기에 충분했던 일격.

주변에 흩뿌려지는 옅은 피 안개가 마티아스에겐 당혹을, 겔베르트에겐 자신감을 선사했다.

“이, 이런!”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온 마음의 소리.

피했어야 했다.

피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기대를 배신했다.

‘몸의 반응이... 느려졌다?’

그제야 마티아스는 자신이 저지른 거대한 실책을 깨닫는다.

오래전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몸과 마음의 상처를 안겼던 상대, 아르민.

20년의 세월을 거슬러 겔베르트라는 이름을 지닌 적국의 기사로 나타난 그의 모습에 침착함을 잃고 마구잡이로 검을 뿌렸다.

그게 문제였다.

앞뒤 안 가리고 쏟아부은 공격 탓에 힘은 힘대로 빠지고, 체력 역시 급격히 떨어졌다.

자신도 모르게 적이 파놓은 함정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고 있었던 마티아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으나, 이미 전세는 역전되어 있었다.

슈악! 쉬이잉! 슈카칵!!!

지금 같은 순간을 기다리며 인내했던 겔베르트의 매서운 공격이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오랜 악연과의 조우에 평정심을 잃고 함부로 쏟아부었던 마티아스의 공격과 달리 그의 검은 소름 끼치도록 냉정했다.

흥분한 상태에서 계속된 공세를 펼치다 힘이 빠지고 반응이 느려진 마티아스를 서서히 죽음의 늪으로 몰아가는 겔베르트.

치열했던 결투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그의 검은 아이러니하게도 늑대라 불리던 사나이의 것과 비슷해 보였다.

“흐아아앗!!!”

불리해진 상황을 뒤집어 보려는 듯, 들끓는 분노를 토해내며 좌에서 우로 크게 검을 휘두르는 마티아스.

그러나,

휘우웅- 콰직!!!

“커억!”

동작이 커진 만큼 많아졌던 빈틈.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겔베르트의 검이 뱀처럼 공간을 타고 들어와 마티아스의 두꺼운 허벅지에 악랄한 독니를 박아넣는다.

촤아악! 카캉!

마티아스의 허벅지에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깊이로 찔러 들어갔던 검을 재빨리 뽑아낸 겔베르트가 적절한 대처로 상대의 반격을 무력화시킨다.

허벅지를 찔렸으니, 안 그래도 무거웠던 상대의 발걸음이 더욱 느려질 것이다.

“아르민! 아르미이이이인!!! 이 더러운 안할트의 배신자 새끼야!!!”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에 분노한 마티아스가 악을 쓰며 소리친다.

“...”

하지만 그토록 시끄럽게 굴던 상대의 혓바닥은 어찌 된 영문인지 침묵할 뿐이다.

그 모습에 간신히 다잡았던 평정심이 또다시 자리를 이탈하고, 차분해지는 듯싶던 검의 움직임이 도로 어지러워진다.

“감히, 이 나를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으냐!!!”

진득한 분노가 담긴 포효.

하지만, 마티아스가 무슨 소리를 하건 겔베르트는 얼음과도 같은 침착함을 유지하며 날뛰는 늑대의 몸 이곳저곳에 검의 흔적을 남기는 일에 집중할 뿐이다.

휘익- 푸욱! 슈우웅- 촤아악!!!

마티아스의 곳곳에 늘어가는 혈흔(血痕)들.

그의 몸 위에 붉은 꽃이 피어날 때마다 승부의 추는 점점 더 한쪽으로 무게를 더한다.

그리고 마침내.

쿠웅, 탱그렁-!

“커흐윽-!!!”

가슴 한복판에 찔러넣은 겔베르트의 검이, 마티아스의 몸을 관통하여 등 뒤로 튀어나왔다.

스륵- 촤아아아악!!!

무표정한 얼굴로 마티아스의 몸을 꿰고 있던 검을 단번에 뽑아내는 겔베르트.

그 즉시 마티아스의 가슴과 등을 잇는 상처에서 시뻘건 피가 미친 듯이 쏟아져 나왔고, 엉망이 된 흙바닥을 붉게 적셨다.

“크흡, 컥... 커헉!!!”

무릎을 꿇은 채로 깜빡거리는 시야를 돌려 겔베르트를 바라보는 마티아스.

뭐라 저주의 말을 퍼붓고 싶었으나 무참히 찢겨버린 폐는 더는 그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

“꺼히이... 꺼흑...!”

마티아스 괴츠.

백작령 안할트를 포함한 왕국 북서부 최강의 검으로 불리던 기사.

동시에 안할트 백작의 명령을 받아 무수히 많은 영지민을 학살하고, 수탈했던 악인(惡人).

그런 그가 스러진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처참한 모습으로.

“끄흐으...”

철퍽-!!!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웅덩이에 얼굴을 처박는 마티아스.

오랜 세월 왕국 북서부를 지배하던 전설의 초라한 종막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