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젠탈 (2) >
“왕국의 위엄을 상징하는 가장 날카로운 검의 고향, 바이펠베르크의 기사 외르크 라인홀트가 다닐렌츠의 온당하신 주인 데미언 카릴베르크 남작님께 인사드립니다.”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내게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는 중년의 사내.
외르크 라인홀트.
그는 백작령 바이펠베르크라는 빛나는 배경에 더해 스스로의 힘으로 상급 기사라는 경이(驚異)를 이뤄낸 걸물이었다.
그토록 빛나는 위업을 달성하고, 그 정도의 위치에 있는 자라면 왕국 변방에 자리한 남작 따위에겐 살짝 고개를 숙이는 정도로 충분할 터.
하지만 그는 지금 자신의 자세를 한껏 낮추고, 바닥에 닿을 듯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다닐렌츠의 영주인 나에 대한 공경을 한껏 표시하고 있었다.
물론, 눈에 보이는 저 모습이 진심이 아닐 수도 있다.
아이젠탈에서 생산되는 전략물자, 철을 얻어내기 위한 외교적 수사의 일환으로 머리를 숙였을 가능성이 크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의 존중을 보여주는 건 내 입장에선 감사한 일이지.’
외르크는 개인의 자격으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백작령 바이펠베르크를 대표해 다닐렌츠를 방문한 것이었고, 그가 저 정도의 존중을 표한다는 것은 바이펠베르크의 주인인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 백작의 의중이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 했다.
‘바이펠베르크가 이렇게 우리 영지의 권위를 세워주는군.’
그러니, 이제는 다닐렌츠 영주의 자리에서 답을 해줄 차례다.
“라인홀트 경,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예, 염려해주신 덕분에 이리 다시 귀한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하, 귀한 시간이라... 저에게도 그렇습니다. 자, 이럴 게 아니라 편한 자리로 가시죠.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예, 영주님.”
***
자리를 옮긴 우리는 넓은 창을 통해 언덕 아래의 키르헨 시내가 보이는 응접실로 향했다.
“이리로 앉으시지요, 라인홀트 경. 차린 게 별로 없어서 민망합니다.”
“아닙니다. 저처럼 별 볼 일 없는 인사를 위해 이런 성찬을 차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경쟁적으로 겸양의 말을 늘어놓으며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눈앞에 보이는 탁자 위, 외르크를 대접하기 위해 준비한 갖가지 음식들이 빈 곳 없이 꽉꽉 들어차 있는 게 보였다.
“먼 길 오느라 시장하셨을 텐데, 식사부터 하시죠. 복잡한 일 얘기는 그 이후에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 알겠습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의 외르크였지만, 집주인인 내가 ‘밥 먹고 하자’며 못을 박아버린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평화로운 식사 자리를 가진 우리 두 사람.
마침내 테이블 가득 차려졌던 음식들이 치워지고, 그릇에 소담스럽게 담긴 과일과 예쁜 찻잔이 그 빈자리를 채울 즈음이 됐을 무렵.
“크흠, 영주님. 제가 이곳 다닐렌츠까지 발걸음을 한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마음이 급했던 외르크의 입에서 본격적인 협상의 시작을 알리는 말이 흘러나왔다.
바이펠베르크가 원하는 것이야 뻔했다.
왕국의 남부, 브리카니아 왕국과의 전쟁에 대비해 늘 군사력 유지에 신경을 쓰는 바이펠베르크였다.
그런 그들에게 철은 항상 부족하고, 필요하고, 소중한 자원.
그러니 이렇게 상급 기사씩이나 되는 사람을 사신단의 책임자로 지정해 먼 길을 올려보냈겠지.
하지만...
‘호락호락 원하는 걸 내어줄 수는 없지.’
나 역시 저들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을 얻어낼 때까지는 내 입에서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을 거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이 협상 자리를 유리하게 이끌 히든카드를 하나 준비했다.
“아, 라인홀트 경. 잠시만... ”
“예?”
“제가 따로 초청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누가...”
내 말을 듣고 황당한 표정을 짓는 외르크였다.
감히 백작령 바이펠베르크의 사신이 앉아 있는 협상 테이블에 어느 누가 겸상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건 좀 선을 넘었다는 생각에 외르크가 뭐라 말을 얹으려던 그때...
“영주님, 부르셨습니까.”
“음, 왔나? 이쪽에 앉도록.”
“예, 알겠습니...”
응접실에 들어와 인사를 하려다 내 맞은 편에 앉은 외르크의 얼굴을 확인하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한 사람.
“...?!”
외르크 역시 응접실에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휴, 저 표정 봐라.
딱 보아하니 ‘네가 여기서 왜 나와?’라는 느낌이네.
그 두 사람의 모습에 당장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꾹 참고 태연한 얼굴로 나는 입을 열었다.
“자, 이쪽은 바이펠베르크에서 오신... 아니지, 따로 소개를 드릴 필요는 없겠지요? 서로 잘 아시는 사이일 테니.”
“아니, 그게...”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의 외르크가 손을 들어 입술을 쓸어내린다.
예고도 없이 응접실에 등장한 인물.
바로 다닐렌츠의 영매(令妹)인 니나 카릴베르크의 호위 임무를 수행 중인 기사 아린.
아니, 바이펠베르크 백작의 막내딸 아이린 그뢰네마이어였다.
“음? 자리에 앉지 않고 뭐하나? 이쪽으로... 아니지, 귀한 분께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지. 크흠, 아이린 아가씨? 저쪽, 라인홀트 경 옆자리에 앉으시면 되겠습니다.”
자신에게 공손하게 대하는 내 모습을 본 아이린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여, 영주님? 제가 누군지... 알고 계셨던 겁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아이린에게 나는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답했다.
“물론입니다, 아가씨.”
“아니, 어떻게... 어, 언제부터 아셨습니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았습니다. 4년 전, 바이펠 평야에서 우리 일행을 추격해온 용병 놈들과 드잡이질을 할 때부터 저는 아가씨의 신분을 알고 있었답니다. 하하하!”
“하아...”
내 대답을 듣고 다리가 풀린 듯 그 자리에 주저앉는 아이린.
그녀의 넋 나간 얼굴을 보며, 나는 며칠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며칠 전, 그러니까 나와 파스칼이 아이젠탈의 첫 달 생산량이 적힌 보고서를 확인한 직후.
나는 내 집무실을 빠져나와 어디론가 향했다.
똑똑-
문을 두드리고, 곧 안쪽에서 기다리던 대답이 돌아온다.
[누구세요?]
언제나 맑고 예쁜 목소리.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었지만, 이제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더욱 각별한 사이가 된 나의 여동생.
니나였다.
“음, 나다. 들어가도 되겠니?”
[아, 오라버니! 잠시만...!]
우당탕!
대체 안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뭔가 엎어지고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니나, 무슨 일...!”
혹시 다쳤을까 싶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내 앞에 보인 광경은...
“와우...”
직접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어림잡아도 백여 권은 될 듯한 두꺼운 책들과 그보다 훨씬 많은 서류가 빼곡히 쌓여 있는 방안의 풍경.
다닐렌츠의 수많은 사내를 상사병에 시달리게 만드는 미소녀의 방치고는 너무나 삭막한 그림이었다.
이건 뭐, 그냥 고시원 같은데?
“아... 방 정리를 못했는데...”
책상에서 급하게 일어서다 바닥으로 쏟아진 책들을 주워들며 민망한 표정을 짓는 니나.
책 제목이 보자, <세법 개론>, <회계학>, <토지세와 건물세>...
... 그냥 세무사나 회계사 시험 준비하는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어려운 책들이구나. 어휴, 공부하는 건 어렵지 않고?”
“음, 그렇긴 한데... 재무관님이 잘 설명해주셔서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그래, 그쪽 분야에 있어 파스칼만한 선생님이 또 없지.”
현재 니나는 영지의 재무관인 파스칼을 따라다니 영지의 재무와 관련된 지식을 공부하고 있었다.
<로스트 킹덤> 원작 소설에서도 영주의 자리에 오른 뒤 탁월한 재무 감각을 발휘하며 영지 다닐렌츠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던 니나.
이번 생에선 그녀를 대신해 영주의 자리를 이어받은 나의 존재로 인해 훨씬 마음을 부담을 덜어낸 채로 재무 관련 공부에만 매진하고 있었다.
천재 중의 천재로 소문난 파스칼조차 니나의 재능에 깜짝깜짝 놀랄 정도라고 하는 걸 보면... 과연 주인공은 주인공인 모양이다.
“공부한다고 너무 무리하지 말고. 아직은 어린 나이니까, 잠도 푹 자고 먹는 것도 잘 챙겨 가면서 공부하렴.”
“네, 알겠어요. 오라버니. 근데 어쩐 일로 오셨어요? 뭔가 따로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세요?”
“시킬 일이 있는 건 아니고...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네, 뭐든 물어보세요.”
“음, 그게... 그러니까...”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니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아린 말이다.”
“...!”
내 입에서 아린의 이름이 언급되자 그 즉시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하는 니나의 눈동자.
어이구 니나 이 녀석, 넌 거짓말하면 절대 안 되겠다.
“니나, 너는 알고 있지?”
“네? 무, 무슨... 무슨 말씀이세요?”
“아린의 진짜 신분 말이야.”
“...!”
말을 돌리지 않고 곧바로 본론을 꺼내버리는 나의 모습에, 안 그래도 큰 니나의 눈이 더 커져 쏟아질 지경이 되었다.
“바이펠베르크 백작의 막내딸, 아이린 그뢰네마이어... 니나, 너는 알고 있었지?”
“오, 오라버니! 제가 숨기려던 게 아니라... 어, 언니는 정말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말할 기회를 놓쳐서, 그래서 그동안 말을 못 한 거예요!”
이제 당황을 넘어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이 된 니나가 절친한 언니를 위해 변명을 늘어놓는다.
니나가 뭘 걱정하고 있는지 예상이 갔다.
영주 가족의 호위를 맡은 이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었다?
원칙적으로 생각한다면, 당연히 엄벌에 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 하지만, 이 경우엔 그럴 필요까진 없지.’
왜냐고?
나는 이미 4년 처음 아이린을 만났을 때부터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무려 왕실 근위대장에 백작령의 주인씩이나 되는 거물의 딸이라는 점도 그녀를 처벌할 수 없는 이유가 되겠지.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니나를 찾아와 아린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는지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것은, 혹시라도 니나가 아린의 정체를 몰랐을 경우 입게 될 마음의 상처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네?
그럼 뭐, 문제 될 게 없다.
“진정하렴, 내가 아린을... 아니, 아이린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니까.”
“그, 그럼요?”
어찌나 놀랐는지 그 큰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묻는 니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내가 대답했다.
“그냥, 좀 도움을 받으려는 것뿐이야.”
***
아이젠탈에서 생산되는 철을 노리고 우리 영지로 찾아온 백작령 바이펠베르크의 사신 외르크 라인홀트.
하지만 그가 준비해온 갖가지 외교적 책략들은 주군의 막내딸, 아이린의 등장과 함께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 아이린 아가씨가 신분을 숨기고 다닐렌츠에 머물고 계셨던 것엔 그 어떠한 정치적 의도도 담겨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백작령 바이펠베르크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일입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아가씨의 개인적인 선택이었으며...”
“아아, 물론입니다. 설마하니 백작께서 본인의 금지옥엽을 이 먼 변방 땅에 ‘첩자’ 노릇이나 하라고 등 떠밀어 보내실 리가 있겠습니까?”
“...”
능글능글한 말투로 말하는 내 얼굴을 보며 낭패감 어린 표정을 짓는 외르크.
그의 말처럼 아이린이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우리 영지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다른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았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영 의심스러운 그림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원래 외교란 것은 명분이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상황이 이리되니, 바이펠베르크 측은 굉장한 외교적 무례를 저지른 입장이 되어버렸다.
“아이린 아가씨가 그동안 제 동생의 호위 기사로서 얼마나 임무에 충실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
“그러나, 아가씨께서 자신의 신분을 지금껏 속였다는 것은 외교적으로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아가씨는 니나와 함께 여러 번 저희 영지의 수뇌부 회의에 참석하신 적이 있으셨죠?”
“하, 하지만! 영주님께선 제 신분을 이미 알고 계셨다고...”
“예, 그랬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사자가 밝히지 않은 사실을 제가 먼저 나서서 추궁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아가씨는 왕국을 대표하는 대귀족 중의 한 분이신 바이펠베르크 백작님의 따님이시니까요.”
“그, 그런...!”
“제 입장에선 조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감히 ‘왕국제일검’의 심기를 거스를 용기가 없었거든요. 때문에 저는 아가씨의 정체를 알면서도, 무려 4년이나 그 부분을 먼저 나서서 묻지 못했습니다.”
“...”
마치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린.
어지간한 기사들 따윈 칼질 몇 번으로 제압할 수 있는 검술의 천재이자, ‘왕국제일검’이라는 어마어마한 칭호를 지닌 아비를 둔 아가씨답지 않게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러니 묻겠습니다. 대체 왜, 4년씩이나 본인의 신분을 숨기고 계셨던 겁니까?”
“... 그, 그게...”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한참 동안 대답을 망설이던 아이린.
“아가씨...”
그녀의 입이 좀처럼 열리지 않자 애가 탄 외르크가 그녀를 재촉했고, 결국 그녀의 입이 열렸다.
“제가... 여, 영주님을 조... 좋아합니다!”
“?!”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