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29화 (129/197)

< 예상 밖의 전개 (1) >

아이린 그뢰네마이어.

그녀의 아버지는 ‘왕국제일검’이라는 휘황한 칭호를 지닌 사내.

왕실 근위대장, 바이펠베르크 백작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였다.

이 범상치 않은 배경에 더해, 아이린은 가지고 태어난 재능마저도 뛰어났다.

그 재능이 어떤 것이냐면...

다름 아닌, 검(劍)의 재능이었다.

카캉! 카아앙- 탱그렁!!!

“핫! 내가 이겼다아!!!”

열두 살이 되던 해, 아이린은 디트리히의 자식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검사라 평가받던 가문의 첫째 로이스 그뢰네마이어를 검으로 꺾었다.

참고로 오빠인 로이스와 이 말괄량이 막내 여동생의 나이 차이는 무려 열한 살이었다.

열두 살 꼬마 여자아이가 스물셋의 건장한 남자 어른을 검으로 꺾어 버린 놀라운 사건.

그 기사(奇事)의 희생양이 된 로이스는 얼마나 황당했으랴.

“하, 하하하! 이야 진짜... 아이린, 정말 대단하구나? 오빠가 졌다, 완전히 인정!”

열 살 넘게 나이 차이가 나는 어린 여동생과의 맞대결에 방심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치더라도 검사가 손에서 검을 놓친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완벽한 패배.

하지만, 땅에 떨어진 자신의 검을 주워드는 로이스의 얼굴에 기분 나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뿌듯함과 대견함, 무가(武家)의 자식으로서 남다른 재능을 지닌 동생에 대한 자랑스러움만이 그의 얼굴에 가득했다.

“로이스 오빠 공격할 때 왼쪽이 엄청 비는 거 모르지?”

“빈다고?”

“웅! 나는 그거 보이던데? 그래서 왼쪽으로 돌면서 홱! 그리고 바로 챙강!”

“하, 너는 진짜...”

가문의 장남인 로이스는 아버지인 디트리히의 젊은 시절을 꼭 빼닮았다는 이야기를 듣는 이였다.

밝은 금갈색 머리에 푸른 벽안(碧眼)으로 대표되는 외모도 외모였지만, 범상치 않은 검의 재능마저도 아버지를 똑 닮은 큰아들 로이스.

하지만, 이 어린 여동생은 그런 로이스를 한 명의 검사로서 압도해버린 것이다.

“헤헤, 오빠 그럼 이번에 카를리온 다녀오는 거 나랑 같이 가는 거다아?”

“그래 알았어.”

“와아! 만세에!!!”

“참나, 이럴 때 보면 천상 어린애인데 어떻게 검만 들면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이 같을 수가 있지? 신기하다, 정말 신기해!”

자신과 똑 닮은 푸른 눈동자의 소녀를 바라보며, 로이스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

신성력(神聖歷) 780년,

아이린이 열네 살이 되던 해_

“하아아앗!!!”

쉬이잉-!!! 카캉!!!

한 호흡 만에 대여섯 번의 공격을 쏟아낸다.

놀라운 속도로 펼쳐지는 연격(聯擊), 하지만 그러면서도 공격의 정확도를 놓치지 않는다.

어지간한 상대라면 순식간에 몸 이곳저곳을 파고드는 검을 막아내지 못하고 무너졌을 터.

하지만,

“흐음!”

카카캉! 카앙! 쉬잉- 카앙!!!

아이린의 눈앞에서 그녀의 검을 받아내고 있는 사내는 어지간한 상대가 아니었다.

쉬이이잉-

“아앗?!”

자신 있게 펼쳐낸 연격이 모조리 상대의 방어에 튕겨 나가고, 그것도 모자라 어느새 상대에게 뒤를 내줬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파공성에 온몸의 털이 삐죽 서는 느낌을 받은 아이린이 재빨리 바닥을 굴러 상대와의 거리를 벌려보려 했지만...

퍼어억!

“크흑-!!!”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날아온 발차기에 옆구리를 얹어 맞고 바닥에 엎어지고야 만다.

“이익!”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통증을 이를 악물고 참아낸 아이린이 흙바닥에 처박혔던 몸을 일으키며 재빨리 반격하려 했지만...

쉬잉- 툭,

“제가 이겼습니다.”

“하아아...”

이미 그녀의 목덜미엔 서늘한 한기를 흘리는 상대의 검 끝이 닿아 있었다.

“아흑, 옆구리 아파!”

“... 괜찮으십니까.”

“아까는 그렇게 신나게 걷어차 놓고서 이제야 괜찮냐고 물어보시는 거예요?”

원망 가득한 아이린의 목소리.

하지만 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녀를 일으켜주기 위해 손을 뻗는 상대의 목소리에선 일말의 후회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릇 가르침엔 최선을 다해야 하는 법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걷어찼다는 말씀이시죠?”

“...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푹 쉬시고, 이틀 후에 뵙겠습니다.”

“으으으! 정말 너무해요, 스승님!”

그렇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남기고 냉정하게 돌아서는 사내.

그는 백작령 바이펠베르크가 자랑하는 세 명의 상급 기사 중 1인이자, 영주의 친위대인 ‘백검기사단(白劍騎士團)’의 단장이었으며, 로이스와 아이린을 비롯한 백작의 자녀들에게 검을 가르치는 스승, 헬무트 파펜이었다.

‘... 아가씨의 재능은 진짜다. 왕국 전역을 뒤져도 저 나이에 저 정도 실력을 지녔던 이가 있을까?’

아직은 나이가 어려 힘도, 경험도 부족한 아이린이었다.

심지어 남자와 비교해 신체적 능력에서 부족할 수밖에 없는 여자가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아이린의 실력은 상급 기사인 자신이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대단했다.

지금보다 더 키가 자라고 나이를 먹어 힘이 붙으면 어디까지 강해질지, 스승인 헬무트 자신조차 예상하기가 힘들었다.

“그나저나...”

문득, 쉬는 시간에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아이린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는 헬무트.

‘저는요, 무조건 저보다 강한 남자랑 결혼할 거예요! 아내보다도 검을 못 쓰는 남자? 그런 사람이랑 사느니 평생 혼자 사는 게 나아요!’

자신이 한 얘기가 얼마나 가혹하고 어려운 조건인지, 저 말괄량이 아가씨는 알고 있을까?

“차라리 여성 최초의 백검기사단장이 되겠다고 말하는 게 좀 더 현실적이겠어. 후우...”

존경하는 주군의 딸이 짝없이 평생을 살 것이 걱정되어 한숨을 내쉬는 헬무트였다.

***

세상 모두가 부러워할 대단한 가문의 막내딸로 태어나 평생을 부족함 없이 자라난 아이린.

하지만 그런 그녀도 ‘질풍노도의 시기’라 불리는 사춘기의 습격만큼은 피해낼 도리가 없었다.

다만, 아이린이 사춘기를 보내는 방식은 또래의 평범한 소녀들과 조금... 아니, 무척 달랐다.

“나, 바이펠베르크의 아린이 위험에 빠진 이들을 구하고 정의가 이 세상에 살아있음을 증명할 것이다! 하아앗!!!”

“이 괴물 놈들!!! 그 더러운 주둥이를 두 번 다시 열지 못하게 해주마! 흐아아아!!!”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그 악적들을 무찌르고 잡혀간 마을 사람들을 구해낼 테니! 이랴앗!”

몰래 집을 빠져나간 영주 가문의 막내딸이 영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도적들과 몬스터들을 때려잡는다?

충분히 미담(美談)이라면 미담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이야기였지만, 그녀의 가족들과 주변 사람의 입장에선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을 만한 일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가 남다른 재능을 지닌 대단한 검사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장 전장에 투입한다면 어설픈 기사 대여섯 명의 몫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직 성년도 되지 못한 어린 소녀이자 영주의 하나뿐인 딸이 창검이 번뜩이는 위험한 곳에 함부로 달려가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가씨 제발! 몬스터 토벌처럼 위험한 일은 영지군에게 맡기시고, 백작 가문의 영애로서 체통을 지켜주십시오!”

“아, 알겠어요!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었어요. 다시는 안 나갈게요!”

나이 든 집사장의 간곡한 호소에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이번이 마지막이라 대답하는 것도 그때뿐.

조금이라도 주변의 감시가 느슨해지면 잽싸게 성을 빠져나와 산으로 들로 말을 달리는 말괄량이 막내 아가씨의 기행에 모두가 두 손 두 발을 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막내야, 한 번만 더 그런 짓 하면 아버지가 너 눈썹이랑 머리카락 밀어서 수녀원에 보내버리신다고 하셨어. 제발! 제에-발! 이 오빠를 봐서라도 얌전히 있어라, 응?”

왕실 근위대장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늘 왕도 카를리온에 머무는 아버지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 백작이 오빠인 로이스 자작을 통해 전해온 무시무시한 최후통첩.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는 아이린이었지만 아버지만은 무서웠기에, 그날로 그녀는 어울리지도 않는 조신한 귀족 영애의 삶에 매진하게 되었다.

하지만...

“으으으, 답답해! 답답해 죽겠어! 난 이렇게 못 살아!”

신성력(神聖歷) 782년, 아이린이 열여섯 살이 되던 해의 어느 날.

영지 내 여러 유력 가문의 여식들과 함께 호화로운 마차를 타고 하하호호 웃으며 성지(聖地) 에셀바흐로 순례 여행을 떠나는 길.

훌쩍 자란 키만큼이나 당당하게 자라난(?) 가슴을 힘껏 옥죄는 코르셋과 불편한 드레스 차림에 질려버린 아이린은 결국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혈기를 참지 못하고 도망치고 말았다.

우습게도, 성지 순례 여행에 따라온 호위 기사 중 어느 한 사람도 한밤중에 숙소를 빠져나와 도망치는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녀의 실력이 호위 기사로 따라온 이들의 성취를 압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아, 이제야 살 것 같네!”

거추장스러운 드레스와 구두를 벗어 던지고, 몰래 챙겨온 누비 갑옷에 딱딱한 가죽 부츠를 신고 나서야 느껴지는 편안함.

새삼 그녀는 깨닫는다.

자신은 검 한 자루, 말 한 필에 의지해 너른 들판을 달리며 악당을 물리치고, 괴물들을 때려잡는 멋진 기사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예쁜 꽃과 나비가 수놓아진 옷을 입고, 검 한 자루보다도 훨씬 비싼 찻잔에 따라진 밍밍한 차를 마시며 몇 시간 동안 지루한 얘기나 떠드는 건 정말로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

“오빠가 걱정 많이 할텐데...”

불현듯 오빠인 로이스 자작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 나중에 명성 높은 기사가 되어서 바이펠베르크로 돌아오는 거야. 그러면 아버지도, 오빠도 나를 자랑스러워하겠지?”

검술 실력은 어른들을 압도할 정도였지만, 생각의 깊이는 여전히 열여섯 살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어린 소녀 아이린.

확실한 계획도,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도망 나온 길, 그저 뜨거운 가슴이 이끄는 대로 말을 달리던 그녀 앞에...

“어이, 꼬맹이.”

“...?”

그녀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갈 운명의 사내, 데미언이 나타났다.

***

다시 현재,

다닐렌츠의 주도 키르헨,

영주 저택 응접실_

“제가... 여, 영주님을 조... 좋아합니다!”

“?!”

말해 버렸다.

열여섯 소녀가 스무 살 아가씨가 될 때까지.

지난 4년간 가슴 속에만 꼭꼭 숨겨두었던 그 말을, 아이린은 마침내 입 밖으로 내어놓고야 말았다.

“아, 아가씨...? 지금 뭐라고... 무슨 얘길 하신 겁니까?”

너무 놀라다 못해 턱이 빠질 것 같은 표정이 되어 자신을 바라보는 라인홀트 경의 모습이 보인다.

아버지의 제일가는 충신이자, 어렸을 적부터 자신을 친조카 대하듯 챙겨준 고마운 분.

하지만 그토록 오랜 세월을 알고 지냈음에도 저런 표정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아, 어떡하지?’

신분을 숨긴 채로 몇 년간이나 이곳에 머물러 있던 자신 때문에 바이펠베르크와 다닐렌츠, 두 영지의 외교 관계가 틀어져 버릴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는 마음에 앞뒤 안 가리고 내뱉은 말이었는데, 반응을 보니 어쩐지 큰 실수를 한 것 같다.

“아, 하하! 아하, 하하하...”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영주님이 어딘가 넋이 나간 듯한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게 보였다.

어이가 없겠지, 황당하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중요한 협상 자리에서 내뱉을 말은 아니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아이린이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영주님! 저는...!”

하지만, 그녀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손바닥을 펴 그녀의 말을 막은 다닐렌츠 영주, 데미언 때문이었다.

“그으... 라인홀트 경? 어, 제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못다 한 얘기는 내일 만나서 다시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그렇게 하시지요.”

“감사합니다, 그럼...”

드르륵-

라인홀트 경의 대답을 듣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데미언이 비척거리며 응접실 밖으로 걸어나가는 것이 보였다.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중간중간 휘청거리며 걷는 모습이, 너무도 위태로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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