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상 밖의 전개 (2) >
응접실에서 밖으로 나온 나는 집무실 문고리를 잡고 잠시 서 있다가 다시 몸을 돌려 침실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살짝 지난 때, 아직은 침실에 들어가기엔 너무나 이른 시간이었다.
하지만 방금 들은 아이린의 ‘충격 발언’ 때문에 집무실에 앉아 업무를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누워 있고 싶다.’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내 침실로 가는데, 익숙한 얼굴이 등장해 내게 아는 체를 했다.
“어, 영주님? 아까 재무관에게 바이펠베르크 측과 협상을 하신다고 들었는... 아니, 안색이 왜 그러십니까?!”
반갑게 미소 지으며 내게 다가오던 잘생긴 청년, 다닐렌츠의 기사 아드리안 쉬라흐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나? 내 안색? 왜?”
“지금 뭔가 체한 사람처럼 하얗게 된 것이... 협상 자리에서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그...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영주님?”
“나 몸이 좀 안 좋아서, 침실 가서 쉴 거야. 어지간히 급한 일 아니면 아무도 내 방에 못 들어오게 해.”
“몸이... 안 좋으시다고요?”
내 말을 들은 아드리안의 얼굴이 심각해진다.
내 입에서 몸이 안 좋다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잔병치레는커녕 전장에서 미친 듯이 말을 달리고 수십, 수백의 적병을 홀로 쓰러뜨리고도 피곤한 기색 하나 없던 인간이 갑자기 몸이 안 좋다니?
내가 아드리안이었어도 믿기 힘든 소리였다.
“영주님, 솔직히 말씀해주십시오. 협상장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혹시라도 바이펠베르크 쪽에서 주군에게 큰 무례를 저질렀다면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만있지 않으리라, 그런 비장한 눈빛으로 아드리안이 묻는데...
“... 아이... 내가... 대.”
“예? 영주님, 잘 못 들었습니다?”
끼이익-
나는 그런 아드리안에게 혼잣말이나 다름없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을 늘어놓으며 침실문을 열어젖혔다.
크게 말하기엔 너무 부끄러워서, 기어들어 갈 수밖에 없는 목소리였다.
“... 아이린이... 내가... 좋대.”
“영주님? 방금 뭐라고 하신... 영주님?”
***
아이린이 보낸 지난 4년간의 다닐렌츠 생활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백작의 딸이 신분을 숨김!’
물론, 그녀가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로 음흉하게(?) 가만히 있기만 했던 건 아니다.
아이린은 그 4년이라는 시간 내내 나의 하나뿐인 가족, 니나의 호위 기사로서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거기에 더해, 틈틈이 영지 내에서 창궐한 몬스터의 토벌이나 도적들의 추살 임무 등을 훌륭하게 수행하기도 했지.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신분을 숨겼다’는 명제 앞에 진실성을 의심받게 된다.
모종의 임무를 띠고 침투한 첩자가 해당 영지 사람들의 신뢰를 얻어내기 위해 열심히 활동하는 건 으레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런 아이린의 정체를 알면서도 4년간 한 번도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언젠가, 적당한 기회가 왔을 때 이 사실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거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무려 백작의 딸, 그것도 왕국 내 최강의 기사라 칭송받는 ‘왕국제일검’ 바이펠베르크 백작의 딸이 다른 영지에 신분을 숨기고 들어와 몇 년간 활동했다?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아이린이 우리 다닐렌츠 영지에 어떤 피해를 주었는지, 그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린다.
바이펠베르크의 백작의 면이 크게 깎이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아이린 역시 첩자 노릇을 한 귀족 영애라는 전무후무한 불명예를 얻게 되겠지.
그러니, 아이린의 존재는 우리 다닐렌츠의 입장에선 너무나 위력적인 대(對) 바이펠베르크 용 외교 협상 카드였던 셈이다.
분명 그랬는데...
“... 대체 이게 뭔 전개야. 후우우...”
그야말로 충격과 혼돈, 혼란 그 자체다.
아이린이 나를 좋아한다고? 대체 왜?
아니 뭐, 좋아할 수도 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봐도 지금의 나는, 그러니까 다닐렌츠 영주 데미언 카릴베르크 남작은 바이펠베르크 백작 영애, 아이린 그뢰네마이어가 좋아하는 감정을 품을만한 충분한 외모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으니까.
“... 그래도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원래 이거 아닌데? 완전히 예상 못 한 전개 아냐 이거?”
내가 아이린의 뜬금없는 고백에 큰 충격을 받은 이유.
그것은 바로, 원작의 흐름대로라면 그녀와 이어지게 되는 사람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아, 보자... 이러면 아드리안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랬다.
원작 소설 <로스트 킹덤>에서 아이린과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아드리안.
어린 시절 아이린이 했던 결심, 그러니까 ‘자신보다 강한 남자과 결혼하겠다’던 말과 달리 아드리안은 소설 결말 시점까지도 검사(劍士)로서 그녀의 역량을 넘어서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린은 ‘자신보다 약한 남자’ 아드리안이 보여주는 특유의 헌신적이고 담백한 성품에 반해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솔직히 아이린이 너무 강해서 그런 거지, 아드리안도 어디서 맞고 다닐 정도로 약한 녀석은 아니다.
여하튼, 아이린과 아드리안은 원작의 팬들에게 이른바 ‘아아’ 커플로 불리며 몇 안 되는 소설 속의 로맨스 파트를 담당했었다.
한마디로 표현해, 아이린은 나에게 있어 ‘미래의 제수씨’ 정도 되는 위치였던 것인데...
“... 그런 아이린이, 나를 좋아한다고? 아니, 이게 왜 진짜?”
뭐가 어떻게 되는 거냐 대체.
나는 부드러운 새의 깃털을 가득 채워 폭신한 느낌이 일품인 침실 안 내 침대에 몸을 눕힌 채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이린, 아이린이라...”
맹세컨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던 그림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아이린은 여자라기보다는 그저 사랑하는 동생 니나를 지켜주는 듬직한 호위 기사에 불과하...
“... 다고 말하기엔 아이린이 좀 많이 예쁘긴 하지, 크흠!”
오빠들과 달리 아이린은 아버지인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의 눈부신 금발을 물려받지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를 닮은 새까만 흑발은 아이린의 상징과도 같은 단발머리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그 흑단 같은 머릿결 아래, 가문의 상징과도 같은 푸르른 벽안(碧眼)의 눈동자와 오똑하게 솟은 콧날, 베일 듯 날카로운 턱선과 새초롬한 입술이 눈처럼 하얀 피부 위에 조화롭게 자리 잡고 있다.
전체적인 인상은 차가운 ‘냉미녀’ 스타일이지만, 속에 꽁꽁 감춰진 천방지축 말괄량이 같은 성격의 반전 매력까지 갖췄다.
물론 원작 세계관 최고의 미녀로 묘사된 니나와 비교하자면 조금 손색이 있지만, 그건 니나가 설정 파괴 급으로 예쁘기 때문이지 결코 아이린의 미모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 아이린에겐 니나가 갖지 못한 어마어마한 무기(?)가 있었으니...
“몸매는 뭐, 아이린 압승이지.”
아, 물론 개인의 취향 차라는 것이 있으니 무조건 아이린이 낫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니나보다는 아이린 같은 체형과 몸매를 지닌 여성에게 더 이성적 매력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었다.
170 중반에 이르는 늘씬한 키에, 오랜 수련으로 만들어진 늘씬하고도 단단한 근육들이 전신에 가득하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도 도무지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그녀의 몸.
그건 마치 사람의 몸이라기보다 수백 번의 망치질과 담금질을 통해 완벽하게 빚어낸 한 자루의 명검과도 같았다.
“... 그런 몸에 심지어 글래머이기까지 하니까, 사기라는 거지.”
사실, 이건 내가 발 딛고 있는 곳이 판타지 세상이기에 허용되는 부분이 아닐까?
그렇게 늘씬한 키에, 전신에 근육이 가득하면서도 뚱뚱하지 않고, 허리는 한 줌, 발목과 종아리는 새처럼 가늘다.
그 와중에 가슴이랑 엉덩이는 어마어마한... 크흠, 아무튼 대단해!
침대에 누워 이 모든 것을 천천히 생각해보니, 하나의 결론이 나온다.
“... 그래, 이제야 알겠다.”
나,
아이린 좋아했네.
***
다음날.
나는 영주 저택의 응접실에서 바이펠베르크 사신단의 대표, 외르크 라인홀트를 다시 만났다.
이번엔 아이린을 부르지 않고 우리 둘이서만 만난 자리였다.
“아! 영주님, 오셨습니까?”
“예, 라인홀트 경. 간밤에 잠자리는 편안하셨습니까?”
“아, 예. 영주님께서 배려해주신 덕분에 편안한 밤을 보냈습니다.”
내게 미소지어 인사하는 외르크의 눈빛에 긴장감이 가득하다.
전날 있었던 아이린의 충격적(?) 발언으로 빚어질 외교적 갈등을 우려하는 것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그... 영주님.”
“예, 라인홀트 경.”
“바이펠베르크와 다닐렌츠, 양 영지 간 물자 교류와 관련된 본격적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사과의 말씀부터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사과의 말씀이라면...”
웃음기를 완전히 뺀,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외르크가 말을 이어나간다.
“바이펠베르크 백작 각하의 영애이신 아이린 아가씨께서 지난 4년간 본인의 신분을 속이고 다닐렌츠 내에 머물며 여러 활동을 한 것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이 사과는 저 외르크 라인홀트 개인의 신분이 아닌 바이펠베르크 사신단의 대표 자격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
“더불어 다시 한번 확실하게 말씀드립니다. 아이린 아가씨가 다닐렌츠에 머문 것은 저희 영지의 정치적, 군사적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아가씨의 개인적인 선택이었습니다.”
“... 그렇습니까.”
“예. 지난 4년간, 우리 바이펠베르크는 아가씨의 신변에 문제가 없는지 여부만 확인했을 뿐, 다닐렌츠 영지의 내부 정보 획득과 같은 불순한 의도를 목적으로 하는 일체의 모략을 꾸미지 않았습니다. 해당 발언에 기사이자 바이펠베르크의 기병대장으로서의 제 명예를 걸겠습니다.”
꾸벅, 말을 마친 외르크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어제 저녁 바이펠베르크 백작 각하께서 계신 왕도 카를리온으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이번 일과 관련해 정식으로 백작 각하의 사과문을 요청드릴...”
“아, 그러실 필요까지 없습니다.”
“... 예?”
조금 당황한 얼굴이 되어 나를 바라보는 외르크.
그런 그에게, 나는 여유로운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아이린 아가씨에게 불순한 의도가 없으셨다는 건 저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어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아가씨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었고, 혹시나 벌어질지 모를 불미스러운 상황에 늘 대비하고 있었으니까요. 지난 4년간, 아가씨는 단 한 번도 수상한 행보를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예, 당연히 그러셨을...”
“다만, 아가씨의 개인적인 일탈 행위를 사전에 알고도 바이펠베르크 측에서 우리 측에 알려주시지 않은 것은 조금 섭섭하군요. 알았다면, 조금 더 극진히 대해 드렸을 텐데요.”
“그건... 큼,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
‘지지리도 말을 듣지 않던 백작의 천방지축 막내딸이 웬일로 마음잡고 얌전히 지내는 모습이 보기 기꺼워서 가만히 나뒀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는 외르크였다.
그리고 그런 외르크의 속마음을 꿰고 있는 나는 굳이 그 사정을 캐묻지 않았다.
“하하, 뭐...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뭐 그리 큰 문제이겠습니까? 아이린 아가씨 덕분에 저는 지난 4년간 제 동생의 안전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 이번 일은 불문에 부치도록 하시지요.”
“아...!”
아이린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내 말에 외르크의 얼굴이 환해진다.
“실로 너그러우십니다, 영주님. 우리 바이펠베르크는 결코 이 일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저희가 더 감사합니다. 이 궁벽한 땅이 왕국 전체에 그 위엄을 떨치는 바이펠베르크와 원(怨)이 아닌 은(恩)으로 맺어질 수 있게 되어 기쁠 따름입니다.”
“백작 각하의 천금을 몇 해씩이나 별탈 없이 거두어 주셨으니 당연히 은혜라 할만하지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번 협상을 잘 마무리하고, 사신단이 바이펠베르크로 돌아갈 때 아가씨도 함께 모시고 가겠습...”
“안 됩니다!”
“...?!”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깜짝 놀란 외르크가 나를 바라본다.
“영주님? 지금 뭐라고 하신...”
“아, 그게... 제 말은, 그런 게 아니라...”
뭐라고 하는 건지.
당황하다 보니 말이 베베 꼬인다.
‘어우씨, 왜 이래? 정신 차리자, 데미언! 너 금사빠 아니잖아?’
그렇게 속으로 널뛰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써보지만, 이게 뜻대로 되질 않았다.
“그러니까 제 말은, 음... 그래도 아이린 아가씨가 여기 머물고 계시던 시간이 꽤 길었는데, 갑자기 바이펠베르크로 돌아가시면 이래저래 입장이 난처한... 아니, 제가 난처하다는 게 아니라!”
“...”
횡설수설하는 나를 바라보는 외르크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러다 문득, 그의 얼굴 가득 웃음꽃이 피어났다.
“풉... 하하! 아, 예. 그렇죠. 예, 이해했습니다. 영주님이 어떤 의미로 말씀하시는 건지, 알겠습니다.”
“... 정말 이해하신 건가요?”
“아, 예! 물론이지요. 완벽하게 이해했습니다.”
“...”
아무래도 외르크의 말이 의심스러워서 말없이 그의 눈을 바라보는데, 그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설명을 보탰다.
“저도 지금의 아내와 정략결혼이 아닌 연애를 거쳐 결혼했습니다. 사실 영주님 같은 자리에 계신 분에겐 쉽지 않은 일이죠. 하지만, 그렇기에 더 응원하겠습니다.”
“... 예? 지금 무슨 말씀을...?”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하시다는 거 아닙니까? 하긴, 어제 저희 아가씨가 먼저 마음을 고백했으니 남자의 입장에서 조금 민망한 그림이 되긴 했습니다. 조금 더 분발하셔야겠습니다, 영주님. 하하하!”
바이펠베르크가 자랑하는 상급 기사 외르크 라인홀트의 주접은, 그의 검술 실력만큼이나 대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