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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31화 (131/197)

< 그렇고 그런 사이 (1) >

바이펠베르크와 다닐렌츠, 두 영지 간의 전략 물자 수출입 협상은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나움가르트 북부, 아이젠탈 광산에서 생산된 막대한 양의 철광석으로 만든 양질의 강철 주괴를 가득 실은 여러 대의 수레가 바이펠베르크로 돌아가는 사신단의 뒤를 따랐다.

꽤 장기적인 계약을 맺었기에, 철의 가격은 시세(?)보다도 훨씬 저렴하게 매겨주었다.

모르긴 몰라도 저 정도 양의 강철이면 올해 남은 모든 바이펠베르크의 강철 수요를 감당하고도 남으리라.

그렇다면 우리 다닐렌츠는 강철을 내준 대가로 무엇을 받았는가?

“... 알겠습니다. 영주님께서 말씀해주신 이 내용, 왕도에 계신 백작 각하에게 빠짐없이 전달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내가 사신단 대표로 온 외르크를 통해 바이펠베르크 측에 요구한 단 한 가지.

그것은 바로, 왕국 중앙 정계에서의 정치적 후원이었다.

현재 왕도 카를리온에선 우리 다닐렌츠 영지의 바렌부르크 병탄과 사실상의 루테니아 식민 지배에 대한 적법성 판단 논의가 펼쳐지고 있었다.

제대로 따져본다면 당연히 문제 될 것이 없는 결과다.

애초에 전쟁 자체가 바렌부르크와 루테니아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우리는 그저 우리가 사는 땅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싸웠고, 싸우다 보니 훗날이 너무 걱정되어 놈들의 근거지까지 쳐들어가 꼼꼼하게 미래의 위험을 제거했을 뿐이다.

하지만...

“어디서 굴러먹다가 나타난 지도 모를 용병 출신의 근본 없는 거짓 귀족, 다닐렌츠 남작이 정복욕에 미쳐서 벌인 정신 나간 전쟁입니다! 우리 안할트는 왕국 북서부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절대 이 전쟁의 결과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봉신 영지인 바렌부르크를 빼앗기고 눈이 돌아버린 안할트 백작은 그 즉시 왕도로 달려가 왕국의 여러 고위 인사들 앞에서 이번 전쟁의 부당함을 주장했다.

바렌부르크를 뜯어먹힌 것도 환장할 노릇이겠지만, 그보다는 안할트의 자랑이자 왕국 북서부 지역 최강의 기사였던 ‘안할트의 늑대’ 마티아스 괴츠를 잃었으니, 안할트 백작이 입에 거품을 물고 난리를 치는 것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백작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의 행동이 용서되는 건 아니다.

생각 같아선 냅다 카를리온으로 달려가 안할트 백작의 뺨다구를 왕복으로 후려쳐주고 싶었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왕국의 공적(公敵)으로 몰리게 되겠지.

아무튼, 이 문제는 무력이 아닌 정치력으로 해결해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이제 막 거지꼴을 탈피한 다닐렌츠에게 그런 재주가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방법이 생겼다.

‘내게 필요한 능력이 없다면, 그 능력을 갖추고 있는 동료를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그 결과 만들어진 다닐렌츠-바이펠베르크 동맹.

우리는 왕국 내에 몇 안 되는 대귀족의 든든한 정치적 비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고, 바이펠베르크는 막강한 군사력 유지에 도움이 될 전략 자원 철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거야말로 양쪽에게 모두 도움이 되는 윈-윈의 정석 아닌가?

“아, 그리고.”

“...?”

“밀가루를 가득 실은 마차 열 대를 함께 내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게 정말이십니까?”

“예, 왕국 남부에 병충해가 크게 발생해 가을 작황이 좋지 못할 것이라 들었습니다. 하여 신경을 좀 써보았습니다.”

“허어! 안 그래도 자작님께서 왕도에 계신 백작 각하에게 이 일을 어찌 대비해야 할지 상의드리려던 참이었는데...”

밀가루를 함께 내어주겠다는 내 이야기를 들은 외르크가 크게 놀란 표정을 짓는다.

안 그래도 곧 다가올 가을과 겨울에 식량 부족이 예견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하, 이제 바이펠베르크와 우리 다닐렌츠는 같은 길을 걸어갈 동맹 아니겠습니까? 우리 다닐렌츠는 뻔히 보이는 벗의 위기를 모른척할 만큼 인정에 박한 이들이 사는 땅이 아닙니다.”

“철을 내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할 일인데, 식량까지 이리 풍족하게 지원해주시니 고마운 마음을 이루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을 꾹꾹 눌러 말하는 외르크.

그, 바이펠베르크에 돌아가셔서도 아버지 대신해서 영지 다스리고 있는 로이스 그뢰네마이어 자작에게 다닐렌츠 영주가 이렇게 따뜻한 사람이라고 전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앞으로 무수히 많은 날을 함께 돕고, 도움을 받아가며 걸어나가야 할 사이 아니겠습니까? 이 정도에 감격하시면 곤란합니다.”

“하하하! 우리 다닐렌츠 영주님께서는 그 마음 씀씀이가 실로 대인이십니다. 영주님 말씀처럼 이제 바이펠베르크와 다닐렌츠는 형제나 다름이 없는... 아니, 그보다도 더 ‘끈끈한 관계’로 이어질 사이 아닙니까!”

“... 예? 아, 아아... 예.”

뭔 소리인가 했네.

4년 전, 외르크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과묵하고 멋진 중년 기사의 이미지가 많이 무너지는 느낌이다.

이거 그냥 어린 조카의 연애 상대(어디까지나, 아직은 예정이다)를 보고 좋아 죽는 주책바가지 삼촌 그 자체잖아!

“항상 건강에 유념하십시오, 영주님.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예, 라인홀트 경. 먼 길 조심해서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바이펠베르크에서 파견된 사신단은 풍족한 선물 보따리(?)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

“언니.”

“...”

“언니...?”

“...”

“아잇, 언니!”

“... 음? 아! 예, 아가씨!”

멍하니 생각에 빠져 니나가 자신을 부르는 것도 듣지 못하고 있던 호위 기사 아이린이 퍼뜩 놀라며 대답한다.

“뭔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고 있어?”

“아니... 별 거 아니었습니다.”

“흐응, 별거 아닌 게 아닌데? 언니 지금 몸만 여기 있지 정신은 완전히 다른 곳에 가 있는 사람 같아.”

“... 죄송합니다.”

호위 기사가 근무 시간에 정신 줄을 놓고 있다는 건 심각한 직무 유기였다.

하지만 현재 그녀들이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다닐렌츠 영주 저택.

건물 안팎으로 경비병들이 빼곡하게 버티고 선 곳이니,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라면 호위 대상인 니나가 위험할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근데 신기하네? 우리 언니가 이렇게 넋 놓고 있는 모습 처음 보는 거 같은데?”

“...”

“무슨 일 있구나, 그치?”

“아닙니다.”

“아니긴, 무슨 일 있는데. 뭐야, 뭔데?”

“정말로, 아무 일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 정색하니까 더 수상한데? 뭔데, 말해주면 안 돼?”

예쁜 눈을 반짝이며 집요하게 아이린을 추궁하는 니나.

그러다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깜짝 놀라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다.

“언니 혹시... 오라버니가 뭐라고 했어?!”

“...!”

움찔-

자신의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반응을 보이는 아이린의 모습에 니나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고 확신한다.

“뭐야, 호... 혹시 오라버니가 언니 쫓아낸다고 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긴! 내 말이 맞지? 하...!”

고운 이마를 잔뜩 구기며 고민하던 니나가 안 되겠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걱정마, 언니! 내가 오라버니에게 다 얘기할게. 언니 나쁜 사람 아니고, 그동안 다닐렌츠에 머물면서 얼마나 헌신적으로 날 지켜줬는지, 내가 다 설명할 거야.”

“아가씨,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러니 제발...”

바싹 타들어 가는 남의 속도 모르고 의지를 불태우는 니나의 모습에 다급해진 아이린이 사정하듯 말한다.

그거 아니야, 제발 가만히 좀 있어!

“아니야, 언니는 가만히 있어! 내가 지금 바로 가서...”

하지만 이미 사랑하는 언니를 구해내겠다는 목적의식에 사로잡힌 니나는 아이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겨 자신의 방 문고리를 힘껏 잡아돌리...

“야! 가만히 좀 있어!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 려고 했는데.

너무나 다급한 상황에 아이린은 니나가 사정사정해야 가끔 보여주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꺼내고야 말았다.

“... 언니?”

“영주님이 나 바이펠베르크로 돌려보내려고 하신 게 아니야! 그게 아니고, 그게 그러니까...!”

대체 뭔 사정인지,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하고 말을 꺼내지 못하는 아이린.

그런 그녀의 모습을 니나가 말없이 빤히 바라보기를 한참.

그러다 마침내...

“... 내가, 영주님을... 좋아한다고... 말해버렸어.”

“... 헐.”

끝끝내 밝혀진 사건의 전말에, 니나는 두 손으로 벌어지는 입을 틀어막고야 말았다.

***

백작령 바이펠베르크 말고도 나는 몇몇 영지를 추가로 선정해 아이젠탈에서 생산하는 철의 수출과 판매를 허용했다.

대부분이 우리 다닐렌츠와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은, 즉 직접적인 군사적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낮은 먼 거리에 자리한 영지들이었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아인스부르크 영지였다.

아인스부르크는 왕국의 최북단에 자리한 곳으로, 대륙 북부에 사는 거칠고 위험한 야만인 바인야르(Vainyar) 족의 땅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곳이다.

그 유명한 대(對) 바인야르 북부 전선의 상징, ‘겨울 장벽’ 또한 이곳에 세워져 있다.

우리 영지와는 거리 자체도 멀리 떨어져 있고, 어차피 철을 내어줘봤자 죄다 바인야르 족들과 싸울 무기 만드는 데 쓸 것이기 때문에 뒤탈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인스부르크 영지는 관계를 좋게 만들어서 나쁠 것이 하나도 없는 곳이었다.

아인스부르크의 영주인 그레고어 마우프 남작은 왕국 북부 지역을 통칭하는 노르트란트(Nordland)의 맹주, 라이에른-팔츠 백작령의 주인인 파울 루덴도르프 변경백(邊境伯)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사내였다.

즉, 그레고어 마우프 남작과 좋은 관계가 된다면 자연스레 그의 주군인 파울 루덴도르프 변경백 역시 우리 다닐렌츠를 우호적인 세력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생각 같아선 곧장 파울 루덴도르프의 눈에 들고 싶지만...’

그러기엔, 파울 루덴도르프가 너무 거물이다.

우리 다닐렌츠가 바렌부르크와 루테니아를 무릎 꿇리며 왕국 북서부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고는 하나, 펠린느 왕실의 외척이자 왕국 내 유일한 변경백의 작위를 지닌 파울 루덴도르프는 나 같은 남작 나부랭이(?)와 곧장 말을 섞기엔 체급이 너무나 큰 인물이다.

그리고 애초에 라이에른-팔츠 백작령은 슈트람 광산이라는 유명한 철광을 보유하고 있기에 굳이 우리 다닐렌츠로부터 철을 수입할 필요도 없으니...

‘그러니, 아인스부르크 남작부터 꼬시는 거지.’

그리고 넓게 보자면 아인스부르크에 철을 공급함으로서 왕실에게도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다.

아인스부르크는 북부의 야만인들로부터 왕국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와 같은 곳.

그런 곳에 전략 물자를 아낌없이 내어주는(아, 물론 돈 받고 파는 거지만) 우리 다닐렌츠가 왕실의 입장에선 얼마나 예쁘게 보이겠는가.

우리 입장에선 돈도 벌고, 인맥도 쌓고, 이미지도 챙기는, 한마디로 잃을 것이 없는 일석삼조의 꽃놀이 패인 것이다.

“시간 있을 때 부지런히 인맥 쌓아둬야지. 2년 뒤면 온 세상이 난리가 날 테니...”

지금 이 순간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미래의 비극.

바로, 펠리노어 왕국의 현(現) 군주이자 38대 국왕인 하인리히 4세의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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