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렇고 그런 사이 (2) >
바이펠베르크의 사신단이 우리 다닐렌츠가 내어준 강철과 밀가루를 마차 여러 대에 가득 싣고 고향으로 돌아간 지 얼마 후.
카앙- 캉! 쉬잉- 슈아악! 카아앙!
다닐렌츠 영주 저택 담장 한쪽에 마련된 작은 연무장에서, 데미언은 오랜만에 아이린과 검술대련 시간을 가졌다.
“집중하십시오! 어디다 정신 팔고 계십니까!”
카캉!!!
“아흑!”
허벅지를 노리고 쏘아진 데미언의 공격을 한 박자 늦게 걷어낸 아이린의 입에서 작은 비명이 터진다.
반응이 늦었기에 자세가 불안정했고, 자세가 불안정했기에 검에 힘을 제대로 실을 수가 없다.
힘이 부족한 검으로 실력 차이가 명백한 상대의 공격을 막으려다 보니 당연히 문제가 생길 수밖에.
“느립니다.”
쉬잉- 터어엉!!!
검을 들었을 땐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사내, 다닐렌츠의 영주 데미언이 어느새 아이린의 뒤쪽에서 나타나 검으로 그녀의 등판을 후려쳤다.
검날(刃)을 세워 벤 것이 아닌 면(面)으로 가한 공격이었기에 피를 보지는 않았으나, 그 충격만은 대단했다.
“크흐읍!”
등판 한가운데를 때린 묵직한 일격에 아이린이 몸의 중심을 잃고 휘청거린다.
그 즉시 공격을 펼친다면 대련을 완전히 끝내버릴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데미언은 그 자리에 그대로 가만히 서서, 무심한 눈빛으로 간신히 몸의 균형을 되찾은 아이린에게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한 번 죽으셨습니다, 아가씨.”
“... 허억, 헉... 죄송합니다!”
“정신 차리시고, 다시 오십시오.”
“... 예, 영주님!”
그 차가운 목소리에 서러워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았지만, 아이린은 이를 악물고 자신의 검을 치켜들었다.
“다시, 가겠습니다.”
“예.”
“흐아아아앗!”
카캉- 카아앙!!!
***
“... 너무해.”
영주 저택의 2층에 자리한 자신의 방 창문을 통해 연무장을 내려다보던 니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검술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니나였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데미언과 아이린이 정기적으로 대련을 하는 모습을 봐왔다.
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오늘 펼쳐지고 있는 두 사람의 대련은 평상시와는 느낌이 달랐다.
일단, 아이린을 대하는 데미언의 말투가 바뀌었다.
이전에도 그는 아이린이 바이펠베르크 백작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만 알고 있었던 것이고, 지금은 아이린이 바이펠베르크 백작의 딸이라는 것이 ‘공식적으로’ 밝혀진 상황.
하여, 데미언은 아이린에게 형식적이나마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방금은 공격을 무리하게 받아낼 게 아니라 뒤로 피했다가 반격하는 식으로 나왔어야 합니다. 다시!”
“또 그 패턴입니까? 너무 단순합니다! 상대가 바보도 아닌데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상대하려는 겁니까?”
“왜 이리 마음이 급합니까? 검을 여러 번 휘두를 생각에 몸의 균형이 엉망이 됐습니다. 첫 전투에 나선 신병만도 못하군요.”
“왜 이전엔 잘 하던 것도 못 하십니까? 아니면 대련에 집중을 안 하고 계신 겁니까? 만약 이게 실전이었으면, 아가씨는 벌써 칼침 몇 방 맞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을 겁니다”
물론, 말투만 존대일 뿐이지 그 말의 내용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도 대련이라는 옷을 입고 쏟아지는 무시무시한 언어 폭행.
한데 똑같은 내용을 존댓말로 전하다 보니 묘하게 거리감이 느껴졌다.
“오라버니, 대체 왜...”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니나.
그런 그녀의 눈에, 지금의 모습은 데미언이 일부러 아이린에게 정을 떼기 위해 못되게 구는 것으로 보였다.
“언니...”
걱정 가득한 니나의 시선 끝, 땀에 절은 머리가 잔뜩 헝클어지고 가혹하게 몰아치는 데미언의 공격을 피해내느라 온몸이 흙먼지투성이가 된 아이린이 바닥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
“... 아니면 대련에 집중을 안 하고 계신 겁니까?”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상대이기에 앞서 기사로서 존경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아이린은 속상하고 서러워서 눈물을 왈칵 쏟을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그 자신이 스스로 생각할 때도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데미언의 말처럼, 그녀는 이 대련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바이펠베르크와 다닐렌츠 영지 간의 물자 거래 협상 자리에 불려나와 충격 발언(?)을 한 이후 거의 열흘 만에 마주한 데미언의 얼굴이었다.
했던 말을 생각하니 너무 민망하고, 그 와중에 얼굴을 보니 좋기도 하고.
이래저래 복잡한 감정 때문에 도무지 대련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마음의 상태가 그대로 대련의 결과로 드러났다.
평소와는 다른 느린 반응에 맞지 않아도 될 공격을 허용하고, 날카로웠던 검의 움직임은 뭉툭한 나무 몽둥이를 휘두르듯 무디기 그지없었다.
결국,
카아앙!!! 휘잉휘잉휘잉- 탱그렁!!!
데미언의 강공을 견뎌내지 못한 그녀의 검이 주인의 손을 떠나 연무장 한쪽 바닥에 떨어졌고,
퍼어억!!!
복부를 노리고 날카롭게 들어오는 발차기를 피해내지 못해 그대로 일격을 허용하고야 말았다.
“커흑-!”
순간적으로 숨이 쉬어지지 않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
물론 데미언이 손속에 사정을 두었기에 정말로 내장을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느껴지는 고통만은 진짜였다.
털썩-
“끄으으...”
바닥에 그대로 엎어진 아이린이 신음을 흘린다.
고개를 들 수도 없을 만큼 극심한 통증.
두 손으로 배를 끌어안은 채 웅크려 끙끙대고 있는데, 그녀의 머리 위로 냉기가 풀풀 풍기는 데미언의 목소리가 들렸다.
“... 오늘 대련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더 해봤자 의미가 없을 것 같군요.”
너무나 무정한 목소리였지만, 아이린은 통증으로 몸을 일으킬 수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애써 고개를 들어 데미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지... 지도에 감사드립... 니다, 영주님.”
정식으로 사제의 연을 맺은 사람은 아니나, 데미언은 지난 4년간 그녀의 가파른 실력 향상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이었다.
비록 오늘은 그녀에게 너무나 많은 마음의 상처를 안겨준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예의는 지키고 싶었다.
그런데...
“제가 사정이 생겨 아가씨의 검술 지도를 더는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
“해서 로이터 경에게 아가씨의 검술 지도를 부탁했습니다. 그가 흔쾌히 승낙했으니, 다음부터는 로이터 경에게 배우시면 될 겁니다.”
힘겹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는 아이린에게 돌아온 것은, 갑작스러운 데미언의 검술 지도 중단 선언이었다.
“... 여, 영주님?”
“잘 아시겠지만, 로이터 경은 우리 다닐렌츠 영지가 자랑하는 최고의 기사입니다. 아가씨의 놀라운 재능을 더욱 꽃피우게 해줄 실력과 경험을 고루 갖춘 분이니 많이 배우시길 바랍니다.”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차갑게 이별을 고하는(적어도, 아이린의 입장에선 그렇게 들렸다) 데미언.
“... 흑!”
그런 그의 모습을 자신의 지난 고백에 대한 대답이라 생각한 아이린.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듯 냉정한 모습에 겨우겨우 참고 있던 그녀의 눈물이 터져버린다.
“영주님, 어떻게... 어떻게!”
“...?”
“흑! 어떻게 저를 이렇게 매몰차게 내치실 수가 있으세요? 네? 흐으윽! 너무해, 정말 너무해요!”
그동안 특유의 말괄량이 성격도 숨겨가며 얌전한 여성처럼 보이려 얼마나 노력했던가?
지금껏 데미언의 눈이 닿는 곳에선 말 열 마디 할 것을 줄여서 딱 한 마디만, 아니 아예 입을 열지도 않을 정도로 항상 조신한 태도를 유지했다.
여성들이 사회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특이하고 보편적이지 않은 일로 여겨지는 각박한 세상.
혹시라도 데미언이 자신을 ‘기가 세고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걱정한 끝에 나온 고육지책이었다.
심지어 데미언 앞에선 보여지는 모습에 신경 쓰느라 밥도 제대로 먹질 않았다.
영주인 그와 함께 식사할 상황이 있어도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호위 대상인 니나를 신경 써야 한다는 핑계로 새 모이만큼만 먹고 벌떡 일어서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보통의 여성들보다 훨씬 체격이 좋고, 매일 같이 격렬한 수련을 하는 터라 식사량이 상당한 아이린으로서는 실로 괴로운 선택이었다.
“내가... 내가 그동안 영주님한테 잘 보이려고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에-! 그런 마음도 몰라주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아이린이 외친다.
지난 몇 년간, 그녀는 정말로 열심히 했다.
사실 타고난 재능이 너무나 대단했던 터라 검술 수련을 열심히 하는 것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아이린.
하지만 눈앞의 사내, 데미언은 그녀보다 고작 한 살이 많을 뿐인데 족히 수십 년의 까마득한 격차가 느껴질 정도의 고강한 실력을 지닌 사내였다.
그런 데미언에게 실망을 주고 싶지 않아서, 아이린은 잠을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그날의 수련량은 반드시 채우는 생활을 반복했다.
무려, 4년씩이나.
그 결과 아이린은 다닐렌츠 영지 내에서 영주인 데미언과 기사 겔베르트 로이터, 군무관인 발터 브라운 정도를 제외하면 검으로 상대할 사람이 없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이 기세대로라면 몇 년 안에 왕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상급 기사가 탄생할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어렸을 적부터 비슷한 칭찬을 많이 받았지만, 그때는 별다른 감흥 없이 그 칭찬들을 흘려들었던 아이린.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사람들의 칭찬을 들으면 혹시 그가 사랑하는 남자, 데미언 역시 자신을 칭찬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눈을 반짝이는 그녀였다.
그러나...
“... 다음부터는 로이터 경에게 배우시면 될 겁니다.”
냉정하게 선을 긋는 데미언의 모습 앞에서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의 오랜 짝사랑이, 끝이 났다는 걸.
‘... 다 끝났어.’
열여섯 살의 겨울에 처음 데미언을 만나 스무 살의 여름이 되기까지.
그 때문에 울고 웃었던 그 모든 기억이 스러져간다.
그를 생각하며 잠 못 이루었던 밤들이 스쳐 지나간다.
많이 아프고, 많이 슬펐다.
발 딛던 땅이 꺼지고, 머리 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지만, 아이린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니, 받아들이는 척하기로 했다.
마음껏 우는 것은 자신의 방, 자신의 침대 위에서 하겠다는 생각으로 아이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후우... 크흠! 알겠습니다, 영주님. 그동안... 후우우...! 그동안, 가르쳐주셔서 감사했습니다아...!”
이미 흘러버린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고, 자꾸만 무너지려는 몸을 바로 세우며 그녀가 그렇게 말을 하는데...
“...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아이린 아가씨.”
“?!”
데미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종류의 이야기였다.
“제가 아가씨의 검술 지도를 그만 두는 이유는, 영주인 제가 직접 신경 써야 할 업무의 양이 너무나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아...?”
“병탄한 바렌부르크 영지와 사실상 우리 영지의 속지가 된 루테니아 영지의 일까지 더해져 처리해야 할 일들이 각 분야에 산적해 있습니다. 행정과 군무, 재무에 이르기까지... 물론 능력 있는 많은 가신들이 최선을 다해 일해주고 있지만... 갑자기 영지의 범위가 넓어지니 쉽게 감당이 되질 않는 상황입니다.”
“...”
“영주인 저도 밤잠을 줄여가며 업무에 매진 중인데, 그래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검술 지도할 시간을 빼서 영주로서의 일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이린 아가씨.”
“그, 그럼... 제가 싫어서 검술 지도를 중단하신 게 아니란 말씀이신가요?”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아이린에게, 데미언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세상에 어떤 남자가 아이린 아가씨 같은 분을 싫어할 수 있겠습니까?”
“...!”
“저도 마찬가집니다. 그리고, 음... 이건 좀 사족입니다만.”
입술을 달싹이며 잠시 머뭇거리던 데미언이 그답지 않게 쑥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가씨의 검술 지도를 중단하는 것에는, 그런 이유도 좀 있었습니다.”
“어떤...?”
“아무리 대련이고 연습이라고 한들, 저도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상대로 검을 휘두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
“크흠! 그럼 전 이만, 일이 바빠서...”
“아니, 영주님! 방금 하신 말이...!”
그렇게, 마지막 말을 남긴 데미언이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난 뒤 연무장에 홀로 남겨진 아이린.
자신이 들은 말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는지, 반신반의한 기분으로 그녀가 멍하니 서 있는데...
“언니! 아이린 언니!”
어디선가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
“니나?”
고개를 돌린 아이린의 시선 끝, 영주 저택 2층 창문에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는 금갈색 머리의 미소녀.
방금 있었던 그 믿을 수 없는 대화의 내용을 모두 엿들은 그 어여쁜 소녀가 넋 나간 얼굴의 여기사에게 말했다.
“언니, 축하해! 너무 잘 됐다아! 헤헤!”
니나의 천진한 웃음소리를 듣고 나서야 아이린은 비로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있었다.
서러움에 흘렸던 눈물 자국이 선연히 남아있는, 하지만 여전히 예쁘고 아름다운 그 얼굴에 잃었던 미소가 걸린다.
아까는 마냥 우울해 보였던 하늘이 더할 나위 없이 맑아 보였다.
“고마워, 니나.”
영영 놓친 줄 알았던 사랑의 끈을 다시 잡아낸 스무 살 소녀가, 배시시 보기 좋은 웃음을 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