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렇고 그런 사이 (3) >
신성력(神聖歷) 786년 11월_
“... 이에, 펠리노어 왕국의 정당한 지배자인 우리 펠린느 왕실은 남작령 다닐렌츠의 바렌부르크 병탄과 루테니아 실효 지배를 정당한 승전(勝戰)의 결과로 인정하는 바이다.”
지난 봄에 벌어졌던 왕국 북서부 지역 ‘소금 전쟁’의 적법성 여부를 두고 왕도 카를리온에서 몇 달간 벌어진 지루한 논쟁.
마침내, 그 싸움의 끝을 알리는 펠린느 왕실의 성명문이 내 손에 들려 있었다.
“... 아주 마음에 드는 결과군요. 우리가 이겼습니다. 하하하!”
전쟁에 이겨놓고도 ‘이겼다’는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지난 몇 달간의 답답했던 심정이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반대로 이 내용을 확인한 안할트 백작은 아주 복장이 터져 죽고 싶은 기분일 테지만... 뭐, 그건 내 알 바가 아니고.
“경하드립니다, 영주님!”
“당연한 결과입니다! 왕도의 높은 분들이 그래도 보는 눈이 있군요.”
“바이펠베르크 백작께서 우리 다닐렌츠를 위해 많이 힘을 써주셨다고 합니다. 왕도로 사람을 보내 적당한 감사를 표하시는 게 어떨지?”
“백작보단 그 아들인 로이스 그뢰네마이어 자작이 고생이 많았을 겁니다.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바이펠베르크 백작은 중앙 정계에서 말을 아끼는 것으로 유명한 양반입니다. 왕도로 사람을 보내기보단 그냥 바이펠베르크 백작령으로 성의를 보이는 것이 나은 선택일 겁니다.”
군무관 발터 브라운의 말처럼, 바이펠베르크 백작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는 정치적인 발언을 극도로 꺼리는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국왕의 측근 중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왕실 근위대장의 직책에 올라 있는 사람.
자신의 발언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지 알기에, 그는 항상 말을 아꼈다.
‘... 하지만, 그 아들인 로이스는 성향이 좀 다르지.’
평생 검 하나만 갈고 닦은 전형적인 기사 느낌의 아버지 디트리히와 달리 그의 아들인 로이스 그뢰네마이어 자작은 능수능란한 정치가의 모습을 띠고 있는 인물이었다.
몇 달 전, 아직 북서부 전쟁의 정당성 여부가 확실히 결정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영지에서 나오는 철 자원의 확보를 위해 발 빠르게 사신단을 보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비인 디트리히였으면 꿈도 꾸지 못할 재빠른 행보.
이처럼 로이스 자작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세를 보는 감각에 추진력까지 갖춘, 탁월한 정치가였다.
덕분에 우리 다닐렌츠는 바이펠베르크라는 든든한 정치적 우군을 만들 수 있었고, 그 선택의 결과가 지금 내 손에 들려 있었다.
“다른 건 좀 그렇고... 소금을 좀 보내줍시다. 그 정도면 충분히 성의 표시가 되겠지.”
“아, 예. 좋은 생각 같습니다.”
“그럼 그 부분은 재무관이 맡아서 처리해주시고.”
“알겠습니다, 영주님.”
“다음으로... 행정관?”
“예, 영주님.”
나의 부름을 받은 영지의 행정관 세르지오가 대답한다.
“일전에 우리가 준비해뒀던 거 말입니다, 그거 바로 진행합시다.”
“예, 알겠습니다.”
왕도에서 들려올 소식만 기다리며 미리 준비해두었던 ‘그것’.
바로, 새로이 우리 다닐렌츠의 영토가 된 바렌부르크 지역을 다스릴 사람에 관한 인사 명령 조치였다.
***
다닐렌츠 동부,
라엔슈타인(Raenstein) 요새_
“아니, 이게 무슨...”
손에 든 문서의 내용을 확인한 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반백 머리칼의 사내.
그는 시선을 들어 예고도 없이 라엔슈타인 요새를 찾아온 자신의 제자를 바라보았다.
“... 영주님께서, 정말로 이걸 나한테 전달하라고 하신 게 맞는 거냐?”
“하하하! 스승님, 그럼 영주님께서 설마 다른 사람에게 가야 할 걸 잘못 내어주셨겠습니까?”
“허허, 그래. 그분께서 그럴 실수를 하실 분이 아니지... 허허, 허허허!”
못 본 사이 부쩍 성장한 제자 아드리안의 넉살 좋은 대답을 들으며, 라엔슈타인 요새의 사령관 데론 베르켈은 몇 번이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 대체 영주님께선 이 늙은이를 언제까지 부려먹으시려는 건지. 이러다 제 명에 죽지도 못하겠구나.”
푸념 아닌 푸념을 늘어놓는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한 장의 문서.
데론의 제자인 아드리안이 직접 영지의 주도 키르헨에서 이곳 라엔슈타인 요새까지 전달한 영주 데미언의 인사 명령서였다.
그곳에 적혀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현 라엔슈타인 요새 사령관 데론 베르켈을 바렌부르크 영지의 총독으로 임명함.]
총독(總督)이란 어떤 자리인가?
총독은 모시는 군주를 대신해 특정 지역의 모든 행정권과 군권을 행사하는 직책이었다.
즉 해당 지역에선 영주와 다름없는 권한을 갖고 있지만, 영지에 대한 소유권만을 제외한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총독이라니, 그토록 중요한 자리를 그저 전장에서 칼질하는 것 말고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늙은이에게 맡기시다니...”
“아니, 스승님!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할 줄 아는 게 없으시다니요? 제 생각에 스승님께선 외려 못하시는 게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 스승님께서 총독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면, 대체 어느 누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
자신의 말에 반박하며 열변을 토하는 아드리안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데론.
마냥 품 안의 어린아이 같았는데, 어느새 몸도 마음도 부쩍 자란 제자의 모습이 대견스러웠다.
“허허, 아드리안. 기사 작위를 받더니 말솜씨도 늘었구나? 이제는 아주 못 당하겠다.”
“하루종일 영주님 곁에 찰싹 붙어있다보니, 절로 말이 느는 것 같습니다. 스승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영주님의 대단하신 말솜씨를요.”
“허허, 영주님께선 그 검술 실력만큼이나 입심도 대단하시지. 아마 말솜씨에도 등급이 있다면, 영주님은 그 역시도 상급 기사 수준을 훌쩍 넘기실 거다.”
“하하하! 맞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자리에 없는 주군의 칭찬에 열을 올리던 두 사람.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에 데론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곳 라엔슈타인 요새 사령관 자리는 누가 이어받게 되는 거지? 아드리안, 후임자에 대해 들은 것이 있느냐?”
“아, 예. 알고 있습니다.”
과거, 이웃한 영지 바렌부르크 남작령의 침략으로부터 다닐렌츠를 지키던 최전방 요새의 임무를 수행했던 라엔슈타인.
하지만 바렌부르크가 다닐렌츠의 영토로 흡수된 이후엔 두 지역 사이를 잇는 경계에 자리한 군사거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맡겨진 역할은 달라졌지만, 여전히 다닐렌츠의 군사력을 상징하는 중요한 장소인 라엔슈타인.
그런 곳의 차기 사령관으로 누가 오게 될지, 데론 쯤 되는 인물의 입장에선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스승님께 총독 임명 명령서를 가져다드린 뒤 다음으로 들를 곳이 바로 차기 사령관이 되실 분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게 어디냐면...”
***
“여기 쓰여있는 내용이 정말이야? 아드리안 네가 장난치는 게 아니고?”
“그럼요. 설마 제가 영주님 직인까지 몰래 도용해다가 위험한 장난을 치겠습니까?”
라엔슈타인 요새에 이어 기사 아드리안이 향한 목적지.
그곳은 바로 라엔슈타인 요새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장소.
바로, 다닐렌츠 신병 훈련소였다.
“... 기사 메이슨 아르히펠트(Mason Archfeld)를 라엔슈타인 요새의 신임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다만 기존 직책이었던 다닐렌츠 신병 훈련소장의 임무 또한 사령관 임무와 함께 겸직하는 것으로 한다... 이런 세상에, 안 그래도 일이 많아 죽겠는데 겸직이라니. 이렇게 일만 하다가 말라 죽게 생겼군.”
입으로는 죽겠다고 하지만, 그 말을 하는 메이슨의 얼굴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런 메이슨의 속마음을 알아챈 아드리안 역시 웃으며 그에게 축하의 말을 건넨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르히펠트 경. 용병으로 시작해 요새 사령관직까지 오르게 되셨군요.”
“그러게 말이다. 오래 살다가 보니 이런 일도 있네.”
아드리안의 말처럼, 메이슨은 용병에서 시작해 다닐렌츠 군부의 고위 수뇌부까지 올라온 사람이었다.
물론 같은 용병단 출신의 동료 중에 무려 용병에서 영주의 자리까지 오르는 전설을 쓴 인물이 있기에 좀 빛이 바랬지만, 메이슨의 경우 또한 충분히 역사에 남을만한 출세 사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메이슨을 기분 좋게 만든 건...
“우리 대장, 그 양반은 어떻게 됐어?”
“대장이요? 대장이야 뭐...”
메이슨이 ‘우리 대장’이라 부를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뿐이다.
용병대 ‘푸른 방패’의 대장이었던 겔베르트.
지금은 다닐렌츠의 기사 겔베르트 로이터 경이라 불리는 바로 그 사내다.
“로이터 경께선 따로 직책을 받으신 게 없습니다. 그냥... 저랑 같이 영주님 곁에서 5분 대기조 하는 노예 신세죠 뭐.”
“하하하! 용병대 시절엔 맨날 나랑 엔리케 부려 먹는 재미로 살던 양반인데, 나이 먹고 되려 젊었을 적보다 더 고생하네. 이다음에 키르헨 올라갈 일 있으면 찾아가서 놀려 줘야겠어.”
“놀리러 가실 때도 미리 약속 잡고 가셔야 할 겁니다. 로이터 경, 요즘 너무 바빠서... 영주님이 아주 쉬는 꼴을 못 보십니다.”
“영주님이 우리 용병대 막내로 일할 때 대장이 얼마나 알뜰하게 부려먹었냐? 이제 그 관계가 역전된 거지. 자업자득이다. 하하하!”
“그래도 나중에 좋은 자리 하나 생기면 떼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영주님이 또 아랫사람들은 기가 막히게 챙겨주시니까요.”
아드리안의 말에 메이슨이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영주님께선 용병대 막내 시절에도 그렇게 주변 사람들 잘 챙기시더니, 높은 자리 올라가셔서도 변함이 없네. 사람이 참... 인간적으로 존경스럽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냐? 잘 계시지?”
“어... 영주님 말씀이십니까? 일이 너무 많아져서 아주 고생 중이십니다. 다닐렌츠 내부 일만 해도 많은데 이제 바렌부르크에 루테니아에... 다른 영지에서 몰려 들어오는 사신단까지 일일이 챙기시느라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실 지경입니다.”
“어후, 세상에... 말만 들어도 끔찍하군.”
그야말로 살인적으로 돌아가는 영주의 일상을 들은 메이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나 같은 사람은 진짜 영주시켜줘도 못할 것 같아.”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영주님 일하시는 거 보면 진짜... 참, 대단하시다는 말 밖에 안 나옵니다. 어찌 그리 아는 것이 많으신지, 그 똑똑한 행정관, 재무관 나으리들도 영주님이 얘기하실 때마다 ‘오, 오!’하면서 경청하기에 바쁩니다.”
“하늘이 내린 인물이시지. 그 어마어마한 무력에, 머리까지 비상하시니... 다만, 너무 힘드셔서 걱정이네. 그러다 쓰러지시는 건 아닌지...”
만난 지 오래된 주군의 건강을 걱정하는 메이슨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아드리안이 말한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요즘 영주님을 아주 극진히 모시는 분이 생겼거든요. 무척 아름다우신...”
“무척 아름다우신...? 아, 혹시 니나 아가씨를 말하는 건가?”
“하하! 물론 니나 아가씨도 대단히 아름다우십니다만, 제가 말한 건 그분이 아닙니다.”
“음? 그럼 누굴 말하는 거야?”
의아해하는 메이슨의 얼굴을 본 아드리안이 웃는다.
아주 친한 형의 연애사를 알게된 개구쟁이 동생 같은 미소였다.
“있습니다, 그런 분이요. 하하하!”
***
다닐렌츠의 주도 키르헨,
영주 저택_
“영주님, 부르셨습니까?”
“아이린? 왔어? 이리로. 여기 앉아.”
“어... 예.”
늦은 저녁, 영주 데미언의 부름을 받고 그의 집무실로 찾아온 아이린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소파에 앉는다.
한동안 그녀에게 존댓말을 쓰던 데미언의 말투는 예전의 반말로 돌아가 있었는데, 고압적이라기보단 친근함만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로 부르셨는지...”
“어쩐 일은, 보고 싶으니까 불렀지.”
“여, 영주님!”
화악, 데이언의 짧은 말 한마디에 금세 얼굴이 붉어지는 아이린.
그 수줍은 반응이 너무나 귀여워서, 미소를 참지 못하는 데미언이었다.
“왜, 내가 아이린을 보고 싶어하면 안 되나? 아이린은 나 안 보고 싶었어?”
“아잇, 그게...”
“안 보고 싶었냐고.”
“보... 싶었... 니다.”
“잘 안 들리는데.”
“크흠!... 저도, 보고 싶었... 습니다.”
“하하하! 마음이 통했네! 좋다, 그치?”
“예, 예에...”
“아휴, 고개 좀 들어! 눈 마주치는 것도 그렇게 부끄러워하면 어떡해!”
“아으... 그게...!”
검사로서 ‘왕국제일검’이라 칭송받는 아버지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 백작을 능가할 정도의 엄청난 재능을 지니고 태어난 천재 아이린.
하지만, 연애에 관해선 평균에도 못 미치는 바보에 가까운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