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하(昇遐) (1) >
신성력(神聖歷) 788년 5월_
수십 년간 고여있던 왕국 북서부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버린 ‘소금 전쟁’ 이후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실로 화살이 날아가듯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하지만, 정작 나는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오늘이 며칠인지, 지금이 어떤 계절인지 옆에서 알려주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바빴기 때문이다.
다닐렌츠의 주도 키르헨와 바렌부르크 지역의 주도인 엘스터, 루테니아의 주도인 프롤린을 오가며 영지 내의 대소사를 모두 챙기는 일은 그만큼 녹록지 않았다.
아, 참고로 루테니아는 작년에 우리 다닐렌츠의 영토로 흡수되었다.
루테니아의 영주 가문인 제르펠트 가문이 전쟁의 패배로 떠안게 된 막대한 배상금을 갚지 못해 결국 파산해버렸기 때문이다.
전쟁 배상금을 제때 지불하지 못할 시 영지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한다는 전후 계약에 따라, 제르펠트 가문은 루테니아 영지의 소유권을 우리 카릴베르크 가문에게 넘겼다.
그 결과, 나는 다닐렌츠와 바렌부르크, 루테니아라는 남작령 세 곳의 남작 위를 한 손에 쥔 거물급 귀족이 되어버렸다.
다스리는 영토의 크기를 기준으로, 기존 왕국 북서부 지역의 패자(霸者)를 자처하던 안할트 백작를 가볍게 넘어서는 수준.
이로써 우리 영지는 좋건 싫건 왕국 전체의 관심과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는 지역이 되었다.
“영주님,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왕국 남부 브렌도르프 출신의...”
“결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왕국의 최북단, 아인스부르크의 북부 전선에서 5년간 장교로 복무했으며...”
“... 왕립 카를리온 대학교에서 회계를 공부했습니다. 실무 경험도 충분합니다!”
다닐렌츠가 유명해지자, 우리 영지에서 일자리를 찾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도 많아졌다.
대다수가 알맹이 없이 혓바닥만 놀리는 쭉정이들이었지만, 가끔 제대로 된 인재들이 걸릴 때도 있어서 나름 도움이 되었다.
그동안 왕국 변방에 처박힌 가난한 영지라는 인식 때문에 쓸만한 인재를 구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던 다닐렌츠.
하지만, 이제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알아서 찾아오는 땅이 되었다.
이로써, 일 시킬 놈이 없어 생긴 인력 문제도 깔끔하게 해결!
“영주님, 올 초에 조사했던 영지 인구 관련 자료 정리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오, 서기관. 정말 고생 많았어요.”
영주 취임 초기부터 내가 영지의 서기관인 세르지오에게 가장 강조했던 부분.
그것은 바로 영지 내 인구 증감에 관한 확실한 통계 자료 확보였다.
우리 땅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지 안다는 것은 세수(稅收)의 산출 또한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영지에서 거두어들이는 수익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미리 예측할 수 있다면 통치 계획을 세우는 것에 큰 도움이 된다.
바로, 지금처럼.
“주도 키르헨의 인구가... 흠, 십오만 명이 넘었군요.”
“예, 영주님. 이미 북서부 지역에선 비교할 곳이 없는 최대의 도시이고 그 범위를 왕국 전체로 넓혀도 손에 꼽힐 정도의 규모입니다.”
“좋습니다. 지난 월말 회의 때 나왔던 영지 개간 계획을 그대로 진행해도 되겠군요.”
“예, 그렇습니다. 앞으로 걷힐 세수를 생각하면 충분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영주로 있는 한, 영지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공공사업은 ‘유급(有給)’으로 행해지는 것이 원칙이었다.
농사를 지을 전답(田畓)의 개간, 도시 외곽을 든든하게 둘러싸는 성벽의 축성, 도시민들에게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수도교의 건설, 지금 이 순간에도 영지 곳곳에서 진행 중인 노후 건물과 도로의 보수 공사까지.
다닐렌츠 영주의 이름 아래 행해지는 모든 사업에 참여한 영지민은 사전에 고지된 급료를 받았다.
그리고 그 급료는 충분히 먹고살기에 넉넉하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어서, 도시 곳곳에서 각종 토목 공사가 진행 중인 키르헨의 경우엔 전문적으로 공사장만 찾아다니며 돈을 버는 사람들이 나타날 정도였다.
이른바, ‘노가다꾼’이라는 새로운 직업이 생겨난 것이다.
‘... 토건 사업의 핵심은 뭐니뭐니해도 노가다꾼들이지!’
전생의 경험으로 인해 당연히 그런 사람들이 등장할 것이라 예견하고 있었던 나는 다닐렌츠 상단 내 ‘토건(土建) 사업 관리부’에 따로 관리 인력을 편성해 그런 사람들을 관리하게 했다.
아예 이름과 사는 곳을 장부에 적어놓고, 영지 주도의 공공 건설 사업이 생기면 그들부터 투입하는 것이다.
처음엔 ‘어차피 돈 준다고 하면 알아서 일한다는 사람이 몰려들 텐데, 뭐하러 귀찮게 따로 관리 인력을 두느냐’고 말하던 사람들.
하지만 경험이 풍부한 전문 노가다꾼들이 투입된 현장과 초짜들만 있는 현장이 공사 진행률이 눈에 띄게 차이 나는 것을 확인한 이후엔 모두가 나의 선견지명을 칭송했다.
“영주님은 정말... 대단하다는 말도 부족합니다. 마치 미래에 일어날 일을 이미 다 알고 계신 사람 같습니다!”
“맞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작은 것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미리 대비를 하시는 건지... 정말, 영주님의 지혜는 하늘에 닿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존경합니다, 영주님!”
가끔 이런 식으로 내 가슴을 뜨끔하게 만드는 칭찬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겸손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해주었다.
“하하하, 어찌 그게 저만의 공이겠습니까? 유능한 가신들이 밤낮으로 노력하며 우둔한 제게 가르침을 준 덕분이지요. 칭찬을 하시려거든, 제가 아닌 우리 다닐렌츠의 가신들에게 하는 것이 맞습니다.”
“오오, 역시!”
하지만, 이렇게 겸손하게 말해도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용비어천가’ 그 자체!
“이토록 대단하신 분이 겸손하시기까지... 영주님께선 진정으로 하늘이 우리 다닐렌츠에게 내려주신 분입니다!”
“영주님을 모시는 것이 제 일생의 영광이요, 행복입니다!”
“데미언 카릴베르크 남작님 만세! 다닐렌츠여 영원하라!!!”
“왕국 최고의 군주, 데미언 카릴베르크 만세에에에!!!”
... 이 정도면 길바닥에 똥을 싸도 ‘영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농사에 쓸 거름을 만들어주셨다, 과연 성군이다!’라며 환호해주지 않을까?
이렇듯 우리 다닐렌츠가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의 번영을 위해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는 이 순간,
멀리 떨어진 왕국의 중심에서는 역사에 기록될 커다란 비극의 전조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펠리노어 왕국의 수도,
왕도(王都) 카를리온_
“쿨럭, 쿨럭! 크흐음... 쿨럭!”
어두운 한밤의 고요를 깨뜨리는 격렬한 기침 소리.
듣는 이로 하여금 걱정을 금치 못하게 만드는 기침 소리를 쉬지 않고 쏟아내던 중년 사내가 결국은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킨다.
“쿨럭! 커흐윽-!”
몸을 일으킨 사내가 크게 기침을 하다 순간 오른손으로 입을 감싼다.
“하아...”
천천히 입에서 떼어낸 그의 손바닥 위에 어둠 속에서도 선연한 새빨간 핏물이 보였다.
“폐, 폐하...! 괜찮으십니까?!”
사내가 몸을 일으킬 때 함께 눈을 뜬 옆자리의 여인이 그의 손바닥 가득 묻은 피를 보며 기함한다.
놀란 그녀가 서둘러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밖에 있는 사람을 부르려는데...
“하아, 하아... 나는... 나는 괜찮소. 그냥 가만히 계시오.”
그런 여인의 손을 붙잡아 말리는 중년의 사내.
하지만 누가 보아도 사내의 상황은 정상이 아니었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파리한 안색, 벌써 몇 달째 계속된 기침 증세.
거기에 더해 오늘은 피까지 토했으니, 누가 봐도 괜찮은 사람의 상태가 아니었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폐하! 토혈(吐血)까지 하셨는데! 지금 당장 어의를 부르겠습니다!”
“그러지 마시오, 왕비. 내 몸은 내가 잘 아오. 이건... 어의를 부른다고 나아질 상황이 아니라오.”
“... 흐으윽! 폐하...!”
생(生)의 마지막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깨달은 사내의 목소리에, 왕비라 불린 여인의 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과인이 부덕하여, 주 아르닌께서 더 이상의 생을 허락지 않으시니 그저 겸허히 받아들일 뿐이오.”
“아닙니다, 폐하! 어느 누가 폐하를 부덕한 군주라 말하겠습니까? 왕국의 신민들이 폐하를 두고 ‘선량왕(善良王)’이라 칭송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셨습니까?”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늘어놓는 왕비의 말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자신의 입과 손에 묻은 피를 천천히 닦아내며 힘없이 웃을 뿐이었다.
“보잘것없는 한 줌의 공을 크게 부풀려 무능한 군주를 감싸주려는 신민들의 갸륵함은 알겠으나, 과인은 일국의 왕으로 불리기에 한없이 부족한 인물일 뿐이오.”
“폐하, 아닙니다! 어찌 그런 말을 자꾸...”
“내가 군주로서, 아비로서 부족하지 않았다면 우리 왕자의 앞날이 이토록 불안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아니 그렇소?”
“...”
사내의 말에 계속해서 반박하던 왕비가 이번만은 침묵을 지킨다.
그녀 역시 지아비의 뒤를 잇게 될 왕자가 처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오늘의 일이 밖으로 알려져서는 안 될 것이오. 만약 과인이 밤새 기침을 하는 것도 모자라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는 말이 흘러나가게 된다면...”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폐하. 그러니... 그러니 더는 말씀을 마시고 누워서 잠을 청하소서. 내일도 아침 일찍 일어나 정무를 보셔야 하지 않습니까.”
흘러내린 눈물로 얼굴이 엉망이 된 왕비가 애써 울음을 참으며 몇 달 새 비쩍 말라버린 왕을 다시 침대에 눕혔다.
“고맙소... 쿨럭... 쿨럭!”
왕비의 도움을 받아 천천히 몸을 눕힌 사내.
펠리노어 왕국의 38대 국왕, 하인리히 위르겐 오토 폰 펠린느(Heinrich Jurgen Otto von Felline)가 괴로운 통증을 참아내며 애써 잠을 청했다.
***
“그래? 왕이 피를 토했다?”
“예, 틀림없습니다.”
“그걸 자네가 어찌 알았는가?”
“왕궁에 심어둔 저의 끄나풀들이 몇인데, 제가 그걸 모르겠습니까? 틀림없는 정보입니다.”
“으흠...”
“해가 뜨기 전 어두운 새벽에 폐하의 침소에 드나드는 시녀들이 피 묻은 헝겊을 가지고 나가 남몰래 불에 태운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일들이 벌써 일주일 가까이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일주일이나 피를 토했다라...”
툭, 툭-
부하의 말을 듣던 어둠 속의 사내가 잠시 생각에 빠진다.
사내와 그의 앞에 선 부하 모두 역천(逆天)의 세상을 꿈꾸는 이들.
작금의 하늘을 뜻하는 왕의 병세가 위중해졌다는 얘기는 분명 희소식이었으나, 당장 말만 듣고 좋아하는 감정을 내비치기엔 지금껏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세월이 너무 길었다.
“... 일단, 이 소식은 내 윗선에 전하도록 하지. 자네는 계속해서 궁의 동태를 면밀히 살피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건물을 나갈 때도 늘 감시의 눈을 조심하도록 하고. 작은 불씨 하나가 온 들판을 불태우는 법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이만...”
어둠 속 사내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이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건물을 벗어난다.
어두컴컴한 방에 홀로 남은 사내.
방 한쪽에 놓인 서랍장에서 깃털 펜과 종이를 꺼낸 그는 다급히 서신 한 장을 작성했고, 종이 위의 잉크가 마르기가 무섭게 방을 나섰다.
먼저 방을 떠난 사내와 마찬가지로 발걸음 소리조차 크게 나지 않는, 유령처럼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