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하(昇遐) (2) >
신성력(神聖歷) 788년 7월_
“한 번 달려보자, 이랴앗!!!”
“키히이이이잉!!!”
나의 외침에 반응해 힘차게 울음을 터트리는 커다란 흑마(黑馬).
이제는 다닐렌츠 영주의 상징이 되어버린 녀석, 블리츠(Blitz)가 나와 한 몸이 되어 무서운 속도로 탁 트인 들판을 가른다.
“어어, 영주님! 영주니이이이임!!! 같이 가셔야지요오오오!!!”
갑작스러운 돌진을 시작하는 나의 뒤에서 아드리안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하다, 아드리안.
나 너무 답답해서 좀 달려야겠어.
“흐아아아아아!!!”
너른 들판을 달리며 나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업무로 인해 응어리진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어내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콱!!!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따로 시키지도 않았는데 블리츠가 알아서 달리는 속도를 높인다.
무시무시한 속도.
평범한 말들과는 비교 자체를 불허하는 압도적인 속도감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좋다, 블리츠!!! 더 빨리 뛰어보자! 하하하하!!!”
***
슈우우우웅- 콰지직!!!
“크워어어어어어!!!”
이마 한복판에 검이 틀어박힌 오우거 한 마리가 처절한 비명을 토해낸다.
동시에 양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에 검을 박아넣은 상대를 잡아보려 하지만...
“느려!”
휘이익- 터억!
오우거의 머리 위에서 뛰어내린 상대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안착, 결국 거칠었던 오우거의 손짓은 허공만 가르고 만다.
“크와악! 크와아아아-!!!”
이마 한복판에 박힌 검이 주는 아픔에 완전히 눈이 돌아버린 오우거가 사방팔방으로 함부로 주먹과 발을 뻗으며 난동을 벌인다.
쿵- 쿠웅! 콰지지직!!!
놈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낸 숲의 나무들이 부러지고 꺾인다.
족히 수십 년은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을 크고 굵은 나무들이 무슨 잡초 뜯겨나가듯 허망하게 박살 나는 광경.
근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한 떼의 사람들이 저마다 감탄을 토해낸다.
“으와아... 미친! 방금 봤어?”
“미쳤다, 저렇게 굵은 나무를 발길질 한 방에... 야, 우리는 스치기만 해도 그냥 뭉개지겠는데?”
“괜히 오우거를 두고 산중제왕(山中帝王)이라고 하는 게 아니네.”
하지만, 그들의 시선엔 눈앞에서 미쳐 날뛰는 오우거보다 놈의 머리통에 가볍게 검을 찔러넣고 돌아온 한 사내의 모습이 더욱더 놀라워 보였다.
지상 최강의 몬스터라 불리는 오우거를 상대로 산책하듯 여유로운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는 남자.
바로, 다닐렌츠의 영주인 데미언 카릴베르크 남작이다.
“근데 영주님은 어떻게 오우거의 머리통에 저렇게 쉽게 검을 꽂으실 수가 있지?”
“내 말이. 무슨 과일에다가 이쑤시개 꽂아 넣는 사람처럼 편안해 보였어!”
“다른 상급 기사들도 다 저런 거 할 수 있는 건가?”
“야, 아니지! 지난번 로이터 경이 훈련소에 특강 오셨을 때 못 들었냐? 상급 기사도 다 같은 수준이 아니래. 로이터 경 본인은 오우거랑 족히 한 시간은 드잡이질을 해야 잡을 수 있다고 하셨어.”
“와, 한 시간? 그럼, 영주님은 대체 뭔데?”
“뭐긴 뭐야, 당연히...”
쳐다보는 것조차 영광스럽다는 듯, 고개를 돌린 한 사내가 이내 벅찬 목소리로 말한다.
“... 주 아르닌께서 우리 다닐렌츠에 내려주신, 신(神)의 사자이시지!”
***
휘우우웅- 콰지직-!!!
“크웨에에엑!!!”
이마 한가운데 검이 틀어박혔을 때보다도 훨씬 더 강렬한 비명이 오우거의 입에서 터져 나온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먼젓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크고 묵직한 무언가가 놈의 가슴팍에 틀어박혔기 때문이었다.
“크워으윽! 끄워어...”
심장을 제대로 꿰뚫린 놈이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선다.
하지만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어지러운 발걸음.
결국,
쿠우웅-!
커다란 고목이 넘어가듯 천천히 뒤로 몸이 기울던 오우거가 바닥에 쓰러져 굉음을 만들어낸다.
이마엔 검 한 자루, 넓은 가슴팍엔 정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막대기 하나를 꽂은 채였다.
“와아아아아아아!!!”
“영주님이 오우거를 잡으셨다!!!”
“데미언 카릴베르크 남작님, 만세!!! 다닐렌츠 만세에에에!!!”
“데미언! 데미언!!!”
“펠리노어 왕국 최강의 기사!!!”
오우거가 쓰러지는 순간만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던 한 떼의 청년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인다.
그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다닐렌츠 영지군 훈련소에서 훈련 중인 초급 장교 교육 과정 생도들.
빠르게 규모가 늘어나고 있는 영지군의 효율적인 운용을 위해 작년부터 운용하기 시작한 초급 장교 교육 과정에 지원해 선발된 이들이었다.
다닐렌츠 영지군의 초급 장교 교육은 총 6개월 동안의 훈련 과정으로 계획되어 있었는데, 그 과정의 마지막이 바로 영주인 나와 함께하는 몬스터 토벌이었다.
영지의 외곽지역에서 약 일주일간 진행되는 이 몬스터 토벌을 문제없이 수행하고 나면, 이들은 비로소 다닐렌츠 영지군의 장교로서 야전에 나가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영지군 장교에 지원하는 친구들은 갓 훈련소에서 나온 신병들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훨씬 뛰어난 기량을 지니고 있었다.
지난 6개월간 훈련소에서 혹독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도 있지만, 애초에 내가 장교 지원자의 기준을 ‘군 복무 경험 혹은 용병 경험 1년 이상’으로 못 박아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보니 생도들은 기본적으로 고블린이나 코볼트 따위의 소형종 몬스터들은 가볍게 상대할 수 있는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오우거 같은 규격 외의 괴물이 튀어나온 상황에서 그들의 전투력은 그다지 쓸모가 없었고, 결국은 내가 나서서 놈을 처리해야 했다.
“후우...”
으지직- 푸화악!
나는 놈의 가슴에 꽂혀 있던 정체불명의 ‘막대기’, 초대형 강철 글레이브를 잡아 뽑았다.
울컥거리며 솟구치는 오우거의 피를 피해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며, 멀리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생도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오오!”
“영주님이 이쪽을 바라보신다!”
“나, 나랑 눈이 마주치셨어!”
“으와아! 영주님 만세!!!”
“흐아아아! 다닐렌츠 만세에!”
... 이거 참, 부담스럽군.
“영주님, 고생하셨습니다.”
오우거가 쓰러진 것을 확인한 뒤 곁으로 다가온 아드리안이 꾸벅 고개를 숙인다.
나를 돕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을 테지만,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오우거와의 싸움에서 자신이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녀석이다.
“고생은 무슨. 이깟 놈 하나 잡는 걸 갖고.”
“이깟 놈이라뇨, 이 넓은 왕국 전체에 오우거 혼자 잡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그러십니까?”
“좀 재수 없었나?”
“솔직히 재수 없긴 하...”
“너 사형. 죄목은 영주 모독죄.”
“... 다고 말하면 영주님이 이렇게 나오실 줄 알았습니다. 하하, 그건 제가 들겠습니다. 이리 주시죠.”
“어, 피 안 묻게 조심해라. 옛다.”
“옙, 흐읍-!”
내 손에서 글레이브를 건네받은 아드리안이 인상을 구긴다.
기사가 된 이후로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아 힘이 장사인 아드리안조차 두 손으로 들기 버거운 것이 바로 나의 강철 글레이브였다.
무게 자체가 평범한 글레이브의 대여섯 배는 되는 수준이었으니, 저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어우... 대체 이런 걸 어떻게 들고 휘두르십니까? 저는 두 손으로 들기에도 힘든데요.”
“저런 놈들 잡으려고 만든 무기이니,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냐? 덕분에 오늘도 한 건 했네.”
멀리서 대기하고 있다가 부리나케 달려온 병사들이 내가 쓰러뜨린 오우거의 사체를 손질하고 있었다.
모두 나를 따라 여러 번 몬스터 토벌에 나섰던 베테랑 병사들이다.
그간의 만만치 않은 경험을 증명하듯, 오우거의 몸에서 피를 빼고 부패를 막기 위해 내장을 긁어내는 모습이 아주 익숙해 보였다.
“영주님, 생도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다들 영주님께서 오우거를 잡는 모습을 보고 감동한 모양입니다.”
“어휴, 한 마디는 무슨... 민망하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내 발걸음을 그쪽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 다들 잘 봤나?”
“예!!!”
“똑똑히 봤습니다, 영주님!!!”
“너무 멋있으십니다!!!”
“왕국 최강의 기사이십니다!!!”
내가 말을 걸기가 무섭게 찬양을 쏟아내는 생도들.
고막이 얼얼하도록 정신없이 쏟아지는 예비 장교들의 용비어천가를 한동안 듣다가 천천히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시장 바닥 같던 분위기가 금세 조용해진다.
짜식들, 그래도 아직 훈련받고 있는 놈들이라 그런지 군기 하나는 확실하다.
“생도 전원 착석.”
“착서어억-!!!”
촤아악-
이어 자리에 앉으라는 내 말에 오십 명 남짓한 예비 장교들이 우렁차게 대답한 후 바닥에 앉았다.
다들 꼬질꼬질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눈빛만큼은 초롱초롱 빛나는 것이 기특해 보인다.
“자아... 다들 알다시피, 다닐렌츠 영지군의 초급 장교 교육 마지막 과정인 몬스터 토벌은 훈련소에서 배운 여러 가지 전투 기술을 실제로 적용해보고, 몸으로 체득하기 위한 시간이다. 한데...”
슬쩍 고개를 돌려 쓰러진 오우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 갑자기 저놈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오늘 과정은 본의 아니게 실전 수행이 아닌 시범 교육이 되고 말았군. 뭐, 그래도 오우거 사냥 자체가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닌 만큼 많은 도움이 됐으리라 믿는다... 거기, 맨 앞에 있는 생도.”
“예, 예에에에엣! 생도 클레멘쓰으으으으!”
내 부름을 받은 생도 하나가 깜짝 놀라며 목이 찢어져라 큰 소리로 대답한다.
이어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는데, 벌써부터 겨울바람에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고 있었다.
그냥 상관도 아니고, 무려 영지 내 모든 생명체의 생사여탈권을 지닌 절대적 존재인 영주의 부름이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는 된다.
“아, 지적하려고 부른 것이 아니다. 그냥... 뭐 좀 물어보려고, 앞에 있길래 부른 거다. 놀랄 것 없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일어서지마, 앉아서 들어라.”
“옙! 알겠습니다!”
철퍼덕, 다시 엉덩이를 깔고 그 자리에 앉는 생도.
잠깐 앉았다 일어서는 그 짧은 사이에 안색이 많이 창백해졌다.
“그래... 내가 오우거를 잡는 걸 보고 뭘 느꼈냐?”
“그... 그것이...”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대답해라. 뭐든 좋으니까.”
“어, 그, 그, 그게... 여, 영주님께선 엄청 강하십니다!!!”
잔뜩 겁먹은 목소리도 대답하는 생도 클레멘스.
딱히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니었지만 내가 원하는 답변은 아니었기에, 나는 그 친구가 아닌 다른 몇몇 생도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검을 휘두르시는 속도가 대단하십니다! 빛살처럼 빨랐습니다아-!”
“오우거의 공격을 피하시는 모습이 실로 존경스럽습니다! 얼마나 수련해야 그렇게 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아-!”
“저도 열심히 힘을 길러 영주님처럼 큰 무기를 휘두를 수 있도록...”
“아아, 그만! 됐다, 더 답변하지 않아도 된다.”
들으나 마나 한 말들의 홍수 속에 원하는 답변 듣기를 포기한 나는 그냥 답을 알려주기로 한다.
“다들,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구나.”
“...?”
“여기 있는 생도 중, 나처럼 오우거와 단독으로 싸워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나?”
“...!”
내 질문을 들은 생도들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당연히 없겠지. 오우거를 홀로 잡아낼 수 있는 재주를 가진 이가 초급 장교 교육을 듣고 있을 리가 없으니 말이야.”
비꼬거나 놀리는 것이 아닌, 그저 사실을 말하는 담백한 말투로 나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혹시라도 전장에서 오우거를 만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라.”
“...!”
“오우거뿐만이 아니다. 이기지 못할 적을 만나면, 물러서는 것이 상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내놓은 의외의 말을 듣고 생도들의 입이 벌어진다.
“물론, 전장에서 등을 보이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허나, 능력 밖의 되지도 않는 일에 만용을 부리는 것은 더욱 추하고 창피한 일이다. 특히...”
잠시 말을 하다 멈춘 내가 생도들의 눈을 하나하나 응시했다.
이어질 말을 잘 기억하라는 의미였다.
“... 그대들과 같이 병사들을 이끄는 지휘관은, 개인의 명예에 집착해 무리한 싸움을 해서는 안 된다. 불리한 싸움이면 물러서고, 위급한 상황이면 퇴각하길 주저하지 마라. 퇴각의 불명예를 두려워하지 않는 장교가 되어라. 그대들의 판단 하나에 수많은 다닐렌츠의 아들들이 목숨을 걸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모두 알았나?”
“예, 알겠습니다!!!”
“좋다, 오늘 교육은 여기까지. 지금부터 일몰 전까지 야영지 설치에 들어간다.”
“옙, 실시!!!”
나의 명령을 받은 생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야영 준비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저녁 식사 조리를 위한 간이 화덕을 설치하고, 물을 길어오고, 막사를 세우고...
그렇게 모두가 바삐 움직이는 가운데, 나는 야영지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서서 아드리안과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 내일은 오우거 안 나오겠지?”
“에이, 설마 이틀 연속으로 그런 놈이 나오겠습니까? 그리고 영주님도 아시겠지만 오우거들은 영역 분리를 확실하게 하는 편이지 않습니까. 설마 같은 구역에 두 마리는 없겠죠.”
“하긴 그렇네.”
그렇게, 점점 붉어지는 하늘을 배경 삼아 아드리안과 수다를 떨고 있는데...
“여, 영주님! 급보입니다! 키르헨에서 긴급한 연락이 도착했습니다!!!”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온 병사 하나가 내게 키르헨에서 전해져온 서기관 세르지오의 서신을 전해주었다.
재빨리 확인한 그 서신의 내용은...
“... 이런. 벌써?”
“영주님, 무슨 내용이십니까?”
내가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이자 아드리안이 긴장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런 그에게 나는 짧막한 대답으로 내가 읽은 서신의 내용을 전했다.
본래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조금 더 빠르게 일어나버린 역사의 비극을.
“... 국왕 폐하께서, 승하(昇遐)하셨다.”
< 승하(昇遐)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