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36화 (136/197)

왕도의 혼란 (1)

내가 영지 외곽 지역에서 국왕의 죽음을 알리는 서기관 세르지오의 서신을 받고 급하게 키르헨으로 복귀하던 그 시각.

다닐렌츠에서 멀리 떨어진 왕도 카를리온은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통치 기간 내내 왕국민들을 위한 선정을 베풀어 ‘선량왕(善良王)’이라 불렸던 하인리히 4세.

그런 국왕이 오랜 병마와 싸우다 결국 하늘로 돌아갔다는 소식에 왕도의 곳곳에서 슬픈 울음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아르닌께서도 참 무심하시지! 어찌하여 우리 국왕 폐하를 데려가시는가!”

“세상에 그런 분이 없었지, 그런 분이 없었어! 난 아직도 그분이 왕자의 신분으로 북부 전선에서 싸웠다는 게 믿겨지지가 않아.”

“어렸을 때 폐하께서 빈민가에 직접 찾아와 우리 어머니 손을 잡아주시고, 어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는 얘기한 적 있었지? 그때 품에서 내어주신 금화 한 닢으로 우리 집안이 일어선 거야. 내가 눈 감는 날까지 그날 일을 잊지 않아!”

“어흐으으윽! 폐하! 어찌하여 이리도 일찍 떠나셨습니까!”

“폐하아아!!!”

“하늘에서도 폐하의 자녀들을 굽어살피소서!!!”

세상 가장 존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언제나 낮은 곳을 바라보았던 군주.

펠리노어 왕국의 38대 국왕, 하인리히 위르겐 오토 폰 펠린느(Heinrich Jurgen Otto von Felline).

향년 50세, 한창 나이에 주신 아르닌의 곁으로 향한 그를 추억하는 많은 왕국민들이 왕성 앞으로 몰려가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한편 국왕의 죽음과 동시에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왕국 권력에 중심에 서 있는 고위 귀족들이었다.

***

국왕 하인리히의 사망 당일_

“군무대신, 변경으로의 연락은 어찌 되었는가?”

“예, 지금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머리뿐만 아니라 눈썹과 수염마저 새하얀 것으로 유명한 왕국의 재상(宰相), 라우링겐 백작 알베르투스 헴펠이 침중한 안색으로 묻자 군무대신 역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을 시작한다.

“북부 전선과 동부 전선에 모두 지급으로 훙서(薨逝, 왕의 죽음)를 전하였습니다. 혹시 모를 적의 도발 행위에도 섣불리 응하지 말 것을 추가로 당부했습니다.”

“흐으음... 잘 하셨소.”

회의실 상석에 앉아 보고를 들은 백발의 노신(老臣)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군주의 유고 시에 가장 우려해야 하는 것은, 권력의 공백을 노린 외부 세력의 도발이었다.

특히나 펠리노어 왕국은 북으로 야만족인 바인야르와 전선을 이루고, 동으로는 대륙 최강국인 쿠르페리안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기에 늘 전쟁의 위협에 노출되어있는 상황.

이런 와중에 국왕의 죽음이라는 변고가 생겼으니, 걱정이 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 나머지 중신들께서도 각기 맡은 바 영역에서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승하하신 국왕 폐하의 장례를 마치고, 왕자 저하께서 새로이 왕좌에 오르실 때까지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를 말이겠습니까, 재상 각하.”

“명심하겠습니다.”

“결코 방심하지 않겠습니다!”

펠리노어 왕국의 국정을 이끌어나가는 기둥들이 재상의 말에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아... 부디, 주 아르닌께서 왕국을 지켜주시길...”

평생 왕국을 위해 헌신했던 노신의 목소리에 회의실의 공기가 더욱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

“후우...”

중신 회의가 마무리되고 회의장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 속, 유난히 피곤한 얼굴로 깊은 한숨을 내쉬는 한 사람.

왕국의 군무대신, 안스바흐 남작 트리틴 알트마이어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군무대신 각하.”

트리틴이 회의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을 본 휘하 기사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인다.

본디 남작에겐 각하라는 호칭을 잘 쓰지 않지만, 트리틴은 엄연히 왕국의 중신이라 불리는 군무대신의 자리에 올라 있는 사람.

하여 그의 주변 인물들은 그를 대할 때마다 깍듯하게 각하(閣下)라는 경칭을 사용했다.

“중요한 것들이다.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하도록.”

“알겠습니다, 각하.”

뒤를 따르는 호위 기사에게 들고 있던 서류 등 자질구레한 짐들을 넘긴 트리틴이 빠른 걸음으로 왕성 밖으로 걸어나간다.

마치 중요한 약속에 늦은 사람처럼 초조한 기색이 느껴지는 걸음이었다.

“마차는 어디 있지?”

“예, 저쪽에 대기 시켜두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빨리 오라고 해, 지금 당장!”

“아, 알겠습니다!”

트리틴의 성화에 불에 덴 듯 깜짝 놀란 호위 기사가 잰걸음으로 달려나가고, 곧 두 마리의 커다란 말이 이끄는 마차 한 대가 다급히 그의 앞에 당도했다.

“군무부... 아니지, 집으로 가자! 최대한 빨리! 어서!”

“알겠습니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하고, 가볍게 흔들리는 진동 속에 트리틴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 정말로 이런 날이 오다니.’

오랫동안 생각만 하던 순간이었는데, 정말로 이런 날이 와버렸다.

뭐, 인간의 수명이라는 것이 원래 무한한 것이 아니니 왕 또한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는 게 당연한 세상의 이치였다.

다만 이처럼 생각보다 훨씬 일찍, 너무나 갑작스럽게 왕이 세상을 떠나는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적어도 5, 6년은 더 기다려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국왕의 건강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세상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젊었을 적엔 혹독한 추위로 악명 높은 북부 전선에 직접 종군했을 정도로 건강하고 활력이 넘쳤던 하인리히 4세.

하지만 나이 마흔이 넘으며 원인 모를 기침과 가슴 통증이 계속되었고, 최근 몇 주 동안은 그 증상이 급격히 심해져 끝내는 목숨을 잃고야 말았다.

‘... 자신이 죽고 뒤를 이을 후계에 대한 걱정이 왕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을 거다.’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는 트리틴의 머릿속에 ‘왕가의 비극’이라 일컬어지는 지난 역사의 사건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

펠리노어 왕국의 38대 국왕, 하인리히 4세는 왕비인 카넬리아와의 사이에서 세 명의 아들과 하나의 딸을 보았다.

하나같이 헌앙한 외모에 착한 성품을 지닌 자식들이었고, 특히 왕위를 이어받게 될 첫째 왕자의 경우엔 아버지인 하인리히 4세의 젊은 시절을 꼭 빼닮았다는 평을 받았다.

허나, 그 첫째 왕자는 왕실에서 행한 사냥 축제에 나섰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

덤불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코볼트를 보고 놀란 말이 펄쩍 뛰어오르는 바람에 왕자가 낙마를 한 것이다.

나이가 찬 어른이었다면 침착하게 상황에 대처했겠지만, 불행히도 사고가 벌어졌을 당시 왕자의 나이는 불과 열다섯에 불과했다.

낙마하여 목이 부러진 왕자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고, 그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한 왕은 말 위에서 그대로 기절하고 만다.

혹자는 그때 그 사건을 기점으로 왕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고 판단한다.

하긴, 눈앞에서 자식이 죽는 것을 보았는데 어느 부모가 정상일 수 있을까.

그렇게 불의의 사고로 첫째 왕자를 잃은 국왕 하인리히 4세.

하지만 떠나간 첫째 왕자와 세 살 터울인 둘째 왕자의 빠른 성장은 그런 국왕의 슬픔을 잊게 해주었다.

별다른 사고 없이 성년의 나이까지 건강하게 자라난 둘째 왕자.

그는 나이 스무 살이 되던 해 훗날 왕위에 올랐을 때 왕국의 신민들 앞에서 당당하게 서고 싶다며 국왕에게 종군을 청했다.

모두가 기겁하며 왕자의 선택을 만류했지만, ‘왕의 핏줄은 이은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왕자의 의지는 강철처럼 굳건했다.

세상에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하던가?

결국 국왕은 3년이라는 기한과 함께 직접 전투에 나서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은 후에야 왕자를 전장으로 보내주었다.

애초에 국왕 본인도 왕자 시절 전쟁터에 종군한 경험이 있으니, 말릴 명분이 딱히 없기도 했었고.

그렇게, 국왕 친위대인 사자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왕도를 떠난 왕자의 선택지는 아버지인 하인리히 4세가 젊은 시절 종군했던 북부 전선이 아닌 동부 전선.

‘대륙 최강국’으로 불리는 쿠르페리안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곳이었다.

지금이야 두 나라 간의 전쟁이 사실상의 휴전(休戰) 상황에 접어들었지만, 둘째 왕자가 도착했을 때만 해도 동부 전선은 하루에도 몇 번씩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지는 위험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둘째 왕자는 비록 전방에 나서서 직접 검을 휘두르지는 않았지만, 군의 후방 지원과 보급을 담당하는 임무를 부여받아 성실하고 용감하게 자신의 본분을 다한다.

모두가 둘째 왕자의 책임감과 용기를 칭송했고, 멀리 왕도에서 그 소식을 전해 들은 국왕 역시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국왕과 약속한 3년간의 종군 기한을 불과 한 달여 앞둔 어느 날.

“폐, 폐, 폐하아! 동부 전선에 계신 왕자 저하께서...!!!”

대대적인 공세를 펼친 제국군의 역습에 아군의 요새가 함락당하고, 왕자는 그 수라장 속에서 끝까지 항전하다 어느 이름 모를 제국 병사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당시 왕자가 있던 요새는 최전방과는 꽤 거리가 있어 적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곳이었는데, 일이 그렇게 되려고 했던 모양인지 그때만큼은 적들이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와 요새를 공격했다.

그 날의 비극이 발생한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분노한 아군의 맹공에 제국은 점령했던 요새를 다시 빼앗기고 원래의 전선까지 쫓겨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은 왕자가 살아 돌아 올리는 만무한 일.

그렇게 왕국은 다음 대 왕위를 이어받을 핏줄을 둘씩이나 잃게 되었고...

결국, 국왕인 하인리히 4세가 스러진 그 자리를 이어받게 된 것은 이제 겨우 11살이 된 막내아들.

훗날 ‘소년왕(少年王)’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요제프였다.

***

왕도 카를리온 중심가에 자리한 군무대신 트리틴 알트마이어의 저택.

어차피 처자식은 왕도에서 멀리 떨어진 안스바흐 영지에 머물고 있었기에, 가문의 사람 중 이 저택에 사는 이는 트리틴 혼자뿐이었다.

“각하, 어쩐 일로 이리 일찍 돌아오셨습니까?”

아직 업무에 한창일 시간에 집에 돌아온 트리틴을 본 집사장이 의아한 눈빛으로 묻는다.

평상시였어도 이리 일찍 집에 돌아오면 이상할 일인데, 지금은 심지어 왕이 죽은 상황이었다.

왕도 카를리온은 물론 왕국 전체의 군무(軍務)에 있어 비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시기.

당연히 집사장의 입장에선 모시는 주인의 이른 귀가가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음, 집에 중요한 걸 두고 온 것이 생각나서 급하게 온 것이다.”

“그런 일이... 그럼 사람을 보내시지 그러셨습니까? 제가 찾아서 군무부로 보내드렸을텐데요.”

“엄중한 보안을 요하는 자료라 다른 이가 보아서는 안 된다.”

“아, 그렇다면 이해가 됩니다.”

트리틴의 대답을 들은 집사장이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서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는지 걸음을 멈춘다.

“각하, 그러고 보니 오전 중에 각하의 앞으로 온 서신이 하나 있습니다. 봉인이 되어 있어 함부로 열어보지는 않았습니다.”

“봉인? 혹시 그 봉인의 색이 어찌 되느냐?”

자신의 앞으로 서신이 왔다는 말에 순간 다급한 목소리가 되어 묻는 트리틴이다.

“봉인의 색이... 아, 검은색이었습니다. 제가 지금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 검은색?”

집사장의 대답을 들은 트리틴의 눈이 빛난다.

긴장과 환희, 기대감이 한데 얽힌 복잡한 감정의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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