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37화 (137/197)

왕도의 혼란 (2)

덜컹덜컹-

세상을 떠난 국왕 하인리히 4세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 왕도 카를리온으로 향하는 길.

간헐적으로 흔들리는 마차의 진동을 온몸으로 느끼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 내가 아는 역사보다 더 빨리 사건이 진행되고 있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소설 <로스트 킹덤>의 내용대로라면 국왕 하인리히 4세는 신성력(神聖歷) 788년 7월이 아니라 계절이 넘어가는 9월에 사망한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시기와 달리 국왕은 한여름에 숨을 거뒀다.

원작보다 2달이나 일찍 죽음을 맞게 된 것인데...

혹시 원작에 등장하지 않았던 나라는 변수 때문에 시간의 흐름이 꼬인 걸까?

‘젠장, 내 존재가 왕의 건강을 더 악화시켰다는 거야 뭐야?’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괜히 마음이 찝찝하다.

생각에 잠긴 나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기 때문일까?

곁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조용히 내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표정이 그렇게 안 좋아요?”

나와 함께 왕도 카를리온으로 향하는 다닐렌츠의 국왕 장례식 조문 사절.

바로, 나의 아내인 아이린이다.

일 년이 조금 안 되는 연애 기간을 거쳐, 우리는 작년 가을 즈음 결혼식을 올리고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

연인 사이로 지낸 기간은 짧았지만, 이미 그 전에 4년 동안 함께 보낸 시간이 있었기에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충분했다.

달라진 다닐렌츠의 위상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우리 두 사람의 결혼식은 무려 사흘에 걸쳐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 기간 내내 결혼식이 치러진 키르헨의 거리에선 다닐렌츠 상단에서 내어준 고기와 술을 먹고 마시는 영지민들의 흥겨운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영주의 결혼식이 온 영지민들의 축제가 되는 광경.

다닐렌츠의 영지민들이 영주인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단적인 예였다.

아무튼, 이야기는 다시 아이린과 내가 타고 있는 마차 안으로 돌아간다.

“음? 아아... 별 거 아니야. 걱정하지 마.”

나는 심각했던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띠며 걱정하는 아이린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런 내 답을 듣고도 아이린은 걱정하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별 거 아닌 게 아닌데? 아까부터 계속 표정이 심각했어요. 아침에 출발했을 때부터 엄청 어두웠다고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음, 그게...”

얼렁뚱땅 넘어갔다가 계속해서 사랑하는 아내를 걱정하게 할 것 같아서, 그럴듯한 이유를 대기로 했다.

“... 국왕 폐하께서 너무 갑자기 돌아가셨잖아? 원래도 좀 편찮으셨다지만 요 몇 주 사이에 확 몸 상태가 안 좋아졌다고 들었어.”

“음, 그래서요?”

“장인어른께서 충격을 받으셨을까 봐, 그게 걱정되어서 그랬어. 편찮으신 국왕 폐하의 곁을 지켜야 한다며 우리 결혼식도 못 오셨을 만큼 충성을 다하셨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폐하를 떠나보내셨으니 상심이 크시겠지.”

“아...”

나의 설명을 들은 아이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아버지이자 나의 장인인 바이펠베르크 백작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는 국왕의 신변을 수호하는 왕실근위대의 수장으로서 대체 불가능하다는 평을 받는 인물이었다.

‘왕국제일검(王國第一劍)’이라 평가받는 일신의 무력도 대단했지만, 국왕과 펠린느 왕가에 대한 강철 같은 충성심이 왕실근위대장으로서의 그의 평가를 더욱 높게 만들었다.

하나뿐인 딸의 결혼식 참석조차 왕의 곁을 비울 수 없다며 고사했던 왕실근위대장 디트리히.

그런 사람이 순식간에 닥쳐온 왕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 얼마나 상심이 컸겠는가?

“하아... 저는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요?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워요.”

즉석에서 꾸며낸 것치고 너무나 그럴듯한 내 설명을 들은 아이린이 한숨을 쉬며 자책한다.

오랫동안 모셨던 주군의 허망한 죽음 앞에 충격받았을 아버지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뭘,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아이린이 생각하는 아버님은 늘 강하고 단단하신 분이었으니까... 그런 분이 아프고 상처받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게 어려웠겠지.”

“... 그런 걸까요?”

“응, 그럼. 당연하지.”

토닥토닥-

나를 위로해주려 손을 내밀었던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이번에 왕도에 가면, 아버님과도 따로 시간을 내어서 꼭 식사 자리라도 마련하도록 하자. 뭐,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버님께서 시간 내시는 게 가능할까 싶기는 하다만...”

“네, 꼭 그렇게 하도록 해요.”

“그래. 그리고... 나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좀 자도록 해. 여기, 내 어깨에 기대서 눈 좀 붙여. 오늘 아침 일찍부터 움직인다고 고생했잖아.”

“응, 알겠어요.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나를 보고 배시시 웃으며 살포시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아이린.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

내 품에 안겨 조용히 잠든 아이린.

규칙적으로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그녀의 어깨와 집중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숨소리가 느껴진다.

그 숨소리를 멍하니 앉아 있다 보니, 뭔지 모를 불안감에 흔들리던 나의 마음도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한다.

지난 생에선 아쉽게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인생의 반려자가 주는 안도감.

‘... 좋은 기분이군.’

피식, 하는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뚜벅뚜벅뚜벅-

고요한 왕성의 회랑을 울리는 누군가의 발소리.

시계처럼 규칙적이고, 걸음마다 남다른 힘이 느껴지는 발소리였다.

그렇게 한참을 이어지던 발소리가 멎었을 때,

발소리의 주인인 중년 사내는 왕성 깊은 곳의 어느 문 앞에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문 앞을 지키던 근위병이 자신 앞에 나타난 중년 사내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보인다.

상대를 향한 깊은 존경의 의미가 담긴, 진심 어린 인사였다.

“... 고생이 많구나.”

“아닙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근위병의 인사를 받은 중년 사내.

총원 200명으로 구성된 왕실 근위대의 수장(首長), 바이펠베르크 백작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가 몸의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준비되었다. 고하거라.”

“예, 알겠습니다.”

큼큼, 몇 차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근위병이 자신이 지키던 문 안쪽을 향해 말한다.

“마마, 근위대장이 알현을 청합니다.”

그러자 문 너머에서 곧바로 답변이 들려온다.

[들라 하라.]

“대장님, 안으로 드시지요.”

“그래, 고맙다.”

끼이익, 천천히 문이 열리고 방 안으로 들어선 중년 사내가 곧바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방의 주인에게 인사를 올린다.

“... 왕실 근위대장이 존귀하신 왕비 마마를 배알합니다.”

“고개를 드시오, 근위대장.”

“예, 마마.”

왕족을 알현할 때 필요한 의례를 마친 디트리히가 특유의 푸른 눈동자를 들어 눈앞의 여인을 마주한다.

카넬리아 루덴도르프 폰 펠린느(Canelia Ludendorff von Felline).

며칠 전 유명을 달리한 전대 국왕 하인리히 4세의 왕비가 바로 그녀였다.

“근위대장, 식사는 하시었습니까?”

“공무가 바빠 미처 챙기지 못하였나이다.”

“이런, 일국의 근위대장이 식사 하나 제때 챙기지 못해서야 어디 제대로 면이 서겠습니까? 내 아래 것들을 시켜 요기가 될 만한 것을 내오라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

“사양하지 마시지요. 게 누구 없느냐?”

디트리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왕비는 시녀들을 시켜 요기가 될 만한 것을 내어오게 했다.

“...”

평소 같았으면 그런 왕비의 요청을 끝끝내 거절했을 디트리히.

하지만 오늘은 왜인지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그는 묵묵히 시녀들이 음식을 가져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자, 근위대장. 이리 앉으셔서 식사를 하시며 이야기 나누시지요.”

“... 예, 마마. 그럼 감사히 들겠습니다.”

구운 오리와 스프, 신선한 과일에 풍미가 남다른 포도주까지.

짧은 시간에 차려진 것치고는 너무나 좋은 구성의 상차림이었다.

딱히 허기가 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음식을 권한 왕비의 체면을 생각해 스프를 몇 스푼 떠먹은 디트리히.

그런 디트리히를 말없이 바라보던 왕비가 힘겹게 입술을 뗀다.

“나는... 두렵습니다.”

“... 왕비 마마.”

참다참다 꺼내 놓은 듯한 왕비의 말에, 디트리히가 침음을 삼킨다.

“어제, 하얀 산맥 너머에서 온 서신을 받았습니다.”

“...”

하얀 산맥 너머라.

그 표현이 뜻하는 이가 누군지 모를 리 없는 디트리히가 자신도 모르게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쥔다.

“왕국의 변경을 사수하는 임무가 너무도 막중하여 폐하의 장례식에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할 것 같다더군요.”

“부득이하게라...”

서신에 쓰인 ‘왕국의 변방을 사수하는 임무’가 대단히 중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심지어 왕국의 동쪽에 자리한 것은 대륙의 절반 이상을 영토로 차지하고 있는 제국이 아닌가.

하지만, 약 3년 전 왕위 계승자의 신분으로 동부 전선에서 복무하다 제국의 공격을 받아 전사(戰死) 둘째 왕자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로 제국 측에서 이렇다 할 군사적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즉, 왕비가 받은 서신에 적힌 내용은 국왕의 장례식에 불참할 정도의 ‘부득이한 이유’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는 얘기였다.

“... 마마께서도 이미 알고 계실테지만, 동부 전선의 전략적 중요성은 두 번 세 번 강조한다고 하여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혹 폐하께서 승하하신 틈을 타 제국 측에서 군사적 도발을 감행할 수도 있으니 그런 위험성을 감안하여 자리를 지키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영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으나,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 애써 좋은 말로 서신의 내용을 해석하는 디트리히.

하지만, 이어지는 왕비의 말에 더는 무어라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한데, 돌아가신 폐하의 장례를 마치고 한 달 뒤에 치러질 대관식에는 참석하겠다더군요.”

“...”

“그 한 달이 지나면 원래는 우리 국경을 도발하려고 기회를 노리던 간악한 제국의 병사들이 평화를 숭상하는 온순한 이들로 변하기라도 한다는 얘기일까요?”

“마마...”

“근위대장, 나는... 도저히 그 자의 생각을 알 수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폐하가 어떤 분입니까?”

처음엔 침착했던 왕비의 목소리가 이제는 숨길 수 없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공의(公義)로서 본다면 그에게 변경 수호의 막중한 책무를 믿고 맡기며 공작위 수여라는 영광을 내리신 분입니다. 하얀 산맥 너머의 땅에서 그가 왕처럼 군림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준 게 누구입니까? 바로 돌아가신 폐하십니다!”

“...”

“사의(私義)로서는 어떻습니까? 그자는...”

생각할수록 화가 난다는 듯, 입술을 깨물며 잠시 말을 멈췄던 왕비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 폐하와 피를 나눈 형제 아닙니까? 전대 국왕 폐하셨던 아버님이 이른 나이에 돌아가시고, 아홉 살이나 어린 동생을 자식처럼 기르며 장성한 나이까지 보살펴 준 것이 폐하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폐하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지 않겠다니, 이게 무슨 금수만도 못한 짓이란 말입니까!”

“... 마마, 고정하소서. 건강에 해가 될까 저어되옵니다.”

“후우우...”

간곡하고도 묵직한 디트리히의 만류에 왕비가 깊은 한숨을 내쉰다.

격하게 끓어오른 가슴 속의 분노를 다스리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심호흡을 반복하며 안정을 찾은 왕비가 확신에 찬 눈빛으로 디트리히를 바라보며 말했다.

“근위대장, 나는 오래전부터 이미 마음속으로 확신하고 있던 것이 있습니다.”

“어떤... 생각이신지.”

혹시라도 자신이 머릿속에 떠올린 말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디트리히가 조심스럽게 왕비에게 물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 공작은, 지금 왕위를 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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