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뵙겠습니다 (1)
시조인 ‘건국왕(建國王)’ 카를 1세의 아들로 태어나 펠리노어 왕국의 2대 군주가 된 ‘충효왕(忠孝王)’ 루트비히 1세는 왕국력 32년, 선왕의 이름을 딴 도시를 세워 왕국의 수도로 삼는다.
왕도(王都) 카를리온.
이후 700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 동안 왕국의 심장부로 기능해온 이 역사적인 도시에 내가 이끄는 다닐렌츠의 조문 사절단이 막 도착했다.
다가닥- 다가닥-
“... 확실히 도시 자체가 침울한 분위기군요.”
나와 아이린이 탄 마차 옆에서 말을 타고 따라오던 아드리안이 착 가라앉은 왕도의 분위기를 살피며 말했다.
늘 밝고 활기 넘치던 왕도의 분위기는 전혀 보이지 않고, 그저 깊은 슬픔만이 이 거대한 도시를 지배하고 있었다.
“돌아가신 폐하께서 워낙 선정을 베푸셨던 분이니, 그만큼 왕국민들이 느끼는 슬픔도 큰 것이겠지.”
열려 있는 마차의 창을 통해 아드리안과 대화하며, 나는 카를리온 시내의 모습을 살폈다.
웃음을 잃은 사람들의 얼굴이 보인다.
현대인의 삶을 살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일까?
아무리 나라를 이끌던 지도자라고는 하지만 나와 피를 이은 가족도 아닌데 저렇게 슬퍼하는 게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와 달리 저들은 국왕을 단순히 자신들이 사는 땅을 지배하는 군주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어버이이자 반인반신(半人半神)의 신성한 존재라고 믿고 살아온 사람들.
그렇게 생각한다면, 저렇게 왕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영주님, 저기 보입니다.”
생각에 깊이 잠겨 있던 나를 깨우는 아드리안의 목소리.
“... 그래, 다 왔네.”
왕도에 머무는 기간 동안 우리 일행의 숙소로 쓰이게 될 곳.
다닐렌츠 상단 카를리온 지부 건물에 도착했다.
***
국왕 하인리히 4세의 장례식 참석과 그의 뒤를 이을 요제프 왕자의 대관식 참석을 위해 왕도에 온 봉신(封臣) 영주들은 족히 한 달 정도는 왕도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도시 내에 남은 방이 없는 상황이라, 몇몇 부유한 귀족들은 왕도에 사는 주민의 집을 장기간 통으로 빌려 머물거나 아예 성밖에 커다란 천막을 치고 지내는 방법을 택했다.
근데, 나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와... 여긴 뭐, 여관입니까? 그것도 엄청 고급 여관 느낌인데요?”
아드리안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변 이곳저곳을 살피며 말한다.
도시 한 가운데 세워진 왕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다닐렌츠 상단의 카를리온 지부(支部).
높은 담장으로 넓게 둘러싸인 그 부지 안에는 두 개의 건물이 존재했다.
하나는 상단 지부 사무소로 쓰이는 건물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의 손님이 방문했을 때 접객용으로 쓰이는 건물이었다.
벽돌을 쌓아 총 3층 규모로 지어진 그 접객용 건물의 가장 위에 자리한 방.
바로 그곳에, 나와 아드리안이 서 있었다.
“나도 그렇고 영지 가신들도 그렇고, 가끔 일 때문에 왕도에 올 일이 있잖아? 그때마다 숙소 잡는다고 번거롭게 고생하는 거 싫어서 이렇게 하나 만들어 놨지.”
“역시 영주님 선견지명은... 대단하십니다.”
“아니... 뭔 이런 거에 선견지명 얘기까지 나와? 너 나 놀리는 거지?”
“에이, 설마 제가 하늘 같은 영주님께 그런 참람된 마음을 품었을 리 있겠습니까?”
아니, 아드리안.
너 눈빛이 이미 글렀어. 아주 나 놀리느라 재밌어 죽겠다는 눈빛이거든.
“맞네, 놀리는 거. 이 자식이 진짜...”
“어우, 배고파! 영주님, 저는 식사 준비가 잘 되고 있는지 내려가서 확인을 좀 해보겠습니다!”
우당탕탕!
“저 자식이 진짜...”
그렇게, 허겁지겁 방문을 열고 도망치는 아드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이제 홀로 남은 방안의 모습을 천천히 살폈다.
좋은 원목을 써서 고급스러운 디자인으로 만들어낸 값비싼 가구들이 흠 하나 없이 깔끔한 모습으로 방안 이곳저곳에 놓여있는 모습이 보였다.
“청소 상태도 너무 좋고.”
소위 말해 ‘파리가 앉아도 미끄러질 듯한’ 청소 상태.
애초에 이 3층 방은 영주나 영주의 가족, 군무관이나 행정관 같은 영지의 중신들, 다닐렌츠 상단장정도 되는 이들만이 쓸 수 있는 공간이었기에, 당연히 관리가 잘 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흐음...”
그렇게, 만족스러운 얼굴로 깔끔한 방 상태를 확인한 나는 발걸음을 옮겨 방 안쪽 벽면에 만들어진 벽난로로 향했다.
붉은색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그 벽난로는 아직 한 번도 쓰지 않은 모양인지 그 안쪽 벽에도 검댕 하나 묻어있지 않았다.
“쓰읍... 이렇게 깨끗하면 너무 수상해 보이지 않나...?”
사정을 모르는 이가 듣는다면 도통 알 수 없는 말을 흘리며,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벽난로 안쪽을 바라보았다.
“... 잘 만들었네.”
내가 기대했던 바로 ‘그것’이, 벽난로 안쪽 보이지 않는 곳에 잘 자리 잡고 있었다.
***
다음날_
“후우...”
한숨이 절로 나온다.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와 바싹 말라가는 입안.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극도의 긴장감이 어깨와 머리를 사정없이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그런 내 곁에, 나보다 몇 배는 더 창백한 안색을 하고서 아랫입술을 떨고 있는 한 사람.
“괘, 괜찮아요? 오... 오, 오빠?”
아이린이 아직은 어색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나를 ‘오빠’라 부르며 딱딱한 얼굴 위에 애써 미소를 짓는다.
“... 아이린, 너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야.”
“제, 제가요? 그... 그럴리가요?”
“맞는데?”
“아니, 아니에요!”
애써 아니라고 소리를 질러보지만, 그런다고 질린 얼굴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해는 간다.
지금 우리가 만나러 가는 사람이 아이린에게 있어 어떤 존재인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나였으니까.
“... 도착했습니다.”
때마침 마차 밖에서 들려오는 아드리안의 목소리.
곧 마차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호위병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마차 객실의 문을 열었다.
철컥, 끼이익-
열린 문을 통해 쏟아지는 따스한 햇살이 긴장으로 굳은 마음을 풀어주는 듯했다.
“후우... 아이린, 내리자.”
“네.”
아이린의 손을 잡고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눈앞에 보이는 건,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오른 성(城).
바로, 왕국 펠리노어의 왕성이었다.
끼이이이...
바로 그때, 그야말로 웅장한 왕성의 규모에 어울리게 거대하게 만들어진 정문이 천천히 열리며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는 은빛으로 빛나는 금속 흉갑 위로 백색의 사자가 수놓아진 화려한 서코트를 걸친 건장한 체구의 기사였는데, 보는 사람에 따라 다소 무서워 보일 수도 있을 강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마차에서 내린 우리를 보자마자 그 사내의 얼굴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떠오르는 게 보였다.
나랑은 초면이었으니 아마 아이린을 보고 웃는 것일 테지.
“처음 뵙겠습니다, 다닐렌츠 남작님. 저는 왕실 근위대장님을 모시는 부관 카르스텐 바익스입니다.”
우리 앞까지 다가온 그가 먼저 나에게 깊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다.
정중하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동작이 과연 왕실 근위대 소속의 기사다웠다.
“반갑습니다, 바익스 경. 데미언 카릴베르크입니다.”
상대는 기사였고 나는 엄연히 한 지역을 다스리고 있는 귀족이었기에 하대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그림이겠으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 장인어른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사람인데, 잘 대해줘서 나쁠 것 없지.’
그런 생각으로 존대를 한 것인데, 나를 바라보는 카르스텐의 눈빛에 호감이 깃드는 게 보였다.
오, 작전 성공인가?
“남작님게서 오신다는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왕국 북서부의 패자(霸者)로 불리는 분을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패자라니...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그저 운이 좋아 몇 번의 승리를 거두었을 뿐 아직 전장에서 배울 것이 많습니다.”
나의 겸손한 대답이 더욱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처음 인사할 때보다 훨씬 부드러운 표정이 된 카르스텐이 이번엔 아이린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다.
“아이린 아가씨, 오랜만에 뵙습니다.”
“바익스 경,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역시 내 예상대로 두 사람은 초면이 아니었다.
하긴 아이린이 아버지 보겠다고 몇 번이고 왕도에 방문했을 테니, 그때 진작 안면을 텄겠지.
“몇 년 전 뵈었을 때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지셨습니다.”
“호호, 정말요?”
예뻐졌다는 칭찬에 약한 건 아이린도 예외는 아니어서, 카르스텐의 말을 듣고 표정이 활짝 피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카르스텐의 말에 풀어졌던 표정이 다시 딱딱해지고야 만다.
“자, 가시죠. 아버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처음 뵙겠습니다.”
좀처럼 긴장하지 않는 나인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긴장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벽안무적(碧眼無敵).
왕국제일검.
왕실 근위대장.
그리고,
백작령(伯爵領) 바이펠베르크의 주인.
단 하나만 지니고 있어도 어마어마한 무게감을 주는 수식어를 한 몸에 모두 지닌 사나이.
하지만 눈앞의 사나이가 지닌 그 어떤 수식어보다도 나를 긴장시킨 건, 바로 이 호칭이었다.
장인어른.
나의 아내, 아이린의 하나뿐인 아버지인 바이펠베르크 백작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가 창공을 품은 듯 새파란 눈동자를 움직여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갑네, 사위. 드디어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
“아, 예!”
장인어른이 천천히 내민 손을 두 손으로 공손히 잡으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거칠고 두꺼우며, 끝 모를 기운이 느껴지는 장인어른의 손.
이게 바로 왕국 최강의 검이라 불리는 사나이의 손이다.
“미안하네. 당연히 혼인 전에 얼굴을 보고 인사를 했어야 하는데, 내 사정이 여유롭지가 않아서 이제야 사위의 얼굴을 보는군.”
“아닙니다, 장인어른께서 맡고 계신 임무의 막중함을 알기에 당연히 그간의 사정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 생각해줬다니 고맙군. 하하하!”
나의 대답에 호탕한 웃음을 지은 장인어른이 격려하듯 내 어깨를 두드렸다.
분명 가볍기 그지없는 손짓이었는데...
‘으윽, 이게 뭔...’
결과가, 가볍지 않다.
툭툭, 장인어른의 손이 내 어깨를 건들 때마다 속이 메슥거렸다.
정체불명의 기운이 내 몸속으로 침투해 속을 뒤집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순간 나는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를 깨달았다.
‘... 이거, 시험이구나.’
딸을 데려간 사위라는 놈이 기사로서 어느 정도의 역량을 지녔는지, 아버지의 입장에서 궁금하셨겠지.
그렇다고 장인된 입장에서 초면의 사위와 대뜸 검을 맞대자는 말을 꺼낼 수는 없으니, 간접적인 방법으로나마 시험을 해보려는 것일 테지.
‘그렇다면 기대에 부응해 드리겠습니다, 장인어른. 흐읍!’
나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몸속의 기운을 끌어올려 장인어른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기운을 깔끔하게 지워냈다.
그 즉시 메슥거리던 기분이 사라지고, 직전과 다르지 않은 편안한 몸 상태가 되었다.
“... 오호?”
그런 내 몸속의 변화를 알아챈 장인어른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의 입장에서는 장난이라고 부르기에도 한참은 부족할, 실로 미약한 기운을 사위에게 불어넣었다.
하지만 말이 미약한 기운이지, 평범한 사람이라면 속이 뒤집히고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서 쓰러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허나 나는 처음과 전혀 다르지 않은 표정과 자세를 유지하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는 장인어른의 얼굴에 흥미가 동한다.
마치 ‘이놈, 제법이군?’이라는 듯한 얼굴이다.
그런 장인어른의 평가를 더욱 끌어올리기 위해, 나는 준비했던 말을 꺼내놓았다.
조마조마한 얼굴로 옆에서 우리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아이린이 놀라 펄쩍 뛸 수밖에 없던 그 말은...
“아버님.”
“음?”
“처음 뵙게 된 자리에서 이런 말을 드려 참으로 죄송스럽지만... 사위이기에 앞서 한 사람의 기사로서, 아버님께 한 수 가르침을 청하고 싶습니다.”
“...!”
저랑 한 판 시원하게 붙으시죠, 아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