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겐스바흐 대공 (1)
하인리히 4세의 장례식이 끝나고 차기 국왕이자 왕국의 39대 국왕이 될 요세프 3세의 대관식 준비가 한창일 무렵.
“오늘은 영 검에 힘이 없구만, 사위! 어젯밤에 잠 안 자고 엉뚱한 일이라도 한 건가?”
“하아, 하아! 엉뚱한 일이라니요? 귀족 가문의 후사를 잇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장인어른?”
“하하핫! 그 또한 맞는 말이로다!”
콰쾅! 콰아아아앙!!!
다닐렌츠 남작 데미언은 하루가 멀다하고 장인어른인 바이펠베르크 백작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 백작과 함께 왕성 지하에 마련된 왕실 근위대의 연무장에서 검을 겨루었다.
“어디 이것도 막아보게, 사위!!!”
“하하,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카카카카카카캉!!!
사방으로 난무하는 찬란한 불꽃의 향연(饗宴).
그리고 이미 몇 번이나 이 초인적인 대결의 양상을 지켜보았음에도 볼 때마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두 사람.
왕실 근위대장의 부관인 카르스텐 바익스와 다닐렌츠 남작의 아내이자 바이펠베르크 백작의 딸인 아이린이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대결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대체 저 두 분은... 힘들지도 않으신가?”
모시는 상관인 디트리히는 말할 것도 없고, 이제는 데미언마저 완전한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카르스텐이었다.
이게 애매한 수준의 격차였다면 같은 기사의 길을 걷는 사람으로서 질투가 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데, 이건 뭐 아예 다른 세상에 있는 수준이니 그저 감탄하는 것 말고는 그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한편, 카르스텐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의 격렬한 대결을 지켜보던 아이린 역시 멍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우리 그이는 간밤에 잠도 잘 못 잤으면서...”
“예? 잠을 못 주무셨다고요? 어째서... 혹시 숙소가 불편하셨던 겁니까? 그럼 지금이라도 저희 왕실 근위대 쪽에 준비된 숙소로 옮기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
“음, 그게 아니면 아버님께 말씀해 보시는 건 어떠신지? 근위대장님의 권한이라면 왕성 안에도 두 분이 머무실 방 하나쯤을 확보할 수 있을...”
발갛게 달아오른 아이린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자기가 무슨 실수를 한 것인지 깨달은 카르스텐이다.
“시, 시, 실례했습니다, 아가씨!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오라...!”
“조용히 하세욧!”
“옙!”
올해 나이 35세, 왕실 근위대장 부관 기사 카르스텐 바익스.
그는 아직 미혼이었다.
***
내가 왕도에 머물며 종일 장인어른과 드잡이질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전 일찍 이뤄지는 장인어른과의 검술 대련을 마치고 일행의 숙소가 있는 다닐렌츠 상단 카를리온 지부로 돌아오면, 나를 보겠다고 왕국 각지에서 몰려온 인간들이 줄을 서 있었다.
“하하! 처음 뵙겠소이다, 다닐렌츠 남작! 나는 왕국 남부에 자리한 남작령츠바이켄의...”
그중에는 영지를 지닌 귀족도 있었고,
“명성 높으신 다닐렌츠 남작님께 고개 숙여 인사드립니다! 저는 자유도시 후페른의 시장...”
꽤 고상한 말투를 구사하는 자유도시의 시장도 있었으며,
“남작님!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저희 상단을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간절하게 빌겠습니다! 어흐흐윽!!!”
냅다 바닥에 엎드려 눈물부터 뿌리고 보는 타 지역 상단의 책임자도 있었다.
“자자, 일단 진정하시고 이리와서 앉으시지요. 이래서야 뭐 제가 대화를 나눌 수야 있겠습니까?”
내 앞에서 엉엉 어린아이처럼 울던 왕국 북부의 어떤 상단 책임자까지 잘 달래어 돌려보낸 후에야 나는 휴식을 취할 수가 있었다.
“하아... 하루가 되다, 되.”
사람 상대하는 일의 피로감은 왕국제일검과 대련을 벌이는 것 이상으로 피로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 지옥 같은 일정을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피를 토했겠지만, 다행히도 히든 피스의 가호를 받는 나는 그 보통 사람의 범주에 속하지 않았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좀 쉬어가면서 하지...”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아이린이 애정 어린 손길로 어깨와 목을 주물러주기 시작한다.
“으음, 어... 거기, 으으... 좋다아...”
녹아내린다, 녹아내려.
아이린의 안마 실력은 가히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아 마땅한 수준이었다.
오랜 검술 수련으로 다져진 막강한 악력에 여성 특유의 섬세함을 더하고, 남편인 나에 대한 애정까지 한 스푼 얹은 아이린의 안마 실력은 그녀의 검술 실력보다도 뛰어났다.
참, 결혼하기 전에는 그저 싸움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여성스러운 면이 있을 줄이야.
“하아, 완전히 무릉도원이다아...”
“응? 물 온도?”
“어, 아니... 그런 게 있어.”
그렇게 아이린에게 몸을 맡기고 얼마나 지났을까?
피곤함이 밀려와 깜박 잠이 들었던 나는 다시 일어나 외출할 채비를 했다.
창문 밖으로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보편적으론 누군가를 만나기에 적합하지 않은 시간.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나는 이 시간에 ‘그’와의 만남을 잡았다.
“아이린, 나 다녀올게.”
“조심해서 다녀와요.”
쪽, 나를 배웅하는 아이린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나는 숙소를 빠져나왔다.
아주 호화롭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나 귀족입네’ 싶을 정도의 옷차림을 유지했던 평소와 달리 아래위로 시커먼 복색을 하고 나선 길.
숙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골목길로 조심스럽게 들어서자, 나를 기다리고 있던 한 사내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작님.”
어두운 골목길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사내는 딱 봐도 평범한 하인 따위가 아니었다.
발걸음 하나에도 절도가 묻어나고, 전신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흘렀다.
“흠...”
치밀어오르는 호기심에, 나는 일부러 사내의 이름을 물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 편하게 옌스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내 표정을 살피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거면, 충분했다.
팟-!
『 옌스 보나탈 / Lv. 47
소속: 백작령(伯爵領) 루덴도르프
클래스: 기사 』
그와 눈이 마주친 덕분에 스킬 ‘창조주의 눈’을 발동시킬 수 있었다.
‘... 역시 기사였군.’
심지어 레벨 40 후반대에 이르는 고강한 실력을 지닌 기사다.
기껏해야 갓 서른이 되었을까 말까한 젊은 나이에 저 정도 실력이라면...
‘볼 것도 없이 폭풍 기사단 소속일 것이고.’
왕국 내에 명성이 자자한 폭풍 기사단 소속의 기사를 고작 길 안내를 위해 보내다니.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이 나와의 약속을 얼마나 중히 여기는지 알려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썩 괜찮았다.
그럼 뭐, 나도 성의 표현 한 번 해주지.
“옌스, 옌스라... 혹시 보나탈 가문의 인물이신가?”
“...!”
상태창을 통해 엿본 정보를 슬쩍 흘리자, 상대가 깜짝 놀란다.
“... 저를, 아십니까?”
“알다마다. 폭풍 기사단의 일익인 보나탈 경을 어찌 모르겠나.”
“...!”
뭐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빛만 봐도 꽤 감격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기사에게 있어 자신의 이름이 알려졌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일 테니까 말이지.
“그대 같은 훌륭한 기사의 안내를 받을 수 있다니, 영광이군.”
“... 과찬이십니다, 남작님.”
“하하, 과찬은 무슨. 자, 어서 가세나. 귀한 분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예, 저를 따라오십시오. 안내하겠습니다.”
어딘지 신나 보이는 발걸음으로 카를리온의 밤거리를 헤쳐나가는 옌스의 뒤를 따라, 나는 소리 없이 몸을 움직였다.
***
“도착했습니다.”
“음...”
옌스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
그곳은 카를리온 시내 외곽에 자리한 허름한 창고였다.
빈민가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2층짜리 건물로, 주변에 곡식의 낱알로 보이는 것들이 무수히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평상시엔 곡물 창고로 쓰이는 듯했다.
“... 저희 가문의 안가(安家)로 쓰이는 곳입니다. 그분께서는 안에 계십니다.”
조심스럽게 창고 문을 연 옌스가 안쪽을 가리키며 다시 한번 내게 고개를 숙인다.
아마도 그는 밖에서 대기하고, 나만 들어가라는 신호인 듯했다.
“안내해줘서 고맙네.”
고개를 살짝 끄덕여 그의 인사를 받아준뒤, 나는 조심스럽게 창고 안으로 발을 디뎠다.
어두운 실내 한가운데, 작은 호롱불을 들고 서 있는 거한이 보인다.
그리고, 그 거한의 앞쪽에 의자를 두고 앉아 있는 한 남자.
그가, 창고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바라보며 반갑게 인사한다.
“드디어 북서부의 새로운 지배자를 만나게 되었군.”
무척이나 낮은 목소리.
하지만, 대단한 울림이 느껴진다.
짧게 자른 반백의 머리, 풍성한 구레나룻과 턱수염이 사자의 갈기처럼 풍성하다.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은 마치 맹수의 그것처럼 매섭고,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옷 아래로 부푼 근육이 모를 저력을 느끼게 한다.
나의 장인어른, 바이펠베르크 백작을 처음 만났을 때는 세상 무엇이든 베어버릴 수 있는 날카로운 보검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반면 지금 이 사내는...
‘... 거대하군, 한 마디로.’
세상 모든 것을 압도하는 듯한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다가오는 상대에게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이토록 야심한 밤, 도심 외곽에 자리한 이 허름한 창고 건물로 나를 불러낸 그 상대의 이름은...
“... 루덴도르프 변경백 각하.”
왕실 직할령, 카를란트 이북 지방을 뜻하는 ‘노르트란트(Nordland)’의 맹주이자 ‘왕국의 방패’라 불리는 왕국 최고의 명문 무가, 루덴도르프 가(家)의 19대 가주.
“반갑네, 다닐렌츠 남작.”
라이에른-팔츠 백작, 파울 루덴도르프가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
왕도 카를리온에서 동쪽으로 꼬박 열흘 동안 말을 달리면 보는 이의 몸과 마음을 압도하는 거대한 자연의 경이(驚異)을 마주하게 된다.
하얀 산맥.
이른바 ‘대륙의 지붕’이라 불리는 지형으로, 지금껏 발견된 인간 문명의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산맥이다.
산맥의 정상부근,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녹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켜온 것인지 사람들에게 ‘만년설(萬年雪)’이라 이름 붙은 새하얀 눈과 얼음 덕분에 ‘하얀 산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하얀 산맥을 넘어 왕국 동부 지역으로 향하는 단 하나의 길.
그리고, 그 길을 단단히 틀어막고 있는 천혜의 요새.
오스텐할트(Fortress Ostenhalt).
그 전략적 가치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중요한 자리에 세워진 이 요새의 성벽 위에서, 예상치 못한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야, 시발! 좆 됐다!!!”
“저, 저... 저거 뭔데?!”
“비상!!! 비상종을 울려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대규모 병력이 요새로 접근 중이다!!!”
“뭔 소리야? 정체를 알 수 없는 대규모 병력이라니?”
“저 아래 보십쇼!!! 대위님은 저기서 꾸물꾸물 올라오는 놈들 안 보이십니까?!”
“어디 보인다는... 에엥?”
오스텐할트가 자랑하는 최강의 전력, ‘오스텐 레인저(Osten Ranger)’ 소속의 장교 하나가 호들갑 떠는 병사의 목소리를 듣고 멀리 산 아래를 바라본다.
거리가 워낙 멀어 보통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 수준이었지만, 그는 그 명성 자자한 오스텐 레인저 소속의 정예였다.
하늘을 나는 새만큼이나 매서운 안력(眼力)을 한껏 끌어올려 어렴풋이나마 구분한 그 깃발의 주인은...
“... 이런 시발.”
“어흑, 보이십니까? 진짜 적군입니까? 제국 놈들이 드디어 여기까지 밀고 들어온 겁니까?!”
잔뜩 겁먹은 병사의 목소리.
하지만, 돌아온 장교의 대답은 그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저거, 대공 전하의 군사다.”
“... 예?”
“좀 애매하긴 한데, 베겐스바겐 대공 전하의 깃발이 보였다.”
“대, 대, 대공 전하 말씀이십니까? 아니, 동부 전선 지키느라 국왕 폐하 장례식도 안 갔다던 양반이 대체 왜...”
“나도 모르지 시발. 이상하네, 병력 이동 계획을 들은 적은 없었는데? 대체...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장교의 가슴 속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